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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드×율하

 

닫히지 않은 창문 사이로 가느다란 바람 한 줄기가 들어온다. 어둑한 저녁, 아직 늦지는 않은 밤 그 사이에는 제법 시끌벅적 할 만 한데도 어째서인지 고요하다고 느껴질만큼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조용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시계소리뿐. 어쩌면 내가 그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그럴지도 몰라. 시간을 볼 수는 없지만 볼 수 있다면 저 가느다란 시계소리만큼이나 가냘프고 올곧은 모양새가 아닐까. 곧 한 줌에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시간은 잡으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부숴져 버릴 것 이다. 하지만 그걸 수백번을 반복해서 잡을 수 있다면 잡고싶은 시간이 내게는 있어. 초침도 분침도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시침조차도 제 딴엔 분주히 움직이고 있겠지. 곧 그 마법같은 시간이 돌아 올 차례야. 줄곧 주시하고 있던 너와 단 하루,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시간을 즐길 수 있는 단 하루가. 나는 네가 없는 날들에도 너를 보고있었어. 그래, 누군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네게 날개라도 달린 듯이"말이야. 네 시선이 미치는 방향에 조금이라도 닿고싶어서 나는 멈출 수 가 없었어. 아마 너도 그렇겠지. 우린 닿을 수 없는 그 사이를 뛰어넘으려 분주히 애를 썼겠지. 하지만 결국 닿지 못했다. 그 유리같은 눈동자 너머로 비춰지는 섬광이 아득해서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건 마치 하늘의 별같은 존재였어. 잡힐 듯이 가까워도 한 없이 먼 길. 그리고 그 별의 또 다른 하나는, 이 창문 너머로도 시작될거야.

 

"조금 추워지네. 가디건이라도 가져올까..."

 

  하지만 그 자리에서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현재시각 11시 59분, 정말로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기 때문이야. 아슬아슬한 스릴을 너와의 24시간에서까지 즐기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 24시간, 빈틈없이 나를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날에 나는 도박을 하고싶지 않았다. 하는 수 없지 뭐, 나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담요를 주워들었다. 펄럭, 공기를 박차고 휘날린 담요는 시간의 찌끄러미 마저 날려버려 마침내 열린 창문 틈새로 온전한 시간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째로 채워주려는 듯 네가 - 그 섬뜩하도록 아름다운 눈동자로 ㅡ 온전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단해보이는 팔, 내가 늘 그리던 품, 닿지않아도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그리고 강렬하게 타오르는 네 아름다운 루비같은 머리칼과 그 눈동자가 나를 감싸안듯 손 내미는 듯 했다. 아, 알고있어. 이 다음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는 말이야. 더 이상 담요같은 것은 어찌되어도 상관없다. 손에서 우아하게 미끄러지는 담요자락은 땅에 달라붙듯 떨어져 내 등 뒤로 레드카펫인 양 펼쳐졌다. 그걸 보고는 그도 똑같이 생각한 듯 한쪽 입꼬리만 씩 올리며 그 예의 웃음을 짓는 것 이었다.

 

"여왕님께 잘 어울리는 공간이 되었군그래."

"이 상황에서까지 그리 얄밉게 굴어야겠어?"

"오, 물론이지. 넌 나를 그리워 한 것이잖아."

"못 당한다니까. ..그래, 키드야. 보고싶었어."

"늘 나를 보고있던게 아니었나?"

"그런 얘기가 아니라는 걸 너도 잘 알고있잖아."

 

  자꾸 꼬투리잡지마ㅡ 내뱉듯이 대꾸한 말을 뒤로하고 나는 그의 품을 향해 힘껏 달려가 안겼다. 안정적인 자세로 나를 받아든 그는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제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안고 한 손으로는 어깨를 감싸쥐어 그대로 연거푸 키스했다. 그 키스는 닿는 입술보다는 늑골을 타고넘어 심장에 각인시키는 키스같이 짜릿하고, 그만큼 아픔이 죄여왔다. 하지만 우리 둘, 그 어느 쪽도 멈출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을 버티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이 달콤함은 훗날 치명적인 독이 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드는 것은 마약 이상으로 간절한 중독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아, 한참을 그 꿀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걸까. 시계의 분침은 좀 더 멀리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쉬운 감정을 뒤로하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서로를 구석구석 바라보며 온전하게 자신의 눈에 담는 것을 잊지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에게 채우고나서야 나는 느즈막히 촉촉히 젖은 입을 달싹였다.

 


"너는? 나를 보고있지 않았어?"

"반응 너무 느리지않냐?"

"대답해줘 키드야."

"아니, 꼬맹아. 너도 잘 알고있잖아."

"응. ..단지 듣고싶었을 뿐이야."

 

네 입에서 나오는 그 다정함을.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손과 겹쳐대보며 슬슬 손가락만 움직여 그의 존재를 다시한번 실감했다. 이 따뜻한 온기는, 이 시원한 체취는, 나를 배반하지 않아. 언제까지나. 그것은 실제로 여기 있는 것이다.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하는 이상, 네가 나를 보고있다는 사실은

나를 실망시킬 신기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 그게 내가 바래왔던 이 해의 이유, 내가 살아온 단 하나의 이유였다. 나는 이제 손을 볼로 가져다댔다. 너는 느리게 눈을 감으며 긴장을 푼 듯 평온하게 미소지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그 웃음은 내게 광적으로 아름답고, 성스럽고, 그래. 섹시하기까지 했다. 그건 내게 축복이기도 했다. 나는 오늘 밤 자지않고 뜬 눈으로 너를 감상할 것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역시, 너와 있는 하루동안은 모든 것을 해보고 싶은 걸. 조금 아쉬운 생각을 뒤로하고 손에 힘을 주어 너를 바싹 끌어당겼다. 장난스레 네 코를 내 코와 맞대게하여 꾹 누르고는 네 반쯤 뜬 눈을 마주보며 씩 웃었다.

 

"일년만에 내 남자랑 동침을 하게 되다니 조금 설레는데?"

"너 그거 위험한 발언인건 잘 알고있지."

"네가 날 공포에 질리게 할 리 없다는 것도 잘 알고있지."

"참 천하태평이야 꼬맹아. 응?"

"누굴 닮았을 것 같은데?"

 

  마주보는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게 서로를 바라봤다. 자석의 이끌림같이, 눈이 아프지도 않은지 한번 깜빡이지도 않던 그 눈을 마침내 그는 항복이라도 하는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뜨고는 아주 작게 키스해주었다.

 

"물론 이 몸이지."


 

 

*


 

아침이라기에는 너무 늦은, 눈부신 오전이었다. 이 날은, 한번도 비가 내리거나 폭설이 찾아오거나 한 적이 없었다. 나와 그의 마음을 반영한 듯 하늘은 늘 높고 푸르렀으며 구름이 조각조각 떠다니는 화창하고 맑은 날이었고 햇살은 키드만큼이나 눈부셨다. 부서진 햇빛이 머리위에 흩뿌려진 키드는 아름다워서 나는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깨우고싶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상체를 조금 들어서 그의 이마에 살포시 입맞추자 그는 느릿하게 나를 잡아끌어 코를 맞대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꼬맹아."

"일어나, 아침이잖아."

"최근에 이렇게까지 기분좋게 자본 기억이 없어서 조금 더 자고싶긴한데.."

 

그래,일어나자ㅡ 따라 상체를 일으킨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제 품안에 가둬두고 턱으로 머리를 가볍게 눌러 자세를 고정시켰다. 놀랍도록 편한 자세가 되어서 나는 그 품에 더 파고들었고, 그의 손을 잡아끌어 하나하나 눌러보고, 만져보고, 쓸어보며 늘 그랬듯 손가락 놀이를 시작하였다. 아, 변한게 없는 시간이었다. 네 행동 하나하나가, 내 행동 하나하나가 서로가 어떤 걸 원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익숙해질 틈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무료하다면 무료할까, 우리는 몇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침대에 머물러있었다.

 

"배는 고프지 않아? 점심시간도 지나버렸는데."

"몇시나 됐지?"

"3시 30분."

"..그렇군. 듣고나니까 조금 허기가 지는데."

"만들어줄게~ 아침 겸 점심 겸 저녁 겸~"

"저녁겸까진 너무 심하지 않냐."

"흐흐, 농담이야!"

 

  콩, 침대에서 뛰어내리듯 내려와 푸른색 앞치마를 메고는 너를 위해 열 손가락이 다치도록 연습했던 요리를 시작했다. 계란을 휘젓고, 토마토소스를 바르고, 치즈와 양송이버섯, 그리고 조금 매콤한 양념까지. 아, 그 사이에 고기가 모두 익었겠지. 좋은 불로 구워낸 크레쁘도 모두 완성되었을 것이다. 그새를 참지못하고 내 곁으로 와서 기대게하듯 안은 그는 내 목덜미에 입맞추며 조용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이듯 입술을 움직였다.

 

"웬일이야 꼬맹이. 연습 많이했나보네."

"수도없이 했지. 네가 없는 동안, ...레시피도 적어놨어. 새벽에 잠깐 일어나서."

"연습했었어?"

"아니, 너 챙겨가라고."

"뭐하러. 네가 만든 맛이 나지 않을텐데."

"..비슷하겠지. ..곧 헤어질텐데 우리, 가끔 내 생각이 나면 만들어먹어. 알았지?"

"네 생각이 나도 못 먹을정도로 질리도록 먹겠는데 그러면."

 

떨리는 목소리는 감출 수 없었다. 이 시간을 멈출 수 없다면, 나는 너에게 웃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완성된 요리 앞에서 하늘은 어느덧 어두컴컴해졌다. 접시 주위로 또르르, 굵직한 눈물만이 떨어질뿐이었다. 그는 울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아니, 울어도 된다는 듯 더 잘 기댈 수 있게 해주었다.

 

"네가 우는 이유가 나때문이라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은데."

"농담이 나와?"

"농담아냐. 네 말대로 곧 헤어질 상황이잖아. 네 하루의 희노애락의 이유가 오롯이 나때문이라면 괜찮은 하루 아니냐."

"...응."

 

그러네. 너는 어때? 네 오늘의 이유는, 나때문이었어? 말 끝에 묻힌 웃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조금 거칠게 내 눈물을 닦아주고는 접시의 음식을 집어먹었을 뿐이었다. 맛있네. 꼬맹이가 해주는 음식은 늘 이렇게 맛있었지. 그의 말에 나는 또 왈칵 울어버릴 것 같았다. 한참을, 한참을 우리는 그렇게 오래도록 운 후에야 저녁식사가 되어버린 점심식사를 끝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급하게도 달려가 어느덧 다시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분침까지 보고싶지는 않아. 그렇다면 나는 내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이 안타까운 시간을 놓치고 말 것 이다. 무엇보다 그에게 듣고싶은 말이 있고, 해주고싶은 말이 있는데. 그 한마디를 못하고 다시 일년을 기다리고 싶진 않아. 아무렇게나 내버려둔 그릇은 차게 식어갔고, 우리 주위를 제외하고는 모두 싸늘한 냉기만을 품는 밤이 되었다. 저 창문 너머 그뭄달은 우리를 놀리듯 한층 흐리게 보였다.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손 잡아줄래?"

 

그는 아무말 하지않고 가만 손을 잡아주었다. 그래, 이 온기. 이 온기면 다시 일년을 버틸 수 있다. 나는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고 소리를 내었다.

 

"...길게 말하지 않을거야. 너도 잘 알고있을테지만, 꼭 말해주고 싶어 키드야. ...난,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 네가 없는 일년, 그 365일. 또 기다릴테니까. 다음에 다시 만나자."

"그래. ..울지말고 꼬맹아."

 

그는 반댓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에 맞춰 또 다시 툭툭,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조금 생각을 하더니 이내 말을 고른 듯 다시 이어나갔다.

 

"내 오늘의 이유는, 너 때문이었다. ..사랑한다, 율하."

 

다음에도 반드시ㅡ 달싹이던 입술아래 겹쳐진 손바닥이 스러져 어느새 목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시간은 다시 온전히 창문너머에서 귀환했고, 너는 그 너머로 이미 빠져나가 다음 말이 무엇인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있어. 네가 늘 말하던 마지막 말정도는.

 

"너를 안아주러 올테니까."

 

나는 그것을 기다리면 된다. 빈틈없는 어둠은 그믐달마저 지워버렸다. 아침은 올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아침의 밤을 기다리고, 기다릴거야. 네가 없는 내내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도 나는 , 너는, 우리의 시간의 꽃을 기다리고 있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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