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마 농담으로 듣겠지만.”
달그락. 플라스틱으로 된 빨대가 움직이자 액체가 거의 사라진 컵 안에 들어있던 얼음들이 맞부딪히며 청량한 소리를 냈다.
새로 전달받은 일을 숙지하기 위해 자료를 훑어보던 리조토는 부자연스럽게 끊긴 말이 신경 쓰여 고개를 들었다. 말을 꺼낸 상대이자 일을 전달해준 당사자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기만 할 뿐,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내뱉어 주진 않았다. 이럴 땐 귀찮더라도 한 번 더 추궁해 줘야 입을 열었지. 상대에 대해 잘 아는 그는 구태여 제 쪽에서 독촉의 한 마디를 건네주었다.
“듣겠지만?”
“나는 당신을 경애하고 있어. 진심으로.”
농담하고 앉아있군.
그는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고 도로 종이 위 글자로 시선을 돌렸다. 경애라니. 그녀와, 파네 비안코와 정말이지 손톱만큼도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타인이 그녀에 관해 저 단어를 꺼냈어도 그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을 텐데, 그녀 본인의 입에서 경애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다니. 질 나쁜 농담이거나 기만이라는 말 외에는 저 발언을 서술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역시 농담 취급 하는구나.”
“말 안 해도 눈치 챌 정도면 이유도 대충 알겠군.”
“하지만 내가 말한 건 정말로 진심인 걸?”
“너 만한 거짓말쟁이가 또 어디 있다고….”
하하하. 충분히 기분이 나빠질만한 말에도, 파네는 유쾌하게 웃으며 빨대를 움직일 뿐이다.
유리잔 안에서 휘저어지며 맑은 소리를 내는 얼음들은 자신들을 휘젓는 빨대와 방 온도에 서서히 녹아 빈 유리잔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었다. ‘시끄럽군. 정말.’ 듣기 싫은 소음까지는 아니지만 서류에 집중하기엔 힘든 잡음에 속으로 불평한 그는 결국 다시 파네에게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유나 들어볼까.”
“좋은 자세야. 감정의 이유는 중요하지. 궁금하긴 한가봐?”
“얼마나 어이없는 이유일지…, 궁금하긴 하군.”
“정말 어이없다면 무시해 버려도 좋은데 말이야.”
말장난 같은 대답만 늘어놓는 그녀는 가지고 놀던 빨대로 제 입술을 툭툭 쳤다. 얼음이 녹아 생긴 물이 테이블 위에 조금 튀었지만, 거기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꽤 비슷한 계기로 이 길에 들어왔잖아?”
“비슷하다면 비슷하지. 복수의 형태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 난 복수하려고 조직에 들어왔고 당신은 복수하고 난 후 갈 곳이 없어 여기에 온 거니까. 형태는 확실히 다르지. 하지만 본질은 비슷해.”
“그게 중요한 이유가 됐나?”
“물론이지! 비슷한 듯 다르기 때문에, 난 당신을 경애할 수 있는 거야. 리더.”
‘리더’ 언제 들어도 어색한 호칭에 리조토가 한숨 쉬고 말았다.
확실히 자신은 리더가 맞긴 하지만, 그녀에게 리더라고 불릴 이유는 없었다. 자신은 암살팀 소속이었고, 그녀는 정보관리팀 소속이었으니까. 리더라고 부를 거라면 정보관리팀 리더에게 그리 불러야지, 제게 그렇게 불러서야 쓰겠는가. 그건 조직원간의 예의가 아니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선 몇 번이고 파네에게 지적을 했지만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걸 보면, 문제가 해결되는 건 포기하는 게 빠르겠지만 말이다.
“이유를 들어도 납득이 안 되는데….”
“그래? 그럼 그 뒤도 봐야지. 우리가 복수한 후 이 파시오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난 딱히 조직에 불만이 없는데.”
“그 점이 경이롭다는 거야. 매일 이런 더러운 일만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조용히 살아? 나라면 때려치우고 도망갔을 텐데!”
툭. 입술을 치던 빨대가 이번엔 리조토가 든 서류를 가볍게 두드렸다. ‘암살 타깃’ ‘반드시 죽일 것’ ‘실패는 용서하지 않음’ 살벌하고 지저분한 요구가 가득 적힌 서류에는 물방울 하나 튀지 않았지만, 리조토는 종이 위 인쇄된 글자들이 마치 녹아서 흩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도망가면 분명 죽을 텐데 뭐 하러. 그리고 네 일도 그리 깨끗하진 않잖아.”
“누구 등쳐서 정보 빼내는 건 일도 아니지. 그리고 난 손에 피를 묻히면 그 수고가 내 것이 되기라도 하지만, 당신들은 언제나 공적도 수고도 지워지잖아. 일은 전달하는 내가 다 속상하다고.”
“쓸데없는 참견이 이유였군….”
“이 세상에 필수불가결인 감정이 어디 있어? 다 쓸데없는 거지.”
궤변이 따로 없다. 하지만 딱히 반박할 말도 생각나지 않는 것이 더 입을 바싹 마르게 했다.
마른침을 삼킨 리조토는 못마땅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고, 파네는 입을 꾹 다문 그를 보다가 못 참겠다는 듯 폭소하며 두 손을 뻗어 그 뺨을 감싸 쥐었다.
“어쨌든, 난 당신이 참 좋아. 이런 상황에서도 진지하게 한 마디도 못하잖아. 어쩌다 여기 처박혀서 썩고 있는지. 아, 다 정이 많아서 그런 거였지?”
“복수로 사람을 죽인 놈에게 정이 어디 있어.”
“내 사람에게만 정을 주면 되는 거지. 내 사람을 죽인 놈에게도 정을 줘야 해? 내 사람 외의 타인의 존재는 쓸모없는 정보보다 가치 없는 거야.”
그렇다면 나는 네 사람인가.
그렇게 물으려던 리조토는 갑자기 일어서는 파네에게 시선을 빼앗겨 입을 열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이만 갈게. 너무 늦으면 잔소리를 해서. 그 일을 끝냈을 쯤 또 보자.”
가지고 놀던 빨대를 리조토의 잔에 꽂아둔 그녀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방을 나갔다.
테이블 위에 놓인 두 잔 안에는 얼음 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다. ‘그렇게 오래 대화를 나눴던가.’ 얼음 녹은 물이 얕게 차올라있는 유리잔을 집어 들며 그런 생각을 한 리조토는, 잔의 내용물을 들이마셔 바싹 마른 속을 달래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