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림주 카스가이 렌카, 5월 14일생으로 탄생화는 매발톱꽃. 꽃말은 승리의 맹세.
요즘, 라이트 매일 켜져 있네.
하얀 빛이 흘러넘치는 담장 아래를 지나며 렌카는 문득 생각했다. 여름 대회를 코앞에 둔 상태이기 때문이리라. 사나다도 내일 있을 연습 경기를 위해 일찌감치 그라운드로 달려갔다. 여름 경기는 늘 시험기간과 겹쳐서 해가 질 때까지 같이 공부했는데. 요즘은 그라운드가 먼저란다. 사나다의 작지만 큰 변화는 렌카에게 기쁨을 가져다 줬다. 예전의 사나다는 무언가를 전력을 다해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라이치의 배트가 바람을 가르는 묵직한 소리가 났다. 빈속으로 운동만 하고 있을 부원들에게 줄 간식거리들이 봉지 안에서 부딪혔다.
“감독님, 저 왔어요.”
라이조가 몸을 뉘인 벤치 뒤에 서서 아는 체 했다. 그는 대충 고개만 돌려 왔냐, 하고 말았다. 커다란 마트 봉투를 벤치 앞에 내려놓으며 렌카는 그라운드를 훑어봤다. 그라운드 가장자리에서 요란스럽게 스윙을 하는 라이치와 각자의 메뉴를 소화하는 재학생들, 그리고 올해 막 입부한 신입생들이 삼삼오오 흩어져 있었다. 마침 그라운드를 가볍게 돌던 사나다와 눈이 맞아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라운드의 곡선을 유연하게 돌고 온 사나다가 렌카의 옆에 나란히 섰다.
“다들 열심히 하네.”
“그렇지. 1학년들도 제법 열심히 한다고.”
“슌쨩이 1학년 땐 안 그랬는데.”
“야…….”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땀에 흠뻑 젖은 그에게 수건을 건네며 렌카가 히죽 웃었다. 사나다가 왜 웃냐고 물어도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기특하다고 하면 필시 비웃으리라. 어린 게 누군데, 하면서. 곁으로 한 발자국 더 다가선 그녀가 팔꿈치로 단단한 사나다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배팅할 거면 도와줄까?”
“음…… 아니, 그거 말고.”
바느질 할 줄 알아? 유니폼에 등번호가 떨어져서 말이지. 어제 보니까 너덜너덜 하더라고. 혹시 그것 좀 꿰매줄 수 있냐? 웬일로 횡설수설 하는 그 모습을 보며 렌카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올렸다.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해줄게. 아, 이참에 다른 애들도 해줘야겠다.”
“어?”
다른 부원들 것도 달아주겠다는 말에 사나다가 엉거주춤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빠져나갔다. 등번호 달아야하는 사람 없니? 쩌렁쩌렁한 그녀의 목소리가 퍼져 펜스에 닿았다. 부원들 중 한두 명씩 저요, 하며 유니폼을 들고 렌카에게 다가왔다. 그 중에는 등번호를 다는 게 익숙하지 않은 신입생들이 대다수였다.
‘내 것만 달아줬으면, 싶었는데.’
렌카의 팔에 유니폼들이 쌓여가는 걸 보며, 사나다는 네트가 있는 곳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유니폼이 쌓일 만큼 쌓이자 부원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다시 연습에 집중했다. 렌카는 길게 뻗은 라이조의 다리를 치우고 벤치에 앉아 반짇고리를 꺼냈다. 다리가 밀려난 라이조는 혀를 쯧 차더니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멋쩍은 듯이 돌아가던 에이스의 너른 등과 그걸 봤을 리 없는 여자친구. 이 일련의 상황들을 라이조는 시종일관 지켜보고 있었다.
“넌 왜 그렇게 귀찮게 사냐?”
적당히 사나다 것만 해주고 말지. 말을 하던 도중에 하품이 나와 말끝이 흐렸다. 텁텁한 눈가를 비빈 라이조가 턱을 괴며 그라운드에 흩어진 무리 중 제 아들에게 시선을 줬다. 잘 보이지도 않는 조그마한 구멍에 실을 꿴 렌카가 신입생을 등번호부터 달았다.
“매니저잖아요.”
밥은 먹고 왔냐. 네, 감독님은요? 먹었다마다. 이 뒤론 라이조가 화장실에 가버려서 대화가 끊겼다. 라이조랑 대화를 하면, 투박스러운 아버지를 떠올랐다. 렌카의 아버지는 다정하고 자식들을 잘 챙겨주시지만, 문득 라이조 같은 아버지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때가 있다.
후덥지근한 바람이 쌀쌀해지자, 렌카는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9시가 훌쩍 넘은지 오래였다. 앉아서 꼼짝 않고 바느질을 한 덕에 부원들의 등번호를 거의 다 달았다. 딱 한 명. 쌀쌀해진 바람을 가르며 배팅을 하는 사나다의 유니폼만 빼고. 렌카는 모서리가 헤진 등번호를 들춰보고는 눈을 가라앉혔다. 검게 그림자가 진 시선이 등번호에서 떠나질 않았다.
“저기, 슌쨩.”
목이 많이 탔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던 사나다의 시선이 돌아왔다. 자신보다 한 뺨정도 아래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느라 가라앉은 시선이 왜? 라고 물었다. 렌카는 팔에 걸쳐둔 유니폼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등번호가 너덜너덜해 모서리부터 펄럭였다.
“이거 내일 줘도 될까? 경기 전까지는 줄게.”
“그래.”
사나다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흙먼지가 묻고 너덜너덜해진 유니폼을 품에 끌어안으며 렌카는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은 검은 천에 가려진 듯 수상쩍어 보였다. 페트병 입구를 닫으며 사나다는 왜? 다 못했어? 라고 되물었다.
“그런 것도 있고.”
“그런 ‘것도’ 라면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거네.”
“슌쨩한텐 안 가르쳐 주지롱~”
혀를 쏙 빼며 짓궂게 웃는 렌카를 사나다는 이길 수 없었다. 땅거미가 진 어둑한 골목에 엇박자로 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춤이라도 추듯 발끝으로 서서 통통 뛰어 걸었다. 문득 한 발로 지탱해 빙그르르 돌면 치마가 들꽃처럼 펴졌다. 한 발자국 물러서서 걷던 사나다가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입을 열었다.
“렌카.”
‘렌’ 자를 나른하게 발음하는 목소리에 그녀는 발뒤꿈치를 내렸다. 응? 하고 뒤를 돌아보는 렌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촐랑거리다 넘어지겠다.”
“내가 애야?”
툴툴 거리면서도 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사나다의 손은 반 마디 정도 컸다. 맞잡은 손에서부터 솜털이 몸을 훑고 가듯 간지러움이 올라왔다.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프흐, 하고 작게 소리를 내자 시선이 향했다.
“왜 웃어?”
“아무것도. 그보다 슌쨩, 나 곧 생일인 거 알아?”
아. 탄식과도 같은 짧은 목소리에 렌카는 볼을 잔뜩 부풀렸다. 정말, 야구에 푹 빠져서는. 미안, 완전 잊고 있었다. 왼쪽 눈을 찡긋 하며 사과하는 사나다를, 렌카는 이길 수 없었다. 늘 그 미소에 지고 말았다. 마지막 여름이라는 게 원통할 정도로, 그는 야구에 푹 빠졌다. 그녀에게는 생일보다 사나다의 야구가 더 중요했다. 문득 생일을 꺼낸 것도 그래서였다.
“이번 생일엔 받고 싶은 게 있어.”
“내가 구할 수 있는 거라면.”
“여름대회 우승.”
“……뭐?”
“우승했으면 좋겠어. 이번엔 운이 아니라, 지금의 슌쨩으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렌카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눈을 보고 있자니, 사나다는 덜컥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골라야할지 모르겠어서, 그저 ‘진심이냐’며 실소를 흘렸다.
“어려운 주문을 하시네.”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렌카가 단순히 ‘우승’을 바라는 게 아님을, 1학년 때부터 지켜봐온 사나다는 알고 있었다. 여름을 조금 더 늘려서, 그가 야구를 더 즐겼으면 싶을 뿐. 그녀가 야구부에 들어온 이유도 모를 리가 없다. 그걸 알기에 사나다는 자신에 대한 렌카의 애정을 져버릴 수 없었다. 가볍게 생각할 수조차 없어 숨을 한차례 고른 뒤 입술을 벌렸다.
“그래도 노려볼게.”
감독이 들었다면 우승이 뉘집 개 이름이냐며 핀잔을 줬을지도 모른다. 특히 강호교가 끓어 넘치는 서도쿄 지구에서 우승하기엔 하늘의 별따기니까. 그럼에도 ‘맹세’해야만 했다. 그들의 여름 또한 가벼운 약속으로 치부할만한 무게가 아니었다. 렌카는 그의 발 사이로 한 발자국 비집고 들어갔다. 고개를 치켜들고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선홍색 눈이 태양을 담은 듯 붉게 일렁였다. “맹세해?”
“맹세해.”
제게 되뇌듯이 읊조렸다. 맹세해. 맹세할게. 그제야 그녀의 굳은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주인공에게 집중되는 스포트라이트처럼 가로등 빛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슌쨩, 유니폼!”
검은 언더웨어만 입은 사나다의 등에 대고 말하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오, 고마워. 등번호가 정갈하게 박힌 유니폼의 양 어깨를 잡고 들어봤다. 등번호 판 가장자리가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굳은살이 투박하게 박인 손끝으로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매만졌다. 아래로 고개를 숙인, 매 발톱을 닮은 붉은 꽃이 자수였다.
“이거 새기느라 늦은 거야?”
“부적 같은 거야!”
멋대로 새겨서 미안. 그렇게 말하며 렌카는 수줍게 웃었다. 멀리서 보면 희미하게 붉은 자국이 보였다. 손끝으로 수줍은 애정을 매만지곤 곧장 팔을 꿰었다. 그는 연한 갈색 머리통을 가볍게 토닥거렸다. 입술 끝을 말아 올려 웃는 그의 어깨 너머로 해가 쨍하게 내렸다.
“오늘은 왠지 이길 것 같네.”
약속 지키고 올게. 그는 투수용 글러브가 아니라 1루수 내야용 글러브를 왼손에 꼈다. 경기 전에 희희덕거리지 마라, 이것들아! 라이조의 호통에 눈이 마주쳤다. 그럼에도 둘은 마냥 해맑게 웃었다. 다녀올게. 그 말을 남기고 그라운드에 올라선 그는, 그야말로 여름 정오에 뜬 태양처럼 눈이 멀어버릴 만큼 빛이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