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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 솜방망이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톡톡 걸음을 옮겼다. 앙증맞게 발톱을 숨긴 자그마한 발, 작은 발 위 쭉 뻗은 역시 작은 다리, 조그마한 몸통, 복실복실하게 살랑거리는 긴 꼬리, 반짝반짝 보드라워 보이는 까맣고 폭신폭신한 털,

털로 덮인 조그마한 분홍색 귀가 쫑긋하고 움직인다. 별이 박힌 것 같은 까만 눈동자를 깜빡깜빡, 감았다 뜨며 커다란 성채를 둘러보는 작은 고양이의 귀에, 아주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르ㅡ네?”

 

 

성대를 긁듯 낮게 으르렁대는 사내의 목소리가, 지극히 어울리지 않는 달콤함을 담고 울린다. 마치 애인이라도 부르듯이,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한, 아주 사랑스러워 죽을 것 같은ㅡ절절한 꿀빛을 담은 나긋하고 달큰한 목소리. 르네, 어디 있니, 하고 말투까지 누그러트리며 속삭이는 말소리에, 고양이, 르네는 크게 먀! 하고 대답하곤 토토토 발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걸어가자 목소리가 멀어진다. 이 쪽이 아닌가? 그러면 저 쪽이다! 하지만 그 쪽도 아니었다. 결국 제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갈팡질팡 배회하던 르네는, 갑자기 멀어지는 바닥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공중에서 헛발질했다. 바닥이 안녕이다냐, 르네는 허공을 걷는다냐.

 

 

“이 쪽, 이 쪽이다. 우쭈쭈.”

 

 

발톱까지 세우며 바동거리는 작은 몸을 익숙하게 고쳐 안은 사내는 행복이 넘쳐 흐르는 표정으로 까만 머리 위에 쪽쪽 입술을 맞댔다. 부드러운 털 아래 작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얇은 살갗과 그 아래의 머리뼈, 아주 연약하고 기묘한 감각. 그는 부드러운 한숨을 토해내며 보들보들한 목덜미로 얼굴을 옮기다 솜방망이로 한 대 얻어맞았다. 먀악! 하고 격렬한 거부를 표하며 발광하는 르네에게 어거지로 뽀뽀하다 발톱에 잔뜩 긁히는 것이 퍽 얼빠진 모양새다.

사내는 간간히 와닿는 날카로운 발톱에 눈썹을 움찔거리면서도 입가에 잔뜩 풀어헤쳐진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음영진 광대뼈와 깊게 그늘진 눈가, 왼눈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의 힘을 입어 그닥 좋지 않은 인상에 얼굴 여기저기에 훈장처럼 남은 발톱의 흔적이 흉악함을 더하고 있으나, 그는... 그래, 그닥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실 정도로 선명한 라임색 눈동자가 꿀처럼 녹진녹진해지고 부드럽게 풀려, 이미 눈이고 입이고 잔뜩 퍼진 미소를 띤 뒤다. 완전히 팔불출 집사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뭐랄까 일방적인 반항의 현장을, 반 정도 충성스러운 그의 부하 직원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매그너스 님이 또 고양이를 괴롭히고 계신다.

자기 딴에는 예뻐해주는 거라지만ㅡ그리고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예뻐 죽고 있지만ㅡ 정작 붙들려 있는 르네는 참 안쓰러운 모양새였다. 먀아아아아, 이야아아아앙. 하고 곧 죽을 것 같은 목소리로 엉엉 울면서도 아주 체념한 모양으로 솜방망이만 파득파득 허우적대고 있다. 표정에서 제 운명을 알아챈 무언가의 기운이 흘렀다, 아주 사람이 따로 없었다. 누가 짐승인지 원.

하기사 발톱으로 바득바득 얼굴을 긁어 피가 질질 흘러도 놓아 주지를 않으니 그럴 만은 하다, 심지어 그렇게 피를 내놓아도 닦을 생각은커녕 그대로 털옷에 부비작대기나 하니. 그러고 보니 르네 광견병 주사를 맞혔던가, 부하 직원, 그러니까 벨데로스는 조금 심각해졌다가 르네의 왱알대는 울음소리에 이내 생각을 그만두었다. 쟤는 병 없을 거야, 아마.

 

 

“르네, 예쁜 르네. 오빠 뽀뽀ㅡ 착하지,”

“갸아아아아앙.”

 

 

아니 걔 별로 안 착해요. 입술을 들이대다가 솜방망이로 얻어맞는 헬리시움의 폭군께서는 솔직히 좀 웃기긴 했지만 웃기는 것보다 더 깼다. 2M에 육박하는 장신의 남자가, 그것도 뿔 달렸고 꼬리 달렸고 날개 달린 시꺼먼 용 남자가, 아니 그것보다 자기 종족 뒷통수 치고 반 말살시켜서 기어이 왕 자리를 얻어낸 지고하고 위대하시며 오만한, 피도 눈물도 없는 폭군 노바가, 지 손바닥만한 까만 고양이한테 애정표현 좀 받겠다며 저러고 있다. 우와 대박. 지 친구들 다 버리고 매그너스 밑에 기어들어온 어쨌든 배신자 벨데로스는 영혼 없이 감탄을 내뱉었다. 물론 속으로.

벨데로스가 속으로 혼 없이 감탄하거나 말거나 결국 기어이 르네의 조그만 분홍색 콧잔등에 잔뜩 뽀뽀를 퍼부은 매그너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떼었다. 얼굴에는 영광의 상처가 가득했다, 아직 선홍색이 선명한 상처가 따가운지 조금씩 인상을 움찔거리면서도 결코 싫은 얼굴은 하지 않는 것이, 제 승리가 아주 흐뭇한 눈치다.

 

 

“쮸쮸, 르네야, 냐옹? 삐졌냐?”

 

 

잉잉 울며 팔 안쪽으로 파고드는 작은 온기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 참, 귀찮게 굴어서 삐진 주제에 숨는 곳은 제 팔 안이다. 간질간질한 온기에 완전히 녹아버린 매그너스는 달콤한 눈으로 까만 털이 보송보송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냐옹냐옹 서툰 고양이 소리까지 흉내내며 아양ㅡ물론 이것은 지극히 매그너스 기준이다ㅡ을 떨자 작은 귀가 귀엽게 몇 번 쫑긋거린다. 냐옹, 냐ㅡ옹. 낮게 그르렁대는 목소리와 귀여운 발음의 울음소리는 영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기묘한 조화를 이루어, 음, 그러니까 보고 있던 벨데로스의 표정을 구기는 정도의 파급력은 일으킬 수 있었다.

 

진심으로, 하늘이 통탄할 일이었다. 그 매그너스가 애묘노바라니! 매그너스를 끌어내고 헬리시움을 되찾으려 이를 아득바득 갈고 있는 판테온 측에 이 정보를 전해 준다면 무슨 헛소리냐며 몰매맞고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매그너스는 고양이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었다, 그래, 않았‘었’다. 이쯤 되면 벨데로스마저, 자신이 저 자그마한 털뭉치를 살려둔 것이 잘 한 일인지 의문이 들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저 고양이, 벨데로스의 작은 오지랖으로 목숨을 부지한 사랑스러운 솜 덩어리가 성채의 식구가 된 것은, 고작 몇 달 전의 일이었다. 말인즉슨 매그너스의 근본 없는 고양이 성애가 시작된 것도 고작 몇 달 전, 그래 몇 달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는 뜻이다.

 

르네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잡종 고양이였다. 지금도 자그마한 몸집인데 몇 달 전에는 더 작았고, 그리고 더 빨빨빨 돌아다녔다. 조그만 것이 겁도 없는지, 수많은 몬스터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와 뻔뻔스레 성채의 주방 찬장에 자리를 잡은 것을 벨데로스가 발견한 것이 시작이었다.

 

 

 

 

“......매그너스 님, 얘 어쩌죠?”

“내다 버려.”

“먀아아.”

“그래도 아직 새끼 고양이...”

“내다 버려.”

“인데...”

“내다 버려.”

“...네.”

 

 

와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다. 벨데로스는 툴툴대며 한 팔로 고양이를 안고 성채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팔이 뭐냐, 한주먹도 안 될 정도로 작은 크기였다. 바들바들 떨며 먀아먀아 울어대는 것이 솔직히 말하면 양심에 찔릴 정도로 가여웠지만, 음... 녀석이 먹어치운 식량이, 그게 좀, 많았다.

 

 

“너 그 쪼끄만 몸으로 대체 뭘 그렇게 많이 먹어댔냐?”

“먀아아아.”

“좀 덜 먹었어도 숨겨 주는 건데 너무 많이 먹더라...”

“먀아아아앙.”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 걸면 꼬박꼬박 대답은 한다. 영특한 건지 아닌 건지, 어쨌든 상당히 귀엽기는 했다. 먹보지만.

먹이가 사라지는 것 외에 별 흔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몰랐는데, 어째 간식거리 비슷한 것만 가져 오면 분명 먹는 사람도 없는데 며칠이면 부쩍 줄어 있는데다, 그 외에도 조금씩 식량이 사라지는 것 같기에 세어 보니 하루에 고기가 한 덩이는 넘게 종적을 감추었더랬다. 생크림에 설탕도 두 통 정도 사라졌고 얼마 전에 보니 바로 전 날 공수해 온 과일이 두 팩 사라졌다. 그렇게 먹고도 탈이 안 나나? 애초에 고양이가 그런 걸 먹어도 되는 거야? 벨데로스는 조금 애매한 표정으로 쪼끄만 먹보의 볼을 쿡쿡 찔렀다. 이야아아아앙. 반항어린 목소리로 크게 우는 것이 아무튼 기운차 보였다. 근데 이 녀석 대체 어디서 온 거야.

주변은 숲이고, 뭐 아무래도 이전 도심지라 고양이가 지낼만한 곳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몬스터가 꽤 많았다. 방금만 해도 스펙터 정찰병이 인사하고 지나갔는데.

 

 

“재주도 좋다... 야, 그 재주로 저기... 뭐냐... 판테온 노바들이나 찾아가, 매그너스 님은 성질 더러워서 너랑 안 산대.”

“미야아앙.”

 

 

왠지 좀 싫어하는 것 같다. 안은 팔 안에서 머리를 뒹구는 고양이를 괜히 쓰다듬은 벨데로스는 몬스터가 잘 보이지 않는 숲에 도달해서야 고양이를 땅에 내려주었다. 잘 살아라, 너라면 장성해서 새끼 열 마리는 깔 거야. 땡글땡글 바라보는 눈에 양심이 좀 아팠지만 별 수 없다, 성채 주인이 나가라는데 뭐 어째.

 

 

“냐아아.”

 

 

근데 따라온다.

와, 저것도 발이라고 움직이네. 제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한 다섯 걸음은 걷는 것 같다. 완전 쪼끄맣고 귀여웠다. 솜뭉치가 복실복실 꼬리를 흔들며 뽈뽈뽈 따라 기어온다, 솔직히 마음같아서는 그냥 다시 데리고 가고 싶었지만 벨데로스는 후환이 두려울 줄 아는 남자였다. 그래서 날았다. 날개는 두고 뭐 해. 땅 아래에서 컁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조용히 양심을 접으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잘 지내야 한다 솜덩어리야...

 

 

“...내가 이거 갖다 버리라고 안 했냐?”

“우애앵.”

“......버렸는데요.”

“근데 왜 이게 여기 있는데!”

“우애애앵.”

 

 

그러게요 걔가 왜 거기 있죠? 벨데로스는 성깔 더러운 매그너스 님의 손에 무슨 털뭉치처럼 덜렁 들려 우애앵 하고 울어대는 솜덩어리를 아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저 멀리 갖다놨는데 언제 찾아왔는지 모르겠다.

 

 

“우애애애앵.”

“아, 시끄러. 야, 다시 갖다 버려.”

“고양이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내 귀가 더 불쌍하다. 꼬우면 너도 얘랑 같이 갖다 버려 줄까?”

“어휴 아닙니다 제가 까라면 까야죠.”

 

 

벨데로스는 그래서 고양이를 또 안아들고 또 숲으로 가서 또 버리고 또 날아서 도망쳤다. 이번에는 고양이가 캬아앙 하고 안 울고 우애앵 하고 울었다, 솔직히 좀 불쌍했는데 불쌍하다고 갖다 키우면 세트로 버려질 것 같았다. 벨데로스는 고양이가 아니라서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어야 했다. 물론 중간에 좀 개길 수는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결국에는 하라는 대로 헀었더랬다.

 

 

“근데 얘가 또 왜 여기 있을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냐?”

“먀우웅.”

 

 

저거 진짜 뭐지? 고양이는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러운 표정이었다. 살기를 펑펑 풍기는 험악한 남자의 한 손에 목덜미를 잡혀서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겁먹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먹은 게 다 배짱으로 갔나? 솔직히 벨데로스는 좀 감탄했다. 그리고 매그너스 님은 그 배짱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으냐며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아니 잠깐.

 

 

“자자자잠깐만요!”

“먀아아.”

“왜.”

“죽이시게요?! 설마 죽이시게요?!”

“근데 뭐.”

“얘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전혀?”

 

 

...그리하여 사람이 죽으면 별로 신경 안 쓰지만 동물이 죽으면 울면서 묻어주곤 하는 감성을 지닌 소년 벨데로스(노바족, 배신자)는 시큰둥하게 말하는 매그너스의 손에서 얼른 털뭉치를 뺏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제가 키울게요!”

“여기가 동물농장으로 보이냐?”

“제가 제 몫 덜어서 밥 주고 털 치우고 매그너스 님 눈에 안 보이게 잘 관리하면 되잖아요! 이 쪼끄만 게 벨 데가 어디 있다고 그러세요 진짜?!”

 

 

저 매그너스 님 서류 안 도와 드릴 거예요! 파업할 거라구요! 하며 작은 고양이를 끌어안는 벨데로스를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쳐다보던 매그너스는 잠시 생각했다. 밥을 자기 몫에서 떼다 준다고? 그럼 일단 식량은 더 안 없어질 테고. 털은... 아무리 눈에 안 보이게 처리해도 날릴 것 같은데. 그렇지만 애초에 저게 자기 방까지 기어들어와서 자고 있길래 들고 나오는 길이었다. 그 정도로 가까이 있었는데 딱히 목이 칼칼한 기색은 없다. 좀 당겨서 얼마나 빠지나 확인해보려 손을 뻗자 벨데로스가 아주 경계하는 눈으로 뒷걸음질쳤다. 저게 사춘기 반항아도 아니고.

 

 

“......뭐 그래... 애들 정서에는 애완동물이 좋지.”

“뭐요?”

“내 눈에 안 보이게 하라고.”

“......예.”

 

 

벨데로스는 걸고넘어지기를 포기하고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야, 내가 너 살렸어. 아는지 모르는지 자그마한 솜덩어리는 어느샌가 새근새근 잠자고 있었다.

 

 

근데 어쩌다가 매그너스 님이랑 저런 사이가 되었느냐고. 벨데로스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까만 먼지 덩어리만한 걸 제 끼니 걸러가며 그나마 좀 고양이 태가 나게 길러 놨더니 매그너스 님이 홀랑 집어가서 원래부터 지 새끼였던 양 우쭈쭈거리고 있다. 르네도 반항은 하는데 막상 놔두면 쫄래쫄래 매그너스만 따라갔다. 사실 처음부터 좀, 르네는 유별나게 매그너스를 좋아하긴 했다. 매그너스가 저를 질색하던 시절에도 어디 묶어두지 않으면 매그너스 옆에 착 붙어 있으려 들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르네가 매그너스를 꼬신 걸지도 모른다... 아니, 근데 고양이가 꼬신다고 넘어가면 어떡해? 벨데로스는 다시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르네, 우쭈쭈쭈, 우리 예쁜 르네. 연어 줄까? 응? 연어 먹고 싶어? 연어 먹자.”

“먕!”

“대답 잘 하는 것 좀 봐, 누구 고양이길래 이렇게 예뻐.”

“먕!”

 

 

고양이가 아니라 개 같다, 개. 연어라는 말에 낚여 고개를 번쩍 든 르네가 개 짖는 톤으로 컁컁 대답하다 다시 매그너스에게 애정표현을 빙자한 괴롭힘을 받았다. 바동바동 뒤집어진 배에 코를 부빈다, 당연히 매그너스는 솜방망이로 뺨을 한 다섯 대 정도 얻어맞았다. ...물론 데미지는 없었다.

 

 

“발도, 발도 이렇게 작아서 어쩔래. 응? 언제 다 클래? 요 쪼꼬맹이야.”

“갸아앙! 갸앙! 컁!”

 

 

걔 다 컸어요, 매그너스 님. 아무리 먹여도 안 큰지 좀 됐다. 그러나 벨데로스가 속으로 진실을 외치든 말든 매그너스는 르네를 괴롭힐 뿐이었다. 작은 발을 붙잡고 조물거린다, 핑크색 육구가 곰돌이마냥 귀엽기는 한데 그걸 만지작거리는 매그너스는 영 안 귀여웠다. 냐우냐우 울부짖는 르네를 더없이 즐겁게 쳐다보고 있었다. 예뻐하는 게 아니라 그냥 괴롭히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벨데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도 따라다닐 생각을 하는 르네가 장한 건지 바보 같은 건지 구분이 안 간다.

 

 

“르네야, 연어 먹자, 연어~”

“먀아아아...”

 

 

목소리가 우는 톤이다. 잉잉 안믿는다냐. 훌쩍훌쩍 울면서 매그너스의 팔 안쪽으로 몸을 웅크리는 것을 지나칠 정도로 행복하게 바라보던 매그너스가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야, 벨데로스.”

“헉 깜짝아 네?”

“...뭔 생각 했냐?”

“아뇨 뭐.”

 

 

히익 짤리는 줄 알았네. 따끈따끈한 미소가 남아 있던 얼굴이 급격하게 식어간다.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린 채 못마땅한 기색을 띠고 있는 매그너스는 더없이 사나워 보였다. 그럼 뭐 해, 품 안에 고양이가 동글게 말려 꼼지락대고 있었다. 완전 안 어울리고 귀여웠다.

 

 

“연어 가져와, 연어.”

“......성채 식구들 먹을 것도 없는데요.”

“지금 걔네가 중요해?”

“르네 먹으면 매그너스 님도 못 드세요.”

“어, 가져 와.”

 

 

와 고양이가 상전이다. 르네는 연어를 좋아했다, 물론 훈제 연어도 엄청나게 좋아했는데 생연어를 더 좋아했다. 그리고 헬리시움은 전시였다. 덧붙여 주변에 바다도 없었다. 그런데도 벨데로스는 꼭 일주일에 한 번은 무슨 수를 써서든 연어를 구해 와야 했다, 그것도 아주 싱싱한 놈으로. 르네가 하루 안에 안 먹으면 훈제를 했고 하루 안에 먹으면 다음 날에 또 구해와서 미리 훈제를 했다. 이렇게 국고가 비어가는 것이다.

미인에 미쳐서 나라 망친 왕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미묘에 미쳐서 나라 망치려는 왕은 어딜 찾아봐도 없을 것이다, 폭군 매그너스는 고양이 때문에 망했다고 역사에 적힐 것을 생각하다 벨데로스는 아주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역시 좀 괜히 주워 와서 진짜.

물론 진짜로 헬리시움이 망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매그너스는 그렇게 분별력 없는 남자가 아니었다, 뭐 무기도 사고 식량도 조당하고, 늘 하던 대로 했는데 연어가 추가된 것 뿐이었다. 그 놈의 연어 진짜.

오히려 예전보다 덜 쪼들리긴 했는데 벨데로스는 그게 더 쫄렸다. 매그너스한테 물어봐도 르네가 먹을 연어는 르네 본인이 번 돈으로 사는 거니까 괜찮다는 뭔 동물숭배자의 헛소리 같은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아니, 진짜 동물숭배자가 된 건가? 벨데로스는 문득 음모론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보니 딱 걸리는 날이 있기는 했다, 르네에게 이름이 생긴 날이었는데, 무려 그 이름도 매그너스가 먼저 지어 줬었더랬다. 아니지, 지어 준 게 아니었나?

그 날 아침은 유달리 몇 번의 노크 끝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 전날 저녁은 르네가 대답을 안 했고, 아마 그게 복선이고 그게 전개였을 것이다, 일단 일은 하셔야 하니까ㅡ라는 명목이 있기는 했지만 사실 벨데로스는 그냥 매그너스가 늦잠자는 게 꼴보기싫었다ㅡ 대답이 없어도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매그너스는 비몽사몽 반쯤 자다 깬 얼굴이었고 그리고 거기 르네가 있었다. 고 옆구리에 틀어박혀서 도롱도롱 자고 있었다. 뭣 됐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매그너스는 식겁하며 르네를 가져가려던 벨데로스의 뒷덜미를 잡았다. 헉 잘못했습니다. 르네 내놔. 예? 걔 이름. 예? 주고 문 닫고 나가라. 예? 더 자게... 그러고 르네를 강탈한 다음에 정말 더 자고 나왔다. 벨데로스는 약간 마시멜로우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저 영문 모를 고양이 성애가 시작된 것이었다.

...진짜 그 날 뭐가 있었나?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아예 처음부터 저러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냥 처음에는 옆에 돌아다니게 뒀었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저 지경이었다. 얼마 전에 아주 그러다가 고양이랑 결혼하시겠어요, 하고 지나가던 투로 던지니까ㅡ얻어 맞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대답이 돌아왔다ㅡ 재미있는 농담을 들었다는 양 웃다가 동물이랑은 법적으로 결혼 못 하잖아, 하고 말했다. 그러니까... 잠깐만, 지금 생각해 보니까 대답이 좀 잘못된 것 같은데. 법적으로 괜찮다면 상관없는 거야 저 노바? 동물숭배자가 아니라 동물성애자가 된 거였나? 벨데로스는 연어를 손질하며 아주 진지하게 생각했다. 판테온으로 돌아갈까.

 

물론 실상은 벨데로스의 생각과... 음, 사실 아주 큰 차이는 없었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르네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전했고, 매그너스는 그 날 악몽도 불면도 없이 아주 푹 잠에 들었고, 또 르네는 정말 돈을 물어오고 있었다. 그러니까 매그너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는데 딱히 또 벨데로스의 생각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까 매그너스는 르네를 사랑했다. 뭐 굳이 성애적인 의미일 것도 없었지만 성애적인 의미가 아닐 것도 없었고, 그건 또 르네가 평범한 고양이는 아니기 때문에 생기는 기묘한 부분이었고.

 

 

“연어 곧 올 거다.”

“으으응.”

 

 

르네는 매그너스의 팔 안에서 다리를 바동거렸다. 길게 쭉 뻗은 하얀 다리는 아무리 봐도 인간의 그것이다, 벗은 몸을 데골거리던 까만 머리카락의 여자아이가 동글동글한 까만 눈으로 매그너스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낸 상처가 한가득이다, 근데 딱히 미안하지는 않았다. 르네는 뽀뽀 싫다고 했다냐.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 아프게 된 건 좀 불쌍하니까 쓰다듬어 준다냐. 딱지가 얹힌 상처를 쓰다듬자 조금 눈썹을 찡그리다가 웃는다.

 

 

“계속 그 모습으로 있으면 좋은데.”

 

 

고개를 또 도리도리. 연어를 대가로 얻어 낸 십 분 간의 소녀 모습이다, 매그너스는 조금 웃다가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다. 아무튼 참 좋은 냄새가 났다. 고양이일 때와는 또 다른 보드라움이 있다. 매그너스는 좋았지만 르네는 인간의 몸이 별로 유쾌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나 잘 하던 대답도 하기 싫어 부루퉁해져 있다. 하기사 본체는 고양이라고 했고. 르네는 자신의 정체성에 지나치게 프라이드가 높았으며, 저 모습이면 고양이라고 칭하기가 애매했다.

매그너스는 르네를 사랑했지만 일단 계기는 그녀가 고양이이기 때문이었고. 인간 모습을 하고 있으면 뭐, 어, 굳이 인간이 아니라고 할 것도 없기는 했지만. 아무튼 매그너스도 나름 복잡했다, 그 복잡함을 어쨌든 고양이 안에 뭉뚱그려 담은 것 뿐이었다.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뻐하는 건데 또 인간이라서 예뻐하고도 싶었다.

그래서 결론은 어쨌든, 고양이. 그냥 고양이는 아니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아로마 테라피 고양이.

 

 

“이제 끝이다냐!”

“아, 조금만 더.”

 

 

싫다냐, 르네는 르네다냐. 고개를 팩 돌리고는 금세 조그만 털덩어리가 된 르네가 매그너스의 품에 꼬물꼬물 안겨들었다. 인간 말 싫다더니 막상 하면 잘만 한다, 쓸데없는 부분에서 칼같지만 않으면 참 좋은데.

매그너스는 툴툴거리는 르네를 쓰다듬으며 약간 웃었다. 연어 냄새가 났다, 어쩜 제 부하는 타이밍도 이렇게 완벽한지. 굳이 비밀 삼을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 우연이 겹쳐서야, 매그너스는 역시 저 혼자서만 비밀을 간직하고 싶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뭐, 어쨌든 고양이니까. 르네가 먀웅, 하고 작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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