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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페라도×에소루엔 로시스

1.

 

언젠가부터, 나에게만 보이는 사람이 생겼다.

유령인가. 아니, 그렇게 치면 나에게만 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겠지. 난 무당도 퇴마사도 아니니까. 굳이 따지자면, 그래. 그건 수호천사 같은 것에 더 가까운 개념으로 보였다.

처음 그를 본 것은 아마 나 혼자서 밥을 먹고 있을 때였을 것이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에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 뜬금없이 내 맞은편 의자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식탁에 턱을 괴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유령이다’ 처음 그를 본 나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인간이라곤 생각 할 수 없는 반투명한 몸. 게다가 기척이 느껴지지 않고, 식탁 위의 물건도 만질 수 없는 것 같은데, 저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하지 않는가. 내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자, 그도 나를 인식한 것인지 살짝 웃어보였다.

하지만 그것 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을 뻗지도 않았다. 멀뚱멀뚱 그를 보던 나는 먼저 손을 뻗어봤지만, 만져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 외로워서 환각을 보는 걸까.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한 나는 결국 그 남자를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하지만 한 번 보고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그는 가끔씩 생각날 때 쯤 되면 제멋대로 내 현실에 나타났고, 나를 외롭지 않게 해주었다.

 

“저기, 나 보이는 거 맞아?”

 

언젠가는, 내 쪽에서 먼저 말을 건 적도 있었다.

가끔 내가 바라보면 눈을 맞춰주거나 몸짓을 보이는 적은 있어도, 결코 대화는 통하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물은 건 내가 그만큼 절박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콩깍지라면 할 말이 없긴 해도 반투명한 그는 꽤 잘생겼고, 목소리도 들어 본 적이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 보여주는 태도는 상냥하고 젠틀했으니까. 나만 보인다면, 결코 저런 눈빛은 보여주지 않을 테지. 나는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도 혼자 대답했다.

 

“그렇구나”

 

나 혼자 말하는 게 우스운 걸까. 그는 살짝 웃어보였다.

적어도 이름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건 욕심일까.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단 한번을 만난다고 해도 이름이라는 것이 있으면 어떻게든 의미 깊게 남을 것 같다고 생각해 버리는 나로서는 사실 그의 목소리 같은 것 보다 이름이 더 절실했다. 내가 그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혹은 내가 부를 이름을 정해줘야 할지. 그런 것들. 오직 그런 것들만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세상에는 나와 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2.

언젠가부터 나에게만 보이는 여자가 생겼다.

환각인가. 혹은 마술인가. 다른 누구에게도 아니고 나에게만 보인다는 것이 신기한 걸 넘어 수상했지만 그녀는 내게 해를 끼치거나 해코지를 하진 않았다. 오히려 아무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거 같아, 아쉬울 정도라고 할까.

애초에 나는 그녀가 나를 볼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환상처럼 내 방에 나타난 그녀는 그저 나를 바라보거나 입을 뻐끔거리는 게 다일 뿐, 실제 대화가 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서 아마 난 더 그녀의 존재에 의문을 가진 게 아닐까. 닿을 거리에 있으면서 닿지 않는 여자는, 여러 의미로 그녀가 처음이었으니까.

어쩌면 이 여자는 내 수호령 같은 건 아닐까. 바보 같지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득도 실도 아닌 존재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 할 때쯤이면 이미 나타나서 내 곁에 있다. 누가 봐도 훌륭하게 수호령 같은 조건이 아닌가. 뭐, 수호한다고 해도 뭘 수호하는 진 알 수 없을 정도로 득도 없긴 했지만. 아니, 득은 무슨. 대화조차도 할 수 없는데. 정말로 이걸로 좋은 걸까.

그래도 이렇게 손짓이나 눈빛을 교환 할 수 있는 걸 보면, 그녀도 내가 보이는 게 아닐까. 그렇게 어림짐작 할 수는 있었지만, 난 뭐든 확인하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사인을 보냈다.

처음은 미소, 두 번째는 대답. 어차피 대답이라고 해도, 그녀의 입모양을 보고 유추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좋다. 나만이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환상이 아니라, 그저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고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 그렇게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었을 텐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반투명하지 않은, 만질 수 있는, 그리고 대화할 수 있는 네가 내 방에 와있었다.

 

 

 

3.

그것은 아마 한 해가 끝나며 만들어진 기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12월 31일. 11시 59분. 과제를 끝마치고 잠들기 위해 누웠던 루엔은 핸드폰을 열어두고 날짜가 표시되는 상단만을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2015가 2016이 되는 걸 보기 위해, 귀중한 잠도 미루고 액정만을 보던 그녀는 조금 뒤 변한 화면에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응?”

 

2015년 12월 32일.

존재하지 않는 날짜를 알려주는 화면은 날짜 외에는 정상으로 작동하는 것 같았다. AM 12:00을 표시하던 시간도 곧 12:01분, 12:02분으로 변하며 제 구실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다른 어플들도 모두 정상적으로 작동 되었다. 뭔가 오류가 생긴 걸까. 핸드폰을 닫은 루엔이 쏟아지는 졸음에 못 이겨 잠든 것은, 아마 그녀가 그날 저지른 최대의 실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잠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본 것은

 

“아”

 

익숙한 듯 낮선 방과 여전히 있을 리 없는 날을 표시하는 핸드폰. 그리고 언제나 제 곁에 반투명한 모습으로 보이던 남자의 선명한 모습이었으니까.

 

“…?”

 

꿈인가. 아니, 꿈이라면 이불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춥다거나, 어깨가 뻐근한 것 같단 생각은 하지 않았겠지. 그래도 혹시 몰라 제 볼을 꼬집어 본 그녀는 선명한 아픔에 작게 신음했다.

 

“아얏”

“…뭐야”

 

평소와는 다르다. 딱 저 한마디로 지금 이 세상이 뭔가 크게 잘 못되었다는 걸 자각한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늘 봐왔던 커다란 손이 제 입을 막았다.

 

“…응?”

 

아니, 자신이 먼저 손을 뻗어놓고 같이 놀라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루엔은 손에 잔뜩 묻어있는 담배와 화약의 냄새에 반사적으로 기침을 쏟아냈다. 그러고 보니 종종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나타나곤 했는데, 실제로도 흡연자였던 걸까.

 

“…왜 만져지는… 아니, 잠깐. 너 지금 내 목소리 들리냐?”

“읍, 으읍”

“아, 미안”

 

침입자를 대하듯 손부터 나간 것도, 습관적으로 입을 막아버린 걸 알아챈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 될 정도로 너무 늦었다. 마치 꿈이라도 꾸는 것 같군. 데스페라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건 분명 현실이었다. 그래, 오히려 현실이니 ‘꿈같다’라는 말도 할 수 있는 거겠지. 손을 치운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너, 그… 맞지? 늘 나한테만 보이던”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그나저나 말이 통한다? 평소엔 목소리 안 들렸는데…”

“아무래도, 서로 비슷한 상황이었나 보군”

 

두 사람을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있는 이 낮선 공간은 그와 그녀의 방이 적당히 섞인 형태라는 것과, 지금 그녀의 핸드폰이 32일을 표시하고 있다는 것까지. 지금 일어난 일과 일어났었던 일들을 모두 알게 된 두 사람은 믿기진 않았지만 한 가지 결론을 내놓을 수 있었다.

365일 뿐인 세상에 하루가 더 추가되었고, 두 사람이 살던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이것이 언제까지 이루어지는 기적인지도, 또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와중. 두 사람은 변해버린 세계에 대한 걱정보다는 만난 기쁨에 들떠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불량한 말투인걸. 목소리는 엄청 내 취향이지만”

“상상이랑 달라 미안하군. 뭐, 오히려 내 쪽은 목소리며 말투며 생각했던 그대로라 놀랐지만”

“그래? 그건 좀 기쁜데”

 

헤헤. 자신도 모르게 웃어버린 루엔은 자꾸만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 어쩔 줄 몰랐다.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렇게 대화 할 수 있는 것도 언제까지인지 모르는 건 꽤 애가 탄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데스페라도도 마찬가지인지, 두 사람은 곧 같은 말을 꺼냈다.

 

“나갈까?”

“나갈래?”

 

아직 모르는 게 더 많고, 알고 싶은 건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잡고, 정말로 같이 있는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이름이 뭐야? 뭐라고 부르면 될까? 난 에소루엔 로시스. 뭐, 그냥 루엔이라고 불러 줘”

“루엔인가.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

 

진심일까. 아니면 그냥 해보는 말일까. 무엇이라도 좋았다. 정말로 듣고 싶었던 목소리로 들은 칭찬이니까. 루엔은 그걸로 충분히 좋았다.

데스페라도는 환하게 웃는 그녀의 뺨을 한번 쓰다듬어 보곤, 속삭이듯이 제 이름을 알려주었다.

 

“데스페라도라고 불러, 뭐든 네가 편한 걸로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아냐. 난, 네 이름이 알고 싶었어”

 

그래야 서로 들리지 않게 되더라도 당신을 부를 수 있으니까.

루엔의 말은 흘러넘치는 웃음소리에 고스란히 가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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