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속에서 살아온 이는 당연히 죄 위를 걷는다. 죄 위에서 걸어온 이가 죄를 만나면 다시 죄가 태어난다. 죄는 끝없이 대물림된다. 복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피는 피로만 지워낼 수 있다.
그렇다면 부모의 죄는 자식의 죄인가?
*
아그네스 헬리시움 임페르타.
헬리시움의 가장 높은 성채, 가장 위대한 노바를 부친으로 두고 가장 무질서한 것을 모체로 빌어 태어난, 폭군의 유일한 적자.
햇빛에 젖은 대지처럼 찬란한 모래알 빛을 띤 짙은 피부를 가지고, 제 핏줄을 자각시키듯이ㅡ가장 어두운 곳에 군림하여 으르렁대는 광폭한 맹수를 떠올리게 하는 번뜩이는 노란 눈, 파충류의 그것처럼 노란 홍채의 안쪽으로 둘러지듯 섞여드는 야비하고 날렵한 연녹색과 가느다란 동공. 깜깜한 밤 아래에서는 그림자처럼 보일, 제멋대로 삐쳐 자라는 쇳빛 광택의 청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노바의 상징인 용의 뿔이 작지만 단단하게 뻗어 있고, 아직 어린 등 뒤에는 아비의 것과 똑 닮은 날개가 아직 미성숙한 형태로 자리잡혀 있는.
그리고 그 난폭하고 날카로운 외모와 기묘하게 화합을 이루는 말그레하고 환한 웃음, 커다란 호기심을 가득 담고 반짝반짝 빛나는 영원 같은 눈빛, 제 어미를 닮은 동그마한 볼과 발간 뺨을 한 어린 노바.
올해 열 살이 된, 그의 사랑스러운 딸아이다.
매그너스가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고작 오 년 전부터였다. 이제는 제법 자라 날개뼈 부근에서 흔들거리는 청회색 머리카락은, 솔직히 제멋대로 삐죽삐죽하여 겉보기에 썩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상당히 지저분한 인상이었지만ㅡ 뭐, 됐나. 적어도 그가 애틋하게 친애하는 이들만은 그 길게 뻗친 머리카락을 달갑잖아 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매그너스는 그것으로 되었다 생각했다.
“아빠, 아빠, 아ㅡ빠!”
그래,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음... ...두 번째로 사랑하는 존재. 보들보들하고 몽그랗고, 제 어미를 꼭 닮은 사랑스러운 웃음소리를 곧잘 내고는 하는, 이제 제법 노바 태를 내는 하나뿐인 딸아이.
언제나처럼 말간 웃음을 어린 얼굴에 한가득 띄우고, 그의 집무실로 토다다 달려오는 자그마한 몸체에, 매그너스는 치솟아 오르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며 퉁명스럽게ㅡ그는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어쨌든 주변인이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더없이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말투였다ㅡ 대답했다.
"왜. 무슨 일 있냐."
"아빠 바빠?"
"...음."
물론 바쁘다. 안 바쁠 리가 없다. 헬리시움은 늘 전시였고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노바의 땅을 반 이상 차지해서 꼭대기에서 놀고 있는 매그너스는 늘 바빴다.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는 반 이상이 아직 미결재였다.
"아니."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상관이라던가. 그는 아이의 시선이 책상 위에 닿기 전에 서류를 싹 밀어 치웠다. 뒷정리하는 벨데로스가 비명을 지르며 뒷목을 잡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건 매그너스가 알 바 아니었다. 하루 정도 일 미룬다고 안 죽는다, 애초에 그는 하루 미루면 죽을 정도로 급한 서류를 만드는 남자가 아니었고.
사랑스러운 딸아이가 폴짝 달라들어 그의 품에 안겼다. 딱딱하고 차가운 갑주가 불편할 만 한데도, 아이는 개의치 않고 매그너스의 가슴팍에 볼을 기대며 히히 웃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는 이를 꼭 하나 더 알고 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녹아내리는 표정으로, 아이의 동그마한 이마를 쓰다듬으며 아직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게 딸아이는 하나뿐인 보물이었다.
뭐,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아이의 어머니가 이 자그마한 노바를 뱃속에 품고 있을 때만 해도, 그는 그녀를 괴롭히는 아이가 미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잖아도 마르고 비실비실한 이의 안색이 나날이 창백하게 늘어져만 가는 것이, 그 얇달막한 몸에서 유일하게 불룩 튀어나온 배가, 그 속에 든 것이 꼭 그녀의 기를 빼앗아 빨아먹는 기생충 같아서.
그러나 그녀는 그를 사랑하는 만큼 아이를 사랑했다. 매그너스 님, 제가 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기뻐요. 매그너스 님의 아이가 내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게, 내가, 매그너스 님의, 나의, 피를 이은 아이를, 매그너스 님의 가족을. 만들 수 있다는 게, 하고.
새까만 어둠이 비치는 테라스 아래 지친 안색으로,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에 찬 표정으로, 달빛에 젖은 뺨과 별빛이 차르르 흐르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더없이 달콤하게만 들리는 말을, 그에게 속삭이던 밤.
그는 그 배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뱃속에서 느껴지는 두근거림과 손끝에 닿는 보드라운 온기와, 아아, 그 말에서 전해져 오는 행복감에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 세계에서 살아갔다는 지울 수 없는 흔적, 흔적... 그의 아이, 그녀의 아이. 매그너스가 더없이 뜨겁게 사랑하는 이의, 그리고 자신의 아이. 한 가닥으로 외로이 흐르던 두 영혼이 엮여 새로 가른 줄기의 뿌리.
세계였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였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그를 사랑해 주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랑을 어떤 것보다도 강하게 증명하는 작고 소중한 세계.
단 하나뿐인 가족. 살아생전 다시없을 그와 그녀의 아이.
‘뭘 이렇게들 바리바리 적어 왔대? 누가 보면 아주 지들 새끼인 줄 알겠어.’
‘그래도 다들 신경 써 주시니까 좋은걸요, 애기도 자길 생각해 주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알면 좋아할 거야.’
‘......큼. ...그래서 뭐, 마음에 드는 이름 있냐?’
‘으, 으음. 전부 좋은 이름이긴 한데...’
전부 좋은 이름인데? 왜,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사실은, 미리 생각해 둔 게 있어서...
좋네, 그걸로 하자.
그래도 돼요?
뭐 어때, 우리 애긴데.
이름 자를 하나씩 따서 네스. 아이가 조금 커서 스스로 걸을 수 있을 즈음에 새로 지은 이름은 아그네스(Agnes), 그의 절반과 그가 사랑한 여자의 절반을 담고 새 자를 하나 새겨 넣은 이름. 아아, 내 아이, 내 아이구나.
그는 그 아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히히 웃으며 올려다보는 딸아이의 볼을 톡 건드리며 마주 피식 웃은 그는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아이의 어깨를 도담여 주었다. 말할 것이 있으면 어련히 말하시겠지, 아이를 키우며 나날이 인내심이 늘어 가는 기분이었지만, 우습게도 그것이 나쁘지 않았다.
사실 딸아이는 그의 아주 많은 것들을 바꿔대곤 했다. 제 어미가 했던 것과 아주 똑같이, 무심코 지나가는 말 몇 마디로 그를 근간까지 흔들어 놓았다. 정작 저는 모르고 있다는 것까지 꼭 닮은 것은 희극이로다.
아이는 그가 고개를 숙여 늘어진 머리카락의 끝을 건드리며 손장난을 치고 있었다, 역시 제 어미와 똑 닮았다, 어디가 나를 닮았다고, 그의 것과 똑같은 색의 머리카락, 똑같은 모양의 뿔, 아주 빼다 박은 사나운 인상과 짙은 피부색을 보면서도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빠, 머리 기르면 네스랑 똑같겠다! 그 때부터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있을까. 언젠가 아이가 크면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흘리듯이 말해 주고 싶었다. 아마 그 즈음에는 제 머리카락이 거치적거려 다시 자르게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그가 그 정도로 깊이, 아이를 사랑했노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것을 가르쳐 준 이가 지금 이 순간 곁에 없다는 것에 혀끝으로 작은 씁쓸함을 느끼며, 그는 어느 샌가부터 저를 말똥히 올려다보고 있는 라임 색의 눈동자를 부드럽게 마주보았다.
"아빠, 있잖아, 엄마는 언제 와?"
매그너스는 웃던 입매를 굳히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의 기분이 대번에 가라앉았지만 아이의 앞에서 그것을 티 낼 수는 없었다.
"...몰라."
그는 짤막하게 그 말만을 뱉어내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딸아이는 커다란 라임색 눈을 몇 번 꿈뻑이며 그를 바라보다가, ‘그럼 됐구.’ 하고 고개를 돌리더니, 이내 가볍게 그의 품에서 내려가 집무실 문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자그마한 발걸음 소리, 톡, 톡, 톡, 땅을 두드리며 울리는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그는 한참을 시선을 내리깐 채 멈추어 있었다.
매그너스가 가진 왕위는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찬탈해 낸 것이었다. 백성조차 없는 땅, 아주 약간의 노바 세력과 그보다 곱절은 많은 스펙터가 드글거리는 땅. 아마도 그는 살아있던 땅을 죽여 손에 넣었던 것이리라. 씨를 뿌리면 싹을 틔우고 푸르게 빛날 수 있었던 땅 위에 독극물을 부어넣어 그 위에 숨 쉬던 것들을 모두 죽이고 군림한 것과 다름없으리라.
그는 소유하는 법이라고는 그런 식의 것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망가트리고, 더럽히고, 죽였다. 제 손아귀 위에 놓기 위하여. 아무도 갖지 못하게, 오직 그만이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그런 방법으로 가질 수 없는 것을 욕망하게 되었을 때, 그는 어떻게 해야 좋았던 것이었을까.
그는 손 위에서 꿈틀대던 온도를 기억한다. 애무하듯이 부드럽게 심장 위로 칼을 찔러 넣고, 괴상하리만치 경건한 마음으로 마지막 숨을 뱉는 입술 위에 온기를 겹쳤다. 매그너스는 그것을 사랑이라 믿었다.
누군가를 그렇게 강렬하게 증오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가슴 속을 태우는 불길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저주스러운 이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고,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었고, 제 가슴이 터질 때까지 끌어안고 싶었고, 두 눈동자 속에 담긴 것을 망가트려 없애고 싶었다. 들끓는 분노와 고통이, 머리를 태우는 것 같은 달콤한 쾌감과 무너질 것 같은 절망이 시시각각 뒤섞이며 그를 괴롭혔다. 그것은 분명히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증오했다.
그는 소유하는 법이라고는 그런 식의 것밖에 모르는 남자였다. 망가트리고, 더럽히고, 죽였다. 제 손아귀 위에 놓기 위하여. 아무도 갖지 못하게, 오직 그만이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런 식으로 가질 수 없었다. 망가지지 않았고 더럽혀지지 않았고 죽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음습한 소유욕과 질투와 분노가, 두려움과 무력감과 그것에서 기인한 반향이 미쳐 날뛰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어? 네가 감히, 나를, 네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우스울 정도로 금세 변하여 덧없이 자취를 감출 것을 죽음으로 박제시킬 수 없다면. 온전히 부서트려 그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되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이 끝끝내 망가지지 않는다면, 더럽혀지지 않는다면, 죽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자신이 그렇게 되고야 말 것이다.
누가 먼저 포기하나 보자고, 네가 이러고도 망가지지 않을 것이냐고, 그는 사랑을 속삭이는 올곧은 눈빛을 몇 번이나 파내고 꺾었다. 그는 패배할 수 없었다, 무너질 수 없었다, 영원인 체 하는 달큰한 고백을 믿을 수 없었다. 죽이지 않으면, 그 상태로 망가트려 못 박지 않으면, 그렇다면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입으로 언젠가 훌쩍 떠나 또 다른 이에게 거짓 영원을 속삭이리라.
너는 나를 배신할 것이다.
네가 배신하는 것을 두려워해 내가 망가질 것이다.
그것이 약점이 되리라.
용납할 수 없었다, 무르게 썩은 틈 따위는 이를 악물 정도의 수치일 뿐이었다. 그렇게 거부하고, 저주하고, 증오하고, 있는 힘을 다해 그가 할 수 있는 종류의 모든 고통을 바닥날 때까지 퍼부은 뒤에도 한참, 이미 빈 바닥을 드득드득 긁다가 내려다 본 가슴 위가 이미 흐물흐물하게 녹아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야 말 때까지, 그는 그 사랑이 변하지 않고 저를 바라보는 것을 줄곧 눈으로 확인했다.
어떻게 저렇게 올곧을 수가 있는지.
어떻게 아직도 그를 사랑한다 할 수 있는지.
어떻게, 한 줌의 원망도 없이, 어떻게 그 어떤 두려움도 없이. 어떻게 저렇게나 변함없이, 세계를 가득 담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수가 있는지.
매그너스는 사랑에 빠졌다.
그것은 사실은, 아주 한참 전의 일이었다. 외면이라는 것은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지만 가능한 것이다. 거부하고 부정했던 것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것을 인정하기 전부터, 한참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약점이 될 것이 두려웠다, 제가 약해질 것이 두려웠다,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것을 잃으면 어떤 심정일지를 어렴풋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아 두려워했다.
그러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변하여도 영원할 사랑이 그 곳에 있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안식이 그 곳에 있었다.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그는 드디어 마침내, 그 사랑을 인정했다.
그는 그것의 완전함을 맹신했다, 망가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매그너스는 성채의 가장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아도 그릴 수 있는 익숙한 동선을 따라 흐르며 문을 연 그의 눈에, 커다랗고 웅장한 침대 위에 이질적으로 누워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검은 머리카락을 시트 위에 파도처럼 늘어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흰 눈꺼풀 아래 감춰 보여주지 않는, 꽃물이 든 듯이 발그스레한 입을 자그맣게 벌리고 새하얀 목덜미를 힘없이 늘어트린 채 아무렇게나 드러내고, 순교자의 것과 같은 결백한 천을 그것보다 더 순결한 흰 몸 위에 덮듯이 걸쳐 놓은ㅡ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처연한 사랑스러움을 눈 감은 얼굴 가득히 띤 공주님.
그가 세상에서 가장, 그 어떤 굴레의 안에서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깊은 잠에 빠진 듯이, 고요하게 그의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이는 그 엄숙하고 웅장한 방 안에서 유일하게 여리고 보드라운 것이었다. 돌 틈새에 핀 풀꽃처럼 더없이 연약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어긋남에서 늘 안식을 얻었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폭군의 침소에서 잠든 소녀를 당장 구출해 내어야 한다고 소리칠지도 몰랐다. 소녀라니, 실상을 알고 본다면 퍽이나 우스운 호칭이지만. 그럼에도 그 모습 자체는 정말이지, 앳되고 작은 여자아이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 여자아이, 영원한... ...영원한, 여자아이. 그 종족 특유의 영원을, 스스로를 파괴하며 자멸시키는 그 영원함을 고스란히 담아 놓은 것 같은, 처절한 불로(不老)의 여자아이.
매그너스는 애틋한 한숨을 뱉으며 그 하얀 뺨에 손을 갖다 대었다. 굳은살이 단단하게 배긴 손끝에 생크림처럼 부드럽고 차가운 피부가 녹아들듯이 달라붙는다.
관자놀이부터 턱 끝까지, 뺨을 스치며 부드럽게 오가던 손이 천천히 보드라운 볼로 향했다. 라임색 눈동자가 정신없이 일렁이다 한순간에 불붙듯이 확 치솟아 오른다, 그는 손끝을 잠시 움찔 떠는 듯 했다가... ...손에 잡힌 하얀 볼살을 있는 힘껏 꼬집어 비틀었다, 힘껏.
"해가 중천인데 여기서 연락도 없이 퍼 자고 있냐 이 둔탱아!!!"
“아우으아아아?!!!”
짜릉짜릉한 비명이 평소와 별다를 것 없이 성채에 울려 퍼졌다.
"흐어엉, 아파. 네스으, 엄마 아파아."
"호오오."
누가 엄마인지? 매그너스는 코웃음을 치며 어린 네스를 안아들고 새빨개진 볼을 그 작은 손에 부비작거리는 르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참 변함없는 여자다, 애를 낳고도 저 말도 없는 방랑벽이 사라질 줄을 모르니 원. 아무리 살아온 시간이 변하기 어려울 정도로 쌓여 있다지만 집에서 애가 기다리는데 무정히 퍼질러 자고 싶은 것인가.
물론 네스가 별로 내내 엄마를 기다리는 애가 아니기는 했다. 벌써 열 살이나 되기도 했고, 엄마가 없으면 아빠가 있고 아빠가 없으면 보부(...)가 있는 사람 넘치는 아이가 무슨 걱정이겠는가. 알고는 있지만. ...알고는 있다. 그러니까 사실... ...열 살짜리 딸아이의 타이르는 듯한 시선에 과연 그 ‘기다리는 애‘는 딸아이가 아니라 자신의 쪽인 것 같다는 것을 느낀 매그너스는 애써 진실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얼마 가지 않아 시선이 되돌아오기는 했다. 매그너스는 제 딸에게 ‘아픈 거 다 날아가라 해 조.’ 하고 아양을 부리는 르네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무리 엄마는 딸의 영원한 친구라는 소리가 있대도 그렇지 저건 좀 지나치게 친구가 아닌가. 저게 양심을 밖에 두고 온 모양이었다.
매그너스는 네스에게 기꺼운 볼뽀뽀와 즐거운 웃음을 받아내고는 마주 환하게 웃어 보이는 르네를 바라보며 자꾸 누그러지는 눈매를 굳혔다. 양심이 있냐는 눈으로 쳐다봐야 하는데 그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두 여자가 같이 행복해하고 있으니 그보다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결국 그는 싸늘한 시선을 포기하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꼬리를 흔들었다.
그의 아이를 낳은 여자,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시시각각 그리워 어쩔 줄을 모르고, 그리는 것만으로도 나락과 천국을 단번에 오가게 하는 여자. 아마도... 아내, 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것이었다.
정식적인 혼례를 치르지는 않았으나 매그너스는 르네를 사랑했고 르네는 매그너스를 사랑했다. 한 곳에 붙어 있는 법이 없는 이가 아이를 낳고부터는 거주지를 그의 성채로 옮겨 함께 살기까지 하고 있으니 사실상 부부와 다를 바 없었다.
뭐, 르네의 속이야 알 바 없다마는 적어도 매그너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넌지시 여보, 하고 두어 번 불렀을 때 결혼도 안 했는데 왠 여보냐는 속 터지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니 아마 르네 본인도 은근히 인정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 스스로가 헬리시움의 반을 손에 쥐었다는 것을.
둘은 연인이 아니었다. 딸이 생기고 한참 후에야 주고받은 예물도 한 쪽씩 나누어 끼운 귀고리 정도밖에 없었으니, 말만 듣고 보면 참으로 담백하고 속박 없는 사이 같다마는ㅡ 정확히 따지자면 소유욕은 절절히 끓어 넘치는 이들이 다만 서로를 속박할 일이 없는 것일 뿐이었다. 매그너스는 이미 르네의 것이었고, 르네는 그 무엇보다도 매그너스를 사랑했다.
매그너스는 르네를 속박할 수 없었고 르네는 매그너스를 속박하지 않았다.
...뭐, 그런 것으로. 그래서 르네가 딸이 생긴 이후 꼬박꼬박 성채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솔직히 상당히 기함했더란다. 이 녀석이 가정에 충실한 인간일 줄이야, 매그너스야 아무리 썩어빠졌대도 뿌리가 노바 남자라지만, 르네는 아이를 낳기 이전에는 매그너스가 있든 말든 신나게 노다니며 이리저리 뒹굴고 다니는 이였다.
그래 봐야 결국 날 사랑하는데 뭐, 좀 속이 쓰렸지만 그 정도로 용서하던 것이 아예 사라지자 그는 허전... 하기는커녕 솔직히 네스의 볼에 입이라도 맞추고 성채를 한 바퀴 돌고 싶었다. 상당히 불순한 마음가짐이지만 어찌되었든 그것도 태어나 주어 기쁜 점에 속하는 것이리라.
하루에 한 번, 늦어도 이틀에 한 번. 친정... 이라고 칭하는 것이 옳을 듯한 그녀의 원래 집에 갈 때만 제외한다면 그녀는 그 정도로 꾸준히 집에 들어왔다. 물론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습관이라든지, 노바 하면 슬쩍 눈 돌아가는 습관을 못 고친 것은 아주 불만스러웠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녀를 충분히 기다려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랑은 언제나 완전한 것이다, 허나 그것을 둘러싼 다른 것들은 고통스럽게 망가져 서로에게 박혀들 수 있는 것이었다.
매그너스는, 그것을 속죄해야 했다.
어린아이는 금방 지치는 법이다, 까르륵 웃는 소리가 사라지고 적막이 빈자리를 대신 채웠다. 색색 작은 숨을 내뱉으며 잠든 네스를 도담이며 미소 짓는 얼굴은 제법 어미 같아 보였다.
매그너스는 아이가 깨지 않도록 기척을 죽이며 르네의 곁으로 다가갔다. 르네는 매그너스가 옆에 서자마자 비틀대듯이 그의 가슴팍에 기대며 한숨을 지었다. 행복감과 함께 짙은 피로가 묻어나는 한숨이었다.
“매그너스 님...”
혹여 아이가 깰까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내뱉은 부름에, 매그너스는 말없이 이마에 입맞춤해 화답했다. 작고 힘없는 몸이 매그너스에게 겹쳐져 늘어지는 것을 알았다. 르네는 아이만큼이나 금방 지쳤다, 많이 망가졌고 많이 병든 정신체, 어느 종족이 정신에 육신을 갉아 먹히지 않겠느냐마는, 그녀의 뿌리가 되는 이들은 유달리 정신의 영향이 깊었다. 죽음과 노화와 병이 주어지지 않은 육신은, 그저 정신을 실체화시킨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매그너스가 온 힘을 다해 악다구니를 쓰다가 조각낸 것, 그가 그녀를 믿기 위해 내리치고 망가트려 시험하던 와중에 남은 온갖 잔해들. 그가 그 균열을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나는 잘 하고 있는 걸까요?”
매그너스는 젖은 눈가에 입술을 누르며 자잘하게 떨리는 어깨를 도담였다. 그 가장 연약하고 불안정한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준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동시에 그랬기 때문에 가슴이 묵묵하게 막혀 왔다.
“...네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시작과 끝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아프다. 네스는 르네의 행복이었다, 그리고 매그너스에게도 그랬다. 네스는 어떠한 선물이었고, 축복이었고, 그들의 어떤 평화였고, 그랬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이였다.
그러나 그 작은 행복이 더없이 불안한 이유는, 그들이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걸어왔기 때문에.
매그너스의 왼쪽 눈가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 잘려 영영 잃어버린 한 쪽 뿔은 돌아갈 수 없는 배신의 상징이었다. 그래, 가지고 싶었기에 움켜쥐었다. 그 과정에서 남들이 무엇을 잃을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 욕망이 꿈처럼 찬란히 빛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찬란함이 남의 빛을 찬탈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죄 이외에는 될 수 없었다.
르네는 다만 사랑을 했다, 그녀는 인간의 기준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르네에게 세상은 장미꽃밭 같은 것이었다, 소중한 단 한 송이가 아니라면, 툭 휘두르다 꺾이더라도 실수일 뿐인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그 꽃밭 사이에서 살아가고자 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꽃의 양분을 빨아먹는 탐욕스러운 장미의 곁을 지키며.
죄는 어쩌면 죄에게 끌리는 것이던가? 복수가 복수를 부르듯이, 죄는 죄로밖에 씻어낼 수 없는 것이던가? 그리하려 씻어도 씻어도 고작 서로의 몸을 부비는 것이 될 뿐인, 그저 같은 죄를 가진 두 죄인이 될 뿐인 것이던가.
“...네스는.”
후회하지 않는다.
“네스는 행복했으면 좋겠어...”
스스로의 죄만은, 후회하지 않는다.
르네는 울지 않았다, 눈가를 붉게 들띄우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시선의 끝에는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네스가 있었다. 각각이 하나의 개별적인 종족인 그녀에게는, 네스만이 유일한 고향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의 피를, 이은, 아이. 어찌나 행복한 존재인가, 어찌하여 그 이가 단지 이 세상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가 있는가. 매그너스의 뿌리와 르네의 뿌리가 섞여 전혀 새로운 열매를 맺었다는 것은, 적어도 르네 그녀에게만큼은, 고통스러울 정도의 행복임이 분명했다.
십 년을 살아 온 아이는 더없이 천진난만하고 어렸다. 인간 나이로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더지만, 몇 백 년, 몇 천 년, 몇 만 년, 아니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세기를 살아 온 그녀에게는, 네스는 너무 작고, 어리고, 안타까울 정도로 깨끗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부러, 아이에게 많은 것을 침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부모의 죄는, 자식의 죄인가?
단지 이 배 안에서 난 타인일 뿐이다. 네스는 네스일 뿐이다. 폭군 매그너스의 딸이 아니라, 군견 르네의 딸이 아니라, 아그네스, 네스. 무질서와 노바의 혼혈,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사랑스러운 네스.
검을 다루는 것을 단지 놀이라 생각하고 피가 무슨 색인지조차 모르는 무구한 아이. 죽음이라는 그 보편적이고 단순한 명제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
죄는 이을 수 없다. 그 손으로 직접 저지른 죄가 아니라면 아무도 탓해서는 안 된다. 무지의 죄조차도 없는 이를 고작 죄인의 아이라는 이유로 징벌하려는가.
“...벌은 우리가 끝낼 거예요.”
죄는 우리가... 받을 거예요.
매그너스는 작게 속삭이는 입술 위에 가볍게 몇 번 입술을 스쳤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타인의 체온, 제 죄로 빚어낸 이브가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 손에서 끊어내야 할 원죄를 물릴 수야 있겠는가.
그래, 벌은 우리가 받겠다. 죄 지은 이들이 받겠다. 심장을 도려내고 힘줄을 끊어도 좋다. 그러나.
“그러니까 네스는...‘
아이만은 살아가야 했다.
죄가 반드시 죄를 낳으리라는 법이 대체 어디에 있다던가? 죄가 죄로 이어지는 것은 단죄하기 때문이다. 목이 잘린 상처에서 배어나온 피가 땅을 덮어 자라기 때문이었다. 그 지독한 연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허니 끊어 내리라, 여기에서 끊어 내리라.
이기적이라 하여도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전장에서 피를 취한 이들도 어딘가의 부모이고 자식이고 형제이리라. 그러나 전장이라는 것을 알지조차 못하는, 무구한 이를 징벌할 수는 없는 법이 아니던가. 그저 죄인을 고통 주기 위한 수단으로써 죄 없는 이를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미안해, 아가, 미안해... 소리 없는 흐느낌이 자그마한 떨림으로 잔류하였다. 그저 살아가는 것이 죄라면, 그것은 저들의 죄였다. 저들의 죄였다.
적어도 아이의 죄는, 아니었다.
르네는 매그너스의 손을 꼭 잡았다 놓았다. 그러고는 지워지지 않는 핏자국이 남은 손으로, 제 품에서 잠든 어린 손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가, 너를 사랑해.
아주 많이 사랑해.
네스는 곤히 잠든 얼굴로, 행복한 꿈을 꾸는 듯이 자그맣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