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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시도록 찬란하고 화창한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은 닿을 수 없을 만큼 드높기만 했다. 아도니스는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자마자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다. 활짝 웃는 모습으로 건네던 한마디가 정말 고맙고 마음이 따뜻해져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고맙다.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엔 많은 뜻을 함축한 단어였다. 벅찬 마음을 전달하기엔 더없이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가방을 메고 등교하는 순간에도 수많은 축하를 받았고 교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축하가 닿을 때마다 느껴지던 따뜻한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많은 사람한테 축하와 선물을 받았는데. 왜 아쉬워지는 걸까.’

 

그토록 많은 축하와 선물을 받았는데도 이상하리만큼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그는 양손에 들린 선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축하하던 사람의 잔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들이 건넸던 말들은 전부 온기가 녹아있었다. 선물한 사람의 시간과 마음이 담겨있어서 더욱더 묵직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다른 사람을 축하하기 위해 신경 썼을 이들의 마음과 시간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더욱 선물을 끌어안았다.

 

‘과분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태어난 날을 축하해줬다. 더는 그 마음에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아도니스는 한 사람씩 차근차근 떠올렸다. 그들이 했던 말과 손에 쥐여주던 선물을 다시 마음에 되새겼다. 이대로 비워두긴 싫어서 공허함이 느껴지지 않게 계속해서 벅찼던 순간들로 채워 넣었다. 차곡차곡 쌓아 올리던 마음은 아키히사 류세이를 시야에 담자마자 우뚝 멈춰 섰다. 아도니스는 눈을 깜빡거리며 밝게 웃는 류세이를 우두커니 쳐다보기만 했다. 류세이는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까먹었어.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줄게.”

 

잔잔했던 마음이 이유 모르게 요동치자 아도니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비어있던 공허함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건 평소보다 들뜬 마음이었다. 아도니스가 입을 열기도 전에 류세이는 미소를 흘리며 자리를 떴다. 마음에 깨진 틈이 생기기라도 한 걸까. 류세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아쉬움이 깃든다. 거리가 벌어질수록 겹겹이 쌓여서 꽉 찬 마음이 어느새 공허해졌다. 아도니스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도니스는 류세이한테 축하받고 싶었다. 이 이유가 아니라면 평소의 생일 때와 달랐던 마음을 정의할 길이 없었다. 류세이를 만난 순간 허전함이 사라졌던 이유도. 해줄 말이 있었다는 사실에 들떴던 이유도.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상대가 사라지니 공허함이 배로 몰려왔던 이유도 전부 같았다. 오늘이 생일이라서. 아도니스는 여전히 아쉬움만 가득 남은 가슴을 붙잡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류세이한테 부담감만 얹어주는 느낌이라서 한없이 깊었던 아쉬움을 다른 사람의 축하로 채워보려고 했다.

 

 

 

‘역시 무리인가.’

 

축하받던 상황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준다는 목소리가 겹친다. 무슨 말을 해줄지 기대되는 마음이 순식간에 고맙고 기뻤던 마음을 집어삼킨다. 기대감만 부푼 마음이 덩그러니 남아 결국엔 류세이한테 부담감을 안겨주는 꼴이다. 아도니스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졌다. 오늘은 열심히 달리면서 소중한 사람들한테 들었던 축하를 하나둘 떠올리자는 심경으로 두 주먹을 쥐었다.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구나. 아도니스군.”

“훈련량을 늘릴 생각이다. 사쿠마 선배.”

“아도니스군은 참 성실하단 말이지. 그렇지만 오늘은 생일이지 않누.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축하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네만.”

“과분하게도 이미 많은 축하를 받았다.”

“오늘이 지나면 일 년 후에야 돌아올 날이지 않누. 아도니스군이 어떤 선택을 하던 후회 없는 날이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라네.”

 

아도니스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기만 했던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고 있었다. 머지않아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를 시간대가 찾아올 터였다. 보이지 않는 달을 눈에 담았다. 그는 수동적인 자세로 류세이의 대답을 기다리기만 했다. 잊어버렸던 답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를. 그래서 듣는 날이 오기를. 이왕이면 들려주고 싶던 말이 축하이길 기대했다. 생일 축하하는 걸 까먹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류세이한테 축하받고 싶다는 마음을 접지 못 해서 아직도 기대하는 중이었다.

 

“큰 선물을 받았다. 고맙다. 사쿠마 선배.”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아도니스는 꾸벅 고개 인사를 하고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류세이가 모르고 있다면 오늘이 생일이라고 알려주면 된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축하받고 싶다고. 하고 싶은 말을 떠올려주라는 게 아니라 그저 오늘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니. 레이는 팔짱 낀 채 아도니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은은하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 *

 

 

아키히사 류세이는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봤다. 어둠이 드리운 하늘엔 별빛 하나 반짝이지 않았다. 축복받을 날이라고 하기엔 어둡기 짝이 없었다. 달이라도 떴다면 조금이나마 밝았겠으나 달은 보이지조차 않는 그저 캄캄한 하늘이었다. 오늘이 끝날 때까지 맑은 하늘이였다면 좋았을 텐데 안개가 낀 것처럼 탁하기만 했다. 오늘은 아도니스의 생일이었다. 모르고 싶어도 도무지 모를 수가 없었다. 주변이 시끄러웠으니 말이다. 많은 사람이 한 사람의 태어난 날을 축하하며 마음을 담아 선물을 건넸다. 매우 낯설고 생소한 모습뿐이라서 류세이는 말없이 조용히 사람들과 아도니스를 지켜보기만 했었다.

 

‘넌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정곡을 찔렀던 친구의 질문을 가만히 곱씹었다. 당시에는 그저 실실 웃으며 헤픈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했으나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웃지만 않을 뿐 상황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진심으로 축하하는 사람들과 기뻐하던 아도니스는 류세이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류세이는 아도니스와 눈이 닿았을 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나 흘리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아직도 또렷하게 생각나면서 거리를 벌렸다. 오늘이 지나면 내년이 되어서야 하게 될지도 모를 그 말을 또 한 번 삼켰던 찰나였다. 큼지막한 손이 류세이의 팔목을 감쌌다. 인상을 찌푸리고선 뒤를 돌아봤다가 류세이의 눈이 커졌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고기를 먹으면서 축하해 주지 않겠나?”

“.....하?”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정녕 꿈이었다면 이대로 멈춰서 깨어나질 않길 바랐을 터였다. 감싸진 팔목에서 서서히 시작된 온기가 이곳은 현실이라고 인도했다. 아도니스는 류세이를 바라보며 힘있게 말했다. 흔들림 없이 올곧게 말하는 아도니스와 다르게 류세이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눈뿐만 아니라 마음도 요동치고 있었다. 생일이라는 걸 먼저 언급했기 때문에 이젠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류세이는 대화를 이어갔다.

 

“너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알아? 엄청나게 늦었거든?”

“알고 있다. 미안하다. 오늘이 지나면 일 년을 기다려야 하니 실례인 걸 알면서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동요하지 않은 척 일부러 날을 세웠다. 중심을 잃고 떨리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기에 자칫하다간 목소리에 스며들 것 같았다. 너무 날카로웠던 탓일까. 사정없이 찔렸던 아도니스는 류세이의 손목을 스르르 놓았다. 아도니스는 익은 벼처럼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류세이는 입을 꾹 깨물고 아도니스의 정수리만 바라보았다. 커다란 손이 떨어졌는데도 아직 아도니스가 잡은 온기가 남아있었다.

 

“마침 먹고 싶은 음식이 고기라서 동석하는 거야. 생일은.....축하해.”

 

아도니스의 팔꿈치를 살짝 잡고선 작게 중얼거렸다. 자칫하다간 뜨겁게 달궈진 마음이 넘칠 거 같아서 애써 잠재웠다. 생일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던 순간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서 주변을 관찰하기만 했다. 그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지켜봐 온 순간들이었다. 한 명, 두 명 아도니스의 생일을 챙겨주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류세이 또한 그들처럼 아도니스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어졌다. 말할 기회는 찾아왔지만 차마 말하지 못했다. 지금보다 몇 배는 마음이 울렁거렸기에 굳이 축하하지 않아도 이미 많은 사람의 축하를 받았고 또 누군가는 축하할 거라는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도망치기 바빴다. 아직도 가슴은 울렁거렸다. 차마 눈을 마주칠 수 없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도니스의 얼굴에 차츰 웃음이 피어났다. 맛있는 집으로 데려가겠다며 앞장서서 걸었다. 아도니스의 발걸음이 유난히 가볍고 신난 것 같았다.

 

 

 

* * * * *

 

 

 

불판 위에 올려진 고기가 자글자글 익어갔다. 선홍빛을 띄우던 날고기는 달큼한 향을 내며 옅은 갈색으로 물들었다. 류세이는 메마른 입술에 침을 묻혔다. 아무리 온기를 쬐고 있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힐끔 시선을 옮겨 아도니스를 쳐다보았다. 집게를 들고 고기를 노려보는 모습이 심히 신중해 보였다. 고기 끝이 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더니 힘껏 뒤집었다.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만 정적을 뚫고 퍼져나갔다.

 

“배가 고픈 건가. 많이 구워주겠다.”

“배고프다고 한 적도 없고 너보고 구워주라고 한 적도 없어.”

“그렇군. 입술에 침을 묻히길래 입맛 다시는 줄 알았다.”

“......고기 굽던 거 아니었어? 그러다 고기 타거든?”

“탄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 태우진 않는다.”

“한눈팔다가 홀랑 태워버리는 거야.”

 

달궈진 불판 위에 올라가 있던 고깃덩어리가 잘게 잘렸다. 류세이는 턱을 괴고선 중얼거리며 잘려나가는 고기를 쳐다봤다. 낯이 뜨거워졌다. 귓가에서 닿았던 목소리 때문이겠지. 쳐다보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고기 구우면서도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알게 되어서 더욱 열기가 더해졌을 터였다. 불에 가까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몇 번이고 스스로 속삭인다. 불보다 더욱더 짙고 뜨거웠던 상냥함 때문에 이미 화상을 입었다. 온몸이 달아올랐으나 특히 마음 깊숙한 곳이 아렸다. 불구덩이 중심에 빠진 것처럼 하염없이 뜨거워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몹시 괴롭고 서글펐음에도 가슴 떨릴 만큼 행복했던 찰나였다.

 

“......”

 

류세이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행복하다는 감정은 몸서리치게 두렵고 무서웠다. 깨져버리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곧이곧대로 되돌아왔다. 행복한 시간이 남기고 간 자리에 파편이 무자비하게 꽂힌다. 한 번 꽂힌 파편은 쉽게 빠지지도 않을뿐더러 상처를 남겼다. 그러니까 더 물들기 전에 멈춰야 했다. 언젠가 잃게 될지도 모르니까. 행복을 더욱 욕심내고 탐했다가는 다신 쥘 수 없는 부스러기가 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아도니스의 걱정스러운 시선이 닿자 눈에 연기가 들어간 것처럼 행동해서 그를 속였다. 여전히 다정은 떠나질 않고 곁을 머물렀다. 얼굴을 감싸고 눈가를 불어주려고 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뭐.....뭐야!”

“이제 눈은 괜찮은 건가. 다행이다.”

‘눈은 괜찮아도 마음이 엉망인데.’

 

화들짝 놀란 류세이는 그대로 손을 치워버렸다. 아도니스는 여전히 걱정이 깃든 표정으로 류세이를 눈에 담았다. 심각한 표정이 그나마 펴진 건 류세이의 두 눈이 떠졌을 때였다. 아도니스는 안도한다는 듯 입이 휘며 웃음을 지어냈다. 그 온화했던 미소에 류세이의 마음은 다시금 엉망이 되었다. 행복을 달아나게 할 불청객이 다시 한번 더 찾아왔다. 규칙적으로 마음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키히사. 축하해줘서 고맙다.”

“고마운 줄 알면 말 아끼고 고기나 먹어. 오늘은 네 생일이라며.”

“다음번엔 내가 축하해 주고 싶다.”

“언제는 고기를 먹으면서 축하하자더니.”

“내 생일 말고 네 생일. 생일이 언제인지 알고 싶다.”

 

가장 큰 고기를 집어 아도니스 그릇에 툭 올려놓던 류세이는 한순간 멈칫했다. 축하하고 싶다는 아도니스의 순수한 염원이 이뤄지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깃들 아쉬움도. 아도니스 성격이라면 사서 하게 될 미래의 걱정도 훤히 보였다. 행복은 한순간에 멎어버렸다. 이번에도 그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한참 남았어. 내 생일. 그때 되면 말해줄게.”

 

습관이 된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그때’는 돌아오지 않을 텐데 언젠가 말해줄 것처럼 여지를 남겼다. 아도니스한테 했었던 나중에 생각나면 말해줄 거라는 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도니스를 오래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지금 보내는 이 시간은 나중에 아픔으로 다가올까. 여전히 웃을 수 있는 기쁨으로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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