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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오 카즈나리×사토우 노조미

좋아해
Takao Kaznari Dream
W. 화예랑 (@hwayerang)


우리는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왔다. 내가 처음 너를 봤을 때엔 어느 늦가을이었다. 겨울이 다가오려고 찬 기운을 폴폴 뽐낼 때 너를 만났다. 하지만 네가 나를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홀로 너를 짝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짝사랑이면 뭐 어때. 좋아하는 사람을 멀리서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짝사랑으로 줄곧 가슴앓이 했다.

마치, 투명한 유리막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나는 너에게 닿을 수 없으며 너 또한 나에게 닿을 수 없다. 그렇게 너와 나는 평행세계인 것 같으면서도 평행세계가 전혀 아닌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떤 식으로든 맞닿을 수 없었고, 서로를 마주할 수 없었던 우리였지만 지금만큼은 다르다. 어쩌다가 24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 시간마저도 너무 소중하고 조심스럽다.

운동화와 농구 코트가 서로 마찰을 일으켜 삑, 삑 소리를 내고, 농구공이 바닥에 튕기는 소리가 가득 들어찬다. 서로의 기합소리가 크게 울린다. 멀리서나마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네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너의 목소리, 너의 웃음소리, 네 손길을 전부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네가 농구하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게 된 것도 아마 그 탓이겠지.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을 때엔 내가 너를 보고 있을 때, 너 또한 나를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연습이 끝나고 뒷정리 하라는 선배들의 말을 뒤로한 채, 타카오는 노조미를 향해 달려왔다. 당장이라도 품에 끌어안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표정이 훤히 보여 노조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타카오는 노조미의 손을 이끌어 체육관을 벗어났다. 외투를 채 걸치기도 전에 찬바람에 훅 끼쳤다. 노조미의 단발머리가 바람에 날리자, 타카오가 오히려 손을 뻗어 흐트러진 노조미의 머리를 정갈하게 빗었다.

마주잡은 손에는 온기가 따뜻하게 전해진다. 서로의 숨소리가 고르게 들려온다. 운동하는 아이들이 있는 운동장을 가로 질러 학교를 벗어났다. 만약, 타카오를 만나게 된다면 혹은 노조미를 만나게 된다면 그 동안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 전부 해줘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공원 쪽으로 길을 걷는 순간까지도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말이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다 타카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하고 있어?”
“타카오 네 생각.”

 

타카오의 물음에 노조미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오히려 당황한 것은 타카오였다. 조금 더 발랄한 이미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 반대의 타입이었다. 이윽고 어떤 타입인지 이해가 되었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타카오의 웃음소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노조미는 덩달아 웃음을 터트렸다. 어쩌다가 타카오와 함께 있게 되었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시선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고, 서로가 서로를 만질 수 있게 되었다.

 

“있지, 노조미.”
“응.”

 

어째서 더 다가오지 않아?

타카오의 물음에 노조미의 걸음이 멈췄다. 타카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근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초겨울이지만 나무들은 푸르게 지던 녹음을 벗고, 알록달록한 가을 단풍과 낙엽들도 벗었다. 앙상하게 마른 나뭇가지들이 자신의 처지를 애처롭게 알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앙상한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아무도 없는, 단 둘만 있는 공원이 오히려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다.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한참이나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노조미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냥.”

 

노조미는 타카오의 물음에 대한 답을 얼버무렸다. 무어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이나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해봤지만 마땅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았다. 투명한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서로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심지어 지금과도 같이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가 갑작스럽게 투명한 벽이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투명한 벽이 사라지자마자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손끝에 닿을 것 같으면서도 닿지 않았던 감정들이 닿았다.

그래서 노조미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마냥 신기하기도 했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너랑 있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더 다가가지 않은 거야.” 노조미는 한 템포 느리게 숨을 고른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타카오는 노조미의 말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조심스럽게 등을 토닥였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타카오 너도…….”

 

노조미는 말을 끝내 잇지 못하고 입을 꾹 닫아버렸다. 애써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긴 시간동안 함께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 애틋한 감정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와 마주친 시선에서 느낄 수 있었다. 마주친 타카오의 눈빛에서는 애써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노조미는 타카오의 품에 안긴 채, 그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등 뒤로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에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은은하게 퍼지는 장미향의 샤워코롱이 코끝을 스친다. 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손에 더 힘을 실었다.

 

“계속 이대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응, 나도.”
“그나저나 노조미는 뭘 제일 하고 싶었어?”
“음…….”
“나는 저거!”

 

타카오가 가리킨 손짓의 방향대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이 별로 없어 휑했던 공원에는 한 명, 두 명씩 사람이 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사이에는 자전거를 타고 있는 커플이 눈에 보였다. …자전거라. 조금 의외이긴 한데?

 

“왜 의외야?”
“그냥. 오히려 농구를 같이 해보자고 했으면 모를까, 같이 자전거 타자고 말하는 건 의외야.”

 

노조미의 말에 타카오는 어깨를 으쓱였다. “나라고 뭐 매일 농구만 하면 질리니까.” 라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전거 대여소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모양인지 약 5분이 지나자 그의 손엔 자전거 안장이 2개 달려있는 커플 자전거 하나를 떡하니 빌려왔다. 그러면서 뒤쪽 안장을 손으로 툭툭 두어 번 두드리며 타라는 시늉을 했다. 노조미는 마지못해 뒤쪽 안장에 올라타자, 앞쪽 안장에 타카오가 올라타고는 곧장 폐달을 밟기 시작했다.

날은 이제 한겨울로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바람은 어쩐지 시원하기만 하다. 춥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볕이 따뜻한 봄과도 같았다. 아주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바람에 날려 앞머리가 휘날리고 이마가 훤히 드러나는 것도 모르고, 아주 어린 시절로 다시 되돌아간 기분이 든다.

 

“노조미.”
“응?”

 

좋아해.

바람에 소리가 묻혀 웅웅 거려 작게 들린다. 노조미는 타카오가 한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뭐라고?” 라고 다시 되묻지만 타카오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답했다. 애써 말한 좋아한다는 단어가 바람에 날아갔다. 물론, 그 또한 노조미의 탓은 아니다. 타카오는 조금 더 용기를 내지 못한 스스로를 탓했다. 자전거를 멈추고 좋아한다고 용기 있게 고백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고작 해봐야 12월 31일. 오늘 하루, 24시간만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괜히 그런 말을 꺼내봐야 좋을 거 없다고 판단했다.

한참을 달려 겨우 멈춘 곳은 공원 안쪽에 위치한 호수가 보이는 곳이었다. 근처 벤치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자리에 앉았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가 되어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한 지금까지 줄곧 함께 했다. 낮에는 그가 농구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그 후에는 함께 공원으로 와 데이트를 즐겼다. 함께 손을 마주잡고 거리를 거닐고, 춥진 않을까 서로 껴안아 체온을 확인했다. 하지만 그 많은 것들 중에서도 딱 한 가지.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있다.

 

“있지, 타카오.”

 

호수를 바라보며 노조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언제 사왔는지도 모를 따뜻한 캔 커피 2개가 손에 들려 있었다. 노조미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타카오는 제 손에 들린 2개의 캔 커피 중 하나를 노조미에게 건넸다. 노조미는 넘겨받은 캔 커피를 손에 꼬옥 쥐었다. …따뜻하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가 마음을 간질였다. 입 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간다. 타카오는 연신 힐긋거리며 노조미의 표정을 살폈다. 노조미가 기뻐하는 것 같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응, 뭐가?”
“그냥. 전부다.”
“그게 뭐야. 시시해.”

 

별로 시답잖은 얘기에도 어린아이마냥 꺄르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인걸까. 타카오는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반쯤 마신 캔 커피를 제 옆에 내려놓고는 노조미와의 거리를 좁혔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타카오에게 무어라 말을 채 하기도 전에 타카오의 입술이 먼저 다가왔다. 입술 위로 부드럽게 겹쳐진 감촉에 노조미는 잠시 놀란 듯 싶다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두 입술을 맞대고 있어 따뜻한 온기를 나눴다.

잠시간 맞댄 입술이 떨어지고, 노조미는 부끄러운 나머지 고개를 푹 숙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양 볼을 타카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건 타카오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연신 고개를 숙여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들 줄 몰랐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더 흘렀는지도 모른다. 따뜻한 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노조미가 입을 열었다.

 

“타카오.”
“…….”
“…카즈나리.”

 

줄곧 성으로만 부르다 이름을 불렀다.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그의 이름을 불렀다. 타카오는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에 두 눈을 반달로 휘어 접었다. 노조미는 한참이나 타카오와 시선을 마주하다 마음 속 깊숙한 곳에 꽁꽁 숨겨두었던 말을 겨우 꺼낼 수 있었다.

 

“좋아해.”
“…….”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어.

타카오는 노조미의 고백에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천천히 등을 토닥이며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이 아가씨야. 말하는 게 늦었잖아.” 라고 말하며 노조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너 좋아해.

먼 길을 돌고 돌아 겨우 만난 우리였지만, 앞으로 또 얼마나 먼 길을 돌아와야 할지 모르겠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는 너를 여전히 좋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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