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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노세 토키야×호시카게 아오이

And will he not come again?

And will he not come again?

No, no, he is dead,

Go to thy deathbed.

-햄릿 Act 4, Scene 5, Page 9

 

 

짙은 색의 머리칼이 흩어지며 창백한 얼굴이 드러난다. 그 사람은 그림자에 잠겨 들며 이 쪽을 보았다. 눈이 마주쳤을까,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있는 온기도 반응도 없다. 이치노세 토키야는 익숙하다는 듯 다시 손을 거뒀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꿈이었다.

 

처음. 어느 관계에서나 처음은 중요하다. 아니, 관계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모호한 ‘이것’을 그는 뭐라 정의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사람은 물에 비친 환영처럼 잠시 떠올랐다 흩어지고만 말았지, 그와 대화를 나눈 것은 아니었기에. 그렇다면 처음 그 사람을 보았을 때를 이야기해보자. 이제 막 백일몽과 현실을 분간하기 시작했을 때 즈음, 처음으로 극단에 찾아와 무대에 섰을 때였다.

눈앞을 강하게 찌르는 조명과 그를 평가하는 어른의 눈빛이 여럿. 어린 시절의 이치노세 토키야는 공황에 빠졌다. 두려웠다, 아직 어렸다. 지금에 와서야 그리 마음을 다스리지만, 당시에는 달달 떨며 대사를 읊은 제 모습이 너무나 어그러져 보였다. 그는 무대에서 간신히 도망쳐, 커튼 뒤에 숨었다. 바깥은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 겁쟁이는 고개를 푹 숙였다.

무서워. 홀로 서 있는 무대는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 조금만 있다가, 조금만 있다가 어머니에게 사과하자. 맨질한 바닥에 주저앉으며 아이는 제 다리를 감싸 안았다.

자신을 찾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어디론가 멀어졌던 그 순간이었다. 불이 켜져 있던 무대가 어두워졌다. 어찔하게 어둠이 다가와, 그는 몸을 움츠렸다.

자신을 찾는 걸 포기한 걸까. 소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커튼을 꽈악, 손안에 쥐었다. 틈새로 빛이 조금 비쳐 온 건 그때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 건가요?”

 

흐릿하게 깔린 안개를 닮은 목소리였다.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분명한데, 울음과 웃음을 짓이긴 것 같은 음의 나열. 커튼 사이로 무대 위가 비칠 듯 말 듯, 시야에서 일렁거렸다. 토키야는 홀린 것처럼 커튼을 조금 더 벌렸다.

흐트러진 긴 원피스를 입고 새카만 머리칼을 늘어뜨린 여자아이가 입을 열어 노래했다. 금방 망가질 듯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는 다시 노래했다. 그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 건가요?

아름다운 노래는 아니었다. 어딘가, 목소리의 한구석이 새카맣게 타들어 간 것 같아. 여자아이는 노래를 이어갔다. 입술은 가사를 담으며 움직였지만, 토키야의 귀에 그 노랫소리가 닿지 않아, 어린 소년은 커튼에서 고개를 조금 더 내밀었다. 여자아이의 입은 빠끔빠끔 움직이고, 고개가 돌아가고 있다. 길게 풀어헤친 머리칼 사이로 비치는 남색 눈, 그리고.

 

“토키야, 여기 있었구나!”

 

어머니의 쉬어버린 목소리가 귓전에서 쨍하게 울렸다. 힉, 숨을 들이키며 그는 고개를 물렸다. 자, 돌아가자. 지친 기색이 만연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잡은 커튼을 옆으로 벌렸다. 벌린 너머로 어머니의 얼굴이 있었고, 아까의 여자아이는.

 

“어머니, 누구 다른 사람이 연습하고 있지 않았나요?”

“무슨 말 하는 거니, 토키야. 아까 네가 마지막 순서였잖니? 어서 가서 제대로 감독님께 인사도 드려야 해.”

 

이끄는 손길을 따라가면서도 토키야는 객석을, 무대를 훑었다. 어디에도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는 없었다.

 

며칠 동안, 그 기묘한 노래는 귓전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도, 그가 흥얼거린 노래가 무엇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학교에서 배운 노래니? 정도가 그가 얻은 반응이었다. 노래라면 그 샤이닝 사오토메에게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니? 조용한 목소리로 답을 내놓은 건 아버지였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우리보단 더 많이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한다만.”

 

고개만 끄덕이자 그는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며칠 뒤, 다시 불려간 영화의 촬영 현장에서 만난 샤이닝 사오토메는 그의 노래를 듣고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턱을 손가락으로 몇 번 쓸다, 조금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이건 노래는 아니다.”

“무슨 의미인가요?”

 

셰익스피어의 햄릿, 들어본 적 있나? 토키야는 고개를 저었다.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남자아이에게 햄릿이라는 작품은 생소했다.

 

“햄릿은 연극이다. 내용은…어린아이가 보기에는 조금 잔혹한 부분도 있을지도 모르지만, 명작이지. 그 안에서, 주연인 스코틀랜드 왕자, 햄릿이 나오고, 그의 연인이자 햄릿에게 상처를 받아 미치는 여인이 있어. 그게 오필리아.”

 

오필리아. 사오토메 씨는 무척 부드러운 소리로 그 이름을 발음했다.

 

“사랑을 잃은 오필리아가 광기에 빠져 왕과 왕비의 앞에서 부르는 노래의 몇 소절이 분명 네가 방금 부른 것과 닮아있구나.”

 

그 노래는 어디서 들은 거냐? 묻는 눈에 소년은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다시 촬영이 시작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의 대화는 없이 연기에 몰두해야 했다.

 

 

새까만 머리칼, 밤하늘에 물든 눈.

그는 그 아이를 오필리아라 부르기로 했다.

 

 

오필리아는 그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나타났다. 신기루, 사전에서 찾아낸 단어는 정확하게 그녀를 묘사하는듯 했다. 실체는 없고 다가가려 하면 어느새 사라져있는. 토키야는 그녀에게 말을 걸려는 노력도, 닿아보려고 하는 것도 점차 포기했다. 아무래도 그녀를 볼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기에,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비밀로 하자. 어린 소년은 제가 보는 환영을 홀로 간직했다. 조용한 아이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비밀이었다.

 

그의 오필리아는 잘 웃는 여자아이였다. 뭐가 즐거운지, 싱글싱글 미소를 지으며 곁을 스쳐 지나가는, 예쁜 미소의 아이. 혹시, 혹시나 직접 만나게 된다면 자신도 그렇게 웃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때 보인 제 얼굴은 긴장된 기색이 역력해, 토키야는 괜히 힘이 빠졌다.

 

 

처음 보았던 날처럼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날은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름조차 알 수 없었던 건 아쉬웠지만. 지치거나 무섭다거나, 외로움이 피부에 닿아오는 순간에 나타나는 오필리아의 모습은 나름의 위로가 되었다. 문득문득,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놀라긴 했지만. 귀신 같은 무서운 것과 착각하기에, 그 아이는 너무나도 쉽게 웃었다.

 

어느 날은, 그녀가 자신이 서 있는 무대에 함께 서 저가 모를 작품의 대사를 읊었다. 그에 지지않겠다는 듯, 저도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를 연기해냈다. 어느 오후에는 아버지의 서재에서 꺼내 온 책을 읽는 옆으로, 그녀가 다가와 책을 펼쳤다. 그런 오후면 그는 곁눈질로 그녀가 읽는 책의 이름을 기억해둔 적도 많았다. 같은 책을 읽는다면, 언젠가 함께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는. 셜록 홈즈. 메리 포핀스. 어린 왕자. 지나간 시간만큼 그녀의 곁에서 읽은 책은 늘어만 갔고, 두 아이의 어깨는 그만큼 높아져 갔다.

 

결국 토키야는 그녀의 존재를 적당히 의식하는 법을 배웠다. 신기하게도, 그녀가 보일 때면 외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참 이상하지. 그는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흘깃 그녀를 보았다. 오토야와 자신이 함께 있던 방의 한구석에 오필리아가 어느새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수다를 떨며 눈을 곱게 휘어 웃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또다시 촬영일까. 애써 무시하며 그는 읽던 문단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돌 양성 학원인 사오토메 학원을 졸업할 무렵에 그가 그녀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은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오필리아는 전문적인 배우일 것이다.

둘째, 그녀는 자신과 같은 곳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이돌로 데뷔한 연예계의 그 어느 곳에서도 검은 머리, 깊은 남색 눈의 소녀를 찾을 수 없었다. 하야토가 되었을 때부터 꾸준히 찾아도 소녀는 그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여전히 오필리아는 이름 없는, 그의 오필리아였다.

다시 눈길을 주자, 소녀는 흔적 없이 사라져있었다.

익숙하다는 듯, 토키야는 생각을 갈무리하였다. 오토야의 왜 그러냐는 질문도 가볍게 넘기고는. 다음 날 있을 촬영에 집중하면, 그 사람은 금방 잊혔다.

 

 

“다녀왔습니다.”

 

어두운 방 안에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오우, 톳키 다녀왔어? 하고 익숙하게 들려올 목소리도 없는 것이 코토부키씨도, 오토야도 벌써 잠든 모양이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지쳤다는 사실을 숨길 사람도 없었고, 마음 편히 쉴 수 있게 되었으니까.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방을 침대 옆에 놓아두고는 화장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조금 들려온다. 오토야가 수도꼭지를 제대로 안 잠가둔 건가? 정말이지, 그 사람은.

문을 열었을 때, 보인 것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면, 그 생각은 어떻게 매듭지었을까.

이곳에서 보일 리가 없는 검은 머리칼이 물에 새카맣게 녹아들어, 마치 잉크라도 풀어놓은 듯한 환각을 일으켰다. 하얀 손이 물 안에 핏기없이 잠겨 작게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얼어붙은 듯, 그는 그 모습을 한참 눈에 담았다. 벌어진 입술도 파랗게 물들어, 굳게 다물려 있다. 아, 그녀가. 아아.

물 위로 성의 없는 칠처럼 번져가는 붉은 빛.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그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오필리아, 오필리아는 물에 잠겨 죽어가고 있었다.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는 그 몸을 일으켜 안아주고 싶었다. 물 위로 번져나간 검은 머리칼을 걷어내고, 품에 안으면.

역시 차갑게 식어있는 걸까, 그 손은.

 

 

 

그 날 밤, 공포에 사로잡혀 잠을 못 이룬 뒤, 오필리아는 며칠이고, 몇 주고 나타나지 않았다. 버릇처럼 기다려도 어디에도 그 얼굴도, 뒷모습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타인이 물어도 그저 멍청한 표정을 짓다, 토키야는 답으로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말해도, 알아줄 사람은 없었다. 애초에 어째서? 그 여자가 자신에게 무엇이었길래? 손을 잡아본 것도, 대화를 나누어 본 적도 없는 타인이었을 텐데. 자신을 향해 시선 한 번 던져 준 적 없는 그런 이였는데.

문득 든 생각에 머릿속은 뒤집혀 심해 속을 헤엄치는 듯한 감각을 선사했다. 아아, 그러게 말이다. 어째서지? 왜, 그 여자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무너질 것 같다고 울게 되는 걸까. 가사를 끼적이던 손은 그 생각에 멈추었다.

아이돌이 되어서 노래하는 감정은, 대체 무엇의 조각이었을까. 왜 사랑이라는 단어를 눌러쓸 때,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을 생각하는가.

 

대답은 야속하게도 빨랐다.

 

아, 사랑하게 되었구나. 어느새 자신의 일부가 된 그 여자를 미련하게도 사랑하게 되었다. 눈빛 하나, 손짓 하나 스칠 수 없는 사람인데 어찌하여 사랑하게 된 걸까?

 

몇 밤을 더 기다렸을까. 그 사람이 돌아왔다.

예전만큼 찬란하진 못하더라도, 하얘진 입술로 지어낸 표정은 웃는 얼굴이었다. 그걸로 돼, 이름도 목소리도 모를 그대. 나를 알지도 못할 그대. 결국, 무대 위에서 부른 노래는 가슴 속을 울음으로 적셨다.

 

 

*  *  *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 해가 떨어지는 시간은 점점 빨라지는구나. 아오이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어둑해진 밖을 내다보았다. 연말이니 푹 쉬라며 아까도 매니저가 당부했다. 걱정할 것 없는데. 눈을 굴리며 대답하자 돌아왔던 따끔한 지적이 떠올라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손으로 감쌌다. 이제는 괜찮다, 정말이지 괜찮다.

구원이라는 말을 믿을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잊어버리는 것이 아쉬울 정도로 다정한 노래를 들은 뒤, 그녀는 구해졌다. 어둡고, 어두운 곳에서.

저도 모르는 새 옅게 미소지으며 그녀는 손을 내렸다. 오늘은 너를 보지 못한지 며칠이 지난 날이다. 그 노래가 아니라, 얼굴이라도 보면 다행일 텐데. 소리 죽여 중얼거리며 커튼을 끌어당겨 창을 가렸다.

곧 자정이다. 새로운 해에는, 그대의 이름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작은 소망을 빌며 호시카게 아오이는 침대에 기대앉았다. 새해가 되면, 그래도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무언가가.

 

 

 

누군가의 느릿한 숨소리가 가깝다. 이상하다, 자신이 내는 소리가 이렇게 깊은 소리였던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자 엷은 빛에 눈이 따갑다. 으음, 작게 소리를 내며 눈을 비비자 다른 이의 손길이 어깨에 내려앉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남자의 낮은 한숨 소리. 눈을 다시 뜨자, 놀라울 정도로 가까운 얼굴이 바로 앞에.

 

“당신은 나의 꿈이었는데, 오필리아.”

 

잠에 취한 듯, 웅얼 이는 말이 귓전에 닿았다. 오필리아. 유독 속삭이는 말이 부드럽게 느껴진 건 착각이었을까? 그는 눈을 휘어, 상냥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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