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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을 보았을 뿐인데 시선은 탁자 다리 사이가 보였다. 몸을 구부렸을 때에서야 제대로 보일 광경을 보고 있는데도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못했다. 밑을 내려다보니 회의실 바닥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멍!”
  귀를 의심하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쪽은 하얀 털이, 왼쪽은 황갈색 털이 나있었다. 동그랗게 변해버린 발을 보다가 몸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길쭉한 황갈색 허리, 하얀 털이 난 짧은 다리, 보이지 않는 꼬리. 이 모양은 전에 본 기억이 있었다. 비파는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회의실 안쪽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 거울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얼른 그 쪽으로 가서 손을 탁자로 뻗었다. 그러나 곧 공중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제야 자신이 지금 본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멍멍!”
  이제 어쩌면 좋을지 적당한 해결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비파는 한숨을 뱉었다. 당장 회의실을 나가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고 있던 옷은 다행히 바닥에 대부분 흐트러져 있었지만 핸드폰이 들어 있는 가방은 의자 위에 있었다. 가령 의자를 넘어트려서 핸드폰을 만진다고 해도 이 상태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이 손으로는 문자를 쓰는 것조차 불가능해보였다. 사람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지만 이 후에 이 회의실에서 다른 일정이 잡혀있다는 말도 들은 것이 없어서 비파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뱉었다.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서 의자 쪽으로 달려갔다. 손으로 의자를 밀었지만 짧은 길이 탓에 그렇게 많이 움직이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서 계속 의자를 밀다가 점프를 하는 것으로 의자를 밀고자 했다. 당연한 수순으로 머리를 의자에 부딪쳤다. 의자는 크게 기울어 넘어지고 비파도 바닥에 넘어졌다. 순간 시야가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비파는 머리를 한 번 흔들고 의자에서 떨어진 가방으로 달려갔다. 안의 내용물은 대부분 쏟아져 나와 있었고 그 사이엔 핸드폰도 있었다. 전화벨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비파는 오른손으로 화면 위를 밀었다. 전화가 연결되기는커녕 핸드폰이 조금 옆으로 밀렸다.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화면을 옆으로 밀자 드디어 전화가 연결됐다. 스피커에서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파, 전화 받을 수 있어?”

  “멍!”
  “비파?”

  “멍멍!”
  아이는 자신이 아는 비파의 목소리가 아니어서 그런지 다시 한 번 그녀를 불렀다. 비파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오로지 하나 뿐이었다.
  “비파는 없는 거야?”
  “멍!”  

  “비파가 핸드폰을 놓고 갔나 보네. 금방 갈게.”
  “멍멍!”
  기쁘게 외쳤고 전화는 끊어졌다. 신이 나서 핸드폰 옆에 앉았다. 문을 바라보며 가만히 앉아있었다. 아이가 온 건 10분 후였다. 아이는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살피더니 비파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반가움에 짖는 소리를 듣고 그가 말했다.
  “네가 전화를 받은 거야?”

  “멍!”

  “비파는 아직 안 왔나 보네.”
  “멍멍!”

  두 번 짖은 후 고개를 열심히 저었다. 아이는 자리에 앉아서 비파를 내려다보았다. 비파는 어떻게든 자신이라는 걸 전하기 위해서 계속 짖고 또 고개를 저었다. 아이에게서는 별다른 반응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비파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마지막에 비파가 선택한 것은 핸드폰이었다. 그녀가 앞발을 사용해서 여러 번 화면을 옆으로 넘겨서 화면을 켰다. 끙끙거리며 겨우겨우 메모 앱을 켜서 자판을 치기 시작했다. 도톰한 앞발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히라가나로 비파를 적기 위해서 B 자를 치려고 하면 자꾸 옆의 V자를 치게 되거나 했다. 5번 실패 끝에 바닥에 엎드렸을 때 아이가 핸드폰을 집었다.
  “뭘 쓰고 싶은 거야?”

  “멍!”

  “아까부터 계속 B 자를 치려고 했지?”

  “멍!”

  “그 다음은 뭐야?”

  “멍멍!”

  “좋아. 그럼 맞는 걸 가리킬 때 짖어봐.”

  “멍!”  

  아이가 다시 바닥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판에 손을 가져갔다. 하나씩 글자를 가리키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I를 가리킬 때 한 번 짖었다. P를 가리킬 때, A를 가리킬 때 짖었다. 그러자 아이가 나를 보았다.
  “비파의 이름을 네가 어떻게 알아?”

  “멍!”

  “그렇게 말해선 의미를 알 수가 없는데.”

  아이는 고민하다가 다시 핸드폰에 손을 가져갔다. 다시 한 번 해보자는 말에 한 번 짖었다. 그 후 I‘m Bipa!를 거의 완성할 때쯤 아이가 비파에게 시선을 주었다. 
  “네가 비파라고?”

  “멍!”
  거의 없는 꼬리를 격하게 흔들면서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비파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은 조금 흔들리는 것 같았다. 비파가 몇 번 짖으며 그의 무릎 위에 오른발을 올려놓았다.
  “핸드폰을 다룰 줄 알고 글자를 아는 것을 보면 거짓이라고 판단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네. 바닥에 떨어져있는 가방이랑 바닥에 있는 옷도 비파가 평소에 입던 옷이고.”

  “멍멍!”

  “일단 박사에게 가보는 편이 좋을 것 같네.”

  “멍!”

  아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가지와 물건들을 가방 안에 담았다. 의자를 다시 세워서 바르게 정돈하였다. 가방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비파를 품에 안았다. 그 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세실이었다. 그는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회의실 안을 훑어보더니 비파를 보고 입을 크게 벌렸다. 황급히 그녀에게로 다가와서 두 앞발을 잡았다.
  “비, 비파. 미안해요.”
  “멍?”

  “무슨 일이야, 세실?”

  “아이 선배. 미안해요. 동물로 변하는 마법이 걸린 부채를 깜빡하고 그냥 회의실에 두고 와버렸어요. 비파가 이렇게 된 건 다 내 탓이에요.”

  “……동물로 변하는 마법?”

  “Yes! 미안해요.”
  안절부절 못하는 세실을 진정시키고 나자 이번에는 아이가 혼란을 느낀 것처럼 말했다.
  “마법이라니, 비과학적인 이야기가 나왔네.”
  “실제로 존재합니다.”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오히려 간단히 믿게 된다는 말이 생각나네. 이런 비효율적인 감정을 인간은 매번 느끼고 있는 거야? 이해가 안 돼.”

  “멍멍!”
 비파가 짖은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그런 그녀를 보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그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난 후에 듣기로 하고 해결책을 물었다. 세실은 그건 간단하다고 말했다.
  “그렇게 강한 마법은 아니니까요.”

  “그럼 어떻게 하면 풀리는 거야?”
  “마법 효과는 30분 정도만 유지되도록 되어 있으니까 그냥 이대로 기다리면 될 거예요.”

  “그럼 여기 있는 편이 좋겠네. 박사에게 가는 동안 마법이 풀릴 수도 있으니까.”
  “멍!”
  세실은 다시 한 번 미안하다고 말한 후에 탁자 위에 놓인 부채를 챙기고 회의실을 나갔다. 닫힌 문을 잠시 보다가 아이는 비파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가방을 의자에 놓고 그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비파가 그를 빤히 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하고 그가 웃었다.
  “내가 온 지 10분 정도 지났으니까 5분 정도 후면 풀리겠네. 3분 51초 후에 내가 밖으로 나가있을게. 옷 입고 나와.”
  “멍!”
  “이렇게 강아지가 된 비파도 색다르네. 종은 귀나 얼굴, 몸을 봐선 웰시 코기네.”
  “멍!”

  “귀여워.”
  “멍멍!”
  비파는 웃으려고 했다. 잘 웃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곧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웰시 코기는 본래 웃는 것처럼 보였다. 비파가 봐온 웰시 코기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믿었다. 그녀를 마주하고 아이는 조용히 관찰했다. 이리 저리 비파를 둘러보면서 그는 간혹 털이나 귀의 모양,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짧은 꼬리, 하트 모양 엉덩이, 짧은 다리, 웃는 얼굴에 대해 여러 모로 이야기를 했다. 비파는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다가 맞장구를 칠 타이밍에 짖었다. 그리고 3분 51초 이후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나가있을게.”

  “멍!”
  아이가 회의실을 나가고 비파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탁자 위에 앉아서 초침이 지나가는 것만을 뚫어져라 보았다. 10초가 지나고 20초, 30초, 50초. 마침내 59초가 되었을 때 비파는 한 번 더 짖었다. 그와 함께 비파의 몸을 노란 빛이 감쌌다. 눈을 꾹 감고 속으로 초를 세었다. 100초를 세었을 때 눈을 떴다. 시야는 다시 높아져있었다. 비파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하얀 손은 항상 보던 익숙한 모양이었다. 양손을 들어서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종이와 칼에 베인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것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춥네. 얼른 옷 입자.”

  탁자에서 내려가 가방에서 옷을 꺼내어 입었다. 따스한 판초까지 몸에 걸치고서 그녀는 회의실 문을 열었다.
  “다 됐어?”

  “네.”

  “이제 집에 가자. 오늘 오후는 오프이기도 하니까 같이 차를 마시자.”
  “고마워요, 아이.”

  “나야말로 돌아와줘서 고마워, 비파.”
  “미안해요.”

  “일단 회의실로 들어가자.”

  아이가 비파를 회의실 안으로 다시 이끌었다. 그리고 문을 닫자마자 그녀를 끌어안았다. 비파는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웃음을 지으며 양팔로 그의 허리에 둘렀다.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부디 그래주길 바랄게.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있을 때 이번처럼 세실이 나타나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알았어요.”

  그를 올려다보면서 웃었다. 바로 몇 분 전에 온몸에 느껴졌던 그의 품은 이제 다시 그녀의 몸에 딱 맞게 안아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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