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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소카×달리아

그대는 다른 세상 속으로 가주길 바래. 쏜애플. 살아있는 너의 밤.


1


단축수업이 있는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운동장은 벌써 까만 인파로 들썩이고 있었다. 파도치는 군중들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무연히 시간을 흘렸다. 뙤약볕에 약간은 졸립고, 약간은 간지러운 감각이 살갗을 기었다. 무심코 손등을 톡 두드렸다가 손가락을 움츠리며 깨달았다. 넋없이 우두커니 앉아 의식없이 그저 홀로간 살아가는 모양을.
 
“리아, 리아!”
“응?”
“듣고 있니?”
“응, 듣고 있지. 그 치마 괜찮다.”

 

검지를 내밀어 부러 콕 집어 가리키니 무심코 자신의 치마를 내려다 본다.

 

“어? 어어, 고마워. 치마 얘긴 아니었지만.”
 
단축수업 공지를 미리 들은 아이들은 저마다 사복을 준비해와 갈아입었다. 평소보다 성숙된 분위기와 화장한 얼굴이 말갰다. 소녀에서 단숨에 ‘여자’로 자라버린 그녀가 마치 낯모르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그녀 또한 비슷한 분위기를 읽은 지 몰랐다. 나를 두고 말없이 바라만보다가 슬몃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오늘은 어디야?”
 
물음에 곧장 대답하기 앞서 생각하는 시늉을 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었지, 아아, 목요일. 목요일이니까……,
 
“…편의점이야.”

 

눈을 맞추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부드러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다행이 불편한 기색 없이 화제를 이어갈 수 있었다.

 

“나중에 들를까?”
“뭐하러…, 괜찮아.”
“내일은 카페지? 카페는 꼭 갈게. 미안.”

 

맥락없는 사과를 던지고는 멋쩍어 눈길을 피하는 그녀에게 나는 익숙한 얼굴을 내보였다. 손님을 대할 때의 사무적이고 친절한 미소와 상냥하고 미려한 말씨. “아냐, 미안할 게 뭐 있어.” 입술을 다물고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호선만 그려내보인다. 불편하지 않을 딱 적당할 정도의 침묵만 감돌았다. 문득 외측으로 파릇한 잔디가 보였다. 대강 학생들이 빠져나간 운동장이다.

 

“그냥, 왠지 널 보면 미안해서 그래.”
 
너, 너무 고생하는 거 같,아……. 말을 흐리며 웃는다. 아냐, 괜찮아. 나는 평연한 대답만 이었다. 그녀가 으응, 네가 괜찮으면……. 먼저 갈게. 대꾸하고는 돌아선다. 아, 맞다. 크리스마스인데 일하니?

 

“응.”
“아……,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 보내!”

 

응. 너도. 그녀를 시선으로 배웅하곤 어느 새 텅 빈 학교 풍경을 바라다보았다. 삭막한 스탠드와 조회대, 인공잔디가 눈부시다. 철을 반사한 햇살이 창문을 타넘어 가느다란 빗살문양을 만드는 것을 가만 문질렀다.

드르륵. 탁…….

왜 바로 안 나오고? 친구랑 얘기하느라… 다 어디갔어? 노래방 간대, 갈 거지? 응.

문양이 옮아 손끝이 희게 빛난다. 두 손가락을 맞비비며 톡톡 책상을 두드리다 느릿하게 움켜쥐었다.

 

 

2


“왔구나.”
“안녕하세요.”

 

딸랑, 종소리와 함께 달리아가 들어섰다. 인사를 건네며 앞치마를 넘겨 받는다. 카운터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자 사장이 말을 건다. 이건 이렇게 하고, 이건 저렇게, 물류 오면 기록해서 옮기고, 아, 폐기된 삼각 김밥 챙겨놨으니까 갈 때 가져 가.

 

“매번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눈초리를 휘며 상냥하게 웃음 짓는 앳된 소녀는 어딘지 싱그럽고 청순했다. 굵게 펌이 들어가 곱슬곱슬 흩어지는 긴 초콜릿색 머리칼과 갈색 홍채, 살구빛으로 물든 피부. 가는 목어림과 마른 체구가 눈에 겹다.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면 세상이 따스하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보이는 만큼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안녕하세요.”

 

손님의 무심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빙그르 웃는 얼굴을 만들어낸다. 귀에 달큼하게 울리는 꿈처럼 몽롱한 음색에 상대조차 무심코 바라보게 된다. 눈이 마주치자 달리아는 여지없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 미소 가득한 얼굴에 손님 쪽은 일견 당황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주춤했다가 대강 찾던 물건을 집어 카운터에 섰다.

 

“감사합니다.”

 

금액을 받아 갈무리하며 다시금 공손하게 인사한다.

 

“아, 네.”
“안녕히가세요.”
“네, 안녕히계세요.”

 

어떤 무뚝뚝한 손님이라도 저도모르게 말을 탁 뱉고야 말게 하는 것. 달리아의 상냥한 분위기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딸랑.

그렇게 피곤한 일과가 시작되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감사합니다.” “안녕히가세요.” 도돌이표처럼 계속되는 인사가 지치지도 않는지 처음 그대로 맑은 웃음을 지어보인다. 달리아의 웃음에 손님들은 속수무책으로 인사를 받고 홀린 듯이 밖으로 나섰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달리아는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다 아, 홀로 중얼거린다. 손님들마저 모두 비어진 실내는 달려들 듯 쨍하게 눈부신 백열등만이 반질한 선반을 비추고 있었다. 지나치게 적막하고, ……공허하다.

달리아는 뜻없이 허공에 오래도록 초점을 맞추었다. 아무 이유없이 입술을 달싹대다 눈길을 내린다. 

 

 

3


월요일과 화요일, 빵집. 수요일과 목요일 편의점. 토요일 카페. 주말조차 쉬지 않고 마트와 식당을 나간다. 만인의 휴일, 크리스마스 조차 예외는 아니다.

거리를 걷는다.
골목을 굽이굽이 빠져나와 번화가로 나선다. 대로에서 문득 길잃은 어린아이처럼 멈춰선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저들은 어디로 갈까.

무수한 인사들로 인산인해. 뭉뚱그려지고 섞이고 덩어리로 뒤엉켜 그들은 외롭지 않은 듯 하다. 소음이 썰물처럼 밀려와 아무렇게나 지껄여댄다. 귀기울여 듣고 있으면 피곤해진다. 눈두덩을 눌러보았다. 아무도 모르게 신음이 새었다.

까닭없이 입술이 벌어져 힘없는 숨을 흩트렸다. 다시 정면을 봤다. 지나가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사람.
사람.

사람.

당신.

 

 

4


캐롤이 들렸다. 크리스마스. 모두가 행복한, 크리스마스.

달리아는 자취하고 있는 단칸방으로 들어왔다. 서늘한 바람이 창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다. 샐로판 테이프를 붙였지만 이미 곰팡이가 슬어 너덜너덜해진 지 오래다. 전등 스위치를 누르자 한참 깜빡이다 비로소 불이 들어온다. 지친 몸을 가까스로 움직여 이부자리를 폈다. 겉옷조차 벗지 않은 그대로 힘없이 드러누웠다.

팔다리를 벌려 대자로 눕고 천장을 바라본다. 전등이 불시에 꺼졌다가 들어왔다. 아무 의미없이 눈동자를 굴려 구석을 바라보았다. 달리아는 자주, 때로 ‘무언가’가 보이는 것처럼 허공을 말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그녀는 입술을 움찔댔다.

꼭 할말이 있는 것처럼.
꼭 전해야 할 말이. 그녀에게 있는 것처럼. 숨겨둬야만 하는 그 말이.

그녀는 다시 천장을 본다. 닳고 닳은 벽지의 무늬를 세듯이 눈으로 덧그린다. 그러다 입모양으로만, 또 무슨 말을 되뇌었다. 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추위에 몸을 옹송그린다.

 

 

5


‘연말…이구나.’

눈을 깜빡였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고 문득 잔인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떠올렸다. 이미 한나절이 지나있었다. 밖이 캄캄했다. 지난 밤, 연장 근무로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온 기억을 떠올렸다. 어쩌면 연초 일런지도 모른다. 굿바이, 2015도. 해피 뉴이어, 2016도. 말해 줄 이 없는 텅 비고 아무도 없는 공간이다. 시간조차 무색해지는 그걸 헤아릴 여유조차 없는 내가 있고.

……아니, 당신도 있구나.

그를 바라보았다. 말끄러미. 말끄러미.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그도 나와 같은 시선으로 나를 본다. ……보고 있을까. 고개를 갸웃했다. 항상 나는 지켜보는 입장이었다. 그를 보고만 있었다. 그는 나를 볼 때도 있었고, 아니 내가 아닌 무언가일지도 모르지만, 이쪽을 보고 있던 적도 있었고, 아닌 경우는 더 무수했다. 그 시선 한 번 붙잡는 게 나는 항상 힘겨웠다.

당신이 나를 본다는 확신이, 내게 없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언제 어디서든, 어느 곳에든 있었다.

운동장.
편의점.
카페.
빵집.
거리.

내 단칸방…….

 

“거기…… 있어요?”

 

당신이 보일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움찔대고는 했다. 꼭 무언가 할말이 있는 것처럼. 꼭 전해야 할 말이. 내게 있는 것처럼.

 

“안녕♣”

 

숨을 삼켰다. 무심코. 저도 모르게. 눈을 숨벅였다. 눈꺼풀이 닫혔다가 밀려 올라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눈꺼풀 올올이 눈 아래를 간지럽혔다. 눈 안쪽이 망막을 쓸며 느리게, 느리게 열린다.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응◆ 잘 들리네♠ 너도 내가 보이는 모양이지?”

 

……네…. 힘없이 속삭였다. 소리로 새어나갔는 지도 의심스러웠다. 적막 속에서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옅은 음향인데도 그는 마치 들은 것처럼 흐응. 흥미롭다는 듯 말을 흘린다. 나는 잠시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믿을 수 없어.

 

“당신 정말……”
“응, 네가 보여♥ 안녕◆ 궁금했어♣”

 

……내가, 궁금했어요? 나를 알고 있었나요? 내가 있다는 걸, 이 세상에, 내가. 존재 한다는 것을…… 당신도……나처럼, 나를, ……그리워, 했어요?

물음이 목을 매서, 헐떡이는 숨만 자꾸 새어나갔다.

 

“난 당신이……. 아 갑자기 왜…….”

 

나는, 괜찮았어. 나는 외롭지 않았고, 나는ㅡ모르겠어. 그냥 괜찮았던 것 같아. 그러니까 ‘그런 것 같다’는 건, 괜찮지 않았다는 거겠지. 사실은.

많이 외롭고, ……추웠다는 거겠지. 그래서 지금 나는, 환영에 매달려 혹은 세상에 어떤 것이 미쳐 나를 슬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울고 있는 거겠지.

 

“당신이, 없을 때는, 괜찮았어요. 난 이렇게 울지 않았고…….”
“응♥”

 

너 참 씩씩하게 살더라♣ 그가 위로처럼 말을 건네도 위로처럼 여기지지 않는 게 신기했다. 한없이 가볍고, 낱낱이 흩어지는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 서늘한 눈길에 눈물을 삼킨다. 횡경막이 크게 부풀었다. 그럼에도.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울 필요도, 없어서… 난… 그래서……”
“알고 있어◆”
“부모님이, 부모님이, 흑, 힘드실까봐…”
“잘했어♠”
“동생도, 아프니까…”
“잘 참았어♥”

 

그럼에도. 그런데도. 왜… 이렇게……

 

“…내가, 흑, 내가, 잘해야 한다고……. 난”
“착하다♣”
“난, 정말……”
“정말, 착해◆”
 
따뜻할까.

 

“사실은, 난, 난……”
 
울음은 왜 갑자기 튀어서, 나를 슬프게 잠기 우는 걸까. 눈물이 머리까지 차올라서 도무지 생각을 이어갈 수 없다. 의식의 흐름따라 엉망으로 쏟아내기만 하고.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 사실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만질 수 있을 줄 몰랐어♥”

 

당신이 내게 와닿았다. 숨이 멎는다. 당신의 손이 내 볼을 쓰다듬고, 콧잔등을 누르고, 인중을 만지작대고, 입술을 잡아 문지른다. 마디가 단단하고, 마냥 부드럽지만 않은 손이었다. 

 

“……당신은…”
“정말 흥미로워♣”
“……”
“계속 말해도 돼◆”
 
아랫입술을 꾹 누르며 손가락이 들어온다. 혀를 문지르며 열을 전하고 비어져 나간다. 숨결이 축축하게 허공을 적셔 나는 못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들어줄 테니까.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난 괜찮지 않아요.”

 

차분히 숨을 참아내며 말을 뱉었다. 가까스로 호흡을 정돈하고, 차근차근 말을 정리해서 하고 싶었던 말을 끝까지 했다.
 
“당신이, 나를 외롭게 해요.”
 
비록 부당한 타박일지라도, 왠지 그렇게 말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라면 들어줄 거라고, 가슴 한 켠에서 나도 모르는 이기적인 마음이 불쑥 솟는다.
 
“미안♥”

 

그의 손길이 이제 목덜미를 지나 쇄골의 모양따라 움직인다.

 

“당신을 좋아해서, 괴로워요.”

 

그는 내 가슴 위로 살풋 손을 올려놓고 쿡 웃었다.
 
“솔직한 아이는 좋아♣ 넌 정말 사랑스럽네♥”
 
그의 손등에 손을 겹쳐 올렸다. 그의 시선을 묶어두고 싶었다. 그를 보고 있으면, 항상, 그를 붙잡지 못하는 내가 너무 분했어서, 이번에는 욕심껏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취는 나. 온전한 내 모습을.

 

“난… 달리아에요.”
“난 히소카◆”
 
히소카……. 입 안으로 되새겨 보았다. 절로 입 밖으로 히소카. 이름이 굴려진다.

 

“잘했어♥”

 

부추겨지 듯 한 번 더, 히소카. 불렀다. 응♣ 대꾸가 돌아오자 나조차 내가 어색할 만큼 순식간에 기분이 들뜬다. 고양된 마음에 거듭 히소카, 히소카. 불러버렸다.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참을 수 없을 만치. 꼭 그런 기분이 되어서.

 

“당신도… 내가 보였어요?”
“응♠ 처음엔 넨인 줄 알았어◆ 기척을 읽을 수 없어서, 재미있었지♣”
 
그때를 회상했는 지 히소카가 즐거운 표정을 짓는다. 넨? 무심코 고개를 기울여 의문을 표했지만, 그는 가타부타 설명없이 화제를 돌렸다.

 

“저녁은?”
“……배고파요?”
“같이 식사나 할까♥”

 

커튼 아래로 어둠이 스며든 것을 기척으로 느끼며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저, 히소카, 집에 아무것도……. 밖에서 먹을까요?”

 

밖에서? 히소카가 희안한 눈으로 나를 보다 문득 눈초리를 휘며 웃었다.

 

“여긴 네 세상이랑 내 세상이 섞인 것 같아♣ 리아◆”
“네? 무슨…?”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내려다보며 잠시 골몰하던 히소카가 살짝 흔드는 손동작만으로 마술처럼 꺼낸 카드를 입술에 톡 하고 댄다. 와, 감탄을 보냈다.

 

“바깥은 위험하거든♠”

 

무서운 아저씨들이 잔뜩 있으니까◆ 뒤엣말에 ‘그냥 집에 있었으면 좋겠어’와 같은 뉘앙스를 주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위험한 아저씨요……? 묻고싶었지만 삼켰다. 그가 그걸 원하는 듯 해서.

 

“그럼……그냥 간단히….”
“응♣ 밖은 네가 자는 동안 실컷 봤어♥ 흥미롭지만, 불쾌해♠”

 

끝맺는 말에 문득 살기를 느낀 것은, 착각일까? 살아가면서 ‘살기’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지만 어쩐지 그런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은, 묘한 위화감과 위압감에 조용히 수긍했다. 갑작스럽게 가슴이 두근 두근 뛴다.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라는 걸 안다.

 

“……볶음밥 좋아해요?”
“뭐든 좋아♥”

 

처음으로, 볶음밥을 하면서 떨어보았다. 물론 이 떨림은, 두려움이 아니다.


이야기를 했다. 실컷 눈을 맞추고, 그의 손을 잡아 보았다. 용기를 내어 팔을 만져봐도 되냐고 묻자 혼쾌히 내어준다. 그가 신기하다는 눈으로 나를 보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내 눈 앞에 있다는 것을 나 스스로 믿을 수 있게 그의 체온을 느꼈다. 그의 곁에서 내가 이렇게 말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나조차 낯선 내 모습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기쁜 미소에 그의 화답이 돌아오는 게 좋았다. 그의 금색 눈동자에 내 눈을 맞추고,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순간이 좋았다. 그렇게 그를 느끼고, 그를 내 안에 받아 들이고, 그를 실감했다.

한참동안 그와 서로를 응시하다 아, 신음했다.

 

“당신 갑자기…”
“조건은 하루, 자정인가♣ 너도 희미해지네◆”
 
그가 나를 가리켜서 무의식 중에 내 손을 들어 손바닥을 봤지만 내 형체는 그대로였다. 나보다는……! 다급히 그를 살폈다.

 

“이대로 사라지는 건, 싫어.”

 

그의 어디를 잡아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그의 목에 팔을 걸어 움켰다. 그가 내 등을 한 번 안았다가 팔을 떨어트렸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넌 모처럼 만난 재밌는 것이니까.”
 
그가 처음으로 ‘진실’을 말하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그런 본인이 생소하다는 듯 눈을 살짝 키웠다가 본연의 얼굴로 되돌아간다.

 

“사라지지…말아요. 사라지지 말아요. 제발…….”

 

저도모르게 매달리는 신음을 낸다. 앓는 양 끙끙대며 그를 힘주어 붙잡게 돼. 다시금 눈물이 밖으로 비어지려는 것을 그가 눈 아래를 살짝 눌러 막았다.
 
“내년에 보자 리아♥”

 

그는 냉정하고 잔인하게 나를 떼어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샐쭉하게 웃는 여우눈으로 내게서 멀어지고……. 손을 흔든다. 사라진다. 사라진다.

사라져 간다…….
 
“좋은 꿈 꾸길♣”

 

나는 마치 주문에 걸린 산양처럼 가련히 눈감을 뿐.
돌아오지 않는 꿈. 눈물이 머리까지 차올라서, 나는 눈물로 채운 수조에 아득히 가라앉는 것만 같다.

이럴바에야…… 내 세상 속으로 들어오지 들어오지 말지 그랬어.
숨을 삼키며 외로움도 꿀꺽 삼켰다. 

‘나를 혼자 두지 말아요…….’

또 그리운 꿈을 꾼다.
영원한. 영원히 당신만 바라는 꿈. 

 

 

* * *

 

 

“Happy New Year! 2016년 입니다!”

뉴스 앵커의 시끄러운 인사말과 동시에 눈을 떴다. 혼몽한 정신을 일깨우며, 아침 해가 떠오른 광경을 무연히 바라본다.

나 홀로, 2016년 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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