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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합작] 동경과 연심은 한끗 차이

[꽃말합작_토로레_카렌]

5월 7일 사랑과존경

 

성의 안쪽에 위치한 서재는 사람들의 왕래가 적었지만 그에 비해 꽤나 잘 관리되고 있었다. 창가는 물론이고 낡은 책 역시 먼지 한 톨 자리 잡지 않았다. 종이 냄새가 짙게 풍겨오는 공간에서 햇볕이 제일 잘 드는 창가 쪽에 앉아, 독서에 열중하는 일상을 카렌은 꽤나 좋아했다.

 

“ 카렌 님, 대장님이 부르십니다. ”

 

그녀의 이름은 카렌. 타케다 군 내에서는 굉장히 특별한 존재였다. 유키무라와 사스케가 어릴 적부터 존재했으나 누구와도 가까이 지내는 법이 없었으며 항시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기에 두 사람 역시 처음에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책을 좋아한다는 것뿐이었다. 일찍이 닌자로써 활동했던 사스케는 그녀가 그저 성에서 책만 읽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나, 유키무라는 최근에 들어서야 그녀가 꽤나 군에서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래? 알겠어. ”

 

카렌이 밖에 좀처럼 나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말들은 많았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무섭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대장님이 부를 시에만 밖에 나온다는 말까지. 전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후자는 그럴 지도 모르겠다고 유키무라는 생각했다.

 

“ 카렌 님. ”

“ 왜? ”

“ 독서를 방해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신다고 들었습니다만, 화내지 않으시는 겁니까? ”

 

유키무라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던 카렌은 그제야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에 움찔했던 그였으나, 그는 이내 긴장한 채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고보니 유키무라는 카렌의 마중 역할이 처음이었던가. 유키무라 이전에는 여러 가신들이 돌아가며 그녀를 부르고는 했지만 한 번 그 역할을 맡았던 자는 다시 카렌의 얼굴을 보는 걸 두려워했다. 서재에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이유 역시 아마 원인은 그녀일 터다.

 

카렌은 딱히 사람과의 관계가 서툴러서 생각과는 다르게 말이 헛나오는 종류의 인간은 아니었다.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을 소중히 여겼을 뿐이다. 자는 것을 방해 받는 이가 화를 내는 것과 같은 이치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동안은 외부의 간섭을 받고 싶지 않았다.

 

“ 괜찮아, 신겐 님이 부르시는 거라면. ”

 

오갈 데 없는 카렌을 받아준 타케다 신겐은 그녀에게 있어서 은인이자 아버지였다. 그녀는 신겐을 곤란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 얌전히 있었으나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면 가차없이 응징했다. 본인이 개의치 않는 것과는 별개로, 고독을 즐긴다는 점까지 포함하여 그녀가 타인과 어울리기 힘든 성격이라는 것은 틀림없었다.

 

부름에는 늘 착실히 나오긴 했지만 이대로 군에 제대로 녹아들지 못할 것을 염려한 타케다 신겐은 그녀를 불러내기 위해 하나둘씩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한 군의 수장으로써 부하를 이유도 없이 지속적으로 불러내는 일은 다른 부하들에게 좋게 보여질 리가 없다. 하물며, 카렌은 여자였으니 이상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지도 모른다. 신겐은 카렌이 이상한 소문에 휘말리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임무’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불러냈다. 예상치 못했던 것은 그녀의 수완이 꽤나 훌륭했다는 점이다.

 

“ 부르셨습니까, 신겐 님. ”

“ 왔느냐. ”

 

카렌이 한 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곧 신겐은 고개를 들라 일렀고, 입을 열었다.

 

“ 카렌, 내가 네 얼굴을 보기가 참 어렵구나. 밖에는 자주 나가고 있는 게냐? ”

“ 노력하고 있습니다. ”

 

신겐은 한껏 꾸짖어야하나 고민하다가 이내 말을 삼켰다.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제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렇게도 밖을 싫어하면서도 그의 부름에는 한 달음에 달려오는 그녀였다. 카렌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그 역시 잘 알고 있다.

 

“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잘 알고 있겠지. ”

“ 네. 슬슬 약초가 떨어져갈 시기죠. 곧 채비하겠습니다. ”

 

뛰어난 능력으로 어느 새, 군 내의 보급품의 보충, 비용 절감, 치료와 약재 구비 등을 담당하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효율적으로 가장 최적의 효과를 내놓았기에 이제는 이를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한 달치 계획 및 차선책까지 모두 작성하여 던져주고는 다시 서재에 틀어박혀버린다는 것이 참 그녀다웠지만 말이다.

 

“ 오늘부터는 유키무라가 함께할 것이다. 카렌, 어떻느냐? ”

“ 따르겠습니다. ”

 

신겐은 항상 카렌의 대답이 긍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대장의 명령을 거역할 부하가 어디에 있겠냐만은 그는 카렌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다.

 

“ 유키무라. ”

“ 소인이 말입니까? ”

“ 못 하겠느냐? ”

 

그동안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꿋꿋이 카렌에게 따라붙은 것은 사스케였다. 그 정도의 신경줄이 아니고서야 그녀의 곁에 있기란 어렵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 결단이라도 한 것인지 신겐은 카렌의 옆에 유키무라를 붙였다. 유키무라가 싫은 건 아닐 테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결코 좋아할 만한 인간상은 아니었다.

 

“ 아닙니다! ”

“ 그럼 둘 다 조심히 다녀오도록. ”

 

유키무라가 대답을 내놓자 신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고 카렌은 별말 없이 방을 빠져나왔다.

 

“ 유키무라, 준비는 됐어? ”

 

짐을 실을 수레와 말, 그리고 조금의 먹거리와 물을 구비하자, 두 사람은 바로 떠났다. 카렌은 말을 탈 줄 몰랐기에 짐과 함께 수레에 올랐고, 당연히 유키무라는 말을 모는 쪽이었다. 시장의 위치는 그 역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말을 몬다고 하여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카렌의 동선(動線)은 항상 똑같았다. 처음에는 시장에 가서 필요한 물품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숲을 통과하면서 약초를 따오는 것이 전부였다. 대량 구매를 하므로 대개는 상인들이 성으로 납품하러 오지만 그 외에도 이것저것 추가로 주문할 것이 생길까 확인하는 것까지 그녀가 맡은 일이었기에 직접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결과, 그녀가 외출을 할 때면 항상 밖에서 며칠이 지나고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 여, 여기 사람이 벌에 쏘였어요! ”

 

시장을 돌아보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차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원을 찾는 목소리에 카렌은 당장 소란스러움이 일고 있는 근원지로 달려갔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을 잘 차려 입은 웬 사내가 한쪽 팔을 붙잡고 신음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가 벌집을 건드렸는데, 하필 그 근처에 서있었던 그가 그들을 감싸다가 쏘인 모양이었다.

 

“ 긁지 말고 가만히 있어. ”

 

꿀을 발라 붓기와 통증을 가라앉힌 후, 바로 옆에서 약초를 빻아 발라준 카렌은 그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알려주었다.

 

“ 당신은…! ”

“ 유키무라, 아는 사이야? ”

 

그러나 그의 대답보다 치료를 받은 장본인이 더 빨랐다.

 

“ 예전에 한 번 도움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름을 댈 정도의 사람은 아닙니다. ”

 

카렌은 그가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내비친 것을 알아채고 더는 묻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인간이 타케다 군의 영토에 들어와 있는 것은 몹시 께름칙할 수 있었으나 유키무라가 이상한 표정을 짓기는 했어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별 거 아니겠거니 그녀는 곧 신경을 껐다.

 

“ 성함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

“ 이름을 댈 만한 자는 아닙니다. ”

“ 이런…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었습니다만. 다음에 뵐 때에는 꼭 대답해주십시오. ”

 

상대의 대답을 똑같이 돌려준 카렌의 모습에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떴다. 카렌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유키무라를 깨우고 숙소로 돌아갔다. 기껏 방을 따로 잡았더니 그녀를 보호해야 한다며 본인의 방에 들어가지 않고 굳이 그녀의 방 앞에서 불편하게 자겠다는 그를 카렌은 말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말을 몰고, 짐을 들고, 카렌의 문 앞에서 거의 밤을 샜던 탓일까 유키무라는 카렌이 약초를 뜯는 새에 잠시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정신을 차리고보니 벌써 밤이었고 옆에는 카렌이 모닥불을 피워 놓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

 

여기까지와서도 책을 읽다니 정말 책을 좋아하는 구나 감탄하고 있었던 차에 그는 퍼뜩 정신이 들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유키무라가 일어나면서 떨어진 천은 아마 카렌이 덮어주었던 것일 터다.

 

“ 카렌 님, 송구합니다! 이 유키무라, 임무 도중에 잠이 들다니 무슨 불찰인지…! ”

“ 아, 일어났어? 몸은 어때? ”

“ 걱정 없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수 있습니다! ”

“ 그럼 됐고. ”

 

사실 그는 고작 피로하다 하여 졸음에 빠질 정도로 나약한 정신을 가진 이가 아니었다. 정신론으로 모든 것을 이겨내는 남자가 바로 사나다 유키무라가 아니던가. 카렌은 그가 먹을 음식에 그도 모르게 수면을 강제로 촉진시키는 성분이 들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약초를 함께 넣었다.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그이지만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피로회복에도 좋은 모양이라고 기억해 두기로 했다.

 

“ 얼른 성으로 돌아가야…! ”

“ 하루 정도야 늦는 건 괜찮겠지. 그것보다 조용히 해. 밤중에 숲에서 고성방가(高聲放歌)라니, 죽고 싶어? ”

“ 하지만…! ”

“ 밤에는 산짐승들이 내려오니까 시야가 제대로 확보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움직이는 건 자살행위야. 바로 지금처럼. ”

 

카렌이 그에게 주의를 주자 마자 두 사람의 곁에는 곰이 나타났다. 그러나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잔뜩 흥분한 곰을 본 유키무라가 자세를 잡자, 곧 카렌이 그를 제지하고는 앞에 섰다.

 

“ 카렌 님! ”

 

유키무라의 외침에도 그녀는 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 괜찮아. 저 녀석은 너를 해치러 여기에 온 게 아냐.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

 

곰은 잠시 탐색하는 듯싶더니 고개를 숙였고 카렌이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자 어두운 숲으로 사라져버렸다.

 

“ 말이 통하는 겁니까? ”

“ 그럴 리가 없잖아. 예전에 저 녀석의 새끼를 구해준 적이 있어. 곰은 영리해. 아마 자기를 해치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어서 물러간 거겠지. ”

“ 도리를 아는 녀석이라는 겁니까. ”

“ 동물은 사람과는 달리 은혜를 알 거든. ”

 

카렌은 아까의 소동으로 더 이상 독서할 기분이 들지 않았는지 책을 덮어버렸다. 그러자 유키무라가 그녀에게 물었다.

 

“ 그 책은…? ”

“ 산 거야. 보자기에 싸서 가져왔으니 너는 못 봤을 수도 있겠네. ”

“ 카렌 님은… 정말 책을 좋아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

“ 좋아해, 실제로. ”

 

항상 무표정을 고수하던 카렌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까 곰을 마주할 때와 똑같은 미소였다. 그러자 유키무라는 순간 심장 한 켠이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어 손을 가슴에 올려보았지만 어딘가 아픈 느낌은 아니었다.

 

“ 카렌 님도…입니까? ”

“ 뭐가? ”

“ 카렌 님도 익숙해진다면 거리를 허락해주시는 겁니까? ”

“ ……글쎄, 난 동물이 아닌데. ”

 

아까의 미소는 어디로 갔는지 카렌은 어느 새 무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조금 좋지 않아보였다. 유키무라는 본인이 실수했음을 느끼고 사과를 하려했지만 카렌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만 자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뒤부터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 *

돌아오고 나서도 카렌의 서재는 불이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원래라면 해가 지면 바로 잠에 드는 그녀였건만 최근 들어서는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시종(신겐을 제외한 병사들에게 차가울 뿐이지, 여자아이들은 카렌을 좋아하고 동경했다)들이 제발 식사 좀 해달라며 문을 두드리는 것을 목격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타케다 군에서 군사가 아님에도 그에 비슷한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을 유키무라는 근래에 겨우 알게 되었다.

 

“ 카렌 님은 생각보다 많은 일을 하시지 않은가. ”

“ 그걸 이제야 알았어? ”

“ 사스케. ”

“ 타케다 군에는 없어서는 안 될 보이지 않는 책략가, 같은 느낌이지. 이미 타국에는 그렇게 알려진 모양이야. ”

“ 군 안에서조차 마주치기 힘드신 분인데, 대체 어떻게…? ”

“ 소문이란 건 어떤 것에도 구애 받지 않으니까 말이지~. ”

 

유키무라는 타국의 사람도 아는 것을 제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잘 모르는 사람이었고 대화를 몇 번 나누어 본 적도 없었지만 카렌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답답한 기분이 들까.

 

“ 사스케, 이 답답함은 대체 뭘까. ”

“ 응? ”

“ 나는 카렌 님이 지금까지 무엇을 하시는 지 조차 몰랐어. ”

 

사스케는 유키무라를 한동안 쳐다보다가 씨익 웃더니 말했다.

 

“ 직접 부딪히면서 알아보는 게 어때? 카렌 님의 곁에서 일을 돕다가 원인을 알게 될 지도 모르잖아. 의원 못지 않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니, 몸에 이상이 있으면 봐주실 테고. ”

“ 그런가! 고맙다, 사스케! ”

 

그는 고민하다가 곧 제 식견이 좁은 탓에 그런 것이라 결론을 내렸고, 바로 카렌에게 달려갔다.

 

“ 내일 아침, 일찍 이쪽으로 오겠습니다! ”

“ 뭐? 왜? ”

“ 며칠 전, 대장님께서 소인에게 부여해주신 임무는 카렌 님의 일을 돕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인이 부족하여, 지금 카렌 님께서 혼자 도맡아 하고 계십니다. 이를 이제야 깨달은 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 아니, 이건 네가 할 일이…. ”

“ 카렌 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으니, 저의 역할 또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

“ ……. ”

 

카렌은 파이팅 넘치는 유키무라의 생기 있는 얼굴을 보고는 이마를 짚었다. 사스케 녀석 짓인가. 그녀는 오히려 일은 혼자 하는 게 편했다. 전에 잠든 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진 모양인데 약을 넣었다는 것을 말해준다는 게 깜빡했다. 아니, 사실 말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에 가까웠지만.

 

유키무라는 이야기한대로 꼭두새벽부터 카렌이 머무르는 서재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작업에 착수했고, 누구와 함께 일하는 법이 없었던 카렌의 모습을 보고 병사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호오. ”

“ 대장님의 의도대로 된 것 같네요. ”

 

유키무라를 통해서 카렌을 밖으로 이끌어내려 의도를 하긴 했으나 이렇게 벌써 결과가 나올 줄이야. 신겐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 *

 

얼마 후, 신겐은 다시금 카렌을 불렀다. 당분간 불릴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녀는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것인가 머리를 굴리며 그의 앞에 대기했다.

 

“ 내가 너를 왜 불렀는지 알겠느냐? ”

“ 아뇨.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

“ 그렇겠지. ”

 

신겐은 드물게 한 동안 뜸을 들이더니 서신(書信) 하나를 건넸다.

 

“ 동맹국의 영주의 아들이 얼마 전에 네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 같구나. ”

“ 영주의 아들…? ”

“ 벌에 쏘여 죽을 뻔한 것을 도왔다고 하던데, 아니더냐? ”

 

카렌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유키무라와 함께 시장에 나갔던 때를 기억해냈다. 확실히 누군가를 돕기는 했다. 이름을 밝힐 수는 없다느니 수상한 소리를 하긴 했는데 그게 설마 영주의 아들이었을 줄이야.

 

“ 얼마 전, 시장에 내려갔을 때 벌에 쏘여 죽을 뻔한 사내를 도운 적은 있으나 그가 동맹국의 영주의 아들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 흐음- 뭐, 만나보면 알게 될 일이지. ”

 

카렌이 서신을 받아들자 신겐이 다시 말을 이었다.

 

“ 그쪽에서는 너와 정식으로 만나보고 싶다고 하더구나. 어찌 하겠느냐? ”

 

가장 가까운 측근인 사스케나 유키무라를 제외하고는 병사들을 전부 물렸던 이유가 역시 이것 때문이었나. 그러나 워낙 예상 가능한 전개였기에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정식으로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나는 감사의 마음으로 초청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 나머지 하나는 혼례를 염두에 두고 싶다는 말이었다. 둘 중에 어떤 것일 지는 서신을 읽어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

“ 카렌. ”

“ 네, 신겐 님. ”

“ 너는 타케다의 사람이다. 어디에 있다고 한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잊지 말거라. ”

 

전국시대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이 세계에 연고도 없이 던져지고 난 후, 카렌은 타케다 신겐에게 주워졌다. 그녀는 그에게 감사하고 있고 앞으로도 평생 그에게 은혜를 갚으며 살아갈 생각이었다. 누군가에게 팔려가듯 가는 혼례를 그가 주선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카렌이 함께 할 동반자가 있다고 한다면 기꺼이 보내줄 사람이 그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아무리 익숙해졌다 한들 애초부터 이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었던 카렌은 철저히 이곳의 외부인이었다. 얼마나 타케다 군에 오래 있었는 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병사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 그들과 가까워질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방금 신겐의 말에 조금 감동받은 것은 거짓이 아니었다.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이질적인 느낌을 느끼지만, 그에게 가족으로 여겨지는 일은, 그런 말을 해준 건 고마웠다.

 

“ …네. ”

 

서신의 내용은 이러했다. 벌에 쏘인 후, 영주의 아들은 자신들 역시 약초에 관해 연구해보고 싶다고. 비밀리에 진행하고 싶으니, 표면적으로는 카렌을 초청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연회가 될 것이고, 진짜는 약초에 관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는 이는 극소수의 사람들 뿐이라 유키무라와 같은 순진한 사내는 알 리가 없었다.

 

“ 사스케, 대장님은 왜 그런 말을 하신 거지? 카렌 님이 곧 멀리 떠나기라도 할 것처럼. ”

“ 어라, 사나다 나리 모르는 거야? ‘결혼’을 전제로 만나보고 싶다는 거잖아. ”

 

사스케의 말에 유키무라는 며칠 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마음이 어지러웠고 틈만 나면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동시에 카렌이 스쳐가듯 보여주었던 미소 역시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그 미소를 떠올리고 나면 또다시 마음 한 켠이 간질간질했고 가슴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이 증상은 다 나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 사나다 나리, 일단은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어. 오늘의 나리는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아무것도 쓰러뜨리지 못할 거야. ”

 

사스케의 충고에 유키무라는 곧 검을 내려놓았다. 자신 역시 어지러운 지금의 마음으로는 훈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으리라. 그리고 이유를 묻는 사스케에게 그는 본심을 실토해냈다. 아마 사스케는 유키무라의 마음을 몰라서 물은 게 아닐 터였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경 쓰여서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이런 약한 마음가짐으로 훈련에 집중하지 못하다니, 아직 수행 부족…! ”

“ 사나다 나리에게 그게 그렇게 신경 쓰일 일이야? 그럼 카렌 님께 직접 물어보는 게 어때? ”

“ 직접? 카렌 님께? 하지만 나에겐 그럴 자격이…. ”

“ 헤어짐이 아쉬운 거잖아? 카렌 님을 존경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동료로서 그 정도도 물어보지 못 할 이유, 있어? ”

“ 존경… 동료…. ”

 

유키무라는 사스케의 말을 곱씹다가 이내 갑자기 기운을 차렸는지 소리를 지르며 서재를 향해 달렸다.

 

“ 정말~ 사나다 나리는 알기 쉽다니까. ”

 

사스케는 그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었다.

 

 

 

* * * *

“ 카렌 님, 잠시 괜찮으십…! ”

 

기세 좋게 달려온 것은 좋았으나 카렌은 굉장히 불편하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주변에 책이 어지러이 놓여있는 것을 보니 독서 중에 잠든 것이 분명했다.

 

“ 거기서 뭐 해? ”

 

그런 그녀를 홀린 듯이 쳐다보던 유키무라는 어느 새 눈을 뜨고 일어난 카렌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까의 굉장한 외침에 결국 잠이 깬 모양이었다. 그녀는 예민한 편이라 잠귀가 밝았다.

 

“ ……. ”

 

카렌이 잠시 벗어두었던 안경을 다시 쓸 때까지 유키무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평소라면 오자 마자 제 할말을 쏟아 냈을 그였건만. 카렌은 그의 그런 기색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하며 물었다.

 

“ 그래서? 무슨 일? ”

“ 혼담을 제안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

“ …아. ”

 

카렌은 약초에 관한 서적을 읽어보다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현재 카렌에게 있어서 그것은 연회나 혼담이 아닌 극비 임무에 가까웠다. 혼담이라는 직접적인 단어를 언급하지는 않았는데 유키무라가 거기까지 유추해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전쟁터에 관한 것이라면 그래도 알아듣는 편이지만 이런 이야기는 그에게 아직 일렀다. 아마 사스케에게 이야기를 들은 거겠지.

 

“ 별 일이네. 유키무라가 그런 이야기에 흥미가 있는 줄 몰랐는데. ”

 

그러고보니 함께 시장을 나갔을 때에도 이상한 소리를 했었지. 익숙해지면 나도 거리를 허락해줄 거냐는 물음이었던가. 그 때에는 약초 때문에 헛소리를 조금 하는 건가 생각했는데, 아직도 약기운이 남아있을 리는 없고, 설마 유키무라가 나를 좋아하나?

 

“ 주제 넘은 참견이었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대답을 내실 지 궁금해서… 밤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

 

유키무라는 근면성실하고 솔직하며, 순진하다. 이건 단순히 동경일까? 그러나 카렌은 곧 고개를 저었다. 대장님 일편단심인 유키무라다. 말도 안 되는 추측이었다.

 

“ 그게 너한테 중요한 얘기야? 자고 있는 나를 깨워서 물을 만큼? ”

“ 죄송합니다! 깊게 잠드셨기에 돌아가려고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

 

카렌은 유키무라가 던진 질문의 의도를 생각했다. 사스케와는 달리 쓸데없는 말은 안 하는데다가 그가 신경 쓸 주제가 아닌 이야기를 가지고 이렇게 고민을 한다면 답은 하나다. 바로 신겐과 관련이 있기 때문일 터.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직책도 갖고 있지 않지만, 타케다 군에서 여러 중요한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카렌이 이 혼담을 받아들인다면 이 곳에서의 생활은 끝난다. 혹시 전력을 잃는 것 혹은 동료를 잃는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 신겐 님을 떠나는 게 배신으로 느껴져? ”

“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

 

유키무라는 제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 감정에 스스로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존경하는 대장님과 동경하는 카렌 님을 향한 마음은 엄연히 달랐다. 두 분에게 가진 이 감정의 차이는 무엇이란 말인가.

 

“ 어쨌든 꼭 대답을 들어야할 정도로 네겐 중요한 이야기라는 거구나. ”

“ …그렇습니다. ”

 

죄의식을 갖고 고개를 푹 숙인 유키무라를 보자니 괜히 괴롭히는 기분이 들어 카렌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에게 서신의 내용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키무라처럼 숨길 줄을 모르는 이에게는 더더욱. 애당초 이 이야기는 비밀리에 진행되어야 하는 일이다.

 

“ 서신의 답을 제 3자에게 먼저 말할 수는 없지. 하지만 아무 말도 안 하고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 ”

“ …알겠습니다! ”

 

썩 후련해 하는 기색은 아니었으나 유키무라는 나름 납득한 얼굴로 서재를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윽고 사스케가 카렌의 뒤에 나타났다.

 

“ 지금의 사나다 나리, 마치 사랑에 빠진 남자의 표본이네요. ”

 

카렌은 혈기 넘치는 얼굴로 대련장을 휩쓰는 유키무라의 모습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사스케를 쳐다보았다. 어딜 봐서.

 

“ 저건 야생에서 살아온 개에게 먹을 걸 줬다고 따르는 정도의 호감이야. 유키무라는 순수하고 단순하니까. ”

“ 흐음~ 순수하고 단순하다는 말에는 동의하지만 말이죠. ”

“ 너는 다르게 느낀다는 거야? ”

“ 글쎄요. 저라고 독심술을 하는 게 아니니까 사나다 나리의 본심은 모릅니다. ”

 

사스케 녀석은 말 장난에 능숙하다. 능글맞게 다 아는 듯이 말하면서 상대방을 떠보기도 하고 모르는 척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도 한다. 이제는 익숙해져서 딱히 신경 쓰지 않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키무라가 정말 본심을 터놓는 상대가 있다면 그건 아마 저보다는 또래인 사스케일 터다.

 

“ 유키무라가 너에게만은 마음 편히 본심을 털어놓는다면 잘 들어주도록 해. 그건 내가 맡을 수 없는 역할이니까. ”

“ 애초에 사나다 나리는 숨기는 걸 못 한단 말이죠. ”

“ 그렇지. 사루토비 사스케가 아니니까. ”

“ …그 말, 어쩐지 가시가 박혀있는데요? ”

“ 그리고 사스케. ”

“ 내 뒤에 나타나지 마. 한 번만 더 그러면 내쫓을 줄 알아. ”

 

그리 말하면서도 카렌은 서재의 문을 닫지 않았다. 그에게 나가라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단순히 귀찮아서 일수도 있지만, 사스케는 그녀가 진심으로 그를 내쫓을 생각이 없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여간, 카렌 님은 무르다니까. 남들은 차갑네 무섭네 하지만 사스케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카렌에 대해 잘 몰라서 저러는 것이라 확신했다.

 

 

 

* * * * *

연회가 끝나고 카렌은 바로 일에 착수했다. 원래라면 거절했을 제안이었지만 타국과 협력한다면 좀 더 좋은 약초를 발견해낼 수도 있는 일이다. 동맹국일 뿐이고, 언제 다시 칼을 겨누게 될 지 모르지만 저쪽은 카렌의 능력을 빌려 약초의 효능을 연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본국의 상세한 정보는 적당히 숨겨가며 이야기하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번에 카렌과 함께 동행한 것은 유키무라가 아니었다. 아니, 그는 아예 카렌이 떠날 때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잠시 멀리 원정을 간 탓이었다. 신겐은 아마 의도적이었을 것이다. 카렌은 어차피 며칠 지내다가 돌아올 예정이었기에 따로 인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떠났고, 뒤늦게 성으로 돌아온 유키무라는 카렌이 떠났다는 소식만을 듣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 카렌 님은 아무 말 없이 떠나는 일이 없을 거라 하셨을 터… 그런데 어째서…? ”

“ 뭐, 카렌 님은 그런 자리 좋아하지 않으시니까 며칠 뒤에 돌아오겠지. ”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카렌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고, 얌전히 기다림을 택했던 유키무라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다. 신겐에게 물어도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올 것이라는 상투적인 대답 뿐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대장님의 말을 의심해버리고 말았다. 카렌 님은 정말 돌아오시는 걸까, 하고.

 

“ 실은, 카렌 님도 상대가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니야? ”

 

한껏 풀이 죽어있는 유키무라를 사스케가 조금 부추겼다

 

“ 이대로 돌아오시지 않는다면…. ”

“ 유키무라여! 그러고도 네가 남자라고 할 수 있느냐! 전해야 할 말이 있다면 상대가 어디에 있든 쫓아가 전하거라! 망설이지 마라! 그도 못하면서 어찌 진심이라 인정 받길 바라느냐! ”

 

이번에는 신겐이 나타나 그에게 호통을 쳤다.

 

“ 우오오오오!!!! ”

 

유키무라는 신겐의 말에 무언가 깨달음을 얻었는 지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갔고 사스케는 그 모습을 보며 신겐에게 말을 올렸다.

 

“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으셨던 겁니까? 아니면, 이렇게 되길 바라셨던 겁니까? ”

“ 둘 다다. 나머지는 유키무라 녀석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겠지. ”

 

유키무라는 쉴 새 없이 달렸다. 밤새 달렸으나 지치지 않았다. 카렌을 만날 생각만으로 가득차 힘든 줄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카렌과 동맹국인 영주의 아들 사이를 끼어든 뒤였다.

 

“ 유키무라? 어째서 이곳에…?! ”

 

이건 카렌도 예상치 못했다. 유키무라가 이 정도로 제 주장이 강한 녀석이었나? 아무리 혈기가 끓는다 해도 예의를 모르는 아이는 아니었다. 비공식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국가 대 국가의 입장으로 만나고 있는 자리에 함부로 끼어들다니. 신겐 님은 이를 그냥 두었단 말인가.

 

“ 소인, 무례를 범한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카렌 님은 타케다 군에 꼭 필요한 분이십니다! 대장님, 사스케 뿐만 아니라 소인도 카렌 님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아니, 더 솔직히 말하자면, 소인은 카렌 님이 떠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건 바로… ”

 

유키무라의 눈이 정확히 카렌의 눈을 향했다. 그녀는 이토록 그의 뜨거운 눈빛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해버렸다. 설마, 진짜 유키무라가 나를…?

 

“ 대장님을 존경하는 만큼, 카렌 님을 존경하기 때문임에 틀림 없습니다! 형태는 다를 지언정, 이것은 분명 카렌 님을 동경하고 있기 때문일 터! 이 뜨거운 마음이 존경이 아닐 리가 없습니다! ”

 

카렌은 유키무라의 외침을 듣고 곧 자신이 자의식 과잉이었다며 살짝 반성했다. 유키무라는 카렌에게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곧바로 머리를 숙여 사과했고, 다행히도 영주의 아들은 그를 재미있는 사람이라며 마음에 들어 했다. 그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들은 사스케는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 …이거 참, 갈 길이 멀었구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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