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모든 게 아니라고 해도, 자신을 적으로 돌린 이들에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누가 답해주지 않아도 드물다 못해 불가능하다는 건 대부분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쿠니키다도 그랬다. 적에게 웃음을 보이는 건, 그것도 비소 어린 게 아닌 진심이 담긴 것은 어리석다 못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답은 쉽게 나올 수 있잖아. 제아무리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만물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줄곧 그렇게 여겨왔는데.
갑자기 그의 앞에 뚝 떨어진 그녀는 그가 알고 있던 거의 모든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끔 했다. 줄곧 지켜왔던 자잘한 신념들, 가치관, 어떤 것에 대한 선입견,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평가까지. 코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를 만난 이후로 많은 것들이 조금씩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쿠니키다는 그동안 당연히 여겼던 것들 중 하나를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앞에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쿠니키다는 카페 밖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다리를 꼰 채 발을 두어 번 까닥거렸다. 날씨는 좋았고, 그의 앞에는 적당히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놓여있었다. 테이블 위로 활짝 펴져 있는 파라솔은 아직까진 제법 쨍한 햇살을 가려주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연한 분홍색 가디건을 걸친 그녀가 앉아있었다. 새하얀 머리칼은 그녀의 등 뒤를 살짝 간질이는 햇살을 이따금 만날 때마다 반짝거렸다. 사실 그보다 더 반짝이는 것은 코우의 눈이었지만.
코우의 바로 앞에는 이번에 새로 나왔다며 노래를 부르던 시즌 한정 파르페가 놓여있었다. 말랑한 황도와 잘익은 감 페이스트, 그리고 각종 과일이 차곡차곡 쌓인 파르페는 그녀에겐 최고의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연신 사진을 찍다가, 기다릴 수 없었는지 평소보다 빨리 카메라를 내려놓고 한 입 머금는다. 그리고 스르르 눈이 접히며 행복하다는 듯 환하게 웃는다. 달콤한 파르페의 맛에 잔뜩 신이 났는지 얇은 피부 사이로 드러난 발그레한 볼이 더 붉어졌다. 쿠니키다는 그 표정을 빤히 보다가, 픽 웃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이군. 다시 파르페를 떠먹는 그녀를 따라 그는 파르페 대신 아메리카노를 입에 머금었다. 적당한 산미가 도는 게,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쿠니키다 씨, 이거 너무 맛있는 것 같아요!!"
"그동안 먹은 파르페들 전부 다 맛있다고 했었지, 아마."
"물론 그렇지만! 이번에는 특히 더 맛있다니까요. 자, 쿠니키다 씨도 한 입 먹어봐요!"
아, 해봐요!
코우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파르페 한 숟갈을 내밀었다. 쿠니키다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입 받아먹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버텨봤자 결국엔 먹을 게 분명하니 얌전히 맛보는 게 나았다. 파르페가 입에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감 맛이 예상보다 좋았다. 살짝 얼린 황도 역시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동안 한 입씩 먹어본 것 중에 가장 괜찮았다. 너무 달지도 않고, 적당했다.
"나쁘지 않군."
"그렇죠! 이거면 쿠니키다씨도 몇 번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맛이지 않아요? 더 먹을래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분으로 남겨져 있던 숟가락을 하나 들었다. 그녀는 다시 활짝 웃으며 자신의 앞에 있던 파르페를 가운데로 옮겼다.
거리는 주말치고는 한산했지만, 제법 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코우는 파르페를 먹다가 말고 거리의 사람들에게 눈길을 줬다.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어린아이가 아빠 손을 꼭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고 그녀도 그에 답하듯 손을 살랑거렸다. 눈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쿠니키다는 문자를 확인하던 중 열심히 파르페를 먹던 그녀의 손이 계속 멈춰있자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가 뭘 하는지 확인했다. 손 인사를 하는 그녀의 시선 끝에는 처음 보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걸 보고 있자니, 그녀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우는 조금 더 아이를 바라보다가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생긋 웃는다.
"아이들은 친절한 것 같아요.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를 해주다니."
"모르는 아이의 인사를 받아주는 너도 아이에게는 친절한 사람으로 인식되겠지."
"그럼, 아이랑 나는 둘 다 친절한 좋은 사람인거네요?"
코우가 기분이 좋다는 듯 미소지었다. 그녀의 생각은 항상 좋은 쪽으로 흘러간다. 코우는 어떤 상대든,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를 골라 장점을 말하라고 한다면 대여섯 가지는 바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건 애초에 처음부터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이 깔려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쿠니키다는 여전히 그녀가 신기했고, 어떤 의미로는 경이로웠다. 요즘 고민하는 것도 늘 그렇듯 코우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모두에게 애정을 갖는 것, 어떤 것이라도 늘 처음은 애정으로 대하는 것. 불가능하다 여겼던 일들이었다.
쿠니키다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그녀는 그사이에 어디서 왔는지 모를 한 강아지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녀 옆에 앉아 쓰다듬을 받으며 격하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의 모습은, 누가 보면 그녀가 주인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왈!"
쿠니키다는 테이블 맞은편 발치에서 짖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그녀 옆에 강아지가 앉아있다는 걸 알아챘다. 난데없는 모습에 헛웃음을 지으며 코우에게 말을 건넸다.
"어디서 온 거야, 그 강아지?"
"글쎄요? 다리가 간지러워서 봤더니 옆에 있더라고요."
"주인 있는 강아지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목걸이가!"
코우가 강아지를 들어 올려 목걸이를 확인했다. 휴대폰 번호가 쓰여 있었다. 강아지를 품에 안은 뒤,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꾹꾹 눌렀다. 그때, 뒤에서 무언가 외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며 무언갈 외치고 있었다. 강아지는 그 소리를 들은 듯, 품에서 벌떡 일어나 그쪽을 향해 짖기 시작했다. 코우는 강아지를 안은 채 벌떡 일어나 외치던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쿠니키다가 뒤따라가기도 전에 그녀는 벌써 주인에게 강아지를 돌려보내고 있었다. 주인이 감사 인사를 하는지 연신 인사를 하더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코우는 뿌듯한 표정을 지은 채 돌아와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안고 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빠져나와서 잃어버렸었대요!"
"그래도 주인이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군."
"맞아요! 원래 사람을 잘 안따르는데, 저한테 잘 안겨있어서 깜짝 놀라셨어요."
코우는 헤헤 웃으며 신이 난 듯 얘기를 하다가, 먹다 만 파르페를 다시 입에 넣었다. 파르페는 거의 다 녹아가고 있었다.
"앗, 파르페 다 녹았다..."
"그러게 얼른 먹었어야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그냥 아이랑 인사 잠깐 하고 잃어버린 강아지 찾아준 것밖에 없었는데..."
뭐, 다 녹아도 맛있으니까 괜찮아요!
그녀는 주먹을 꼭 쥐며 중요한 걸 얘기하는 듯이 단호하게 내뱉었다. 그는 말처럼 같이 단호해진 그녀의 표정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못 말린다는 듯 작게 웃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왜 웃어요! 라고 덧붙였다.
"그냥 웃겨서. 모두에게 사랑받는 건 꽤 고단한 삶이군."
"맞아요. 파르페가 녹아버리기 일쑤죠... 하지만 뿌듯해요!"
"그런 건가."
"그런 거죠!"
코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쿠니키다를 바라보았다.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라. 장난식으로 내뱉긴 했지만 실제로 코우는 거의 모두에게 사랑받고 있었다. 사랑하는 만큼 되돌아오는 걸까. 쿠니키다는 아까 전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왜 많은 것들을 사랑하는 걸까. 그는 곧이어 생각했다. 직접 물어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지.
"코우, 궁금한 게 있다만."
"응? 뭔데요?"
"네가 싫어하는 게 있어?"
"음... 으으음... 아마도, 아뇨! 좋아하지 않는 건 있지만 아직까진 싫어하는 건 없어요."
"그럼, 좋아하는 건?"
"갑자기 심문받는 분위긴데... 음, 셀 수 없이 많아요!"
"왜 그렇게 많은 것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
"왜, 냐고 묻는다면..."
너무 미묘한 질문인데!
그녀는 쿠니키다의 물음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턱을 괴고 눈을 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을 내뱉었다.
"뭔가를 좋아한다는 건 좋은 거니까요!"
"...좋다는 건 알아. 그런데, 너에게 득이 되는 게 뭐냐는 거지."
"음, 그러니까... 딱히 득을 바라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단순히 누군가를 나쁜 감정으로 보기 전에 먼저 좋아하는 감정을 가진 채로 대하는 건, 종종 제법 멋진 결과를 불러오거든요!"
"멋진 결과란 말이지?"
"네! 이미 저한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라면 제가 사랑을 주는 만큼 사랑을 받게 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얼마나 행복한데요!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미워해서 마음이 불편한 것보다는 훨씬 나아요."
"상대가 널 좋아하지 않더라도?"
"당연하죠.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해치지 않는 이상은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것들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것도 큰 선물 중 하나라고 그러셨거든요."
수녀님이 예전에 그렇게 말해주셨어요!
코우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그런 그녀의 표정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항상 그래왔었지. 한없이 어려운 것들을 언제나 쉽게 해내곤 했다. 그는 아까까지 되풀이하고 있던 의문에 마침표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한다. 물론 아주 드물지만. 그저 어리석은 게 아니라 모든 것에게 가장 먼저 관용을 베푸는 사람. 존경스럽네. 쿠니키다는 작게 중얼거렸다.
"모두를 사랑한다, 라."
"그래도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쿠니키다 씨니까요!"
"알고 있어. 맨날 말하잖아."
"그럼 쿠니키다 씨가 제일 좋아하는 건!"
뻔한 질문이었다.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코우를 만난 후로 그는 자신이 이렇게 자주 웃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웃을 일이 없던 건 아니었지만, 마냥 웃고 다닐 만큼 썩 유쾌한 기분도 아니었다. 그가 날마다 자연스레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건 그녀 때문이었다.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처음 느끼게 한 사람.
코우는 말이 없는 쿠니키다를 향해 어서 말해달라는 듯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자신이 큰일 났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게 아니라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이렇게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게 더 어리석은 건데. 그 한 사람이 없어지면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진다는 건 겪어보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다만."
"그래도! 쿠니키다 씨가 말해줬으면 하니까!"
마주치는 모든 것을 조금씩 사랑하는 것보다, 항상 바라보는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게 더 맹목적임을. 그럼에도 후회는 없었다. 어리석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분명 처음에는 이렇게 좋아하게 될 줄 상상도 못 했는데, 어느 순간 그는 그녀만큼 자신도 깊이 빠져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 만큼.
"나도 좋아해. 어떤 것보다도 제일."
코우는 행복하다는 듯 활짝 웃었다. 웃는 모습이 예뻤다. 쿠니키다는 마주 잡고 있는 코우의 손을 어루만졌다. 이 손을 그녀가 놓지 않는 이상, 그녀의 웃음을 지키리라. 그녀는 그에게 있어서 항상 우위에 있었으니까. 뭐, 물론 본인은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조용히 웃었다. 어쩌겠는가. 더 사랑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따뜻했던 아메리카노는 이미 미지근해져 있었고, 파르페 역시 어느새 다 녹다 아메리카노와 같은 온도로 바로 옆에 놓여있었다. 더없이 좋은 날씨였고, 더는 바랄 게 없이 두 사람은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