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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볼릭 에스퍼×키즈나
Love, Just Like a Blue
Diabolic Esper × Kizuna(KINA)
*
오늘부터 추억.
당신과 나는, 한 때의 멋진 추억으로.
내일부터는 혼자.
둘이서 헤엄쳤던 바다를 나 혼자 헤엄치며
보고 싶다, 고 중얼거렸어.
안녕이라고는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
"( )!"
모르는 소리가 들려 온다. 이건 뭐지? 내가 왜 여기 있지?
"( )!"
감각에 흘러 넘치는 것은 흐릿함 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두려움이 아닌 설렘 따위로 떨리는 걸까. 마지막으로 내가 뭘 했었지? 텔레비전 위로 떠오르는 글자들을 안구로 공허하게 쫓다 피곤함을 못 이겨 책상에 그대로 엎어져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그 후에는? 모르겠어. 기억이 나질 않아.
"어...?"
순간 반쯤 감긴 눈꺼풀 위로, 뺨 위로 비가 내렸다. 따듯한 소나기가 내렸다. 따듯하고도 상냥하게 뺨 위를 스르르, 하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왜 울고 있나요?"
아직도 흐릿한 그 시선 끝에 비친 것은 꼭 하늘이 우는 것만 같아서, 몽롱히 말을 건네며 손을 뻗었다. 그러자 차츰 감각이 분명하고 투명해지더니,
"키나!"
아, 이제야 보였다. 이제야 알았다.
소나기가 아니라, 당신의 눈물이었구나.
하늘을 향해 뻗은 손은 당신의 따듯한 눈물과 대조되는 차가운 뺨에 닿아 있었다.
"다행이다. 만나고 싶었어..."
갑자기 당신이 나를 안아 왔다. 가슴이 꽉 조여 왔음에도 괴롭지 않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귓속을 파고 들며 간질여 왔다. 조금도 낯설지 않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당신이 내가 그 창문으로 바라 보던 사람임을 알았다. 타인의 어깨 위에 제 머리를 올려 두고 바라본 하늘의 모습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었다. 빨간색, 분홍색, 파란색, 노란색, 자주색, 선홍색, 푸른색, 청람색... 다 세기도 어려운 별빛이 밤하늘을 꽉 수놓으며 채워가고 있었다. 검기만 했던 밤하늘이 별빛을 입어 다채로운 빛깔을 내는 듯이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다 문득 발끝이 간지러워 밑을 바라 보니 온통 새하얀 장미가 저기 먼 지평선 너머까지 이어져 가고 있었다.
당신의 체온이나 체취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너무 편안하고 부드러워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가만히 안겨 있었다. 너무 부드러웠던 나머지 그대로 잠들어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지, 싶었다. 조용한 꽃밭에는 떨리는 서로의 숨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분명 꿈일 텐데, 어째서 오늘 따라 이리도 상냥한 꿈인지. 깨고 싶지 않았지만 눈이 감겨 왔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세상이 어서 일어나라고 깨우는 걸까. 아, 싫다. 싫어.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다 문득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기, 키나."
타인의 목소리를 그렇게 가까이서 들어 본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의 나이는 고사하고, 이름부터 생각하는 것까지, 그 무엇도 모르고 있는데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정말 가까운 몇몇 사람들에게만 알려 주었던 자신의 이명을. 가까운 타인의 목소리에 몸이 자꾸만 움찔거리는 것만 같았지만 애써 외면했다.
"이건 꿈일까?"
"...아마도."
"그럼 너는 환상인 거야?"
"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내가 당신의 환상이라면 당신이 원하지 않는 답을 내놓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덧붙이며 답하자 그는 나를 놓아 주었다.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니? 키나야."
자수정을 닮은 자줏빛 눈동자에 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 새카만 옷, 새카만 흰자위. 그 새카만 흰자위 때문에 그 눈이 새카맣게 보였다고 한다면, 그는 내가 보았던 창문의 '그'가 맞았다. 그는, 당신은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 보았다.
"당신은 나를 안으면서 만나고 싶었다, 라고 말했으니까요. 내가 당신이 느낀 만나고 싶다는 감정이 만들어 낸 허구였다면, 이건 꿈이 아니라고 말했겠죠. 당신은 이런 허구를 만들어 내면서까지 그러고 싶었던 것이었을 테니까."
이런 상황에 그런 차분한 말이 나오는 나 자신에게 실소를 지어 보이고 싶었다. 어차피 꿈이니까. 곧 나를 데려갈 테니까. 생각 따위 거치지 않고 그저 떠오르는 대로 말을 뱉어 냈다. 그러자 곧 당신은 조금 놀란 듯 하더니 이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키나."
그는 가뿐하게 장미밭에 두 손을 짚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뼈가 그대로 비치는 이목구비는 그가 삐쩍 말라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나도 몇 가지 질문해도 될까요?"
"내가 대답할 수 있다면."
고개를 숙이고 땅을 보았다. 백장미들에 파묻힌 제 맨발이 보였다. 당신도 맨발이었다.
"당신은 누구죠?"
그는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조금 뒤에 짤막한 대답을 내놓았다.
"악마."
"네?"
"디아볼릭. 악마."
놀림받는 거라면 신물이 났다. 조금 화가 났지만 애써 추스리며 되물었다.
"장난 별로 안 좋아해요."
"알고 있어."
그의 시선은 여전히 하늘에 머무르고 있었다. 훤히 드러난 목을 바라 보던 나는 시선을 다시 발끝에 닿는 장미에로 돌렸다.
"나를 알고 있나요?"
나는 당신을 모르는데. 짤막히 덧붙이고는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알고 있어. 너에 대한 것이라면,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어."
사람을 믿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어디까지 진심이고, 어디까지 장난으로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저 말이 온전히 다 거짓인 것은 아닐 터 였다. 그러나 그것을 확인하기에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내가 질문해도 괜찮겠지?"
줄곧 하늘만을 바라 보던 자줏빛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느꼈다.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그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제 시야 안에 보랗게 번져 들어 온다면 자신이 그대로 벌집 마냥 꿰뚫릴 듯한 날카로운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왜 그렇게 그 목소리가 부드럽기만 했는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니?"
*
시간은 흐르고만 있었다. 쏟아지는 비로 차갑게 흐려지는 창문에 비치고 있던 선명하지만 흐릿한 너의 풍경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 비가, 새하얀 눈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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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원 좌표의 변이를 감지했습니다. ]
*
위화감을 느끼는 것이나, 변화 따위는 의외로 매우 쉽게 일어난다. 정작 네 자신이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지 못 할 지라도. 언제나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곳에서, 천사는 가련해 보이는 그 두 손에 차가운 납 총알이 담긴 베레타를 들고 나타나며, 광대는 상냥한 웃는 얼굴로 치장한 가면으로 사람들을 속이며, 어리고 귀여운 척 하며 어른에게 예쁨받는 아이는 항상 그들에게 얻고 싶어 하는 것이 있다. 그 속내를 알아 내는 일이란 살모사의 뱃속에 직접 들어 갔다 나오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았다. 죽은 사람은 죽은 뒤의 풍경을 전할 수 없어 사후세계에 대해 멋대로 꾸며 쓴 공상소설이 나오는 것도 필시 그 이유이리라. 멋대로 단정짓는 것은 무지의 반증이며, 곧 죄였다. 새벽에 대한 무한한 기대감 따위는 땅거미의 너머로 사라졌으며, 꿈은 곧 허상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 안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것이 희망이란 말은 거짓일지도 모르지. 판도라의 상자 안에 형태야 어떻든, 무엇이던 간에, 그들에게 긍정적인 것이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 버린 과거의 사람들이 억지로 희망이 있었다며 끼워 넣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지상낙원은 언제나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열 세 번째 달, 한밤중에 떠오른 해, 1년 366일, 8번째 요일.
날짜, 해. 이런 시간에 속하는 것들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정의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 시간을 몇 시라고 부르는 것일 뿐이지. 정의를 벗어난 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뭐라고 말하지? 비현실적이라고 말하지. 그 무엇도 정확하게 규정되거나 정의되지 않아. 올바르고 어긋나지 않은 남녀관계, 순탄하고 하향세 없는 인생설계. 답이 없는 난제임을 알면서도 답을 요구하는 그 태도에 대해. 자신의 소리 만이 옳다고 들이 밀며 반박 당하면 다수를 대변하듯 목소리를 붙여 타당하게 합리화 하려는 그 움직임을 싫어 했어. 착함? 상냥함? 친절함? 글쎄, 이젠 그 모든 것에 가식이 숨어 있지 않다고는 누구도 확실하게 답하지 못해. 심지어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 조차도. 하지만 너는 상처를 입어서는 안 돼. 그 무엇에도 마음을 내어 주지 말고, 그 어떤 것이라도 의심해라. 비가 내리기 이전에, 항상 먹구름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거다.
다만, 오직 나만은 그 어느 때라도 절대적으로 믿어도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다오.
내가 거짓 투성이인 이 세상의 유일한 진실이 될 테니.
*
어느새 부터 였던가, 비가 쏟아지던 날의 굳게 닫힌 불투명한 창문에 사람의 형체가 비치게 되었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대비되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그 형체가 너무도 가늘고 긴 것이 꼭 뼈만 남은 사람 같았다. 창문에 비친 그는 항상 혼자였다. 목소리는 흐려져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귀를 잘 귀울이면 목소리가 살며시 들려 왔다. 언제나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어쩐지 조금 괴로워 보여서, 늘 마음에 걸렸다. 내가 당신의 아픔을 들어 줄 수는 없을까, 하고 문득 창문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헛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무언가 때문에 끊임없이 고통받고 괴로워 하는 그 모습이 자신과 닮아 있었다. '절대 다수', '논리', '물질적'... '사회'라는 것의 부품에 이골이 났다. 상처는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인간이란 대개 눈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로 자신이 그 광경 앞에 닥친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는 건 머리는 알지만 마음은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당신이 무엇에 이골이 났고, 무엇에 염증이 났고, 무엇에 상처 입었고, 무엇에 괴로워 하는 지 모른다. 하지만 모르기 때문에 알고 싶었다. 그저 '불쌍하다'와 같은 동정에 가까운 감정에 구애되는 것이 아니다. 외면, 외로움, 쓸쓸함. 최후에는 아픔으로 이어져 한평생 나을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마는 극심한 염증으로 생긴 가슴 속의 깊은 동공을 나는 보고 있었다. 탄환이 뚫은 것보다 더욱 크고 깔끔한 구멍을 보고 있었다. 타인은 볼 수 없고, 오로지 자기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동공(洞空)을 볼 수 있었기에, 나와 당신은 닮아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멋대로 생각해 버렸다. 음수에 음수를 더해 봤자 음수가 나오는 것처럼 당신의 동공에 내 동공을 더해 보았자 그저 동공일 뿐이라도, 서로의 동공을 헤아리고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
눈 대신 비가 내리던 12월 31일의 늦은 밤, 여전히 당신은 괴로워 보였다. 처음엔 그저 안쓰러움이나 걱정스러움에 그쳤던 오지랖에 가깝던 감정은 이제 다른 감정들과 사정없이 섞여 들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쓰린 느낌이 맴돌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애정에 가까운 감각이 손끝에 남았다. 왜? 어째서?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정신 질환이 있는 환자로나 보였을 그에게 왜 이리 신경이 쓰이고, 눈길이 가고, 마음이 끌리는 걸까. 어지러운 감정 속에 빗소리가 추적추적 들려 왔다.
ㅡ앞으로 10분 뒤면 새해 1월 1일이 밝아 오는 것으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나, 모두 같은 이야기 뿐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도 적적한 방에 옅고 흐린 누군가의 목소리가 흐르며 창문과 귓가를 척척이 적셔 왔다. 춥다.
혼자, 라는 감각은 미치도록 어리석다. 너무 적으면 답답함에 괴로움을 느끼고, 너무 많으면 외로움에 괴로움을 느낀다. 곁에 있어 주는 이 라고는 방 안을 떠도는 공기 뿐이었던 지난 날들을 떠올리면 이젠 혼자가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감각은 왜 이리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이 추위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이 라면 누구라도 좋았다. 사랑을 받고 싶었다. 타인의 체취에 호흡을 하듯 파묻히고 싶었다. 타인의 체온, 체취, 사랑. 그 모든 것에 갈증이 일었다.
아아, 그래.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이기적이었다. 끔찍할 정도로 자신 밖에 모르는 흉측한 인간이다. 존재에 의미를 가지지 못 한다. 가식적인 웃음으로 채워진, 타인이 만들어낸 '나'는 내가 아니었다. 누구도 제 아픔을 알지 못 했다. 감정을 인정 받지 못한 채 끝없이 추락하고, 추락하고, 추락해 이윽고는, 외톨이가 되었다.
부모님의 목소리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상냥한 목소리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상냥한 척 하던 목소리었다. 그런 걸 사랑이라고 바란 적이 없었다. 텅 빈 제 방 만큼이나 텅 비어 공허한 감정은 차갑고 서늘하기만 했다. 이미 그 누구에게도 불리지 않게 된 자신의 이름은 그 역할을 잃은 지 오래였다. 잊혀진 이름은 무감각하게 변해 버렸다. 그저 희뿌연 유리창 너머 흐리게 비치는, 이름 한 번 불린 적이 없는 자신과 비슷한 타인을 바라 보았다. 이젠 울지 않았다. 울음을 잊어 버리게 될 정도로 감정이 무뎌졌기 때문이었다. 그저 새카만 자신과 대조되는 끝없이 새하얀 유리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새하얀 하늘 아래에 새파란 바다가 있었다. 새파란 바다 위에서 홀로 허우적대고 첨벙대다 그를 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으로도 감출 수 없는 새카만 색의 사람이었다. 나와 같은 색이었다. 아니, 나와 같은 색으로 비쳤다. 내 눈에는 그의 색깔이 그렇게 비쳤다. 덧없는 몸부림에 지쳐 막혀 오는 숨을 추스리려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나를 이 망망대해에서 건져 올려 줄 천사이든, 내가 생명의 위기에 처했다는 점을 이용해 나를 잡아 먹을 악마이든, 심지어는 미쳐 버리고 만 나 자신이 만들어 낸 허구의 구명 튜브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무엇이든 자신을 구해 주기만 하면 된다. 이기적이고, 사악하고, 비열하고, 추잡하게도.
그를 바라 보며 그에게 헤엄쳐 갈 때마다 그를 닮아 갔다. 유리 같은 하늘 아래, 우리가 있었다. 새파란 바다에서 길을 잃었다. 안대로 가려진 두 눈에는 빛 한 줄기 들어 오지 않았고,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심장은 얼어 있었다. 36.5도를 훨씬 뛰어 넘도록 차갑게 변해 버렸음에도 죽는 것 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던 우리들이었다.
ㅡ올 한 해의 끝과 함께, XXX에서 0시를 알려 드립니다.
*
순간 확, 하고 트인 시야 너머에는 또 같은 하얀 장미가 끝없이 늘어져 있다.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의식이 저 지평선 너머로 가 있던 내 몸은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디아볼릭?”
“응, 키나야.”
꿈이었다고 생각한 광경은 꿈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만, 올려다 본 목소리의 주인공은 또 그 새하얀 백발에 자수정빛 눈동자를 하고 검은 옷을 입은 남자였다.
“드디어 네가 나를 불러 주었구나.”
약간 감상에 젖은 듯한 그.
“이름이 정말로 ‘디아볼릭’이에요?”
“나를 내 이름 그대로 ‘디아볼릭 에스퍼’, 라고 부르면 너무 길잖아. 내 이름 일곱 글자를 다 부를 시간을 아껴서 조금이라도 더 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랄까.”
어차피 진짜 이름이 아니니까 다르게 불러도 상관은 없지만, 나는 ‘초능력자’란 말보다는 ‘악마’란 말이 더 맞는 인간이니까. 스치듯 그가 덧붙였다.
“그러고보니, 마지막에 제게 물었던 질문이 무엇이었나요?”
그는 나지막이 답했다.
“잊어 버려.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감정을 감추는 목소리에서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어색하게 흐르는 적막이 싫어 먼저 입을 열었다.
“당신이었나요? 제 칭문에 비치던 사람.”
“창문에 비치다니, 너도?”
“너도?” 란 말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나는 장미를 바라보던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비 오는 날 창문에, 다소 흐릿하지만 하얀 머리에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늘 서 있었어요.”
그는 내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맞춰진 시선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해 버렸다.
“나도, 비 오는 날이면 창문에 네가 비치고 있었어. 굳이 외형을 설명할 필요 없이, 틀림없는 너였어.”
그는 웃고 있었다. 목소리에서 긍정적인 감정이 희미하고 엷게 묻어난다.
“서로 보고 있었단 말인가요?”
“아마 그런 셈이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는 가볍게 덧붙였다.
“언제부터요?”
그는 기억을 되짚는 듯 찬찬히 고민하다 대답했다.
“아마도, 2월 즈음?”
2월 초. 분명 그 때부터 창문에 당신이 비치기 시작했다. 퍼즐처럼 들어 맞는 생각의 물결에 사고보다 먼저 다급하게 목소리가 뛰쳐 나갔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만난 거죠?”
그는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이건 꿈이 아닌 현실인가? 사고회로가 싹 날아갈 듯한 감각에 어지러워져 휘청거린 머리는 다시 그의 어깨를 찾아 갔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묵묵히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도 뜨기 싫다. 그저, 조금 혼란스럽다.
“디아볼릭.”
“응?”
유유히 흐르던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나지막히 대답한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소리를 내며 벌처럼 맴돌았다.
“내 눈으로 본 당신은 언제나 괴로워 보였는데, 이젠 괜찮은 건가요?”
마쳐진 말에 당신은 말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는 딱 질색인데. 내가 또 말을 잘못 꺼냈나. 아아, 당장 손목을 자르고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 헛된 고뇌의 끝에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가 있으니까, 괴롭지 않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보통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질문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 간다. 그러나 나는 묻지 않았다. 아픔에 이유를 묻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가에 대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픔을 머리로, 원인이나 사건에 입각하여 보지 않는다. 그저, 목소리를 들으면 알 수 있다. 그는 내게서 해결책의 제시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힘들고 고된 하루의 끝에 어깨를 두드려 주고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를 던져 줄 사람이, 죽을 듯이 노력했지만 인정받지 못한 제 노력을 인정해 주고 박수를 보내줄 사람이, 제 안에 꼭꼭 숨겨둔 감정에 노크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으로 아픔에, 가슴에 뚫린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에 공감하고 위로와 격려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역시 디아볼릭 에스퍼, 그는 나와 닮아 있다. 체내가 새파란 색으로 얼어 있다. 당신이 무슨 이유로 새파란 색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상냥함과 다정함을 가진 강함으로도 감출 수 없는 아픔이 있어 때때로 약함을 보이며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지는 날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당신도 그 새파란 바다에서 발버둥치다 투명하고 높아서 닿을 수 없는, 그 유리 같은 하늘을 보고 있으려나?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새벽이 시야에 들어 왔다.
“알고 있니? 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뜬금없는 말에 놀란 시선은 그의 눈을 쫓았다. 눈은 새하얀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다만, 흰 머리카락 사이로 비치는 검은 흰자위는 꽤 인상적이었다고 해 두자.
“넌 언제나 네가 할 수 있다고 느끼는 일이라면 뭐든 최선을 다해 열심히 했어. 아무도 그 노력에 찬사를 보내거나, 인정하지 않아도 말이야. 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남들이 알아주지 못했던 그 수 많은 네 노력들에 대해서.“
물론, 내가 아는 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겠지만. 가볍게 덧붙인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쩐지 눈이 조금 가늘어진 듯 보인 것은 착각이었던 걸까.
“너는 1분 1초를 정말 고생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 왔어. 그런데 너는 네가 한 노력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살았잖아? 지금이라도 인정받고, 이해받고 싶지 않니?”
누군가가 너를 이해해 주길 바라잖아.
“너는 참 아름다워. 항상 펜을 쥐고 있었던 탓에 중지손가락에 생겨난 굳은살 마저도 말이야.”
아아, 죽을 것 같다. 죽을 듯이 괴롭다.
“그 모든 것이, 네 노력을 증명하고 있잖아? 마치 백조의 헤엄과 같이.”
왜 이렇게 나에게 잘 해주는 거야? 고작 이런 나 따위에게.
“이제 조금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키나야. 혼자 앓는 소리를 내며 밤새도록 고민하지 않고, 편히 잠들어줘.”
그립고도 부드러운 목소리. 심장 안쪽을 따듯하게 적셔 가는 목소리. 목소리에 귀 기울이면서도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 당겼다.
“지금껏 많이 힘들었지? 고생했어.”
발목을 간지럽히는 백장미의 잎. 아, 약한 자신의 안에 노크 소리가 들려 온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네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그 모습은, 내게 언제나 다시 일어설 힘을 주었어. 그러니,”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입을 열었다 떼기만 수십 회를 반복했다. 약한 모습의 나는 아무도 찾을 수 없게 숨기고 싶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리만치 간단히 찾아낸 것인지. 이렇게 찾아내 버리면,
“이번엔 내가, 네가 쓰러지지 않도록 지키는 버팀목이 되어도 될까? 키나.”
울음이 터져 나오게 되어 버리잖아.
“... 울어도 괜찮아. 수고했어.”
네가 지금껏 얼마나 괴로웠는지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덧붙이고 제 어깨에 기댄 타인의 머리를 차분히 쓰다듬었다. 다정한 손길에 지금껏 참아온 숨을, 비통함을, 아픔을 전부 토해내고, 토해내고, 토해내었다. 슬픔에 찬 숨이 잦아들 때까지, 그는 가만히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따듯하다. 아플 정도로, 괴로울 만치.
“세상 모두가 네게서 등을 돌려도 나는 계속 네 편이야. 약속해.”
아아,
“우리를 비웃는 이 가혹한 세상에서, 보란듯이 함께 행복해지자, 키나.”
녹아 버릴 것 같아.
서로 말하지 않지만 알고 있다. 서로의 가슴 속 깊이 난 구멍을.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었던, 많은 괴로움의 순간이 겹쳐져 만들어진 새파란 구멍을.
새파란 바다를 표류하던 이는 알고 있다. 바닷물이 몸에 닿았을 때의 차가움을.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억지로라도 그 구멍을 채울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서로의 구멍을 채우는 재료로 서로를 택했다. 이것은 사랑이란 이름을 단, 가혹하고 잔인한 세상에 맞서는 투쟁이다. 서로가 미칠 듯이 괴롭고 아프기에 가능한 투쟁=사랑. 서로의 등을 맞대고 서서 서로에게 의존하고 의지하며 세상이 쏜 탄환이 뚫고 지나간 구멍을 메워 간다.
아아, 내가 싫어하는 그 바다보다 더욱 진한 새파란 색이다. 슬프고, 우울하고, 힘들기 때문에 사랑이라니. 아담과 이브라도 된 마냥 사랑하고 의지할 사람이라곤 서로가 유일한데.
두 사람은 구멍이 다 채워질 때까지 본인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백장미 들판을 걷고, 이야기했다. 어제의 날씨 같은 시시한 거라도 좋으니 계속 대화했다. 서로의 목소리가 뇌리에 분명히 새겨지고, 체온이 맞춰질 정도로.
어느새 하늘이 투명히 맑아 있었다.
*
몇 시쯤 된 것일까. 해는 진즉에 저물어 있었고, 이번 밤하늘에는 어째선지 오색 찬란한 별빛이 다 사라지고 파란 별빛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 수록 그 파란 별빛마저 희미하게 흐려져 갔다. 그와 동시에 차츰 자라나는 장미들. 없던 가시가 하나 둘씩 생겨나 발바닥에는 생채기가 가득했다.
“디아볼릭.”
“응, 키나야?”
걸음을 멈춰 선 당신의 앞으로 다가가 당신의 눈을 마주보았다. 나보다 족히 20센치는 더 큰 것 같은 당신의 눈을 마주보려면 고개를 들고 올려다 보아야 했다.
“나는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해 봤어요.”
말을 잇기 위해 떨궈진 시선. 그 눈을 마주 보고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자수정을 닮은 그 빛에 말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이 나를 처음 만났을 때 물었던 마지막 질문이, 방금 기억났어요.”
그 말에 눈웃음을 짓는 듯 당신은 올라간 입꼬리를 내버려 둔 채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대답, 들려주지 않을래?”
살며시 고개를 끄덕인다. 말할 수 있다. 자수정빛의 눈동자에 눈을 맞추고, 살짝 미소지었다.
“사랑해요.”
생에 두 번 다시 없을, 진심을 담은 고백이었다.
순간, 별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별들이 자취를 감추자 장미들이 당신의 키보다도 더 크게 자라나 거대한 덤불을 이루기 시작했다. 검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백장미. 그 가시가 온몸을 덮기 전에, 두 사람은 그저 달렸다. 장미 덤불에 가려서 별들 사이로 유유히 빛나던 달도 이제 더는 보이지 않았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가시가 스쳐서, 알게 모르게 따끔거리고 있다. 손가락이 베여 피가 흘러 나와도 개의치 않았다. 그저 당신을 따라 멀리로, 저 멀리로 도망치는 것에 열중했다. 선혈에서 당신의 냄새가 난 듯한 건 착각이었나?
당신은 내 손을 꼭 붙잡고 걷다 내가 아프지는 않은지, 잘 따라오고 있는 건지 걱정하는 얼굴로 힐끔힐끔 뒤돌아 보았다. 그 얼굴이 비칠 때마다 웃어 보이며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런 상냥함이, 섬세하고 세심한 그 다정함에 이끌려 장미 가시를 밟으며 피투성이가 된 발로 당신을 따라 걸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장미 덤불. 그 안에, 두 사람은 길을 잃었다. 있을 곳을 잃었다. 그저 서로가 이대로 계속 함께 있어도 허락될 곳으로, 그림자도 모르는 곳으로 달리는 것을 계속한다.
사랑 속에 서로의 손을 붙잡고 어둠 속을 빠져 나가려 몸부림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설령 그 결말이, 비극일 지라도.
희미하게 하늘이 일렁였다.
“키나야, 괜찮니?”
다시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내 손을 더욱 꽉 잡고 장미덤불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이젠 발을 딛기가 어려울 정도로 자라나 버린 장미 덤불 사이로 걷기가 힘들어 그의 얼굴에도 생채기가 가득했다.
두 사람을 이곳으로 데려온 기적이 더 이상 두 사람을 허락하지 않는다. 부탁이니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시간을. 조금만 더 우리를 허락해 주세요. 그러나 빗소리 같이 당신은 내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려가. 덤불에 발이 묶이고, 손가락이 흩어져서 당신을 잡을 수 없어.
“디…”
흐릿해져 가는 시야,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 그 안에, 당신이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힘겹게 나를 향해 걸어 오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요!”
그 말 한 마디에 놀란 듯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난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직감적으로 나, 그리고 당신도 드디어 이별의 시간이 왔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조금 쓰게 웃음지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아까보다 차분해진 그의 발걸음이 들리자 덤불이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다.
드러난 것은 끝없이 펼쳐진 하늘이었다. 그리고 그 하늘의 양 끝에 놓인 두 개의 새파란 바다. 마주본 두 사람. 서로의 등 뒤에 각자의 파랑이 기다리고 있다. 아프지만, 슬프지만, 빨갛게 물든 하늘. 해가 지려고 하고 있다.
“예쁘다.”
“뭐가?”
하지만 해는 다음 날이면 다시 떠오르니까, 괜찮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괜찮아. 밝은 모습일 수 있어요. 애써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당신의 눈동자.”
뻗은 손이 뺨에 닿았다. 자수정빛 눈동자 안에 한가득, 빨간 하늘이 담겨져 있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새하얀 머리카락이 손등을 스치며 춤추었다. 대답 대신 미소 지은 당신의 얼굴은 무슨 뜻이었을까. 마냥 좋지 만은 않았다. 미소가 아팠다.
“정말 사랑한단다, 키나. 꼭 기억해줘.”
흐릿해져 가는 의식, 떨어져 가는 손. 그럼에도 당신의 목소리가, 눈동자가, 표정이, 또렷이 새겨졌다.
“넌 내가 아니더라도 사랑받고, 내가 제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의 손이 완전히 떨어지고, 이제 눈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희미해져 가는 당신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처음이었다. 그렇게 진심으로 밝게 웃어 본 것은. 나는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시야가 새하얗게 변질된다.
*
안녕히, 잘 가.
어디로 향해 가는 지도 모르는 채로 발걸음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었다. 날개 없는 꿈은 하늘을 쫓아, 부서진 밤은 새벽을 쫓아, 겹쳐진 수백의 사랑스러움에 눈을 감고. 다시 만나자는 말에 의미란 있는 것이었을까? 어차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 할 것이 분명했는데. 그럼에도 내일을 기대하게 되어 버렸고, 앞으로를 기대하게 되어 버리고, 슬픔을 억지로 재워 버리고.
사랑하는 나의 소녀야, 나는 내일도 너를 만나고 싶어. 내일도 네가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네 새하얗고 보드랍고 상냥한 손을 내일도 잡고서 걷고 싶단다. 신데렐라는 자정에 마법이 풀리지. 그러니 자정 전에는 돌아 오라고 하셨는데. 미안해요, 신비한 요정 아주머니. 저는 도저히 자정 전에 돌아올 수가 없을 것 같네요. 마법이 풀리고, 이제서야 드러난 재투성이의 초라한 저를 저 아름다운 공주님이 보고는 나를 경멸한다 하더라도 저는 여기에 더 있고 싶어요.
발걸음이 느린 신데렐라. 제 이성과 마음을 저울질하며 애써 느리게 걷는 추한 신데렐라.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나의 사랑은, 그래. 한없는 짝사랑으로 다시 변하겠지요. 원래 그러했듯. 차라리 공주님이 그 사랑스러운 손길로 내 목을 졸라 준다면 좋을 것 같네요. 나의 마지막을 사랑하는 그 소녀의 손길로 장식합니다.
아아, 이 얼마나 성대하고 성스럽고 우아한 최후인가! 그 소녀를 알기 전의 나는 죽어 있었으며, 그 소녀를 알고 나는 무덤에서 관 뚜껑을 열고 재로 눈을 검게 채우며 흡혈귀 마냥 기어 올랐으니, 그 소녀가 이 저주받은 두 눈에 영원히 비친다면 나는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작은 창문 틈새로 비치는 한 줄기 달빛에 염원의 파편을 담아 내 안에 얼마 남지 않은 행복을 그 소녀에게 가져다 달라고, 소녀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로 만들어 달라고 소원하며 새벽을 눈앞에 둔 채 무릎을 꿇고 잠이 들었습니다. 피가 통하지 않은 다리는 매일 욱신거렸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나의 존재 조차도 모를 그 소녀의 행복을 바라고, 설령 마음이 닿지 못 한다 하더라도 셀 수 없이 사랑한다 말하고, 이윽고는 투명한 창 너머로 비치는 체리빛의 작은 소녀의 입술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목 너머로 피가 아른거렸고, 갈증에 피부가 갈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소녀를 만났습니다. 내가 지난 나의 20년 가까이의 생애 동안 그토록 욕설을 퍼부었던 신은 이윽고 나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나는 소녀에게 사랑한다 말할 수 있었고, 소녀는 울었습니다. 내게 똑같이 몇 번이고 사랑한다 말해 주었습니다. 따듯한 소녀의 눈물 방울이 내 가슴에 살며시 와 닿자 상냥함을 느꼈습니다.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슬픔을 껴안을 수 있을 정도의 다정한 따듯함. 나는 그런 따듯함으로, 그런 상냥함으로 소녀를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 소녀가 그렇게나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귀엽게만 보이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신비한 요정 아주머니, 기적은 한 번 뿐인 것이겠죠?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나는 괜찮아요. 나를 위해 나의 여리고 작은 공주님에게 이기적인 요구를 할 수는 없어요. 공주님은 그대로, 화려하고 찬란한 광채를 내는 성의 빛 아래서 오색빛 가득한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걷고, 우는 일이나 화내는 일 없이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게, 계속 그렇게만 살아가 준다면 나는 그걸로 한평생 욕했던 그 신에게 무한한 감사를 바칠 수 있습니다. 그녀의 그 작은 손길로 내 목을 조르는 것도, 내 심장을 갈라 찢는 것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공주님, 달이 흐르는 강보다도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 주소서.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가 주소서. 나의 종교, 어여쁘신 그대. 애써 눈물을 삼키며 돌아 서는 그 모습 마저도 참 아름다워라. 그대는 우는 얼굴도 예뻐요. 그렇지만 그대는 웃는 얼굴이 우는 얼굴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답고 빛나요. 그러니 부디,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요. 자정이 되어서도 이 기적이 끝나지 않았다면, 자정이 지나 밝아 오기 시작한 새벽녘에 너와 함께 서 있을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네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
*
영어의 알파벳 중 하나인 'U'는 'You'의 약자로 쓰일 때가 있다. 'U'의 형태는 꼭 'I' 두 개 사이에 둥그런 다리를 하나 놓은 것 같지 않나? 'I'의 뜻은 '나'. '나'와 '나'. 즉 'I'와 'I'는 '나'가 두 명이 존재함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사이에 존재하는 둥그런 다리. 이것은 '나'와 '나'를 이어, '자신'과 '자신'을 이어, '자신'과 '타인'이 이어지고 존재하는 관계를 의미한다. 'U(=You)'의 뜻인 '너'는 '나'가 두 명 이상 있어야지만 존재할 수 있다. 이는 곧 자기 자신인 '나'가 아닌 '나(=타인)' 없이는 '너'라는 개념이 존재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이 그리도 사랑했다.
당신은 또 하나의 'I'. 당신은 나의 처음이자 끝. 출발역이자 종착역. 알파이자 오메가. 당신은 아름다운 나의 신. 당신과 손을 잡자 내 안에 'U'의 존재가 생겨났다.
그러나 내 안에 'U'를 만들어 준 당신이 영영 사라지고 만다면?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당신을 알기 전까지 나는 죽어 있었는데. 당신이 없다면 사고도, 감정도, 언어도 필요치 않는데. 아프고 싶지 않아. 괴로워지고 싶지 않아.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 내가 숨을 쉬는 이유가 되어 버린 당신이 내 숨을, 내 폐를, 내 혈관을 막아 버릴 거야. 당신이 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유일한 타인이니까. 좋아하니까, 사랑하니까.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 사랑한다는 말로도 다 표현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
파도가 쓸려와 바닷물이 발목까지 빈틈없이 나를 채우고 밀려나는데, 나는 그 형태 없는 파도를 잡고 싶었다. 나를 이렇게 간단하게 채워 버리고 그냥 떠나가지 말라고, 파도의, 당신의, 팔을 잡고 싶었다. 그러나 손에 닿았다 싶으면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려 내 곁을 떠나는 당신이 너무나도 나를 괴롭게 만들어서, 나는 그대로 파도 속에 뛰어 들었다. 옷이 젖는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당신의 체취로, 당신의 체온으로, 당신의 목소리로 제 종아리, 허리, 가슴, 목, 머리 할 것 없이 모두 당신으로 빈틈없이 채우고 싶었다. 빈틈없이 채우고, 다시는 당신이 내 안에서 밀려나지 않게 하고 싶었다. 당신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게 된 나는 내 모든 것을 지워도 좋으니 당신의 곁에 있고 싶었다. 사랑하는 육지의 왕자를 만나기 위해 목소리를 버린 인어공주. 비록 종극에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마는 것일 지라도,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한 여름 밤의 꿈 같은 지금이 지나고 당신을 기약 없이 기다려야만 한다면, 나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당신을 만나러 목소리를 버리고 얻은 다리로 달려 가리라. 그러니,
부디, 나를 기억해 주세요.
*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 왔다. 비가 그치고 해가 떠올라 창밖은 온통 빛나고 있었다. 단지, 이 아침에는 당신이 없다는 것이 나를 그리도 슬프게 했다. 햇빛은 따스했지만 당신의 따스함처럼 부드럽지 않았다. 나는 당신의 온기가 햇빛에 묻혀 저 너머로 사라질까 두려워 사라진 당신의 온기를 기록하고 있다. 체온이라 부르기에는 마음이 아팠다. 체온이라는 말에는 말로 다 하기 힘든 슬픈 온도가 만져졌기 때문에.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런 기적은 두 번 다시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을. 그래도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당신을 만나고 싶다. 당신의 따스함에 화상을 입고 싶다. 그러나 당신을 생각하기에, 내게 주어진 시간은 턱도 없이 부족했다.
당신을 볼 수 있었던, 빛나는 유리 같은 새하얀 하늘과의 경계선이나 다름이 없는 창문. 그 창문을 받치고 있는 창틀에는 늘 온갖 벌레들의 송장이 쌓여 갔다. 그들을 종족으로서가 아닌, 이 세계를 이루는 존재 중 하나로서의 이름, 생김새, 사고, 그 어떤 것도 알지 못 했던 누군가들이 너덜너덜하게 스러져 갔다. 이제는 너무 무뎌져 아무 것도 느낄 수 없게 된, 차가운 창틀.
오늘도 누군가의 무덤이 된 창틀 위에서, 오늘도 누군가의 피로 흐르는 새파란 바다 위에서, 나는 여전히 유리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 겨울, 유리 같이 깨끗하고 투명하던 하늘.
그는 내가 그리도 올려다 보았던 유리 같은 하늘이었다.
질리도록 새파란 하늘이었다.
아아, 보고 싶은 당신의 뒷모습이 멀어져만 가.
저만치 멀리, 아득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