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코코×은

요 사이 신경 쓰이는 것이 생겼다. 그 때문에 자주 허공을 응시하게 되어버렸다. 정확히는 그 너머의 무언가를 본다. 애석하게도 주위 사람들은 그게 보이지 않는 모양인가 본지 그 덕에 난 언제나 이상한 취급을 받고 있다. 눈에 보여선 안 될게 보이는 것 아니냐, 흉물스러운 소리 그만해라. 뭐 그런 얘기가 몇 번 오갔던 것 같다. 개의치 않았다.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이는 것은 맞는 말이었으니까. 다만 그게 적어도 부모님이 걱정하는 귀신은 따위는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소리 없이 넘어가는 옛날 영화의 스크린을 보고 있는 느낌. 타인의 삶을 엿보고 있는 듯한.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다. 내 삶이 누군가에게 엿보여 지고 있다면 난 망설임 없이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다.

내 삶은 어디 가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을 만큼 당당하지 못했다. 어느 사람이 흑백이 없겠는가 싶냐마는, 적어도 내 기준에서 내 삶은 내가 죽을 때 까지 바닥을 찍고 있을 게 분명했다. 외부적인 것과 관계없이 내 자체가 너무 독보적으로 쓰레기거든. 손톱을 깨물었다. 앞니가 시렸다.

무엇보다 우스운 점은 내가 보고 있는 사람의 인생도 나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거다. 알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의 생활모습뿐이지만, 타인의 그를 바라보는 시선 저 너머에서 느껴지는 경멸과 공포심에서 깨달았다. 저 사람은 나와 동류다.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우울감도 마찬가지로. 무언가 있었다. 사람 간의 접촉을 끊어놓는 칼날 같은 것이.

 

‘솔직히 그래서 좀 거슬려.’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로 시선에 머무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몸에 무언가 문제가 있으니까 그렇겠지. 나처럼. 노곤히 고개를 벽에 기댔다. 그의 몸이 간혹 보랏빛으로 물드는 것과 관계가 있을까? 불이 꺼진 방에서는 그의 모습만 보였다.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곤란한 얼굴로 손사래를 치는 그가 퍽 애처로워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몇 번 허공을 휘저은 적도 많았다. 내가 원하는 대로는 되어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를 경멸하면서도 그를 동경한다? 사랑한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래, 얼굴은 상당히 반반했다. 지나가다가도 헉, 하고 뒤를 돌아볼 것 같은. 남자인 내가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말은 다했지. 아마 그게 인기의 비결인 것 같았다.-본인은 상당히 곤란해보이지만-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날카롭지도 않으니 여자들이 좋아할 법하다. 그러다가도 그가 무어라 말만하면 달라붙던 여자들이 소스라치듯 놀라 거리를 두니. 썩 유쾌한 장면은 아니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외모와 그의 생활뿐인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참 우습다. 가식으로 들어찬 삶이 허망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던가? 그와 되도록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졌다.

 

 

하루가 멀다 이런 그를 보고 있는 내가 이상한 건가. 이 끝없는 삶에 지쳐 헛것이라도 보이기 시작한 건가. 정말로 그는 내가 만든 환상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조금 슬프겠다. 나는 그를 보고 있는 것으로 삶의 위안을 얻고 있으니. 아님 위안을 얻는 데에만 의의를 두는 게 좋을까. 그가 실존하는 인물이든 내가 만든 환상이든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서 위안을 얻고 있다. 이건 사실이다. 됐다. 끝. 눈을 감았다.

그의 이름이 알고 싶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 저가 생각해도 이다지도 꼴불견이다. 환상 같은 것에 사랑이라도 느끼는 것인지. 아, 사실이라면 정말 처참하겠다. 또 무의식 적으로 뻗어냈던 손을 거뒀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래도. 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 없나.

나라면 그가 무슨 치부를 가졌든 간에 그를 사랑해 줄 수 있었다. 저 여자들과는 달랐다.

오만에서 비롯된 자기위로다. 내가 지금 저지르고 있는 모든 것들이.

쓰레기가 어딜 가나.

 

 

벌써 12월의 막바지다. 1년 동안 무얼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의 생활 정도. 주변사람들이 나를 닦달하는 모습은 뒤이어 떠올랐다. 올해도 부질없는 생활 감사합니다. 신께서는 언제 나를 데려 가시려나요. 침대 위, 옆으로 누워 어두운 방안을 응시한다. 딱 내가 살 수 있는 공간 안에 그도 있다. 어쩌면 없을 수도. 눈을 감았다. 부디 신년에는 이 쓰레기를 자극시킬만한 일이 일어나도록 해주십시오.

올해 마지막 기도였다. 눈을 감았다. 졸음이 쏟아지는 건가. 바다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깊이, 심연으로 가라앉아. 내 의식이 아득해 질 즈음 빛이 들어찬다. 너무나도 눈이 부셔 눈을 떠보면, 익숙한 듯 나도 모르는 곳에 앉아있었다. 꿈인가? 손바닥 끝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 시선 끝에는 그가 있었다. 그도 날 보고 있었다. 엇갈린 시선이 아니다. 내 너머의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날 보고 있었다. 오롯이. 나만을. 둘만 남은 곳에서. 무슨, 상황이지?

 

“아.”

“아…?”

 

그와 나의 시선이 교차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말을 뱉어야 할까?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다 아래로 떨어졌다. 하고픈 말은 많았다. 단지 무서웠을 뿐.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현실인가. 이마를 짚었던 손바닥을 곧장 내려 볼을 꼬집었다. 익, 꼬집은 볼이 홧홧했다. 환상이 아니었다. 내가 만든 환상이 아니었어. 무언가의 벅차오름에 목에서 사람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 아. 하고 뚝뚝 끊기는 짐승 같은 멍청한 소리만.

그는 이 상황에도 나름 다소곳한 태도를 보였다.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건가. 더욱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조심스럽게 다가오던 그는 나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둔 채 입을 열었다.

 

“이름, 물어봐도 될까?”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일이었는데. 가슴 속에서부터 무언가 울컥하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피라도 토하려나. 심장을 뱉으라면 뱉을 수도 있었다.

평소 사람을 대할 때 튀어나오는 퉁명스러움을 뒤로 감췄다. 은, 은이에요. 그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언제 봐도 예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내 이름을 되뇌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내 이름은 코코야.”

 

오랜만에 자기소개하려니 조금 어색하네. 그가 제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산만한 덩치치곤 귀여운 이름이다. 그는 허리를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과 다정한 말투. 부드러운 목소리. 뭐하나 떨어질 것 없이 완벽한 남자였다. 이제야 그 입이 떡 벌어지는 인파가 설명되는군.

자기소개를 하고 난 뒤 다시 정적이 이어졌다. 뭐라 말을 하긴 해야 할 텐데. 여태까지 당신을 지켜봐왔습니다. 이런 건 너무 스토커스럽다. 역시 시치미 떼는 게 좋을까. 그만큼의 인고를 견디며 그를 만났는데? 고민은 고민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번에도 먼저 입을 뗀 건 그 쪽이었다. 아무래도 우리 둘 밖에 없는 것 같은데, 조금 걷지 않을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리 없다. 끝나지 않는 길을 걸을 동안 그와 나는 많은 대화를 나눌 것이다. 여태까지 기다려왔던 만큼. 지금 그의 손을 잡아도 될까. 손가락 끝이 움찔댔다.

그의 목소리, 그의 이름. 앞으로 계속 이렇게 같이 지낼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와 있을 수 있는 시간, 단 하루. 오랜 시간 삶을 살아온 인간 아닌 괴물의 감이다. 이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꿈에 그리던 오늘의 시간이 끝난 뒤에도 그를 계속 예전처럼만 지켜볼 수만 있다면 아쉽지 않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오늘 같은 일이 다시 한 번 일어날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영문은 모르겠지만, 감이다.

세상은 있을 수 없는 일이 가득 일어나는 곳. 그와 나의 만남만 비롯하여도 그렇다. 그러니 조금만 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도록. 신이시여.

그의 손을 꽉 잡았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