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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토 코우스케×류세
그와 관련된 추억은 거의 없다. 내가 그를 보는건 매일이지만.. 뭐랄까 말을 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다. 어째서인지 나는 매일매일 널 보고 있지만. 너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를 만질수도 너의 목소리를 들을수도 없다. 우리는 이상하게 그랬다. 너를 볼 수는 있지만. 만지거나 이야기 하거나 듣거나. 모든게 허용되는 날은 단 하루였다. 그 날은 12월 31일.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또 헤어진다, 슬픈 이야기지만. 뭐..
“ -...모르겠는걸. 이거 꿈인지 현실인지 ”
한숨을 포옥 내쉬며, 소녀는 자신의 푸른 빛 머리칼을 잔뜩 헝클어뜨렸다. 머리가 아파왔다. 언제는 웃으며 밝게 다니던 소녀도 아니었지만. 이런 생각만 하면 머리가 복잡했다. 가슴이 찌릿 하고 아파왔다. 운이 없게도 이 멍청한 소녀는 이게 어떤 감정인지도 알수 없었다. 엥? 딱 봐도 뭔지 알겠다고? 하하핫~ 그래도 뭐 어쩌겠어. 본인이 모르겠다는데.
“ 으으 아아악!! ”
아무런 죄도 없는 곰인형을 때리며 소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꾸욱 눌렀다. 아, 짜증나. 작은 입에서 투정이 세어나왔다. 연말인데. 나는 왜 이런 골치아픈 생각을 떠올려서 난리냐고! 자신을 몹시 때려주고 싶었다. 주먹을 꽉 쥔 주먹을 확 올렸다가. 헛웃음을 내뱉고는 손을 슬쩍 내렸다. 지금 자신을 벌해서 뭘 하겠는가.. 소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그러고 보니 연말인가..? "
소녀는 시선을 돌려 달력을 쳐다보았다. 큰 글씨로 12월이라 적힌 달력을 빠르게 살펴나가자 12월 31일 이라는. 이번 년의 마지막 날이 보였다. 이게 꿈인지 아닌지는. 그때 알아보면 되는거야. 소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까 말한적이 있던가. 우리는 일년의 단 하루만 만날 수 있다. 그것이 12월 31일. 마지막 날이다. 사실 일년의 한번 보는거라 꿈인지 생시인지는 잘 모르겠다만. 음.. 믿어야 본전이지. 불쌍할 정도로 단순한 이 소녀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많이 기다려야 했다면 소녀는 또 성질을 부렸을지도 모르겠다. 뭐 내일이면 그 날이니까.라고 중얼거린 소녀가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내일이면 알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길게 하품을 하고는 침대속으로 천천히 들어가서 소녀는 눈을 감았다. 내일 널 볼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하고는 스르륵.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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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길게 하품을 하며 일어난 소녀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루 아침에 세상이 멸망이라도 해버린 듯. 주변이 조용했다. 소녀는 오싹한 느낌에 살짝 몸을 떨었다. 이건 꿈일까? 아님 현실일까.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번에도 이런 적이 있던가. 라고 생각하며 시계를 확인하니 시곗바늘은 열심히 오후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무거운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자고 싶지만. 가봐야 할 곳이 있으니까. 소녀가 길게 하품을 했다. 12월 31일. 만약 작년 이 날. 그때 그 일이 꿈이 아니라면. 그는 분명 그곳에 있으리라. 소녀는 그리 생각하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티셔츠와 하얀 반바지를 입은 소녀는 자신의 푸른 머리카락을 대충 빗어버리고는 거울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생기 없는 눈동자지만 살아는 있다는 걸 알리듯 눈동자가 레몬빛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소녀는 그런 자신을 한참이나 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뒀다. 언제나 봐도 싫증나는 얼굴이야~ 라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소녀는 자신이 사는 집을 빠져 나왔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뭐 이왕 나온거. 확인이라도 해봐야겠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나저나. ”
소녀가 시내로 들어와 주변을 두리번 거리며 말했다. 연말이라 커플이니 가족이니 바글바글 거릴줄 알았던 시내가. 단 한명도 보이지가 않았다. 정말 세상이 멸망이라도 해버린걸까. 라도 생각해도 별 의심이 없을 정도로 세계는 조용하고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끔 느껴지는 오싹한 느낌에 소녀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 ...이정도라면 ”
점점 확신이 되가고 있었다. 잊어버린 오래전의 기억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하다. 무언가의 막혀버린 듯 희미한 모습만 보였다. 머리가 지끈 하고 아파왔다. 기분 나쁜 두통이지만. 소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에는 끔찍이도 싫어하던 산이 보였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산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시간은 5시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조바심이 나버려 속도를 더욱 빨리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흐르는 땀을 닦고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도착이야. 소녀가 자신에게 격려를 보냈다. 겨울이라 앙상해진 나무들을 지나니 푸른 들판이 펼쳐졌다. 만화에서나 볼만한 그런.. 들판.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이 고생이 헛것이 아니길 빌었다. 정말 세계가 멸망한게 아니길 빌었다 ...아 이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 작게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그러다가 문득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그곳을 쳐다보았더니.
“ 아 역시! ”
꿈이 아니길 빌었던.
“ 여기 계셨슴까? ”
그 사람이 서있었다.
한참이나 소년을 보고 서있던 소녀가 소년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소년을 이리저리 살폈다. 늘 보던 그 소년이 맞았다. 흐릿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르는 듯 했다. 심장이 답답해지며 저려왔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너는 날 기억할까. 이런저런 의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손을 뻗어. 소년의 손을 잡았다. 만질 수 있어, 그럼 이건 꿈이 아냐. 그런 소녀를 걱정스레 지켜보던 소년이 먼저 말을 꺼냈다.
“ 너무 오래 기다렸슴까? ”
죄송함다.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표현 하지는 않았지만. 그토록 듣고 싶던 목소리였다. 소녀가 기쁜 듯 살짝 미소 지으며.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 ..보고..싶었어. ”
“ 세토. ”
기억을 더듬거려. 겨우 찾은 너의 이름이지만. 다행이도 너의 이름이 맞는 듯. 밝게 웃는 널 보며 다행이라 생각했다.
“ 제 이름. 기억하고 계셨슴까? ”
“ 물론이지. ..사실 맞는지 잘 몰랐는데. 다행이도. 내 기억이 좋나봐 ”
“ 그런 것 같슴다! 푸흐흐.. ”
어제라도 본 것처럼 편안하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해주는 당신을 보며 다행이라는 듯 웃어보였다. 불안했던 마음이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편한 친구처럼. 나와 나는 즐겁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뭘 하면서 지냈냐.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꽃도 구경하고. 시내는 가봤자 아무것도 안 할거니. 그냥 산속에서 즐겁게 떠들고 놀고. 그러다보니 주변은 어둠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니.. 어둠으로 물든지는 조금 오래되었다.
슬쩍 손목시계를 살펴보니 시간은 뭐가 그리 급한걸까. 바늘은 벌써 오후 11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오늘 12시가 넘어가면. 우리는 다시 헤어질거라 알고 있었다. 입술을 살짝 물고는 너의 팔목을 잡고는 어디론가 뛰어갔다. 보여줄 곳이 있었다. 다리가 아프고. 숨은 금방 차올라서 숨 쉬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나를 따라오며 어디가냐는 너의 질문도 무시해버리고는 어두운 산속을 뛰어가며. 도착한 그곳은. 내가 오래전 너와 처음 만나고 헤어졌을 때 찾은. 비밀 장소였다. 이상하게도 이곳은 항상 꽃들이 많아서. 자주 찾아오기도 한 이곳을 꼭 한번쯤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 미안- 멋대로 끌고와서. 그치만 여기는 꼭 세토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
“ 우와아! 괜찮슴다! 멋져요!! 류세 씨. 뭐랄까. 고맙슴다! "
의외로 좋아해주는 널 보고는 기쁜 듯 방긋 웃어보였다. 다행이다. 좋아해줘서. 소녀는 쪼르르 꽃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작은 꽃 몇송이를 꺾어 화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릴때는 이런걸 잘 만들었으니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달빛이면 조명은 충분했다. 소녀는 열심히.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화관을 만들었다. 마지막 이별 선물. 소녀가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째깍째깍. 시간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 완성~ ”
웃으며 너의 머리 위에 화관을 씌워주었다.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다. 나는 조금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을까. 심장이 또 다시 저려왔다. 결국은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뭐 상관없나. 당신을 보며 웃어보였다.
“ 세토. ”
“ 네, 류세 씨. "
“ 잘 가. ”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여기서 또 헤어지면 오랫동안 보지못하겠지만. 상관 없을거라. 생각했다. 시간은 생각보다 엄청 빠르거든. 시간은 11시 59분을 가리켰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야. 조심스럽게 당신을 껴안았다.
“ 잘 있어요. 그리고. 또 봐요. ”
“ 응. 세토도 잘 있어. ”
“ ..즐거웠슴다. ”
“ 나도. ”
1.1/ 00:00
“” 안녕 “”
두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 했다. 살짝 눈을 떠보았지만. 역시 너는 없었다.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나와. 방울방울 물방울이 되어. 두 눈에서 흘러나왔다. 소리내어 울지는 않았지만. 떨어진 화관을 껴안으며 조용히. 속삭이듯 참아왔던 그 말을 속삭였다.
“ 사랑해. ”
그렇게. 너와 나의 하루는 또 끝이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