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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네 얼굴을 까먹지 않을까. 얄팍하게나마 남아있던 너에 대한 기억마저도 햇빛 아래 엎질러진 물처럼 느리면서도 점진적으로 말라가서, 어떻게든 손으로 그걸 떠보려하지만 아래로 흐를 수밖에 없는 물들은 제 빈약한 손가락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다시 바닥으로 추락하여 작별을 고할 뿐이다. 우리, 조금만 더 오래 있으면 안될까. 내 손에 잠시라도 머물러서, 너의 감촉을 잠시라도 더 되새길 수 있도록 해주면 안될까. 너는 내 온기를 느끼는 것조차 몸서리치게 싫어해서 차라리 태양에게 목숨을 헌정하는 괴로운 선택지를 택하는 것일까. 나는 너에게 조금이라도, 손가락 끝이라도 닿이고 싶어서 오늘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지 못한 서글픈 아이처럼 홀로 울고 있는데. 너는 어째서 그 잘난 얼굴의 서투른 조각조차도 제게 허락해주지 않고 이리도 매정하게 굴며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자꾸만 숨바꼭질을 하는 것일까. 내가 잡으려고 하면 너는 또 어느새 저 멀리, 내가 뛰어도 잡지 못할 곳에 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잠시라도, 정말 잠시라도 너를 본다면 꿈에 갇혀 살아도 좋았다. 그것이 네가 없는 꿈일지라도 단 1초만의 현실에서 너를 제 붉은 눈에 담아 태울 수 있다면 더 이상 욕심 부리지 않고 얌전히 너에게 안녕을 고할 것이었다. 그래, 나를 그렇게나 싫어하는 네 앞에서 기꺼이 사라져 아무도 찾지 못할 섬나라에 스스로를 가두고 숨이 쉬어지지 않는 깊은 바다에 잠식해버릴 자신도 있었다. 너를, 네 보이지 않는 눈을 보면서 제 심장에 담긴 진솔함을 털어넣고 너에게 곱씹지 못할 모멸감을 받더라도 좋을 것이다. 너는 제게 그런 존재였다. 왕관을 가진 자를 충성스럽게 섬기려면 그 옆자리를 탐내는 것으로 목이 날아갈 각오 정도는 해야 하니까. 특히나, 당신 같은 사람이 제 왕좌의 주인이라면. 자신에게 기꺼이 칼을 들이밀며 웃고 있는 왕이 자신이 연모하다 못해 그 칼에 찔리고 싶어지는 사람이라면.

보랏빛 나팔꽃은 밤하늘의 눈물에 물들었나보다. 오든은 제 손 끝에 닿이는 보드라운 아이에게 기꺼이 입맞춤하며 잠이 오는 것처럼 깊게 잠긴 눈을 깜빡인다. 너는 별의 사랑을 받는구나. 이렇게 진한 색으로 물들어 새벽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정성을 보면 보석 같은 눈물에 보답하기 위해 이렇게 활짝 피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을까. 참 부러운 아이구나. 어딜 보아도 네가 사랑하는 이가 기다리고 있어서. 별은 해가 떠있을 때에도, 제 빛이 무고한 태양에 가리어도 항상 떠올라 있으니까. 벨. 내 별과도 같은 사람아. 아니, 당신은 태양이다. 당신은 가려질 수 없으니까. 당신을 가리는 것이 있다면 내가 기꺼이 손에 피를 묻히어 추락시켰을 것이다. 하늘에 태양은 두 개가 될 수 없으니까. 나는 당신이 오로지 높이 떠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라도 하면, 당신은 나를 조금이라도 봐줄까 하는, 햇빛이 닿이지 않는 검은 그늘에 숨겨진 자신을 위한 행위이다. 그래서 당신은, 나팔꽃이 피는 밤에 저물어가는지. 덧없는 사랑을 품은 내가 피어나는.

당신은 나를 퍽이나 싫어하는 모양이다. 바뀌지 않은 사실이다. 알고 있던 지식이다. 틀리지 않은 진실이다. 당신은 나를 싫어한다. 문제는 자신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한 번이라도,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이 나팔꽃들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일 수 있을 텐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만을 품고 있는 그 아이들에게 대신 사랑한다 말해주고 기꺼이 져버려도 괜찮다 입을 작게 맞추어줄텐데. 그렇다면 너희는 편하게 눈을 감고 그 별들의 곁으로 떠나갈 수 있지 않을까. 사랑하는 이의 옆에서 빛날 수 있지 않을까. 해가 피어올라도 서로를 눈에 담으면서. 나도 어쩌면, 그늘 밖으로 나가 달구어진 땅에 발을 딛을 수 있지 않을까. 태양을 마주하여 눈이 멀어버려도 좋으니 그 따스한 곳에 몸을 묻을 수 있지 않을까.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텐데.

아, 덧없는 사랑이다. 오늘도 당신이 지워져만 가는 새벽의 파랑에서 나는 오늘도 기억마저 흐려져가는 당신에게 들리지 않는 허공의 사랑을 고백한다. 사랑해, 벨. 당신은 오늘도 덧없는 사랑을 등진다. 나팔꽃은 오늘도 찬란하게 활개한다. 덧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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