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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당놈들입니다. 속지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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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이란 건 말예요, 뭘까요?”

“이긴 놈이지.”

“현답이네.”

 

냠, 자그맣고 사랑스러운 입 안으로 달콤한 생크림을 바른 크래커가 바삭 부서져 들어갔다.

 

 

“별로 제가 악당이라고 불리는 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여기가 만약 16세기의 왕정 국가였고 제가 그 나라의 귀족이거나 왕족이었다면 사람 좀 죽인 것 정도는 별로 큰 흠도 아니었을 테지만요. 아, 전쟁터의 병사였거나 기사였으면 오히려 칭송거리였겠구요.”

“넌 가끔 이해도 안 되고 이해할 필요도 없는 이상한 말을 한단 말이지.”

“가끔이라고 해도 돼요? 저 아직 할 말 많아요. 후회하실 텐데.”

“그래, 케이크 줄 테니까 먹고 입 좀 다물어.”

 

보기만 해도 당도가 느껴질 정도로 진한 초콜릿 색의 케이크가 테이블의 오른쪽으로 스윽 밀려갔다. 흰 생크림을 섞어 옅은 갈색이 된 종류가 아니라, 진득한 코코아 색 그 자체인 크림이 겉면에 덧발라진 그 케이크는 심지어 한 쪽 면에 비스듬하게 부어진 초콜릿이 굳어져 코팅되어 있었다. 테이블의 오른쪽에서 은제 포크가 슬그머니 튀어나와 케이크의 구석을 떠낸다.

 

“달다.”

“그렇겠지.”

“우웅.”

 

깜빡깜빡, 까만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반짝거렸다. 작은 볼이 빵빵하게 차올라 흔들리는 꼴을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둔탁한 손이 내는 딱딱한 소리에 포크를 쥔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네가 말하는 16세기의 어쩌구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를 죽이면 영웅이고 모험가를 죽이면 악당인 건 좀 웃기긴 해.”

“매으너흐 미믐, 우으응, 매그너스 님은 죽이기만 한 게 아니잖아요.”

“뭐어어어어...... 남자가 살다 보면 배신도 좀 해 보고 나라도 좀 팔아 보고 하는 거지. 그런 것보다 좀 더 먹어. 벨데로스가 열심히 구웠다.”

“움.”

 

말 돌리려는 거죠? 그럴지도. 배신도 해 보고 나라도 팔아 본 남자는 괜히 제 잘린 뿔의 단면을 만지작거렸다. 삐죽빼죽하게 잘린 검푸른 머리카락이 거칠게 손끝에 스쳤다.

악당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사나운 얼굴, 어떠한 전적의 증표인 눈을 가르는 흉터. 짙푸른 남색 갑옷은 벗은 날보다 입은 날이 많았다. 그의 등에 난 용의 날개는 악마의 것처럼도 보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확실히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테이블의 오른쪽에 앉은 여자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팔다리가 길게 쭉 뻗은 늘씬한 몸은 그리 작지 않았지만, 남자의 몸집에 비하면 소녀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빈 포크가 맥없이 발간 입술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빛망울이 몰려 그렁거리는 순진한 까만 눈이,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 얼굴을 ‘정말 못 이기게 만든다’고 표현하고는 했다. 속눈썹이 길고 폭 쳐진 커다란 눈, 톡 건드리면 울 것 같은 불그레한 눈가와 장밋빛 볼, 투명하다 못해 푸르러 보일 정도로 흰 피부의 무구하고 사랑스러운 미소녀.

 

“매그너스 님은 안 먹어두 돼요? 벨데로스는요?”

“됐어, 그거 다 너 먹어.”

“나중에 달라구 해도 안 줄 거야, 안 줄 거야.”

“벨데로스 놈 몫은 따로 있으니까 전부 너 먹어라.”

“정말요? 안심이당.”

 

 

“그것보다 아까 한 말에 이어서 말인데요.”

“아직까지 그런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냐? 방금 먹은 케이크 다 소화되겠다.”

“그치만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구 생각해요. 일례로 말이에요, 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희생되느냐에 대한 건데요.”

“흐음.”

“이를테면 완전한 채식주의자와, 식물형의 몬스터 정도는 먹는 반채식주의자와, 적당히 전부전부 먹고 사는 잡식성 인간과, 동물형의 몬스터들만 즐비하게 먹는 육식주의자가 있다면 말이죠, 그 인간들의 삶에서 궁극적으로는ㅡ육식주의자가 가장 많은 몬스터를 희생시키게 되는 거예요. 왜냐면 말이죠, 동물형의 몬스터는 식물형의 몬스터를 주식으로 삼잖아요? 식물형의 몬스터는 풀 같은 걸 뜯어먹거나 아무것도 안 먹고 말이죠, 그리고 다른 생물의 희생을 죄로 본다면...를 결과로 삼는다면?”

“호오.”

“그렇지만 이건 단순한 먹이사슬의 연장에 불과하니까, 이번에는 다른 예를 들어 볼게요, 보세요, 이 채식주의자의 삶이ㅡ80년 정도로 되어 있고, 그리고 육식주의자의 삶이 5년 정도 되어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죄가 더 깊을까요?”

“채식주의자겠지. 더 많은 걸 먹었으니까.”

“그렇지요! 바로 그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따지면요, 불로불사의 생을 가진 생물은 평범하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죄를 지은 게 되는 거예요, 그런 거라구요, 살아간다는 건. 결국에는 살아있는 건 다른 생물을 터전으로 삼아 짓밟는 죄인 거예요.”

“흐응.”

“뭐, 굳이 따지자면 말이죠, 장난삼아 생물을 죽이는 인간이 식습관에서부터 하나의 희생이라도 줄이려 심도깊게 노력하는 인간보다 좀 더 쓰레기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죠, 아참참, 방금 생각난 건데 있잖아요, 그래서일까요? 먹이사슬 제일~ 끝에 있는 초식성 몬스터들 몸집이 굉장히 큰 게 말이에요. 죽음의 형평화? 일까?”

“뭐어... 그래서 결론은?”

“음......”

 

“인간형의 생물체는 다 죽어버려... 일까.”

“영양가 없구만.”

“뭐어어.”

 

여자의 맨발이 테이블 아래에서 나풀거렸다. 남자의 키에 맞춘 의자는 여자에게는 제법 높았다. 닿지 않는 바닥을 스치며 팔랑이는 장밋빛 발끝과 짧은 스커트에는 가려지지 않은 흰 종아리가 유달리 사랑스럽다.

 

“역시 욕망에 솔직한 편이 좋다고 생각한단 말이지.”

“으흥흥, 르네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의미로 평의회 놈들은 쓰레기야.”

“르네도 그렇게 생각해요!”

“조용히 좀 해 봐.”

“힝.”

 

“애초에 말야, 종족의 안전을 한 놈의 선의에만 기대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않냐?”

“응ㅡ”

“생각도 없던 놈한테, 예고도 없이 갑자기 말이야. 당신은 영웅의 후손입니다ㅡ한다는 게, 웃긴단 말이지. 자자, 어서 힘을 키웁시다! 그리고 종족을 지키세요! 뭐냐고? 가디언이냐고? 수호 장승 같은 거냐고?”

“우응.”

“그리고 그 힘으로, 징징 울면서도 정작 강해지고 싶었던 노바의 실력은 훌쩍 넘어가버려. 웃긴 일이지. 어마어마하게 불공평하고.”

“원하는 인간에게 원하는 힘을 주는 편이 훨씬 나을 텐데 말이에요.”

“뭐, 그딴 생각도 못 하니까 그 머저리들이 나한테 먹히고도 한참을 그 꼬라지가 아니겠냐. 아마 지금도 그러고 있을걸? 어서 강해지셔야죠, 어서 강해져야지! 그리고 매그너스를 죽여! 우리의 적인 매그너스를! 전부 그 녀석 잘못이니까! 응? 그 뒤엔? 뭐, 아하핫 수고하셨습니다ㅡ 보상은 평화로운 매일! 그리곤 잡노예행. 땡.”

 

 

“뭐, 내 잘못이 아예 없다고는 안 해.”

“그야 그런 말 하면 거짓말이잖아요?”

“그렇지만 이기적이잖아? 솔직히 말이지.”

“과도하게 비난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는 없지요~”

“잘한 것 하나 없는 주제에 말이지.”

“그야, 몬스터랑 다를 바 없으면서.”

“자업자득, 자승자박.”

“손에 쥔 것들 말이죠, 자신들도 놓지 않으면서.”

“이제 내 것인데 놓아줄 리가 없잖아, 정말이지.”

“뭐, 머릿수 많은 쪽이 정의~ 라는 거겠죠.”

“이대로 몇백 년 쪽수를 불리면, 이 쪽이 정의가 될까.”

“하아아~ 어차피 우리가 없던 시절에는, 자기끼리 챙챙~ 치고 박던 주제에 말이죠.”

“역사책의 기록은 피로 쓰여 있다고.”

“웃기다고밖에는 못 하겠어요.”

“화살을 돌리면 자신들의 죄는 없어지니까 말이야.”

 

“부끄럽네요.”

“부끄럽지.”

 

여자는 발간 혀를 베, 하고 내밀었다. 혀 베어떠, 하고 칭얼대는 목소리에 고개를 숙인 남자가, 이제는 상처가 사라져 보이지도 않는 혓바닥 위를 가볍게 핥았다. 초콜릿 크림에 섞인 미량의 피 향기가 그의 혀 위로 파묻혀 들어갔다.

 

“우에.”

“엄살 부리지 마, 죽지도 않는 게.”

“욕망에 솔직한 편이 좋다면서요!”

“이건 욕망에 솔직한 게 아니고 그냥 과장이 심한 거다.”

“너무해애.”

 

불로불사의 미소녀는 오른쪽의 테이블에서 천진무구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반대편의 테이블에서, 강함을 추구한 침략자가 의자에 쭉 몸을 기댄다.

 

“케이크 더 먹구 싶어요.”

“이제 안 돼. 이따 저녁 먹어.”

“히잉.”

 

한 때 다른 이들의 터전이었던 행성의 수도. 폭군의 성채라 불리는 곳. 매일같이 그들의 땅을 되찾기 위한 용족의 후예나 지원을 온 인간형 생물 따위가, 두 악당의 손에 의해 핏덩어리가 되어 사라지는 곳.

 

침입자가 없는 날의 짧은 티타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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