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무겁다. 한 명, 아니 두 명인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오크통 속에 몸을 숨긴 소녀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냥 가. 제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발.’
처음 카르텔과 손을 잡았던 그때부터, 자신은 이 순간이 오진 않을까 항상 두려워했었다.
부모님은 알 수 없는 역병으로 목숨을 잃고, 혼자 남은 자신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카르텔의 끄나풀이 되었다. 그들이 옳다고 생각해 이 길에 들어선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갈 곳이 없어 카르텔이 된 거라 해도, 아마 이 발소리의 주인들에겐 제 이야기는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
“데스페라도, 거긴 어때?”
“조용해. 더 없는 것 같은데.”
“흠.”
‘드디어 포기했나?’ 소녀는 제 근처에서 오가는 대화를 듣고 안심했다. 확실히 자신은 무기도 없는 말단이라 없어져도 아군조차 잘 눈치 채지 못 할 테고,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간부는 기습 후 3분도 안 되어 죽었으니 저들도 목적은 대충 달성한 상태이리라. 그러니 제발 이대로 돌아가 주면 좋을 텐데. 자신 같은 건, 살아도 죽어도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조무래기일 뿐인데.
기도하는 것 마냥 눈을 감고 ‘돌아가!’ 만 마음속으로 외던 소녀는 갑자기 제 다리가 간지러워져 눈을 떴다가 경악하고 말았다. 급하게 숨느라 신발조차 신지 않은 제 발에는, 다리가 많은 벌레가 한 마리 붙어 제 무릎위로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힉!”
필사적으로 숨소리까지 참고 있던 인내는 혐오스러운 비주얼의 절지동물 하나로 간단히 깨져버렸다.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른 건 아니었지만, 저 두 사람이라면 분명 눈치를 챘겠지. 식은땀을 흘리며 위로 시선을 돌린 소녀는 자신을 숨겨주고 있는 뚜껑이 서서히 열리는 것을 피하지도 못하고 지켜봐야 했다.
“오.”
화약 냄새와 혈액의 비린내가 가득한 바깥공기가 머리 위로 쏟아지고, 한 쌍의 자수정색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자신을 발견한 여성, 통칭 무법지대의 악몽은 곤란하다는 듯 웃고 있었다.
“모른 척 해줄 걸 그랬나? 이렇게 어린 애일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뭐야, 애야?”
“응. 뭐 여기 있다는 건…, 이쪽도 카르텔의 동료라는 의미겠지만?”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신은 아직 사람을 해치거나 직접적으로 상해를 한 적은 없어도, 일단 카르텔의 밑에서 잡일을 하던 구성원 중 한명이었으니까. 어떤 방식이든 카르텔의 공범은 가만두지 않는다. 그것이 카르텔 사냥꾼인 두 사람의 철칙이었으니, 분명 자신도….
“그럼 처리해야지.”
“잠깐, 데스페라도. 혹시 모르잖아? 딱 봐도 무기도 없어 보이고 옷도 너덜너덜한데. 착취당하고 있던 걸지도.”
“무기도 없다고?”
뭔가 상황이 다르게 돌아간다. 소녀는 아직까지 제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에 희망을 가지고 고개를 들었다. 당장이라도 제 머리를 쏘고 갈 줄 알았던 이가, 뜻밖에도 파트너에게 생판 남인 자신의 변호를 하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근거로 자신을 좋게 판단한 걸까. 소녀는 제게 유리하게만 돌아가는 이 상황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두고 가자. 아직까지 우리에게 기습도 안 하는 걸 보면, 우릴 죽일 생각도 없는 것 같고.”
“웬일로 자비를 베푸는지 모르겠는데, 루엔.”
“웬일로 라니. 난 원래 박애주의자야.”
“그래, 박애주의자라서 문제지. 쓸데없이 이놈 저놈에게 친절하기나 하고.”
“이상한 포인트에서 질투하셔도 곤란합니다만, 데스페라도 씨?”
어이없다는 듯 웃은 루엔은 소녀에게 윙크하고 도로 뚜껑을 내려놓았다. 다시 어두워진 오크통 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늑하게까지 느껴져, 소녀는 완전히 긴장이 풀려 늘어지고 말았다.
“정말 살려둬도 괜찮은 거냐? 나중에 복수한다고 찾아오면 네가 죽여야 해.”
“아니 살려줬는데 복수를 왜 해? 그리고 이런 사소한 친절이 누군가에겐 큰 위안이 되기도 한다고. 그렇지, 응?”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놀린다고 생각하는 걸 봐선 위안이 되긴 했나봐?”
“박애주의자인 누구 씨는 모르겠지만, 나한테 잘해주는 인간은 너뿐이고 내가 잘해주는 인간도 너 뿐이라 말이지.”
발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대화는 정답기 그지없다.
카르텔 앞에서는 사신과 악몽이지만, 그 외의 경우엔 그냥 평범한 젊은 커플 한 쌍일 뿐이라는 건가. 예상치 못한 온도차에 헛웃음이 나온다.
벌레가 지나갔던 다리를 손으로 가볍게 털고 일어난 소녀는 수라장이 된 카르텔 아지트 한 구석에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