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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말 합작_행복감

 

 

 

너는 무엇을 하고 싶으냐. 어느 어렸던 을씨년스러운 밤에 나에게 던져진 질문이었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내가 생각한 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때 무슨 말을 했었더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한 어떤 대답으로 질문을 던진 사람은 웃었다. 아주 호탕하게 웃었다. 나를 믿노라 하였다.

어린 나의 눈동자에 비친 그 모습은 너무나도 온화했다. 나도 나를 믿기기로 하였다. 나는 나의 행복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하였다. 바로 앞의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아.”

푸른 눈동자가 주위의 사물을 다시 제대로 인지하기 시작했을 땐 벌써 해가 산으로 넘어가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아직 노을이 지지 않는 하늘과도 같은 푸름을 간직하고 있는 눈동자는 주위를 흔들리는 동공으로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반지하로 만들어진 골방의 문을 열자 앞에는 이상하게도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것을 본 눈동자는 눈동자가 아까보다 더 심하게 흔들리며 저도 모르게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으며 차마 시선을 위로 올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해도 정말로 망해버린 것이다.

문 닫을까…. 찰나의 정말 짧은 생각이었으나 앞의 그림자의 주인인 그런 생각까지도 간과하고 있다는 듯이 문을 꽉 잡은 채로 서 있었다.

“안 나와?”

“아, 옙! 나가야죠!”

다리가 조금씩 떨리며 짧은 계단을 올라갔다. 망했다…. 진짜로 망했다.

고작 조금 많이 늦게 일어났을 뿐이건만 뭐가 그렇게 망했다는 것인지 궁금할 것이다. 단지 늦게만 일어난 것이라면 분명 아무 문제가 없겠지. 하지만 그 이전에 아주 큰 문제가 있었다. 그래,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해놓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약속을 잊은 채 잠을 계속 잤다는 것이 된다.

어디가 아파서 그런 건 아니며 단순히 자신이 만족할 만한 실험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골방에 처박혀서 실험을 했을 뿐이다.

“린, 어제 늦게 잤어?”

“아, 네…. 뭐, 그러게….”

“그렇구나~ 그래서 약속도 잊은 채 계속 잠을 잤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모처럼 내가 쉬는 날이었는데 전날 너무 무리해서 늦게 잘 수도 있지. 응, 이해해.”

정말로 화가 나 보였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진짜로 본인의 잘못이 100%이기 때문에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눈앞의 상황이 사실일 뿐이었으므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린은 무릎을 꿇었다. 흔히들 말하는 ‘도게자’였다.

“미안합니다!!! 저는 쓰레기예요!! 정말 반성합니다!! 제발 용서만이라도! 해, 해달라는 건 뭐든 해줄 테니까!!”

“....”

“라, 라, 란슬롯…. 님?!”

“하하핫!!! 뭐야 그게. 아…. 하핫,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그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

“우, 웃지 마!! 이건 말이지 단장이랑 같이 다닐 때 베아트릭스한테 배운 거야.”

“넌 대체 뭘 배워서 온 거야…. 뭐, 아무튼 덕분에 재밌는 구경도 했으니까?”

“...”

“뭐, 더 할 말 있어?”

“아뇨, 없습니닷.”

란슬롯은 여전히 소리를 내 웃으며 린의 머리에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린의 표정이 좋지 않자, 손을 거둬 입을 막아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다시 진정하고는 그녀를 데리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래서, 어제도 연금술 공부한 거야?”

“아…. 응….”

“뭐,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몸은 생각하고 있는 거지? 계속 그렇게 불규칙한 생활을 했다간 분명 몸에 무리가 갈 거야.”

“괜찮아!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고의 리듬이 되어있으니까!”

린의 말에 란슬롯은 고민하는 일 없이 린의 볼을 잡아 당겼다. 정말로 아팠다. 그가 손을 놓고 나서도 볼을 꽤 얼얼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제 볼을 감싸고 있었다.

“이상한 말을 한 벌이야. 약속 어긴 벌이기도 하고?”

“...미안….”

“아하하…. 됐어. 그래도 앞으로 늦게 자는 건 금지야.”

“응….”

“그것보다 오늘 데이트는 무리겠네. 어떡하지, 오늘 하루 계획은 데이트뿐이었는데.”

란슬롯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묘하게 웃고 있었다. 저 표정은 누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저 약간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저 표정은 바로 사람을 놀리는 표정이었다. 그의 성격상 딱히 뒤끝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저 린의 반응을 즐길 뿐이었다.

“오늘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그래도 괜찮아?”

“아…. 뭐, 무슨 일 있겠니….”

“그렇지. 아무 일도 없지. 후훗…. 그럼 편히 쉬다가 가야겠네.”

“네, 넵…! 아 밥은 먹었니?”

“아니.”

“그럼 같이 요리하자. 사실 나 계속 공복이라 배고프거든.”

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엄청난 허기가 울려 퍼졌다. 린은 부끄러움에 벌떡 일어났다.

“와!! 나, 씨, 씻고 올게!!

“같이.. 씻을래?”

“미쳤어?”

“아하하... 그렇게 까지 말해야겠어..? 더한 것도 했는데.”

“조, 조용히해!! 아무튼 씻고 올 거니까 여기 가만히 앉아있어!!”

린은 그대로 빠르게 화장실로 들어갔다. 란슬롯은 더 장난치고 싶었지만 오늘은 잠시 참아두기로 하였다. 그녀의 말 대로 그는 가만히 앉아서 얼굴엔 은은한 미소를 띠운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복잡한 건 하고 싶지 않았기에 간단하게 샌드위치라도 만들기로 하였다.

“샌드위치는 진짜 최고의 음식이야. 간단하고 맛있어!”

“알았으니까 진정해.”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고 재료를 옮겨 담았다. 원하는 재료로 원하는 맛의 샌드위치를 만들 생각이었다. 간단한 작업이긴 하였지만, 같이 요리를 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라 란슬롯은 알게 모르게 조금 들떠있었다. 아니, 애초에 단둘이서만 있는 것이 오랜만이었다. 평소의 린은 거의 집으로 나오지 않으며 어쩌다 왕도나, 성에 왔다고 해도 자기 볼일만 보고는 금방 가버리기 일쑤였다. 아마도 바쁜 그를 배려하는 행동이었겠지만 란슬롯의 입장에선 조금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일이 바쁘긴 해도 린을 보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컸으니까.

“왜?”

“아, 아니. 그냥 오랜만에 린이랑 있는 거 같아서.”

“...그러네……. 그런 날 나는 늦잠을 자버린 거네……. 하, 진짜 왜 살지….”

얼굴엔 한순간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얼굴에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거 같은 분위기였다. 란슬롯은 그런 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정말 괜찮으니까 이 이상의 자기비하는 금지. 알겠지?”

그러면서 그는 린의 이마에 작게 키스를 해왔다. 동시에 시선을 맞추었고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부끄럽게 뭐 하는 짓이야. 말을 그렇게 퉁명스럽게 해도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란슬롯도 마찬가지였다.

“일정은 틀어졌지만, 너랑 같이 있는 거로 만족할 수 있으니까.”

 

 

 

 

“자, 이거 들어.”

“...?”

“이제부터 화단에 물을 주러 갈 거야. 이것저것 하다 보니 생각보다 커져서 말이야. 혼자서 하기엔 조금 힘들더라구. 도와줘!”

“아, 응. 다짜고짜 이걸 들이밀어서 뭔가 했네…. 그런 거라면 당연히 도와줘야지. 프리지아도 있어?”

“아니. 이젠 다 졌고 내년에 다시 필 거야. 그때도 보러와~”

“그래, 내년에도 꼭 같이 보자.”

두 사람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미 하는 지고 있었다. 그래도 물을 주는 일을 미룰 순 없었다. 꽃들은 민감하니까 내일 물을 주게 된다면 분명 마르게 되는 아이가 나오게 될 것이다. 그러니 미룰 수는 없는 일이었다.

화단의 꽃들은 주인의 정성만큼이나 예쁘게 자라있었다. 저마다 뽐내고 있는 꽃잎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향기도 달콤했다.

물을 주던 란슬롯은 이 화단을 혼자 가꾸었을 린을 생각하니 저도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혼자서 이 넓은 화단을 혼자 가꿀 수 있게 커버린 그녀의 모습에 새삼 옛날 어린 날의 모습이 겹쳐졌다.

작은 프리지아가 있는 화분을 키우던 어린아이는 이제 제 품보다도 큰 화단을 가꾸는 아이가 되었다. 성장이라는 것은 참 신기했다.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땅에 심은 씨앗이 싹을 트고 계속 자라서 비로소 결실을 보는 꽃의 성장일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대지의 아이라는 말이 조금은 와닿는 순이었다.

“다 했어?”

“아, 응! 아, 이 꽃은 이름이 뭐야?”

“응? 이거? 수레국화라는 꽃이야.”

“헤에, 그렇구나. 예쁘네.”

“그치. 이거 내 탄생화라고 해서 심었어. 얘도 곧 지겠지만….”

린은 몸을 낮춰 꽃잎들을 마주 보았다. 꽃을 보며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 순간만큼은 꽃보다 린의 모습이 더욱 집중되어 보였다.

“아, 그리고 이거 꽃말이 행복감이래. 이쁘지.”

“그러네. 린의 애정을 잔뜩 받았으니까 이 꽃 정말로 행복하겠다. 물론 나도 그렇고?”

“어? 으, 응! 응? 뒤에 말은 조금 이상한 거 같은데요?”

“이상하다니? 후훗, 진짠걸.”

란슬롯은 그녀를 사랑스럽게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 얼굴을 보았다면 정말 행복해 보이네. 라고 말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란슬롯은 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자는 신호였다. 해는 어느새 뒤로 완전히 넘어가 버려서 어둑해지고 있었다. 아직 날이 춥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늦게 일어났더니 하루가 일찍 가네….”

“들어가자 밤 되면 그래도 쌀쌀할 거야.”

린은 란슬롯의 손을 꽉 잡았다. 온기가 그대로 자신에게로 전해졌다. 기사 단장답게 조금은 거친 손이었지만 그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그 순간 린은 한가지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화단에서 본 꽃의 꽃말과 같은 단어였다. 행복감. 린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보내는 이 하루가 소중하고 행복했다. 자신이 찾는 행복이 아주 가까이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란슬롯.”

“응?”

나란히 걷던 그녀는 슬쩍 그의 손을 놓고 그의 앞에 섰다.

“나 지금 정말 행복한 거 같아. 너도 그래?”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그, 그냥….”

“아까도 말했잖아? 난 린이랑 있어서 늘 행복하다고.”

린은 그대로 란슬롯의 품에 안겨버렸다. 검은 머리가 흩날리다 이내 멈추었다. 작게 꽃냄새가 풍겨왔다.

작은 꽃은 자신의 하늘에 안겨있었다. 하늘을 작은 꽃을 품어주었다. 하늘과 꽃은 행복해지겠지. 동화책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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