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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토미네 키레이×코토미네 루리

본래 크나큰 상실감이 불러오는 것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다. 우울함, 슬픔, 절망, 무기력감,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하지만 설마 환각까지 일으킬 거라고 상상한 적은 결코 없었더랬다. 근래 1년 간 우연히 발견하곤 하는 그리운 모습을 알기 전까지는.

처음에는 교회에서. 그 다음은 추억을 나눴던 거리에서. 거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이제는 번화가가 된 거리에서도. 후유키 시 안에서라면 그리 어렵지 않게 마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치 자신은 보이지도 않고 자신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처럼 그저 스쳐갈 뿐이었다. 혹시나 싶어 먼저 말을 걸어 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사라지기 전에 하다못해 만져보려고 뻗는 손은 언제나 허무하게 허공만 갈랐을 뿐이다. 그야말로 거짓말처럼 생생했고, 거짓말처럼 그대로였고, 거짓말 그 자체였다.

그런데 만약, 지금 눈앞에 애타게 만들었던 그 상대가 있다면 이 상황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게다가 자신은 환각이 아니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선명한 목소리와 현실감 넘치는 감촉까지 가지고 있다면?

 

“키레이, 아가?! 정말 너니?!”

“……너는, 설마.”

“아가! 아아, 이게 꿈은 아니겠지!”

 

코토미네 키레이는 이런 영문 모를 상황에 절찬 인상을 구기는 중이었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을 맞을 때 영문 모를 현기증이 돌연 덮쳐오는가 싶더니, 이제는 자신이 아는 누군가와 닮은 여인이 제 얼굴을 더듬고 있는 게 아닌가! 본래 키레이가 아는 ‘코토미네 루리’는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 머리 길이는 좀 더 짧은 편이었으며 숨길 수 없는 명랑한 기색의 소녀였다.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허리까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으며 묘하게 슬픈 기색을 띠고 있었다.

키레이 역시 종종 멋대로 보였다가도 어떨 땐 보이지 않는 존재 때문에 골치를 앓던 참이었다. 자신이 아는 소녀와 닮은 여인은 어딘가 쓸쓸해보였다. 처음 말을 걸었을 때는 큰 용기가 필요했지만, 돌아온 건 실망뿐이었다. 1년 간 그저 헛것이라고 치부하며 어영부영 넘겼던 것이 이렇게 갑작스러운 현실로 들이닥친다면 제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는 것이었다.

 

“머리가 많이 짧은 걸 보면……역시 다른 곳의 그 이구나. 괜찮아. 무서워하지 말렴.”

“무슨 소리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설명해라, 여자.”

“여자……! 세상에나! 네게서 그렇게 불리는 날이 또 올 줄이야!”

“……나를, 아는 건가?”

 

설마. 그럴 리가.

키레이는 속에서 싹 트기 시작한 확신을 몇 번이고 자르려 했다. 본직이 수녀라면 수녀복을 입고 있는 건 당연하다. 머리색이 일치하는 건 우연에 불과하다. 머리는 누구나 땋을 수 있다. 눈이 저렇게나 붉은 건……….

 

“당연히 알지 않겠니. 나는 코토미네 루리니까. 알면서도 질문하는 건 질문을 듣는 이에게는 잔혹한 거란다, 아가야.”

 

내내 부정하고 싶어 했던 정보가 현실이라는 이름의 형태를 취했다. 키레이는 목에 건 십자가가 흔들릴 정도로 격렬하게 좌우로 고개를 흔들었다.

 

 

“……헛소리를. 웃기지 마라. 내가 알고 있는 그녀와의 차이가 너무나도 확실하지 않나.”

“이걸 설명하기는 힘든데. 나도 지금 혼란스러운 상태라서 납득시키긴 힘들겠지만 들어주겠니?”

 

루리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여인이 키레이의 손을 쥔 순간 키레이는 본의 아니게 입술을 깨물었다. 시체라도 만진 것처럼 소름을 돋게 하는 차가운 손도 자신이 아는 소녀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나는 너와는 다른 시대,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의 흐름에서 사는 사람이란다.”

“……그래서?”

“아마 네 입장에서 볼 때의 나는 십수 년 후의 코토미네 루리. 그리고 너는 내 입장에서 볼 때의 십 수년 전의 코토미네 키레이라는 뜻이지.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라고 생각해도 되겠구나.”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너도 내가 겪었던 것처럼 환각이라고 생각했을 이상한 경험을 했을 텐데. 그래도 못 믿겠니?”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만질 수도 없지만 눈앞에는 존재하는 일렁임을 떠올렸다. 키레이는 여인의 지적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가. 내 말을 믿으라는 소리는 하지 않을게. 하지만 지금 이 현상이 벌어진 현실만큼은 일단 믿어야 하지 않겠니.”

“…그건, 그렇군. 있을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벌어진 이상 어쩔 수 없겠지.”

 

그 말 한 마디만으로도 진심으로 기쁜 기색을 표하는 천진난만한 여인을 보고서 어떻게 성직자의 신분으로 험하게 내칠 수 있을까. 더군다나 키레이 자신이 아는 그 소녀의 미래라면 매몰차게 대하기가 더욱 힘들기만 한 과제인 셈이었다.

루리는, 루리라고 자칭한 여인은, 키레이의 손 위에 새겨진 령주를 마치 아이의 뺨을 보듬듯 더없이 애틋한 손길로 어루만지고 있었다.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체온임에도 그 순간만큼은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따스함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여자. 한 가지 질문해도 되나?”

“응? 마음대로 하렴. 네가 하는 질문이라면 내게는 언제나 달콤하지.”

“내가 환각이라고 생각했던 너는 항상 혼자 지내는 사람처럼 멍하니 있거나 입을 다물 때가 많았다. 가끔 내 쪽을 쳐다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더군.”

“아, 맞아. 내게도 네가 보이기는 했지만 만지지도 못하고 네 목소리도 못 들었는걸. 너도 그랬구나.”

“……네가 만약 네 시대의 나와 같이 있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요컨대 키레이의 질문은 ‘그 시대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건가’였다. 루리는 검지를 입가에 대고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건, 거짓말을 생각할 때의 버릇이었고 제일 가까운 곳에서 그 버릇을 지켜봐오곤 했던 건 키레이였기에 얄팍한 생각 따위는 손쉽게 알 수 있었다.

 

“거짓말이라면 하지 않는 게 이로울 거다.”

“응? …이런…, 키레이 아가는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르다니까.”

 

이 순간, 키레이는 1년간 봐왔던 허상 속의 웃음 중에서 제일 씁쓸해보였다고 판단했다.

 

“없어.”

“……뭐라고?”

“그러니까, 없다고. 내가 사는 곳의 너는 이미 죽었단다. 불에 타고 남은 유해라면 남아있었지만, 토오사카네 꼬마 아가씨가 가르쳐줬어. 찔러놓고 태우기까지 하다니! 죽이려면 철저하게…같은 거였을까. 역시 왕자님은 달라.”

 

그녀가 말하는 왕자님이 도대체 누굴 뜻하는 건지. 어째서 저쪽 세상의 자신은 찔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불길에 타올라야 했는지. 지금의 키레이로서는 그걸 알 방도가 없었다. 알게 되려면 적어도 십수 년은 더 있어야 할, 설령 십수 년이 흐르더라도 루리가 살아왔던 미래대로 걸을 거라는 보장도 없는 상태임에도 루리는 거리낌 없이 그리고 아무런 설명과 배려도 없이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뿐이었다.

 

“내가 죽을 만한 짓을 했던 건가?”

 

답지 않을 정도로 맥이 빠진 목소리였지만 그런 의문이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저 일생일대의 답을 찾아 헤맨 것뿐인데 그 끝에 돌아온 게 오로지 죽음이었다면 그 누구라도 허무함과 허탈함을 느꼈으리라.

 

“글쎄. 그런 건 나중에 목숨을 걸고 성배를 얻으면 그 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네가 정말로 루리라면 알고 있을 텐데. …네 시대의 나라면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이 자리의 코토미네 키레이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 애당초 성배를 고작 그런 시시한 소원에 쓰는 건 옳지 못한 행위다.”

“아~아, 역시 그렇게 나올 줄 알았어. 이 고지식함도 그리웠다니…까!”

 

급작스럽게 고개를 치켜든 그녀는, 언제 우울했었냐는 듯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난 1년 간, 그리고 이 짧은 순간동안 봤던 모든 우울함은 전부 날아간 것처럼. 그녀의 감정 포장은 언제나 그러했듯 시간이 지나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강아지가 조금 성숙해졌다고 해도 주인을 향해 꼬리를 흔드는 건 변함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됐어! 됐어! 전부 다 때려치워야지! 역시 ‘살아있는’ 너에게 이런 우울한 이야기만 해봤자 도움 될 건 하나도 없어!”

“루리……?”

“자, 어서 일어나렴! 오늘 같은 밤에는 우선 이 기적 같은 일에 감사하며 네가 믿는 신에게 기도를 드려야지. 그리고 이 기적이 끝날 때까지 더없이 짜릿한 쾌락에 취하는 게 최고의 선택지란다!”

 

죽었다 깨어나도 내가 살던 곳의 네가 가르쳐줬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차오르는 생각을 오로지 목구멍 안에서만 굴리고 삼킨 루리는 지금 그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행복에 겨운 평범한 여인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삐딱하게 기대어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던 키레이를 강제로 끌어당긴 루리가 첫 목적지로 삼는 곳은 후유키 교회였다. 신을 향한 기도라면 그 어디에서 하더라도 상관이 없었겠지만 그곳은 1년 전 처음으로 세계 너머에서 생활하던 서로의 모습을 목격한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거주지이며, 그들의 성스러운 장소이며, 그들만을 위한 쾌락의 요람이었다. 그렇다면 그곳으로 향하는 건 루리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다. 환한 달빛의 베일을 뒤집어쓰고 키레이를 이끌며 달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유난히 더 창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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