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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된 하루가 끝났다. 아니, 고되었다고 말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을지 모른다. 로드바이크를 타는 내내 마나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아주 싱글벙글했으니까. 더불어 들를 곳이 있어 먼저 가보겠다는 먀리의 말에 오랜만에 집으로 오는 길에도 기분 좋게 페달을 밟았던 터였다. 그렇다고 해서 먀리와 함께 하교하는 일상이 좋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로드바이크와 먀리 선배는 각각 비교할 수 없는 행복이니까.

 

잠깐 사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있던 땀이 목 뒤로 타고 흘러내렸다. 미적지근함에 당장 욕실로 달려갈 법도 하건만, 마나미는 그저 손등으로 젖은 목을 가볍게 훔쳐내었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씻는 것도 좋지만 잊기 전에 3학년과의 마지막 합숙 일정을 달력에 적어넣는 것이 먼저였다. 거의 확신에 가까운 예상이지만. 이번에야말로 지각한다면 아라키타 야스토모의 비앙키에 산 채로 치이고 말 것이었다. 죽어버리면 더는 로드를 타지 못하겠지. 좋아하는 먀리 선배의 곁에 있을 수도 없을 테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될 말이었다. 마나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탁상 달력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 이내 이상한 것을 본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뭐지? 이미 열흘이나 지난 셋째 주의 토요일 칸에 쳐진 물색 동그라미가 낯설었다. 허나, 낯선 흔적 치고선 그 안에 적힌 글씨체가 분명히 마나미 제 것이었다. 100일. 그 숫자의 의미는, 자신이 모르려야 모를 리가 없었다. …어? 그럴 리가. 잠깐, 잠깐만…. 말끝이 짙게 흐려지는 것이 상당히 자조적이었다.

 

주변의 모두가 으레 그렇게 생각하듯이, 마나미 산가쿠는 기념일을 잘 챙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끽해봐야 생일 정도. 그마저도 상기시켜주지 않으면 번번이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경우엔 상황 자체가 달랐다. 그도 그럴게. 마나미와 먀리는 엄연히 사귀는 사이다.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물어보지 않았으므로 먀리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나미에게는 첫 연애이기도 했다. 그만큼 바램이나 이상이 아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여태 마나미 본인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도, 주위에서 들었던 것 중 하나 정도는 머리 한구석에 남은 것이 분명히 있을 터였다.

 

그게 의외로, 백일이라는 날짜였다.

 

마나미는 이 숫자를 제 나름대로 행복이라 생각했다. 화폐 단위로 좁게 보았을 땐 그리 크지 않은 숫자일지도 모르지만, 세상엔 100을 최대 한도로 둔 것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제일 가까운 것으로는 시험이 있었다. 예시일 뿐, 지금껏 받아본 적은 없는 점수지만. 여하튼 마나미는 다른 날은 몰라도 먀리에게 백일만큼은 꼭 챙겨주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답지 않게 옅은 설렘에 휩싸여 행복해할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몇 주 전에 미리 선물을 사두고, 다가올 날을 기다리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는 짓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어째서 잊어버렸는가는 본인도 의문이지만.

 

창밖으로 잘 익은 자몽 빛 같은 노을이 지고, 엷게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금방 하루가 져버릴 것이 분명했다. 아, 어떡하지. 옷을 갈아입은 마나미의 손에는 깔끔하게 포장된 사각형의 선물이 들려있었다. 어차피 늦은 선물이었다. 오늘 주나, 내일 주나, 다음 달에 주나. 하등의 상관은 없을 테였다. 그러나 사람의 기분이라는 것이 이르면 이른대로 멋쩍고, 늦으면 늦은 대로 마음이 불편해져선 문제였다.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아직 바깥이실 것 같은데. 전화해볼까. 아니면, 메일이라도 남겨볼까. 한참을 전전긍긍하며 마나미가 핸드폰과 외투를 번갈아 보고 있을 때였다. 기세 좋게 벨소리가 울렸다. 마나미는 발신인도 확인하지 않은 채 핸드폰의 플립을 열어 귀에 갖다 대었다. 여보세요?

 

응, 나야 마나미. 혹시 지금 뭐 해?

 

 

* * *

 

 

"지나가다 군밤 장수를 봤는데… 뭔가 지나칠 수가 없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마나미를 불러낸 먀리는 집에서 조금 떨어진 가로등 아래에 서있었다. 곧 마나미가 급히 뛰어오자 열심히 오르락 내리는 가슴팍에 군밤 봉지를 안겨주었다. 묵직하고 뜨뜻한 봉지 안에는 통통하게 잘 익은 밤들이 올망졸망하니 한가득 들어있었다. 마나미의 코에 군침 도는 훈기가 훅 끼쳤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선배. 아니야, 뭘. 말은 그렇게 해도 절 바라보는 얼굴이 퍽 기뻐 보여서 마나미는 여상히 입꼬리를 휘어 보였다. 참 부단히도 제게 뭘 먹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 극 초반에는 연애하면 얼굴이 좋아진다는 게, 잘 먹어서 살이 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싶을 정도였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불만은 없었다. 애초에 먹을 것을 선물 받는 건 싫지 않았으므로. …아, 맞아 선물. 또 까먹을 뻔했다. 10월 하순답지 않은 냉한 바람이 옆으로 불어 사고가 끊기기라도 한 건지. 마나미는 별달리 덧붙일 말도 생각지 않고서 들고나온 베이지색 팬시 봉투를 먀리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뭐야?"

 

마나미는 봉투가 제 손을 떠나고서야 정신이 파뜩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게요? 라고,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제아무리 사차원이라는 평을 듣는 마나미라 하여도, 누구도 아닌 자신의 연인에게 몇 주나 지난 커플 기념일의 선물로 준비했던 것이라고 태연히 덧붙일 수 있는 위인은 아니었다. 마나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나오는 대로 말을 이었다. 그냥. 덤으로 군밤 봉지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먀리 선배한테 주고 싶어서 샀어요. 뭣하면 이거 받은 답례라고 생각해주세요."

"으음, 그래도 돼?"

"당연하죠. 지금 뜯어봐도"

 

…되는데. 아쉽게도 먀리의 행동이 한 템포 더 빨랐다. 마나미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지만 분명 어딘가 들떠있는 표정으로 포장을 뜯어내는 먀리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어떤 반응을 해줄까, 작은 감탄이라도 내뱉어주려나? 기왕이면 환히 웃어줬으면 좋겠는데. 자만이라 해도 좋았다. 선물에 대한 걱정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먀리는 선물을 확실하게 좋아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사이, 분주히 바스락대던 소리가 멈추었다. 어느새 먀리의 손엔 겉 포장 만큼이나 깔끔하니 옅은 한색 계열의 다이어리가 들려있었다. 몇 번을 봐도 역시, 잘 골랐다. 한달 전쯤이었을까. 슬슬 새 다이어리를 사두어야겠다고 지나가듯 중얼거린 먀리의 말을 기억해두었다 산 것이었다. 이 디자인을 선택한 이유도 마찬가지로. 표지는 마나미의 머리칼보다는 채도가 높고, 보라기가 섞인 수레국화 다발 사진이었다. 굳이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먀리라면 이 의미를 다 알아볼 것이다. 그에 대한 증거로, 입술을 살 벌리고 마나미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먀리가 있었다.

 

"직접 골랐어?"

 

함소한 마나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의미도 아는 거야? 그, 이거."

 

당연하죠, 라는 진부한 단어는 목 안으로 미끄러트려 버린 채 이번엔 잘게 눈웃음을 쳤다. 필요하다고 했었으니까, 선배의 탄생화라, 꽃말이 당신에게 주고 싶은 감정 그 자체라서. 이런 말로 백 마디 맞장구를 치는 것보다 두어 번의 해사한 웃음이 좋다는 것을 마나미는 알고 있었다. 그게 유독 먀리에게는 아주, 자알 먹힌다는 사실도. 방글거리는 마나미를 힐끔 보고는 다이어리를 소중히 끌어안은 먀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엄청 행복해."

 

그것은, 지각쟁이 행복 배달부의 죄책감을 날려버리는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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