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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의 진행과는 상관이 없는 별개의 시간대 설정입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것은 기이하기 짝이 없어서, 철조망이나 벽 따위로 막아놓은 세상을 한 겹 벗겨보면 죽은 자들이 썩어 문드러지는 입을 벌리고 비틀거리며 달려드는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떠도는 것은 죽음의 그림자를 매달고 걷는 일이고, 머무는 것은 언제나 등의 신경까지 바짝 곤두세운 채로 사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삶의 찬연함을 알기도 전에 벽에 매달려 허우적거리는 시체를 보고 자라거나, 그게 아니면 그들을 지키기 위해 긴장감을 한도 끝까지 치밀어 세운 부모의 등에 제 등을 맞대고 총기를 손질하는 법을 익히며 자라야 했다.

 

그게 아니면 죽은 부모의 유품을 보며 이별을 이해하는 일을 배워야 하지. 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 멀리 릭에게서 아버지의 유품을 받아드는 소녀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렇게 크지 않은 나이였다. 고작해야 아홉 살 쯤 되었을까. 가지런하게 자른 앞머리가 둥글고 맨질한 이마를 얌전하게 덮고, 붉은 머리카락은 때 모르는 햇빛 아래에서 금색에 가까운 주홍빛으로 불탔다. 남색에 가까운 짙은 푸른 눈동자가 옅은 갈색에 가까운 주홍빛 속눈썹 아래로 깜박이며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릭은 아이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기꺼이 무릎을 굽히고 꼭 공주를 대하는 나이 든 기사처럼 꿇어 앉아 있었다. 아이는 릭의 나직한 목소리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손 위에 쥔 손목시계를 끌어안듯 가슴께에 끌어당겼다. 어른스럽구나. 스콧을 잃은 뒤의 그녀는 그대로 졸도해 버렸었는데.

 

아빠는 용감하셨어, 사람들을 구하셨단다. 그것은 스콧을 잃고도 몇 번 비슷하게 들어보았던 소리라고,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물론 죽어버린 아버지의 빈자리가 그것으로 해결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당장에 스콧을 잃은 후에 갈피를 못 잡고 죽어버리겠다며 권총을 챙겨 나간 것이 그녀 자신이었지 않은가. 물론 그것은 실패했고 그녀는 지금까지 살아남았지만, 그것이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는 또 다른 ‘정상적인’ 위로의 메커니즘으로 작용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아니, 좀 더 희망적으로 생각해야지. 그녀는 자꾸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어 누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햇빛은 정말이지 때를 모르고 번쩍였고 작은 소녀의 붉은 머리카락에서는 이제 금색의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꼬맹아.”

 

단단한 손이 문득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무너질 것처럼 휘청이는 그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호칭에 아물거리며 조금 더 작고, 더 금발이고, 더 옅은 푸른 눈을 한 두 아이들로 풀어지려던 실루엣들이 단단하게 날이 선 채로 다가왔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귓가에 꼬마야, 하고 쏟아지는 숨 섞인 부름에 다시 풀어지려는 시선에 힘을 주었다. 팔을 잡아 세운 손이 허리에 단단하게 감겨 휘청이지 못하게 다잡아주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바짝 다가온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대고 속삭였다. 아저씨.

 

“정신 차려.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나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나한테 염병할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마라. 내가 널 모르겠냐.”

 

의문으로 끝났어야 할 것이 평서문으로 풀려나가는 것의 의미는 제법 묵직해서, 그녀는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머리카락 위에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빛을 핑계 삼아 갈라지고 뭉그러지려던 실루엣은 목소리에 다잡혀 다시 하나로 단단하게 뭉쳐 있었다. 높이가 다른 두 개의 그림자와, 젖빛이 섞인 두 쌍의 푸른 눈동자와, 그리고 정오의 햇빛 아래에서는 백금 색으로 반짝이는 탁한 금발의 머리카락 따위는 없는 온전한 하나의 소녀로. 허리를 감은 손이 몸을 끌어당겨 바짝 끌어안았다. 그녀보다도 먼저, 아니, 어쩌면 그녀와 비슷하게. 흐려져서 갈라지던 형체들과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이름들을 생각해냈을 대릴이 텁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괜찮아, 라고. 그녀와 그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언제고 속삭이던 거짓말을, 언제나처럼 다정하게.

 

“죽은 건 네 노인네가 아니야.”

 

눈을 감으면 상상하게 된다. 마치 그녀가 스콧을 잃었던 것처럼, 그녀가 낳은 두 아이들이 그녀와 남편을 잃는 날을. 짐이 차라리 죽고 싶다는 얼굴을 한 채로 그녀에게 글록을 내밀었던 것처럼, 누가 될지도 모르는 이가 그녀와 남편의 유품 따위를 내밀고 아이들이 그것을 받아드는 날을. 악몽 같은 상상 속에서 아이들은, 이제 고작해야 둘의 살아온 해를 합쳐도 10년도 되지 못할 아이들은 그것을 받아들고. 부모님은 용감하셨단다, 라던가 그게 아니면 누군가를 위해 돌아가신거란다, 같은 소리를 듣고. 살아남은 이들은 침통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그래, 마치 그것처럼. 스콧의 글록을 받아 잡고 그대로 무릎부터 무너져 내렸던 그녀를 보던 그 눈들처럼.

 

“그리고 우리는 아직 여기에 있지.”

 

릭이 아이의 뺨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온통 눈물로 뺨이 젖은 아이는 이제 고개를 숙이고 잘게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녀는 자꾸 그 위로 떨어져 씌워지는 그림자를 털어내기 위해 남편의 목덜미에 깊게 코끝을 묻었다. 나도 알아요, 하고 씹어뱉는 목소리는 힘 하나 없이 끽끽대는 잔상을 남겼다. 나도 알아요. 마른 뺨이 그녀의 정수리를 문지르고 이마 위로 거칠하게 일어선 입술이 다가섰다. 아이는 이제 릭의 품에 안겨 섧게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당분간은 이니드와 같이 있는 게 어떻겠니. 네가 원한다면 다른 사람과 같이 지낼수도 있단다...

 

“아직 우리는 그 누구도 남겨두지 않았다는 거요.”

 

부디 그게 오늘은, 오늘은 아니길 바라면서 살아가는 것도. 피가래처럼 치민 말들을 토막 내어 삼키며, 그녀는 입술을 물었다.

 

 

 

 

 

 

“엄마아, 제인은 이제 이니드 언니랑 같이 살아?”

 

우뚝 멈춘 시선 끝으로 일찌감치 잠투정을 하는 작은 아이를 안아들던 남편이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는 것이 보였다. 윤은 딸아이에게 읽어주던 책에 가름끈을 끼우고 표지를 덮었다. 엄지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 되는 제법 두꺼운 책이었다. 노란 테두리 안으로 세피아 빛 세상이 펼쳐진 딱딱한 표지 위에 커다랗고 까만 글씨로 제목이 쓰여져 있는 책은 딸아이가 타라의 집-타라가 사는 집의 다락방에서 찾은 것이라고 했다. 다정하고 올곧은 타라는 아이들에게 물건을 나눠주는 데에 아낌이 없는 성격이었고, 해서 딸아이가 머리 위에 먼지를 덕지덕지 묻히고 책을 쥔 채 나타나자 깔깔 웃으며 네가 찾아냈으니 네 것이라며 선물로 주었다고도 했다. 그녀에게도 익숙한 책이었다. 중학생 때 처음 읽었었나. 짤막하게 추억을 되짚어보던 그녀는 허리춤의 옷자락을 짧게 잡아오는 작은 목소리에 현실로 초점을 맞추었다. 엄마, 하고 딸아이가 속살거렸다. 엄마.

 

“아, 음, 미안, 애쉬, 엄마가 잠깐 다른 생각을 했네……. 응, 제인은 이니드 언니랑 같이 지낼거야. 제인이 걱정 되니?”

“응……. 제인은 자기 아빠를 엄청 좋아했으니까……. 있지, 엄마, 나 내일 제인 만나러 가도 돼?”

“그럼, 당연히 되지.”

 

남편의 어깨 위에 볼을 뭉개고 하품을 하던 작은 아이가 나도오, 하고 웅얼거렸다. 세 살배기 아들은 제 누나를 유달리도 좋아해 제 누나가 발길 닿는 곳이면 어디가 되었든 간에 따라가려고 들었다. 자면서도 귀를 열어놓는지 누나 이야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 뜨고 짐짓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둘레둘레 주위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녀는 꿈결 속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응? 누나아, 나도, 하고 허공에 발을 구르는 아들을 남편이 앓는 소리와 함께 추슬러 안는 것을 보며 나직하게 웃었다. 화제를 제외한다면 언제나와 똑같은 풍경이었다. 딸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 누나와 함께 책을 듣겠다고 오래도록 앉아 있다가 졸음으로 고꾸라지기 직전의 작은 아이를 남편이 숨 삼키는 소리와 함께 익숙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안아드는 것, 세상 다시 없을 맑고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말을 거는 것.

 

죽은 이들이 세상을 덮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벽 너머에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끊어져버린 숨을 끓이는 소리를 흉내내며 걸어다니는 세상 속에서도 오래 전 그녀의 유년과 비슷한 풍경들이 눈앞으로 펼쳐졌다. 다른 것은 죽음이 조금 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되는 것 뿐일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램프 불빛 아래 황동색 테를 두른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그란 두상이 손 안 쪽을 움푹하게 휘게 만들었다.

 

“있지, 엄마.”

“응, 우리 아기.”

“제인을 만나면 무슨 말을 먼저 해야 돼?”

 

아직도 손가락으로 건드리면 옴폭하게 들어가는 흰 뺨이 한쪽으로 가지런히 기울어졌다. 동이 트기 직전 뿌옇게 밝아오는 여름 하늘처럼 부옇게 흰 빛이 섞인 푸른 눈동자가 머뭇거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 그랬지. 요 근래 딸아이 또래의 아이가 부모를 잃은 것은 드문 일이었다. 다들 아이가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는 조에 잘 끼워주지 않기도 했고-물론 그녀와 남편은 바깥이 익숙한 사람 중 한 명이었으므로 어쩔 수 없었지만-벽 안쪽에 머무르기만 했던 알렉산드리아 사람들도 여러 일을 거쳐 바깥에 익숙해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깨까지 부드럽게 늘어지는 딸아이의 머리카락 끝을 손가락 사이로 문지르며 그녀는 입술을 지근지근 씹었다.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은가, 는 사실 그녀가 가장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그 어떤 말도 장본인에게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스콧을 잃었을 때, 칼이 로리를 잃었을 때, 그리고 매기와 베스가 허셜을 잃었을 때. 그녀가 눈으로 보고 피부로 겪은 일들 속에서 자식들은 모두 다른 태도를 보였고, 수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후의 태도 또한 모두 달랐다. 그녀는 스스로의 안으로 침잠했고, 칼은 분노했으며, 매기는 실의에 빠졌고, 베스는 슬픔을 감내했다. 각자 다른 방식의 슬픔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의 위로를 건네는 것은 차라리 불가능에 가까웠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그녀는 팔꿈치 안 쪽 움푹한 곳으로 아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직도 젖내가 풍기는 작은 숨이 옷깃에 닿을락 말락 떨렸다가 잦아들었다.

 

엄마 생각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입 밖으로 낸 목소리의 끝이 불안정했다. 그녀는 제가 그 한 낮의 광경을 다시 되씹고 있음을 깨달았다. 스콧을 잃은 그녀의 그림자를 덮어씌웠다가 결국에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의 실루엣을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그 광경을. 번쩍이던 햇살로 붉은 머리카락이 금빛으로 일렁이고 심해의 빛을 띤 눈동자가 새벽 어스름의 빛으로 깜박이는 광경 아래서 하나의 어린 아이가 두 명의 어린 아이로 갈라지려고 했던 그 때를. 그녀는 마른 침을 한 번 삼켰다. 거의 졸음에 빠져들기 직전의 아들이 제 아빠의 품 안에서 팔을 허부적거렸다.

 

“엄마 생각에는……. 글쎄, 애쉬가 제인의 옆에 있어주는 걸로도 괜찮지 않을까? 힘내라는 말 보다는, 옆에 있어도 괜찮을까, 하는 말이 더 좋을 때가 있으니까.”

“우음, 어려워…….”

“어려운 게 당연하지, 스윗하트. 넌 아직 어리니까. 그리고 네 엄마는 원래 말을 좀 어렵게 하거든.”

“…내가 언제 그랬어요?”

 

옆으로 다가온 큰 손이 코웃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딸아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이가 그 손을 제 손으로 쥐고 뺨을 부비는 틈을 타 뾰족한 척 눈을 흘기자 다시 한 번 코웃음 비슷한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넌 꼭 책 읽을 때처럼 말할 때 있잖아.”

“그건 내가 대본이 익숙해서 그런 거고... 그래도 지금은 안 그러잖아요?”

“대신 듣는 사람이 무슨 뜻인지 모를 말을 하고 말이지.”

“말도 안 돼, 애 앞에서 이렇게 거짓말해도 돼요?”

 

남편은 예의 그 ‘네가 무슨 말을 하던지 난 사실을 안다’ 의 얼굴로 입술 끝만 들어 올린 채 웃었다.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이 그녀를 골리는 게 제법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아들을 한 팔에 받쳐 안고 한 쪽 어깨를 모조리 그 뺨 아래에 내어준 채로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이 어이가 없기도 하고, 또 우습기도 해서 그녀는 헛웃음을 치려다 눈썹만 한 번 치켜 올리고 말았다. 아마 눈치 챈 것일까, 싶은 생각도 들어서였다. 남편의 눈은 그녀와 관련된 것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매서웠다.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그녀의 속이 뒤틀리는 광경을 그녀보다도 먼저 짚어낼 때도 있었다. 오늘 낮만 해도 가장 먼저 그녀의 안 쪽까지 꿰뚫어 본 것은 그가 아니었던가. 윤은 장난 반 숨 반을 섞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쉬, 봤지, 아빠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고……. 하며 주어섬기는 말 끝으로 말갛게 웃음 소리가 따라왔다.

 

“거 봐, 애쉬도 웃잖아.”

“당신 때문에 웃는 거라구요. 그렇지, 애쉬?”

“으히히, 엄마랑 아빠 둘 다 좋아아.”

 

말랑한 볼에는 커다랗고 거친 손을 대고, 반대쪽 뺨으로는 품을 파고 들어온다. 젖빛으로 달아오른 볼 위에 웃을 때마다 지는 복사빛 그림자가 흐드러져 사랑스러웠다. 남편은 그 자그마한 얼굴이 환하게 웃는 것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는지 얼른 허리를 굽혀 보드라운 이마에 부스럭거리는 입맞춤을 남겼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손가락 끝에 온도를 남기며 맴돌았다. 엄마랑 아빠 둘 다 정말로 좋아, 하는 목소리. 그녀는 품을 파고 드는 아이의 관자놀이에 깊숙하게 입을 맞췄다. 코 끝으로는 아직 가시지 않은 젖내가 일렁였다. 아, 내 소중한 아이, 아이들, 내 자식들. 그녀는 오롯하게 이 아이들을 품 안에 끌어안고 놓고 싶지 않았다. 세상도 고통도 땅 위를 떠도는 시체들도 모르는 채로,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외롭고 슬프고 위험한 것인지 모르는 채로 두고 싶었다.

 

아, 하지만 내가 너희를 두고 먼저 죽게 되면 어쩌지. 나와 이 사람이 너희를 두고 먼저 죽어버린다면. 너희의 손에 담기는 게 우리의 살아있는 손이 아니라 알량한 유품 몇 조각뿐이라면.

 

“정말로 좋아. 엄마랑 아빠 둘 다 너무너무 좋아.”

“엄마랑 아빠도 애쉬랑 리틀 제이를 아주 사랑해.”

“응! 그러니까 어디 가버리면 안 돼?”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스콧은 언제나 두렵다고 말했다. 너를 두고 언젠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기에 두렵다고.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너 혼자 이 세상 위에 덩그러니 두고 갈 것이 오롯한 막막함과 두려움일 뿐이라 너무나도 무섭다고. 애쉬랑 제이 두고 가버리지 마, 하고 속삭이는 소리가 온 몸의 근육을 딱딱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얼이 빠진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들어 작은 아이를 안아들은 채로 똑같이 굳어버린 남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남편은 꼭,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치고 들어오는 워커들을 봤을 때처럼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기억들이, 광경이, 머물러있던 시간들이 밀고 들어왔다. 두 개로 갈라졌던 실루엣뿐만이 아니라, 저 멀리 밀어두었던 일들까지도 그랬다. 짐의 입으로 전해 들어야 했던 너를 외롭게 해서는 안된다는 유언과, 로리를 쐈다던 칼의 움푹하게 들어간 눈 밑의 그림자와, 허셜이 죽는 과정을 모조리 봐야했던 매기와 베스의 울부짖음이, 그리고 금색으로 일렁이던 어린 아이의 뺨 위로 데굴데굴 구르던 눈물방울 같은 것들이. 엄마, 하고. 딸아이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아빠, 하는 부름도 뒤따랐다.

 

부디, 제발, 오늘은 아니길. 바이바이, 하고 한 손 안에 모두 쥐이는 그 작은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뒤에 두고 나올 때마다 하는 생각들. 제발 오늘이 저 아이들을 보는 마지막 날이 아니기를. 그녀는 가끔 그렇게 숨이 막힐 때가 있었다. 아마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를 두고 나오는 부모가 죽음 앞에 직면했을 때 느끼는 것들은 모두 비슷하니까. 피붙이는 아니었더라도 그 피붙이만큼 사랑했던 아이에게 허망하게 속삭였던 늙은 군인의 말처럼, 너를 외롭게 두어선 안 된다고 말할 때가 부디 오늘은 아니었으면, 하는 그런 감정들이. 단풍잎 같은 작은 손이 뺨에 달라붙었다. 차닥차닥 물장구를 치는 소리가 났다. 엄마, 왜 울어? 딸아이가 속삭였다. 엄마. 무거운 단어였다. 엄마.

 

“엄마, 울지마아.”

“엄마… 엄마 안 울어, 괜찮아……. 이리와, 우리 아기.”

“엄마 우는데에.”

“정말이야, 엄마 괜찮아……. 그렇지, 봐, 엄마 안 울어.”

 

엄마 울어? 하고 머리 위에서 또 다른 어린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아빠, 엄마 울어어? 남편은 말없이 아들을 몇 번 추슬러 안고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목덜미를 스쳐 감기는 팔이 너무 연약했다. 손에 쥐면 그대로 뭉개질 것 같은 부드러운 팔. 아버지의 유품을 쥐어 가슴께로 끌어당기던 그 아이도 살아있던 시절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안겨들었을까. 죽은 이들에게 물어 뜯겨 결국 머리에 칼집 자국을 낸 채 남겨진 그 죽어버린 아버지도 살아있던 그 시절 오래도록 이런 생각을 했을까. 남겨두고 싶지 않아, 남겨두어서는 안돼, 라고. 작은 아이가 아빠, 엄마 울어, 하고 울먹이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손을 들어 품 안에 안긴 딸아이를 끌어안았다. 허공에 동동 발을 구르다 내려온 작은 아이도 코를 훌쩍이며 품으로 안겨들었다.

 

우리는 늘 괜찮지 않은 것을 알면서 괜찮다고 하지. 너희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래왔고 어쩌면 너희가 전부 자라서 또 다른 길을 찾으러 갈 때까지 그럴지도 몰라. 자꾸 치밀어 오르는 말들의 편린은 끝마다 날이 서 있어 목 안쪽을 쿡쿡 피가 나도록 찔러댔다. 아이들이 울음으로 축축한 목소리로 엄마아, 하고 연이어 말들을 떨어뜨렸다. 윤은 입술을 지근지근 물었다가, 풀었다가, 다시 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깨물었다. 딱딱하게 마디에 굳은살이 박힌 손이 어깨를 바짝 끌어당겼다. 괜찮아, 하고 그 손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언제나의 거짓말처럼, 하지만 결국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그 말처럼, 괜찮아, 라고.

 

“엄마랑 아빠가 어떻게 애쉬랑 제이를 두고 가.”

 

품 안에 안겨서 울먹거리는 소리를 내는 아이들은 듣지 못할 만큼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머리 위로 괜찮아, 하는 단어를 뱉어냈다. 괜찮아, 우리는 괜찮을 거야. 그녀는 시선을 자근자근 밟았다.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계, 아이들은 벽에 매달린 걸어 다니는 시체들과 저희들을 둘러싼 어른의 바짝 긴장한 등에 익숙해져야 하는 세계, 그리고 떠났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부모의 부재에 익숙해질 준비를 해야 하는 세계. 그런 세상 속에서 태어나서, 그런 세상 속에 남겨지는 아이들이 존재하는, 그런 세계. 그녀는 작은 몸들을 조금 더 품 안으로 가득 안았다. 제게로 구부러져 휘어진 남편의 그림자가 언뜻 램프의 불빛을 덮었다. 엄마랑 아빠는 어디도 안 가. 딸아이가 속삭였다. 엄마. 아들이 숨을 가득 섞어 웅얼거렸다. 엄마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어깨와 등을 감싸 안은 품 안으로 몸을 기대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남겨 둘 수 밖에 없는 것, 남겨질 수 밖에 없는 것. 그럴 수 밖에 없는 세계. 가는 팔이 목덜미와 팔에 엉겨붙었다. 약속할게. 헛될지도 모르는 약속이 목소리는 쓴 맛이 났다. 너희를 두고는 어디도 안 간다고.

 

“엄마가 약속할게.”

Written by 마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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