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카무이×키

12. 28

 

5주째 카무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이렇게 길게 보이지 않은 적은 없었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면 그 동안의 모든 게 내 환상이었던 걸까요? 사실 카무이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나 혼자 막연한 환상을 보고 사랑했다고 말해왔던 건가요? 물론 아닌 건 알아요. 그렇지만…… 난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굉장히, 음. ……두려워져요. 이대로 사라질 것 같아서 무서워요.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에요. 아니, 맞는 것 같아요. 믿지 못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 날이 되어도 당신이 보이지 않으면 어떡하죠. 합쳐질 수 있는 당신이 있는 세계 같은 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31일에도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조금, 조금 슬플지도 모르겠어요.

 

12. 29

 

카무이의 꿈을 꿨어요. 아니,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아요.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했고 현실이라고 하기에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카무이의 모습과 너무 달랐는걸요. 정말로 모든 게. 태양을 바라볼 수 없으면서도 햇살을 머금었던 다홍빛 머리카락도, 빛나던 푸른색의 눈도 무엇도 없었어요. 만지면 그대로 흩어질 것 같이 하얗고 색이 바랜 그 모습이…… 무서웠나? 무서웠던가? 이제 생각나지 않아요. 단순히 꿈이었던 것 같아서 기억하지 않으려고요. 말도 안 되잖아요. 온 몸의 색이 하얘지는 병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어. 오히려 그게 훨씬 더 꿈같아.

 

12. 30

 

하루가 남았는데, 오늘의 시간은 유달리 더 느리게 가는 것 같아요. 이 한 문장을 쓰면서도 시계를 세 번은 쳐다본 것 같은 기분이야. 카무이를 만난다는 설렘과 묘한 두려움이 함께 하고 있어요. 오늘은…… 말을 조금 아낄 거예요. 카무이를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걸 이 곳에다 전부 써버리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이 세계와 그 곳의 시간이 동일하게 흘러가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요. 만약 밤이라면 평온한 밤이 될 수 있고, 낮이라면 어떤 근심도 없는 낮이 될 수 있길.

 

 

펜의 뚜껑을 덮고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책상의 앞에서 일기장의 종이 위에 손끝을 가져다대었다. 마른 종이의 느낌이 손끝에 와 닿았다. 그대로 글씨 위에 손을 문지르면 덜 마른 잉크가 번질 것이 분명했다. 글씨가 쓰인 부분이 미묘하게 움푹 파여서 눈을 감고도 글씨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일기의 마지막 문장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다가 끝 부분에서 멈췄다. 움직인 방향 그대로 잉크가 흐릿하게 번졌다. 30분. 앞으로 30분만 더 기다리면 달력의 날짜가 바뀌고 그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찾아왔다. 초침이 가는 소리가 한없이 느렸다. 그녀는 일기를 덮고 번진 잉크가 묻은 손끝을 물로 씻어내었다. 지독한 침묵이 그녀를 지루하게 했다. 잠근 수도꼭지에서 조금씩 흘러나오는 물방울 소리, 침대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제가 들이쉬고 내쉬는 숨소리 하나까지 침묵 속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다 조용히 녹아내렸다. 그녀는 침대 위에 누워서 시계에 시선을 두고 초침이 두 번 움직일 때마다 숨을 들이쉬었다가 또 두 번 움직이면 내쉬기를 반복했다. 시간이 가는 동안 숨을 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괴로웠다.

30분이라면 앞으로 몇 백번이나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해야한다. 그녀는 초침에 맞추어 숨쉬기를 그만두었다. 초침 소리가 점점 무거워져서 느릿하게 숨 쉬는 제가 짓눌릴 것 같았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고 다시 책상의 앞에 앉았다. 그동안 쓴 일기를 천천히 읽어보는 게 고작이었다. 29일의 일기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제가 보았던 것이 단순한 꿈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것은 그의 오만함과 강함이었다. 절대 꺾이지 않았고 꺾일 수도 없는 그것. 모든 것 사이에서도 눈에 한 번에 들어올 것 같은 찬란한 색도 사랑했고, 가면을 쓴 것 마냥 달라붙어 있는 미소도 사랑했다. 제가 사랑한 모든 것이 사라진 그라니. 생각할 수 없었다.

영원 같던 30분이 느릿하게 지나갔다. 그녀는 뭉그러지는 시야 속에서 서서히 들어오는 사람의 인영에 발걸음을 빠르게 옮기다가 한 순간에 멈췄다. 그의 주위에 깨진 유리조각들이 잔뜩 늘어져있었다. 유리조각 뿐이 아니었다. 본래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난 물건들이 빼곡했다. 카무이. 그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그의 눈을 감고 있던 붕대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머리카락은 제가 사랑했던 다홍도,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한 발자국씩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그 색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의 이름을 연신 부르다가 발을 멈췄다. 차마 그 이상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유리 조각이 무서워서 발을 내딛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이미 그녀의 발은 유리 조각을 밟고 걸었던 탓에 상처투성이였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꿈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탁한 색의 눈동자를 본다면 그녀는 29일의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고 말 것 같았다.

카무이, 제가 목소리를 다시 내자 그의 고개가 움직였다. 명확하지 못한 시선이 몇 번이고 허공을 가르다가 멈췄다. 키, 어서와. 여느 때와 같은 다정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렸다. 한참을 제자리에 서 있다가 결국 그녀는 그의 바로 앞에 서서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평소의 의상으로 등받이가 없는 동그란 의자에 앉아있었다. 들고 있는 우산도, 감고 있는 붕대도 평소의 그것이었는데 하얗게 바래버린 그의 머리색이 과하게 이질적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봐야 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5주. 그녀는 5주간 그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얼굴인지 알 것 같으니까 표정 좀 풀어, 키. 보고싶었다구.”

 

장난스럽게 얼굴 위로 올라앉는 미소에 그녀는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려다 멈췄다. 멈췄다는 표현보다 거절당했다는 표현이 옳았다. 순식간에 내쳐지는 자신의 손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미안. 그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사과의 말이 나왔다. 여전히 시선이 미묘하게 어긋났다.

 

“…그러니까, 눈. 안 보이는 거예요?”

“응. 눈도 안 보이고, 아마 곧 죽을지도 몰라.”

“그런 장난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장난이 아니라서 어떡하지.”

 

그의 말이 조금씩 길어졌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병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바이러스, 백저, 치료약이 없는, 에도의 절반이 괴멸상태. 1년은커녕 몇 달도 버틸 수 없는 상태. 그녀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의 말이 끝나기를 마냥 기다렸다. 그의 말이 끝났다고 해서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키, 그가 조용히 자신의 이름을 불러왔을 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뒤늦게 그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응, 여기 있어요. 하고 말을 덧붙였다. 무덤덤하게 제 상태를 설명하던 카무이의 목소리는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인 제 감정을 말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떨려왔다. 있지, 키. 나는 가끔 너와 내 마지막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런 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어. 그의 말에 그녀는 절 찾는 그의 손을 꼭 잡고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기분 이상하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는 늘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해요?”

“응, 바이러스 따위에 죽는다니 조금 기분이 상하는 것 같기도 하고?”

 

끈질기게 얼굴 위에 올라앉아있는 그의 미소에 그녀는 비슷하게 미소 짓고는 떨리는 손을 몇 번이고 주물러주었다. 떨리던 목소리가 평온해진 대신 조금씩 떨리는 몸은 그의 기분을 대신하여 표현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이라는 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네요. 그녀가 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장난치듯 말하니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기왕이면 키의 앞에서 죽고 싶었는데. 마지막을 함께 하지도 못하는 건가. 아쉬워라. 그의 목소리가 꼭 투정부리는 아이처럼 천진해서 그녀는 웃어버렸다. 그럼 헤어지는 순간 같이 죽을까요? 그의 고개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시선을 두어도 도달하지 못하니 내내 먼 바닥만 쳐다보던 그의 눈이었는데 그녀의 말에 그는 처음으로 그녀와 제대로 시선을 마주쳤다. 우연일 것이 분명했지만 그녀가 순간 그의 눈이 사실 보이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할 정도로 시선은 정확했다.

 

“어……. 내가 방금 키의 말을 잘못 들었던 것 같아. 다시.”

“그러니까,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면 헤어지는 순간 같이 죽는 건 어떨까. 싶어서요.”

“농담? 아니면 진짜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이런 걸로 농담할 정도로 취미가 나쁘지는 않은데.”

 

다시 한 번 그녀의 손이 그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내치지 않고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의 표정이 머리카락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그의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물었다. 같이 죽을까요? 그녀가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제 목에 내려놓았다. 그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그는 숨 쉬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그녀의 목을 조르다 슬쩍 힘을 풀었다. 23시간 뒤에. 조용히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진심인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웃었다. 그럼 서로의 마지막을 느긋하게 보내볼까요.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