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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슈퍼 단간론파 2 -안녕히 절망학원-’의 핵심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 게임을 플레이할 예정이 있으신 분은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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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해도 돼?]

히마와리에게서 오랜만에 받은 라인의 내용은 그것이었다. 녹색 말풍선에 간결하게 적힌 메시지를 본 히나타 하지메는 조금 당황스러운 심정이었다. 내용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니었지만 라인이 온 게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뭘 하는 건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로 해야 할 말이란 게 뭔지, 한순간 떠오른 의문이 산더미 같았지만, 하지메는 이내 복잡한 생각을 지워버리곤 짧은 답변을 입력해 전송했다. 라인으로 묻느니 전화가 빨랐다. 자신 역시 잠이 오지 않아 침대 위에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을뿐더러, 혼자 묵고 있는 호텔 방에서 한밤중에 전화하는 정도로 민원이 들어올 일도 없을 테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응.]

전화벨이 울린 것은 거의 읽음 표시가 뜬 직후였다. 하지메는 전화를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지메?]

몇 달 만에 듣는 소꿉친구의 목소리는 기억 그대로였다. 하지메는 등을 벽에 기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무슨 일이야?”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너 오늘 생일이잖아. 잠은 안 오고 해서 너 깨 있으면 생일 축하나 제일 먼저 해 주려고 했지. 진짜 깨 있을 줄은 몰랐다.]

생일 축하해. 자기도 어색해하는 듯한 축하인사를 들은 하지메는 잠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터라 반응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상했던지 히마와리의 목소리에 의문이 묻어났다.

[반응이 왜 그래? 너 혹시 까먹고 있었어? 1월 1일인데?]

“아니, 뭐……. 그냥.”

날이 날인지라 아예 잊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한동안 이래저래 바빴던 탓에 뒷전으로 미뤄 두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필 설과 겹치는 바람에 친구나 가족에게도 제대로 축하받는 건 거의 포기했던 생일이었기 때문에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히마와리에게서야 매년 축하 인사와 함께 작은 선물이라도 받긴 했었지만, 올해는 본가에 내려가지 않은 탓에 만나지도 못할 테니 어영부영 지나가겠거니 하고 생각하며 넘겼었다. 어쩐지 머쓱해진 하지메는 뒷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아무튼 고맙다. 생각도 안 하고 있었네. 바빴거든.”

[그래. 겨울방학에도 학교에 남았다는 말 들으니까 그럴 것 같더라. 설에다 생일인데, 그래도 며칠 좀 내려와 있지 그랬어?]

“좀 급한 일이라서.”

[그래, 아주머니께도 그렇다고 듣긴 했는데…….]

거기서 잠깐 대화가 끊어졌다. 전화 너머에서 히마와리의 침음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뭔가 고민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지는 목소리는 약간 주저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야, 하지메. 그 급한 일이란 거, 좀 이상한 건 아니지?]

“……이상한 거라니?”

[아니……, 방학도 모자라서 명절 연휴에까지 잡아 놓는다니까 이상해서 그러지. 그것도 학교에서. 그거 괜찮은 거 맞아? 너 안 좋은 일에라도 휘말린 거 아냐?]

“…….”

……안 좋은 일이라. 하지메는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우연히 학교에서 진행 중인 연구에 좀 협력하게 됐는데, 그게 곧 성과를 낼 것 같다고 해서..., 그 일 마무리될 때까지 남아 있기로 했어. 방학 동안 쉬어 버리면 한 달이나 미뤄져 버리니까.”

[…….]

일부러 모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이미 들켰을 테지만, 히마와리는 상대가 숨기고 싶어하는 것을 구태여 캐묻는 성격은 아니었다. 지금도 질문이 잔뜩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지 않을까. 침묵만으로도 못마땅해하는 표정이 눈에 선해 하지메는 쓴웃음을 지었다.

“너 사실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지? 그렇게 걱정돼?”

[……뭐, 겸사겸사. 내가 전에 말했었지? 넌 잘못하면 한순간에 보증 잘못 서고 장기까지 털려 올 것 같다고. 그런 녀석이 갑자기 뭔 연구를 돕겠다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있는데 걱정이 안 되겠어?]

“야, 그 정도까진 아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 옛날부터 다른 사람 말에 엄청 휘둘렸던 걸 내가 잘 아는데.]

체념한 듯한 한숨소리가 들렸다.

[아무튼, 위험한 거 아니면 됐어. 더 안 물을게. 이번 방학은 그냥 거기서 보내는 거야?]

“음, 아마도.”

[집에 좀 자주 와. 얼굴 까먹겠다.]

“알았어.”

[그리고 이건 그냥 노파심에 덧붙이는 건데…….]

“뭔데?”

히마와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너……, 거기서 너무 무리하지 마. 내가 신경 쓸 일 아닌 거 아는데, 진짜 걱정돼서 그래. 이렇게밖에 말을 못 하겠네.]

“…….”

하지메는 입을 다물었다. 히마와리도 마찬가지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메는 고개를 살짝 들어 천장 조명을 올려다봤다. 밝은 빛이 눈을 찔렀다.

“알았어. 무리 안 해.”

[무슨 말인지 알고 있는 거지?]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는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어떤 뜻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 탓에 양심이 찔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알고 있어. 고마워. 난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알았어. 그럼 끊자. 너무 늦었네. 생일 잘 보내.]

“그래. 잘 자.”

[너도.]

전화가 끊어졌다. 하지메는 통화 종료 화면이 꺼지기까지 멍하니 지켜보다가, 그대로 옆으로 털썩 누웠다. 긴 통화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지치는 기분이었다. 히마와리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었고, 가끔은 소름끼칠 정도로 들어맞는 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마치 이번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리 옆에 쭉 펼쳐진 서류들을 쳐다보았다. 오늘 우편으로 도착한 마지막 동의서였다. 솔직히 자신이 사인한 동의서의 조항은 아직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았다. 괜히 읽었다가 마음만 불안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부모님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돌려받은 동의서에는 사인이 제대로 되어 있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 이 동의서를 제출하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 하지메는 눈을 깜빡였다. 생일에 생명과 직결된 동의서를 제출해야 한다니 이만큼 묘한 상황이 있을까. 아니,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가장 어울리는 날일지도 모른다. 이건 그 자신을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결정이 될 테니까. 키보가미네 학원의, 전 세계의 희망이 될 존재로서.

히마와리가 이 일을 알았다면 분명 미쳤느냐고 화냈을 텐데.

무심코 떠오른, 자신의 생일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챙겨 주던 친구의 모습에 하지메는 짧게 웃었다. 그랬겠지. 히마와리는 예전부터 하지메가 재능을 가지고 싶어 하는 걸 탐탁지 않아 했다. 일 년쯤 전 하지메가 예비학과에 입학하기로 했을 때도 끝끝내 찬성하지 않았으니까. 대놓고 말리지는 않으면서도 몇 번이고 정말 괜찮겠느냐고 묻는 걸 안심시키는 건 꽤 고생스러웠다. 그래서 그 녀석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이미 결정한 일에 괜히 반대의견을 끌어들여서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녀석이 이 일을 알게 되는 건 모든 게 끝난 후일 것이다. 변해 버린 자신을 앞에 둔 히마와리의 표정을 생각하면 조금 씁쓸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을 자신을 알고 있었기에 더 그랬다.

“……자야지.”

긴 하루가 될 테니, 지금은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 했다. 하지메는 침대 위를 대강 치우고 불을 껐다. 누운 몸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 밤, 하지메는 히마와리가 나오는 꿈을 꿨다. 히마와리는 히나타를 보고 정말 괜찮겠느냐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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