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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제 아이×현비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12월 27일이 되었다. 항상 연말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바빠졌는데, 이번도 역시 다를 것이라곤 없었다. 평소 오지도 않던 연락이 여기저기서 오고, 친구들에게선 자꾸 연말 여행 계획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얘기해도 별로 통하지 않는 것이, 아무래도 다들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특별한 날에 들뜬 모양이었다.

‘비이, 같이 놀러 가자니까~?’

“마감 있다니까?”

‘여행 가기 전까지 끝내면 되지!’

“말 한 번 참 쉽게 한다. 마감 기한이 1월 10일이야.”

‘그럼 이주나 남은 거네!’

“그것밖에 안 남은 거지.”

‘에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얼른 끝내고 놀러 가자!’

“네가 이러는 시간에도 난 마감을 해야 하거든? 끊는다?”

‘와, 냉정해, 비이!’

건너편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차피 거짓 울음이라는 것쯤은 10년 가까이 친구로 지내온 사이에선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주변에서 레이아나 미즈키가 조금씩 부추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선동은 두 사람 중 누군가가 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재작년에도, 작년에도 마감 때문에 같이 놀러가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같이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한다. 사실은 나도 마감이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친구들과 놀러가고 싶었다. 그러나 연말에 가까워지면 왠지 이곳을 떠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유는 스스로도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짐작하건데 아마 가끔 보이는 환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핸드폰은 침대 위에 던져놓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 올려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고, 화면에 시선을 두었다. 이번 마감은 신문에 내는 사설이었다. 신문에서 얼마 되지 않는 분량을 차지하는 만큼 내가 쓰는 것도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사설이라는 점이다. 소설과는 달리 이 신문 안에서 다루고 있는 이야기에 대해 논하는 글이니만큼,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이제까지 작업한 글을 한 번 되돌아가서 읽다가 한숨을 뱉었다. 이래서는 끝이 보이질 않는다. 정말 연말까지도 아무것도 못하고 원고 앞에 붙잡혀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연말에 밖을 나가는 일은 요 몇 년 간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쉬는 날까지 일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손으로 이마를 짚고 다시 한숨을 뱉었다가 다시 책상 위에 올려둔 자료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나중에 다시 정신을 차리고 키보드에서 손을 떼어 시계를 보니, 벌써 시침이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사설을 쓰는 속도는 무척 더디었다. 한 문장을 생각해내고 지웠다가 다시 쓰는 작업을 반복했다. 평소보다 높은 난이도에 집중력도 떨어지고 있었다. 점점 자료를 뒤적이는 일이 많아졌고, 넋을 놓고 다른 생각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대표적인 생각은 역시 환상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보는 환상은 3년 전 친구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가던 횡단보도 앞에서 처음 나타났다. 세상의 색이 바다가 모래사장 위에서 썰물이 되어 빠지듯 사라져 흑백이 되기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눈만 커다랗게 떴다. 내 눈에 이상이 생긴 것인가, 뇌에 이상이 생긴 것인가. 이대로 약속을 갈 게 아니라 병원에 가야하는 건 아닌가. 짧은 시간에 뇌리를 스쳐간 생각들이 내 가슴께를 불안으로 간질일 즈음에 눈앞에 전혀 있을 수 없는 세계가 펼쳐졌다. 길 한복판에 커다란 콘서트장이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객석에 앉아 야광봉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으며, 무대 위에 검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사실 친구들과 약속한 시간은 아직 멀었으며, 여전히 꿈나라를 헤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손으로 볼을 꼬집으려는 순간, 무대 위에 있던 사람 중 한 명과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물처럼 투명한 눈동자가 잠깐 크게 벌어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 자리에 선 내 존재를 알아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그 후로 끝까지 나를 돌아보지 않았으니까. 내 뒤에 다른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을 보고 놀랐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나 나는 이 공간 안에서 유일하게 내게 시선을 주었던 그의 눈에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이윽고 노래가 끝나고, 무대 위로 수많은 사람들의 일제히 팔을 흔들며 환호를 지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웃으며 답을 해주었다. 이곳에서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 없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수 분간, 그만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상황이 끝난 건 주머니 속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고개를 숙이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서 다시 앞을 보았을 때는, 예의 콘서트장이 아닌 맞은편의 커피숍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환청은 동반되지 않으면서 환각만으로 정신을 사로잡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정신의학과를 찾아가 상담을 받아보았다. 심리 상담 센터에 등록도 해보았다. 친구들과 의논도 해봤고, 주위 사람들에게 조언을 구해보기도 했다.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과도한 마감 스케줄로 인한 약간의 우울증 소견이 나왔지만, 그 정도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본 환상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말도 덤으로 받았다.

환상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났다. 배경은 그때마다 달라졌고, 나오는 인물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딱 하나, 처음 콘서트장의 환영을 보았을 때 눈이 마주쳤던 남자는 계속 반복해서 등장했다. 마치 그의 시선을 따라가듯, 환상은 그가 보는 것을 내게 보여줬다. 처음에는 이런 차이를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화려하고 선명한 환상에 넋을 놓는 일이 많았다. 도저히 거짓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채로웠고, 눈을 자극하는 그의 행동들이 나를 흔들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고, 뇌는 점점 이 상황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 남자는 이상하게 내 시선을 점점 뺏어갔다. 처음엔 물빛 눈동자만이 나를 사로잡더니, 살짝 올라간 눈매, 날카로운 콧날, 살짝 다물어진 입술, 단정하고 아름다운 이목구비, 바다를 담은 머리카락, 단단한 목과 어깨, 생각한 것보다 큰 체격과 키, 잘게 붙은 팔 근육, 그리고 그 위로 번지는 따스한 웃음까지. 하루하루 새로이 발견해가는 그 모든 것을 보며, 내 심해가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유유히 물결을 가르며 헤엄치던 파란 물고기는 폭발하듯 터져 나온 바다 회오리를 보며 발버둥 쳤다.

나는 곧 이 환상을 내 글에 담아내기 위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그냥 말로 표현하자면 수만 가지 단어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 안에 그 사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무엇도 내가 보고 있는 그를, 인지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담아내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남자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 부족함을 절실하게 느껴야만 했다. 그래서 펜을 잡았다.

그 후부터 계속 내가 써온 글에는 모두 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내 글은 점점 그를 중심으로 퍼져갔고, 독자들은 하나둘씩 내게 ‘사랑을 하고 있느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단언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질문은 늘어만 갔다. 결국 더 이상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저 내게 보이는 환상을 글에 담아내고 싶을 뿐이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저 그 사람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계속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계속 고민했다. 경계선 너머로 보이는 그의 세계에 내가 닿지 못하기 때문일까. 나는 그저 그를 지켜보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일까. 문제의 원인은 파악하지 못한 채, 3년이 지났다.

그 3년 사이에 내가 환상 속에서 알아낼 수 있었던 점은 딱 세 가지였다. 첫째, 내가 그를 보고 있듯 그도 나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를 절대로 만지거나 그쪽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는 것. 이건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어져온 것이었기에 이제는 그러려니 체념하고 있었다. 둘째, 환상이 보이지 않을 때는 아무래도 상대방이 있는 세계 쪽에서 일부러 차단하고 있는 것 같다는 것. 상대방의 매우 기초적인 사생활 같은 것은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내 세계의 일부와 상대 세계의 일부가 겹쳐져 있는 것 같다는 것. 이것은 오랜 시간 추론한 끝에 얻어낸 결론이었는데, 이렇게까지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 대한 환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밖에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와 내 세계 사이에는 일정 경계선이 그어진 채, 결코 완전히 겹쳐지는 일이 없었다. 강물에 발을 담그듯 그저 그 물결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처음 그를 인지한 날에 다이어리에 적었던 글이 떠올랐다. 술에 취한 듯 두서없이 적은 그 글은 몽롱한 마약 같은 모호함이 있었다. 제대로 된 문장을 갖추지도 못한 채 그저 본 것만을 서술할 뿐이었지만, 그 안에 빨려 든 영혼의 조각이 보였다. 어쩌면 그때 이미 나는 환상에 마음을 빼앗긴 것일지도 몰랐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장으로 다가갔다. 한가운데에 꽂아둔 다이어리를 빼내었다. 3년 전에 환상을 보던 때부터 가지고 있던 녀석은 테두리며, 종이며 제법 낡았다. 환상이 다이어리를 몇 권씩 채울 정도로 자주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기에 아직까지는 이 한 권으로 충분했다. 가장 최근에 본 환상에 대한 기록을 보았다. 하얀 물결과 함께 시야를 잠식한 녀석은 상대의 이상을 보여주었다. 몸 어딘가 아픈 곳이라도 있는지, 아니면 독감이라도 걸린 것인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고통에 일그러진 입술, 더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는 몸까지. 그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걱정되었지만 이쪽에선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는 방법도, 무언가를 해줄 수도 없었다. 그저 또다시 이렇게 다이어리에 기록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되지 않을까. 어깨가 늘어졌다.

 

 

12월 28일. 일기를 쓰는 기분으로 펜을 잡았다. 아침마다 하게 되는 일의 반복이었지만 이렇게 날짜를 세어가며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다이어리를 펼쳐들고, 펜으로 톡톡 두드렸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3일이 되는 날이다. 별 다른 일은 없었지만, 왠지 이 다이어리를 펼치고 싶었다. 환상을 볼 때만 펼치기로 정해둔 것임에도 불고하고, 이것이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그 사람을 처음 인식했을 때 무언가가 마음을 강하게 이끌었던 그 느낌이 아무 이유 없이 되살아났다. 이것도 그 환상의 연장선인 것일까. 일단 기록하기로 했다. 어떤 상황이 아니라 느낌만을 적기 때문에 내용은 중구난방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고 다이어리를 덮었다.

3년째 연말이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느끼게 되는 것이 있다.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보고 싶은 마음과 그 사람에게 나를 보이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욕구를 느끼게 되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번은 조금 달랐다. 지금 5일에 한 번이라는 규칙이 깨지고, 6일째를 맞이했다. 12월 29일이다. 초조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보였다면, 그리고 그 상태로 이제까지 쭉 이어오던 규칙이 깨졌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원해도 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그 초조함을 부추기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 정의를 내리지 못한 마음과 욕망이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물로 적당히 씻어낸 후에 코코아를 마실 생각이었다. 약간이라도 카페인이 들어간 달달한 음료를 마시면 조금은 진정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었다. 글은 어제보다 더욱 집중이 되지 않았다. 이제 문장이 아닌 단어 몇 개만 쓰고 지우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제는 환상만이 아니라 일까지 이 모양이니,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달하는 것 같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씻어낸 컵에 코코아 가루를 담았다. 옆에서 끓는 전기 포트가 달칵 소리를 내며 자동으로 꺼졌다. 입으로 모락모락 뱉어내는 하얀 연기를 가만히 보다가 녀석을 집었다. 컵 한가득 금세 차올라서 흰 구름이 피어올랐다. 조금 식을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 팔짱을 꼈다.

가만히 생각하고 보니, 환상에 대해 또 다른 점이 떠올랐다. 내가 그에게 보여주고 싶은 만큼 그에게 보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분명히 나는 그를 보고 있다. 그 사실을 3년째 인식하고 있고, 그동안 계속 쌓아온 기록도 존재한다. 우리의 세계가 일부분 겹쳐져 있다는 것에 대한 나름의 심증도 가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보아왔다. 그런데 내가 보는 만큼 과연 그도 나를 보고 있을까? 어쩌면 정말로 환상일 뿐이라서 이 모든 게 내 뇌가 만들어낸 연극일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매달려 허우적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가슴께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코코아에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했다.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생소한 통증이었다. 심장에서부터 시작해서 크기를 더해가는 그것은 곧 내 몸을 잠식했다. 눈물이 날 것 같이 붉어진 눈가를 억눌렀다.

 

 

작업은 이어지지 못한 채, 12월 30일을 보내고 드디어 마지막 날을 맞이했다. 그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30분을 채 안 남겨놓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화면은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이렇게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 때는 계속 생각이 밖으로 퍼진다. 지금 노트북 앞에 앉아서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로, 나는 그저께 느낀 통증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저 환상을 통해 보이는 그와 함께 웃고 울고 그리워하는 나날을 보냈을 뿐이었다. 내 글 안에 그를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시간으로 채웠을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의심이 들자마자, 내 심장은 고통을 호소했다. 이제 와서 내 세계가, 내 심해가 뒤집어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이전까지 생각해보지 못한 가정이긴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심해가 흔들릴 만큼 강한 통증을 동반할 만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뱉었다. 이제 시간은 10분을 남겨두었다. 이대로는 연말을 맘 놓고 반기는 것은 무리였다. 바짝 말라버린 목이라도 축이기 위해 음료수를 사러 나가기로 했다. 바깥바람을 쐬고 돌아오면 그래도 조금은 나아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코트를 챙겨 입고 지갑을 손에 들었다. 뻐근한 몸을 쭉 편 후에 밖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닫고, 도어락이 잠기는 모양을 지켜보았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숨을 뱉을 때마다 피어오르는 입김을 보았다. 집 옆 공원 앞을 지날 즈음에 손목시계를 보았다. 몇 초 후면 1월 1일.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 분주히 움직이는 초침을 유심히 보았다. 그것이 이제 정확히 12시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옆 풍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세계의 흔들림과 이전까지는 분명 그 자리에 없었던 공간의 등장. 틀림없었다. 이건 그 환상이 분명했다. 온 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떨렸다. 아흐레 만에 다시 나타난 그가 나와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있었다. 검은 코트에 연보라색 목도리를 두른 조금은 생경한 모습에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

착각한 것은 아닌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지만, 그는 여전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며 뇌가 경고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이렇게 그를 마주한 적이 없지 않은가. 착각은 금물이니, 정신 차리라고 했다. 그러다가 문득 정말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지 의심이 들었다. 3년이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데도, 환상에서 그를 마주하여 시선을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기억력은 살아가면서 보는 모든 것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지 않다. 어쩌면 나는 잊어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새로운 가능성에 경악한 내게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내 앞에 서서 살짝 허리를 숙였다. 그 얼굴 위로 온기 가득한 웃음이 번졌다.

“또 만났네.”

“……또, 라고요?”

“응. 이번이 세 번째야.”

“세 번째요?”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아니, 그 전에 목소리가 들리고 그가 내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내 용량을 벗어난 상황이었다. 머리에서 연기가 날 것 같은 걸 간신히 부여잡고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돼요. 난 그저, 언제나 당신을 보고 있을 뿐이었는데?” “나도 보고 있었어. 3년 전 그 무대 위에서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줄곧.” “그 때 나를 인식하고 있었다고요?” “응. 무대 위라서 더 시선을 둘 수는 없었지만.”

“그럴 리가. 난 이제까지 한 번도 당신과 눈을 마주한 적이 없어요.”

말을 하면서도 점점 떨어지는 자신감에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나도 이 상황은 3년이 지난 지금에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넌 항상 1월 1일이 되는 자정에 나를 만나고 난 후, 다시 돌아가게 되면 이 기억을 잊어버리거든.”

“잊어버린다고요?”

예상이 맞았다. 하지만 동시에 틀렸다. 내가 잊어버린 기억이 있다는 것은 맞았지만, 그 횟수가 두 번이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뻗은 손이 내 손에 닿았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기이한 감각마저 불러왔다. 그동안 상상해왔던 그의 체온은 겨울이라서 그런지 차가웠다. 그가 가진 따스한 마음과는 상반되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아 올리더니, 손등에 입을 맞췄다.

“또다시 닿았네.”

“드디어 닿았네요.”

도돌이표를 새기듯 그의 말을 따라했다. 이건 분명 현실이다. 뇌가 기쁨으로 외치고 있었다.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서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대는 내게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나는 미카제 아이. 다시 잘 부탁해.”

“……저도, 오랜만이에요. 현비파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응.” 그가 내 손을 당겼다. 시간이 없다고 했다. 이제 자정을 넘기고, 딱 하루, 24시간이 지나면 다시 세계가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비파가 보아온 것, 느낀 것, 그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지만 그러기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아. 그러니까 단 1초도 허비하고 싶지 않아.”

“금방 다시 헤어지게 되는 건가요?” “응. 이제 하루밖에 안 남았어.”

“그렇게 오래 기다렸는데, 만날 수 있는 건 찰나의 순간이군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쁨과 슬픔, 두 개의 모순된 감정이 공존하면서 나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러나 곧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그를 따라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보아온 것, 여러 가지 감정을 느꼈던 이야기, 주변 사람들과의 에피소드, 서로에 대해 궁금한 점까지. 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동안 그렇게 닿고 싶었던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잡은 손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지만 동시에 그리웠다. 이 손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그가 내 세계에서 사라질 것 같았다. 헤어져야 하는 시간은 점점 가까워져가고, 내 안의 감정과 그리움은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그것을 똑바로 직시하게 되었다. 며칠 전, 내 심장을 흔들었던 고통이 떠올랐다. 그 전까지도 계속 나를 울고 웃게 만들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지금 이 사람과 마주한 채 온 몸에 퍼지는 기쁨이 떠올랐다. 이제 이 감정이 무엇인지, 왜 글 속에 이 사람을, 미카제 아이를 담을 수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의 말대로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정말 찰나의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흘러갔다. 왜 시간은 멈출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왜 이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잊는 것일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이, 내가 이 시간이 지나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잊어버린다고 했잖아요?” “응.”

“그럼 아이도 이 순간의 기억을 잊어버리는 건가요?” “아니, 내가 잊는 일은 없어. 내 메모리에 그것도 일급 데이터로 저장해뒀어. 그것만은 꼭 지키려고 수많은 락을 걸어뒀는걸.”

“데이터요?”

“응. 이렇게 해두지 않으면, 나도 금세 비파를 잊게 되는걸. 그건 싫어. 어떻게든 이 기억을 붙잡고 있을 거야.”

“나도 그러고 싶어요. 다시 환상으로만 인식하는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것이 불가능한 바람이라는 것쯤은 이제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래도 원하고 마는 것이다. 그게 사람이란 존재였다.

공원 벤치에 앉아서 서로만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집으로 들어갔던 순간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1분 1초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사라져가고, 이 공간 안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볼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놓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자정까지 10분을 채 안 남겨두었다. 그의 품에 이마를 데고, 눈물이 날 것 같은 눈가를 억눌렀다. 이 순간이 지나면 나는 다시 잊게 될 것이다. 그리고 1년을 또다시 기다리겠지. 급격하게 커진 마음이 몸을 흔들었다.

그가 나를 품에서 놓더니, 천천히 입술에 입을 맞췄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사라져가고, 나는 감고 있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비파.”

“네, 아이.”

“언제나 지켜보고 있을 거야.”

“저도 항상 보고 있을게요.”

“다시 만나는 날, 네 이름을 부를게.”

“네, 그 날 또다시 제게 이름을 가르쳐줘요.”

“고마워.”

“고마워요.”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또 보자는 말을 끝으로 그의 존재가 희미해져갔다. 손에 닿은 신기루가 사라지듯 삽시간에 그는 환상이 되어 안개처럼 사라졌다. 나는 빠르게 옅어지는 기억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이 기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원망과 그리움을 담았다. 나는 이제 이 감정에 정의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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