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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이 사츠키
“우리 뭐 하기로 했어?”
“아, 맞다. 너 그날 대회였지. 같이 점심 먹고 오락실 가서 게임을 하고 저녁 먹고 노래방 가고 헤어지기로 했어.”
“그거 평소랑 같지 않아? 뭐야. 올해 마지막 날을 똑같이 보내는 건가. 하아…”
“아니지. 항상 올해 마지막은 각자 행사 때문에 바빴으니까 오히려 반대 아냐?”
“그런가…”
“그런 거지.”
애인도 없는 애들끼리 모여 올해 마지막을 함께 보내기로 했다. 우울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코우지마와 다르게 옆에 있던 친구는 어째서 코우지마가 자신과 함께 올해 마지막을 보내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운동부 중 팬들에게 잘하기로 소문이나 인기가 많은 코우지마 치아키가 어째서 여자친구도 없이 우중충한 남자들의 모임에 합류하게 되었는가.
이유를 물어도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을 뿐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대답을 할 뿐이었다.
짝사랑하는 여학생. 코우지마 치아키 입에서 짝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이야. 마음만 먹으면 여러 다리를 두고 사귈 수도 있는 조건을 가졌음에도 코우지마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사귄 횟수 0회를 기록 중인 모태솔로였다.
자기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며 지내던 코우지마에게서 어느 날 뜬금없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다.
분명 우리 학교 학생이라며 그 여학생이 누군지 궁금해 학생회에 있는 친구에게 물어봐도 그런 여학생은 없다고 대답을 했다. 결국, 본인에게 물어보니 코우지마가 그 여학생이 옆에 있어도 만질 수 없고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는 말을 했을 땐 현실 세계에 좋아하는 사람이 없으니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상상 속 여친인가하고 위로를 해준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코우지마는 어째서인지 화를 냈지만 말이다.
“있잖아, 코우지마. 네 상상 속 여친 말인데…”
“상상이 아니라니까?”
“그래. 네 눈에만 보이는 그 여학생 말이야.”
“사츠키는 분명 우리 학교 학생일 거야.”
그리고는 혼자서 중얼중얼하는 코우지마를 보면서 실수했다고 하면서 그만두게 하려다 진지한 표정의 코우지마를 보고는 별일 아니겠지 하고 내버려두기로 했다.
“사츠키…”
코우지마는 누군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지금도 눈앞에서 자신의 친구들과 대화 중인 여학생을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한다. 꿈인가 싶은 알 수 없는 현상, 환상이 눈앞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 초부터 보였던 이 환상은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에게만 보일까. 코우지마는 눈앞에 보이는 먼지를 손부채 질로 날려보냈다.
토오 학원 교복을 입고 있는 그 여학생은 우리 학교 농구부 부원으로 일하고 있었고 이름은 모모이 사츠키라는 이름이었다. 이름까지 알고 있는 그 여학생이지만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고 현재 코우지마가 다니는 토오학원에 다니지 않았다. 분명 입고 있던 교복은 토오학원 교복임에도 익숙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고 있고 지금도 내 옆에서 다른 친구와 함께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음에도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다.
공원입구 간판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걸어가다 옆에서 옷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그대로 뒷걸음질 치다가 넘어지려는 몸을 간신히 세웠다. 눈앞에 사람의 정수리가 보여 다시 몇 걸음 뒤로, 그러다 제 잘못임에도 불만을 가지고 누군가하고 얼굴을 살펴보려니 친구가 옆에서 이마를 찰싹 때린다. 불만의 시선은 친구 쪽으로 옮겨갔다.
“앞을 못 본 네 잘못이야.”
“……. 네. 죄송합니다.”
친구 쪽으로 고개를 숙이니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앞에 있던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다른 곳으로 갈까 하고 옆으로 피해서 가려는데 이번엔 팔을 붙잡혔다. 떼어내려고 손등을 감싸 잡았는데 그 위에 올라온 손에 또다시 손을 올렸다. 장난하는 건가.
“죄송한데 놔주셔야…”
“31일과 1일 사이엔 당신이 보는 평행세계의 사는 그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어요. 32일이라는 날짜를 꼭 기억해두세요.”
“네?”
평행세계라니… 이 여자는 판타지를 좋아하는 걸까.
코우지마는 자신의 옆에 보이는 한 사람이 걸렸지만 이 사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장난하는 건가 싶어 화가 났지만 일단 상대방이 여자니까 하면서 화를 억눌렀다. 이 여자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다. 날 놀리는 거다. 내가 헛소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한 친구들이 자기들끼리 짜고 팔을 붙잡고 심각한 얼굴을 연기하는 여자를 이용하여 장난치는 거다. 어딘가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코우지마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본 친구는 옆에서 검지로 허리를 꾹 찔렀다. 히이익하고 이상한 소릴 내면서 옆으로 피했다.
덕분에 긴장감은 사라진 코우지마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주먹 쥔 손으로 입을 가린 뒤 헛기침을 두어 번 한다. 가자는 친구의 말에 알겠다며 여자의 손을 뿌리치듯 떼어냈다. 원래 여자에게 강하게 대하지 않는 코우지마였지만 여자의 말이 코우지마를 화나게 만든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라.
여자는 포기한 듯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고 점점 멀어지는 코우지마와 친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둘이 사람들의 사이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듯 한참 동안 같은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31일이 되자 친구들과 함께 보내고 밤늦게까지 시간을 보냈다. 계획대로 패스트푸드점에서 점심식사 후, 오락실로 가서 각자 또는 팀을 짜서 게임을 했다. 더 놀고 싶었지만, 사람이 많은 관계로 사람이 없을 만한 가게로 들어가 대충 배만 채우고 밖으로 나와 바로 옆에 있는 노래방으로 갔다가 인제야 헤어지고 친구와 둘만의 시간이 되었다.
늦은 시간에 주변에 커플들이 많아서 그런지 왠지 모를 오붓한 분위기에 조성이 되니 친구와 코우지마는 서로를 절대로 쳐다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걸었다. 몇 시일까. 지나가다가 편의점 안에 있던 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니 12시가 넘었다. 새해구나. 코우지마는 길게 숨을 뱉어냈다.
“사츠키랑 마지막 날을 함께 보내고 싶었는데…”
“보내면 되잖아?”
“무슨 소리야. 너 사츠키가 상상 속 여자라고 안 믿었잖아.”
“상상이라니 실제로 있잖아. 네가 좋아하던 우리 학교 농구부 매니저 모모이 사츠키 이야기 하는 거 아냐?”
코우지마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해서 그런 건진 몰라도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위로를 해주는 친구가 고마웠다. 코우지마는 짧게 숨을 뱉어내며 웃었다.
“참, 나. 어이가 없어서… 그리고 1월 1일은 가족들하고 보내야지.”
“오늘 12월 32일이잖아?”
“아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32일이 어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을 보고 주머니에서 꺼낸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어째서인지 32일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도 12월에 32일이라는 날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자신의 폰이 고장 난 거라고 친구의 폰을 빼앗아 확인했다. 잠금화면이 걸려있지만, 시간은 확인할 수 있으니 신경은 안 썼다.
큰 숫자로 32라고 적혀있는 화면을 보며 손에 힘이 빠져 폰을 떨어뜨리려는 걸 다시 꽉 잡았다.
“뭐야, 이거… 32일이라는 게 언제 생긴 거야?”
“너야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32일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달력 만든 사람한테 뭐라 하던가… 그 누구였더라…”
달력을 만든 사람을 떠올리려다 모르겠다고 소리치는 친구 쪽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몇 시간 전까지 모모이의 존재를 모르던 친구가 모모이의 존재를 알고 있다.
32일. 모모이 사츠키를 알고 있는 친구.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에게 32일과 평행세계의 존재에 대해 말한 여자.
자신의 폰을 주머니에 놓고 코우지마는 먼저 집으로 가겠다며 집과 반대 방향으로 뛰어갔다. 옆집에 사는 친구였기 때문에 집 방향은 이쪽이잖아!! 하고 소리쳤다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친구는 늦게까지 밖에 있지 말라는 말을 던지고는 집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이틀 전에 만난, 여자와 처음 만났던 장소로 찾아가니 당연히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 근처를 찾아보겠다고 뛰어다녔지만 늦은 시간에 누군가 있을 리가.
하지만 혹시 몰라서 구석구석 빠짐없이 둘러보았다.
돌아보다 만난 공원 경비원에게 여자의 인상착의를 설명하고 못 봤냐고 물으니 모르겠다고 답을 했다. 그리고 학생인 것 같은데 일찍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알겠다고 대답한 뒤 숨어서 공원을 돌아다녔다.
밀회를 즐기던 몇몇 커플을 보고 지나치고 별 짓거리를 다하는 커플을 넘어서서 빠지지 않고 둘러 보았다.
늦은 시간에 어떤 여자가 남자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가는 것을 보고는 구해줬더니 전혀 모르는 여자기에 어떡해야 하나 싶어 공원 입구까지만 데려가 주고 다시 안으로 들어와 순찰하듯 공원을 돌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지 점점 하늘은 밝아왔다. 배에서 들리는 꼬르륵거리는 소리에 힘이 빠져 벤치에 앉았다. 전날 아주 즐겁게 논 탓에 벤치에 몸을 기대니 피로함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 점점 몸은 벤치와 하나가 되려 하고 잠이 들려고 하는데 벨 소리가 들렸다. 시끄러운 벨 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에 나와 운동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전화를 받았다. 어디있냐는 질문에 장소를 말하니 알겠다며 바로 끊겼다.
폰을 옆에 내려놓고 다시 눈이 스르륵 감겨 꾸벅꾸벅 고개를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면서 헤드뱅잉을 하고 있으니 누군가 자신을 건드리는 느낌에 기지개를 펴면서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1신 간 즘 지났고 옆엔 뛰어왔는지 숨을 겨우 쉬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코우지마의 퀭한 모습을 보더니 밤을 샜냐고 물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고 여태까지의 일을 설명하려다 친구도 함께 봤던 그 여자에 관해 물었다.
“어. 기억나. 그때 그 여자 너한테 평행우주 뭐시기 판타지를 좋아하던 여자 말이지?”
“그 여자를 찾아야 해. 그 여자에게 지금 나의 상황을 말해야 해.”
“그 여자 저기 저 여자 아냐?”
친구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진짜 그 여자가 있었다. 밤새도록 찾아다닌 게 헛수고인가 했지만 그렇게 늦은 시간에 사람이 있을 리가… 바보는 자기라고 꾸짖으면서 그 여자에게 뛰어가 붙잡았다. 어제와 그대로의 모습인 여자는 자신을 보고 놀란 게 아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반응이었다. 솔직해 이 여자가 어떤 반응을 하는지 코우지마는 관심이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해결해 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할 말이 있다고 하니 여자는 코우지마를 보고 알겠다면서 카페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여자를 따라가면서 친구가 아는 사람이냐고 묻는데 답 없이 따라가려니 모르는 사람 따라가냐고 붙잡는 통에 가보면 안다고 말하면서 붙잡는 손을 떼고 걸었다.
어느 2층 카페에 도착해 코우지마와 여자는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주문하라는 말에 설명부터 해달라하니 길어질 거라며 주문하라는 말에 메뉴판을 들었다. 메뉴판 맨 처음에 있는 커피 아무거나 시켜놓고 직원이 가자마자 입을 열었다. 메뉴판을 보는 동안 꺼내놓은 것인지 다른 색의 볼펜 두 개와 종이 한 장이 탁자 위에 꺼내져 있었다. 펜 두 개로 반만 겹쳐지게 그리고 그 밑에는 완전히 겹쳐지게 그려놓고는 손가락 사이에 펜을 끼워놓는다. 직원이 가져다 놓은 음료가 탁자에 놓이고 직원이 사라지자 여자는 입을 열었다.
“자신이 사는 세계와 자신이 살고 있지 않은… 흔히들 평행세계라고 하죠? 하여튼 세계가 이런 식으로 반 정도가 걸쳐있다고 해요.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다른 세계의 모습을 볼 수만 있는 거고요. 그런데 12월 31일이 지나고 나면 아래 그림처럼 두 세계가 겹쳐져서 32일이라는 게 생기는 것 같아요. 시간은 24시간. 1월 1일이 되면 다시 위에 그림처럼 반만 겹치게 되는 거고요.”
“이게 도대체 무슨…”
“32일이 되는 동안은 서로의 세계가 합쳐져서 우리같이 이 현상에 영향을 안 받는 사람들은 32일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더라…”
쾅 소리가 나면서 코우지마는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서 봐온 사실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믿을 수가 없다고. 드르륵거리며 탁자가 여자 쪽으로 밀리고 탁자 위에 여러 모양의 컵 안에 있던 음료가 찰랑거렸다. 여자는 흔들리는 음료를 보더니 컵을 들고 한 모금 마시고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큰소리에 카페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되니 본인도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됐지만 일단 코우지마는 다시 의자에 앉혔다.
“못 믿겠으면 스마트폰 확인해봐요. 전에 없던 번호가 있을지도?”
코우지마는 자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주소록이라고 쓰인 앱을 누르고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이름 순서대로 되었는 번호를 확인하면서 똑같네 싶었는데 주소록에 전에 없던 모모이 사츠키라는 번호가 보였다. 주소록에 있는 이름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 감정이 기쁜 것인지 아픈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올 정도로 달리기를 하다가 온 사람처럼 뛰었다. 코우지마가 말없이 여자를 쳐다보자 끄덕이고 번호를 누른다. 연결되고 고운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코우지마… 선배?”
“…사츠키? 아, 아니. 모모이. 저… 그… 미안한데 일단 만나…자? 그 혹시 학교 시내 옆에 있는 공원으로 나올 수 있어?”
“네, 알겠어요.”
외모와 같이 고운 목소리에 예상했던 목소리들을 다 집어치웠다. 고운 목소리만 기억하자고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서 지워버리듯 행동한 뒤 일어섰다. 약속장소를 정했으니 이제는 만나서 이야기하면 되는 거다. 여자에게 고맙다고 말한 뒤 카페를 나왔다. 일 층으로 내려가려고 계단을 내려갔다. 높은 계단이라 조심해서 내려가야 한다는 걸 잊은 체 빠르게 뛰어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뎠다. 몸이 앞으로 휘청하면서 붕 뜨는 느낌에 과거의 자신이 조심하지 않았냐면서 탓하려는데 갑자기 밀려온 통증과 어둠에 정신 차려야 한다고 땅을 짚고 일어나려는데 어째서인지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계단 위쪽에서 급하게 내려오는 친구가 보인다. 아. 빨리 가야 하는데 욱신거리는 몸으로 기어가려고 했지만 금방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신 차리니 하얀 천장. 온몸이 쑤셔 인상을 쓰고 있으니 옆에서 무슨 일이냐고 말을 걸어오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아. 맞다. 코우지마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아까 계단에서 구른 것을 떠올렸다. 고개만 들어 몸을 살펴보니 팔 한쪽과 무릎 한쪽이 다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우와. 배드민턴 칠 수 있으려나. 붕대 감긴 팔꿈치를 움직여 확인했다.
아파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옆에서는 인대가 늘어난 것 뿐이라는 대답만 하고 자신의 팔과 다리를 확인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깜깜한 하늘. 창문 위에 애매하게 걸려있는 시계의 바늘이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친 망했다.
“왜 날 안 깨웠어!!”
“미쳤어? 환자는 절대 안정이라고.”
“야. 나 그 공원 가야 해.”
“내 말 못 들었어? 환자는 절대 안정이라고!”
혹시나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을 모모이를 생각하고 침대에서 내려오려는데 거슬리는 팔과 무릎에 두른 붕대를 풀어냈다. 자신의 앞에 막아서는 친구에게 제발 부탁이니까 가게 해달라고 친구의 팔을 붙잡았다. 자신의 팔을 힘을 주어 잡는 코우지마를 보고 친구는 한숨을 쉬면서 대신 자신과 함께 가겠다고 말하고 코우지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나 의사 몰래 병실을 나와 병원 밖으로 도망치듯 나와서는 바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서 약속 장소로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실제로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면이라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나는 팬처럼 다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연말이라 그런지 가까운 거리임에도 차가 밀려 코우지마는 입술을 깨물고는 차 안 시계를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숫자가 커질수록 긴장감과 두근거림은 커지는데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도로를 보고 결심한 듯 주머니에 든 지갑을 꺼내 돈을 기사에게 건네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뒤에서 당황하던 친구가 잔돈을 받아 쫓아오면서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는데 대답하지 않고 공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공원, 약속 장소로 알려진 분수대 앞에 있을 것 같아 들어가자마자 분수대가 있는 곳으로 뛰었다. 방금까지 아프다고 했으면서 이상하게 지금은 전혀 아프지 않았다. 분수대가 가까워질수록 멀리서 홀로 서 있는 모모이가 보인다.
1월, 새해가 되기 30분 전. 약속한 장소엔 모모이가 자신의 손을 녹이며 서 있었다. 바로 옆으로 뛰어가 섰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말에 어색하게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머리에 묻은 피를 닦아냈던, 손바닥에 묻은 피를 검은 바지에 닦아냈다. 쳐다보면서 웃으니 별일 아니라면서 벤치에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뭐부터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자연스럽게 입고 온 의상에 대해서 칭찬을 하였다.
크게 제스처를 하며 칭찬을 하고 있는데 무리하게 움직인 탓인지 팔이 아파 다른 손으로 아픈 곳을 잡았다. 계단에서 구른 후 눈을 뜨자마자 왔으니 팔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가 아팠다. 벤치에 제대로 앉아있는 것 자체가 힘들어 식은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면서 뛰어온 것 때문에 그런가 하고 둘러댔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몸이었는지 언제라도 내 쪽으로 뛰어올 친구 쪽으로 눈동자를 굴러 오지 못하게 등 뒤로 숨긴 손바닥을 살살 흔들었다. 아직은 견딜만해.
“미안, 사츠키. 만나자 해놓고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게 해서. 부모님께 뭐라 하셨을 텐데…”
“괜찮아요. 다이짱이랑 있다가 온다고 했으니까요.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가끔 제 눈앞에서 코우지마씨가 배드민턴을 하는 모습이 몇 번 보였었는데 그때마다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같이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멋있다고… 생각했었어?”
“배드민턴을 하실 때 집중하는 모습이 제가 좋아하는 사람과 닮아있었거든요.”
“좋아하는 사람… 나도 봤어. 이번 윈터컵때 그… 마술하는 애 말이지?”
마술이란 단어가 신경 쓰였는지 중얼거리면서 어색하게 웃는 모모이를 보면서 코우지마는 생각했다.
자신도 모모이를 봐왔고 그때마다 사랑의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소녀를 보고 자신의 팬들과 같은 얼굴을 하는 모모이가 이상하게 달라 보였다. 아마 사랑에 빠진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서 그런 건진 몰라도 남들과는 다르다고 느껴졌다. 그때 당시 이름도 모르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보면 볼수록 호감이라고 생각했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눈치챈 건 이미 모모이라는 소녀에게 흠뻑 빠진 뒤였다.
“사츠키.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코우지마는 여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생각나는 데로 이야기했다.
32일이라는 날짜. 평행세계. 그리고 코우지마 자신이 보았던 환상 속에 있던 모모이에 대해서.
모모이는 처음엔 믿지 못했지만, 자신도 본 게 있으니 그렇구나 하고 점점 믿는 눈치였다.
그동안 속에서 쌓여있던 것을 다 내뱉은 시원함에 손뼉을 마주치고 만족한 얼굴로 상체를 살짝 숙여 모모이쪽으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눈동자가 마주치니 부끄러워하면서 웃는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쁘고 그와 동시에 곧 있으면 이 기회도 사라진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떨리는 아랫입술을 살짝 입안으로 넣고는 윗니로 꽉 물었다.
정신 차리고 지금이라면 지금밖에 할 수 있는 걸 해보자. 코우지마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네?”
“미안한데… 호, 혹시 한 번만 이름으로 불러주면 안 돼?”
“치아키씨… 라고 하면 될까요?”
“고마워. 사츠키.”
이름으로 불리니 모든 걸 다 가진 기분이었다. 남들이 봤을 때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눈앞에 두고도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코우지마는 모모이의 손을 꼭 잡았다.
점점 눈앞이 흐려져 다른 손으로 눈을 비볐더니 맞은편에 있던 모모이가 이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구나.
마음이 급해지니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방금까지 많은 생각을 했는데 그것들이 전부 휴지통에 들어간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사츠키.”
“네. 코우지마씨.”
“널.”
홀로그램처럼 점점 희미해지는 모모이를 보면서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모모이를 보면서 떠오른 한 단어. 초면에 말해도 될까 고민을 했지만, 왠지 모르게 말해주고 싶었다.
“좋아해!”
모모이를 힘껏 품에 안았지만 통과되는 몸에 몇 번 허우적거리다 결국엔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환상이었던 것처럼 모모이의 모습도 목소리도 온기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코우지마는 자신의 양팔을 엇갈려 누군가를 안는듯한 행동을 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비어 버린 것에 누군가 억지로 마음을 뜯어내 버린 것인지 욱신거려 가슴에 손을 얹고는 상체를 푹 숙였다. 비틀리게 옷을 부여잡고 참았던 모든 것을 다 뱉어내기 시작했다.
“너의 좋아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 여자애는 사라졌다고. 내가 어째서 그 애를 알고 있는 진 모르겠지만 아까 만났던 그 여자의 말대로 31일과 1일의 사이엔…”
“아파…….”
“아프겠지. 너 정신 차리자마자 여기로 왔어. 무슨 히어로인줄 알았네.”
어느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친구가 다가와 앞에 섰다. 모모이 앞이라 겨우 버티고 있던 몸은 힘이 빠져 옆으로 픽하고 쓰러지려는 걸 앞에 있던 친구가 빠르게 몸을 잡아준 덕분에 땅바닥으로 굴러다니진 않게 되었다. 친구는 빨리 병원에 가자며 코우지마를 업었다.
방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밀려와 온몸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이를 악물다가 의식을 잃으려고 하는 것인지 점점 눈앞이 희미해져 갔다. 정신 차려야 한다. 정신 차리자.
겨우 눈을 뜨는데 모모이가 아오미네를 부르면서 뛰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불만 있는 얼굴의 아오미네와 웃으면서 대답하는 모모이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니. 코우지마의 눈이 감겼다.
“사츠키. …곧 너를 보러 달려갈 테니까.”
잠꼬대하듯 중얼거리고는 친구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자신에게 주어진 365일. 코우지마는 365일이라는 것을 머릿속에 박아두었다. 다음번엔 반드시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코우지마는 생각했다.
모모이를 만나기 위한 365일의 기다림은 지금부터 시작되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