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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키×에노키

죽음의 세계에는 올해도 벚꽃이 잔뜩 피었다.

 

사에키는 분홍색으로 물든 거리를 보며 들뜬 가슴을 애써 진정시켜야했다. 아무리 이매망량과 망자가 사는 곳이라 해도 봄이란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계절인데. 제가 사랑하는 그녀가 사는 세계의 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그것만 생각하면. 그 아름다운 세계에서 웃고 있을 그녀만 생각하면, 사에키는 온 몸에 따뜻한 피가 도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옥졸인 그는 일을 하기 위해서 밥 먹듯이 드나드는 생자들의 세계에 사는 존재를 사랑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용납도 안 될 일이고, 일어날 리도 없는 일이었다. 망자를 관리하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을 사랑하다니. 아무리 봐도 모순적이고, 옳지 않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기적인지 비극인지 모를 사랑은 몇 년 전, 그의 세계에 나타난 하나의 환영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여름이 다가오는 어느 따뜻한 봄. 특무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강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단화와 양말을 벗어 옆에 두고 바위에 앉아, 발만 물에 담그고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곱게 양갈래로 묶고, 산 사람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몸에는 짙은 색 교복을 입고.

 

‘인간?’

 

휴식을 취하는 걸로 보이는 소녀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있었다. 오감으로 생자와 망자를 구분할 수 있는 사에키는 어째서 죽지도 않은 인간이 이곳에 있는지를 확인하러 다가가다가,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사에키, 어디 가?”

“아, 키노시타”

 

그녀에게 닿기까지 다섯 걸음 정도 남았을 때일까. 순찰 중이던 제 동료가 부르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춘 그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 반응이 없는 소녀의 모습에 위화감을 느꼈다. 보통은 제 뒤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면 한 번 쯤은 뒤돌아 볼 텐데. 왜 이렇게 태연하게 앞만 보는 걸까.

 

“아아, 별건 아니고… 이 애. 왜 여기 있나 싶어서”

“이 애?”

“여기, 여기”

 

이미 안 듣고 있는 것 같지만, 혹시 들리는데 모른 척 하는 거라면 제 말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지. 배려가 넘치는 사에키는 최대한 목소리를 죽이고, 손짓으로 소녀를 가리켰다. 하지만 키노시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큰 소리로 물었다.

 

“강이 왜?”

“아니, 강이 아니라… 저기 여자애”

“여자애, 라니?”

 

거긴 아무것도 없는데.

키노시타의 그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키노시타가 남을 놀려먹는 것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었으니, 이유 없이 거짓말을 할 일도 없었지만. 하지만 사에키는 차라리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길 바랬다. 제 눈엔 분명히 보이는데, 어째서 키노시타는 전혀 모른다는 눈으로 이쪽을 보는 건가.

 

“…무슨…”

“혹시 피곤한 거야? 사에키, 며칠 째 계속 일이었으니, 당연한가?”

“아니, 그게 아니라…”

“무리 하지 마. 나 먼저 들어갈게? 산책이라도 하고 와!”

 

정말로 걱정된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키노시타 때문에 그는 제대로 변명도 할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당황해서 그 자리에 굳어있던 사에키는 무거운 발을 겨우 물가로 옮겼다.

 

“저기…”

 

말을 걸어도 대답은 없다. 역시, 제가 지금 환영이라도 보고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소녀의 어깨를 건드린 사에키는 제 손이 작은 몸을 그대로 통과하는 걸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아”

 

제가 너무 요란하게 놀란 탓일까. 아니면 몸을 통과한 감각이 느껴진 걸까. 그제야 자신을 인식하고 고개를 돌린 그녀는 하늘보다 푸르고 눈보다 흰 눈동자를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았다. 아아, 이 여자애도 자신이 보인다. 그걸 확인하자 무슨 자신감이 생긴 건지, 사에키는 그녀의 옆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안녕, 내가 보여?”

 

아, 보이긴 해도 서로 말은 안 통하는 걸까. 사에키는 뭐라고 대답하는 것 같은 소녀의 입을 보고 한숨 쉬었다. 그래, 들리지 않으니 다가올 때 까지 몰랐던 거겠지.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걸 봐선, 아무래도 시각적인 정보는 공유가 가능한 것 같았다.

기묘한 현상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그녀를 한참을 바라보던 사에키는 ‘너무 늦지 않게 돌아가’ 라는, 그야말로 평온한 인사를 남기고 특무실로 돌아갔다.

 

“응? 너에게만 보이는 생자?”

 

사에키가 돌아와서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제 피아노 스승이자 상사인 사이토였다. ‘흐음’ 그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준 사이토는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듯 옅게 미소 지으며,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려주었다.

이 세상엔 가끔 이승과 저승 사이에 인연이 생겨, 죽음과 삶의 경계 밖인데도 서로를 인식할 수 있는 관계가 있다고 한다. 비록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닿을 수도 없지만. 확실하게 ‘보이는’ 인연이 있다고.

 

“사에키가 그런 인연이 있다니. 어떤 여자애였어?”

“어떤, 이라니… 그냥, 평범한 소녀였어요”

“아름다웠어?”

“글쎄요”

 

아름다웠다. 확실하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사에키는 그 사실이 왠지 너무나도 낯 뜨거워서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벚꽃이 흩날리는 것이 예쁘다는 것은 그리 간단히도 말할 수 있으면서, 어째서, 그 아이가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이리도 부끄러울까. 사에키는 제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라도, 환영처럼 나타나는 그녀에게 점점 더 깊은 관심을 주게 되었다.

봄이 지나고 무더운 계절이 오고, 낙엽이 떨어지는 시기가 와서야 그는 제가 목소리도 모르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 비록 생과 사의 경계를 사이에 둔 자신들이라 해도, 누군가가 붉은 실로 엮은 이상 이 사랑은 이상하다고 할 수 없겠지. 그녀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두 사람은 언어로 대화를 할 수 없는 관계였는데도 불구하고 서로를 사랑에 빠진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겨울. 한 겨울.

12월의 끝. 1월의 시작.

몇 백 년을 살았고, 이미 죽어서 세월의 흐름도 무감각해진 사에키가 난생 처음, 1년이 지나가는 것을 몸소 실감하게 된 기적이 일어났다.

 

1년이 끝나는 그 날. 혼자서 먼저 방으로 돌아온 사에키는 잠들기 전 또 그녀와의 만남을 가졌다. 서로 들리지도 않지만 ‘새해에도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고, 12시가 다가오는 시계를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있던 그와 그녀는, 11시 59분에 똑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윽”

 

마치 만취한 후 다음날 맞이하는 아침의 숙취 같은 두통, 아지랑이 한 가운데 선 것처럼 일렁이는 주변. ‘모르는 고통이다’ 무지에서 오는 공포와 제 옆의 그녀가 사라질까봐 무서워 고개를 든 사에키는, 변해버린 주변 환경과 선명한 색채에 할 말을 잃었다.

언제나 유리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것처럼, 뿌옇던 그녀가 선명한 색과 입체감을 가지고 제 눈앞에 있었다. 아아, 제가 현세로 불려오기라도 한 걸까. 사에키의 예상과는 달리, 두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진짜 기적에 가까운 사건이었다.

12월 31일과 1월 1일 사이, 유령처럼 슬쩍 끼어든 하루는 오로지 두 사람 만의 것이었다.

이승도 저승도 아닌 세계. 생자도 옥졸도 아닌 두 사람. 그것이 전부인 하루.

그녀, 자신을 에노키라고 소개한 소녀는 사에키와 정말로 함께 하게 된 그 첫 번째 12월 32일에 얼마나 기뻐했던가.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그날, 사에키는 조금 울어버릴 뻔 했다. 만질 수 없던 사람과 손을 잡고, 대화 할 수 없었던 상대와 이야기를 나눈다. 게다가 그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두 사람은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그 하루를 정신없이 즐겼고, 24시간 이후 각자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아, 아쉽다. 사에키는 다시 반투명해진 그녀를 보며 한탄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죽지 않는, 이미 죽어버린 제게 1년은 그다지 긴 세월이 아니었으니까. 다만 살아있는 그녀에게 1년이란 얼마나 지독하게 긴 세월일까. 그는 다시 서로를 바라보기만 할 수 있는 세계에서 그녀와 약속했다.

 

“에노키, 혹시 네가 죽으면 내가 꼭 데리러 갈게”

 

그 전까지는, 네가 이 세계로 오기 전 까지는 1년마다 한번 밖에 못 만나지만, 기다려 줘.

로맨틱하다면 로맨틱하고, 현실적이라면 현실적인 그의 말은 아마 에노키의 귀엔 닿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음소거 된 화면을 보는 것처럼 입을 움직이는 슬픈 표정만 보이겠지. 그걸 알면서도 사에키는 감히 그녀와 약속했다. 그녀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라도.

반쪽짜리 약속을 들은 그녀는 웃어보였다. 마치 기다려 주겠다는 말 같아, 사에키는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올해가 지나면 벌써 4년째인가?’

 

3번째로 만난 겨울이 벌써 엊그제 같은데 다시 봄이 찾아오다니. 시간이란 어쩜 이렇게 고무줄 같은 걸까.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 멀게만 느껴지고, 만났던 날을 생각하면 바로 어제 일 같다.

 

“얼른 겨울이 오면 좋겠다, 그렇지?”

 

사에키는 저 멀리, 벚나무 아래 서있는 사랑스러운 환영에게 물었다.

어느새 짙은 색 세라복 대신 밝은 색 블레이저를 입게 된 에노키는, 사랑스러운 미소로 그의 말에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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