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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난 후의 집은 늘 조용했다. 데스페라도는 이 시간엔 대부분 외출해서 없고, 아이들은 방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거나 밖으로 놀러나갔으니까. 평화롭다, 라고 해도 좋은 걸까. 루엔은 새삼스럽게 평온한 오전이 낯설게 느껴져 볕이 좋은 창가에 앉아 신문을 폈다.

카르텔의 씨가 거의 마른지 얼마나 되었더라. 아이린이 지금 7살이니, 아마 6년 정도 되었나. 옛날과 달리 큰 사건사고가 적혀있지 않은 신문을 보던 그녀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옛날처럼 언제 죽을지 몰라 긴장하고 살았던 삶보다 지금이 훨씬 좋다는 건 말해봐야 입만 아픈 사실이다. 하지만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안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일까. 루엔은 이 조용한 나날들이 괜히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이상하기도 하지, 일이 없으니 더 초조하다니.’

 

일 중독자들의 기분이 이런 건가. 신문을 곱게 접은 그녀는 최대한 잡생각을 떨치기 위해 몸을 움직이기로 했다. 옛날부터 머리를 비울 때는 행동을 하는 게 상책이었지. 그게 법이 없는 세계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으며 터득한 그녀만의 요령이었다.

 

“청소라도 할까…. 아, 맞다. 빨래해야 하는데 비누가 없었지.”

 

창문을 열고 빗자루까지 들고 나서야 다른 할 일이 떠오른 루엔은 잠깐 고민하다가 아이들 방으로 향했다. 슬쩍 문을 열어 안을 보니, 첫째는 나갔는지 보이지 않고 둘째만 얌전히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흐음.’ 앓는 소리를 낸 그녀는 아들이 놀라지 않게 가볍게 노크하며 이름을 불렀다.

 

“라이엇.”

“…네?”

 

4살이면 한창 뛰어다니고 싶은 나이일 텐데, 제 아들은 누굴 닮아 이리도 얌전한 걸까. 연필을 꼭 쥐고 고개만 돌린 라이엇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머니의 말을 기다렸다.

‘괜찮을까.’ ‘괜찮겠지. 아이린도 이맘 때 쯤 보냈고.’ 혼자서 중얼거리던 루엔은 결심했다는 듯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심부름 좀 다녀올래? 비누만 사오면 되는데.”

“비누요?”

“응. 빨래할 때 쓰는 거. 거스름돈은 우리 아들 먹고 싶은 거 사먹고.”

“네에.”

 

혼자 가는 심부름은 처음인데 걱정도 안 되는 걸까. 라이엇은 어머니의 부탁을 덥석 수락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자리를 비우는 거지만 제가 앉은 자리를 치우고, 제대로 외투까지 챙겨 입은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루엔 앞에 내밀었다. 심부름 값을 달라는 의미였다.

 

“자. 조심해서 다녀오렴. 노는데 방해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한 라이엇은 종종걸음으로 첫 심부름 길에 나섰다. 이렇게 야무진 아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요즘 무법지대는 카르텔이 사라진 덕분에 몇 년 전처럼 험악하지도 않으니까 위험할 것도 없다. 그렇게 굳게 믿은 그녀는 조금 뒤 돌아올 라이엇에게 줄 간식이나 생각하며 바닥을 마저 쓸었다.

 

조금 뒤, 제 아들과 딸이 무슨 일을 벌일지 까맣게 모른 채 말이다.

 

 

 

“어? 라이다! 라이~!”

“아….”

 

무사히 비누를 사고 돌아가는 길, 라이엇은 자신을 부르는 누나의 목소리에 발길을 멈췄다. 아까 전 놀러나간다고 나가더니 이 근처에서 놀고 있었던 걸까. 또래의 여자애들과 함께 있던 제 누나는 친구들에게 뭐라 일러두곤 무리에서 이탈해 자신에게 다가왔다.

 

“어디 갔다 와?”

“심부름 갔다 왔어. 이제 집에 갈 거야.”

“심부름? 헤에. 뭐 샀어?”

“비누. 남은 돈은 과자 사라고 했는데, 별로 먹고 싶은 게 없어서….”

 

욕심이 별로 없는 라이엇은 고스란히 남은 잔돈을 누나에게 보여줬다. ‘오오.’ 아이린의 눈동자가 정오의 태양마냥 빛을 뿜었다.

 

“내가 써도 돼?”

“응? 어…, 아마도. 과자 살 거야?”

“당연하지! 자, 너도 고르고! 가자!”

“잠깐, 누나 친구들은…?”

“응? 아. 먼저 가라고 했어. 난 동생이랑 놀 거라고.”

 

평소에는 제멋대로인 아이린이지만, 이럴 땐 또 굉장히 누나 같다. 누나의 손에 이끌려 다시 구멍가게로 향하는 라이엇은 혹시라도 돈을 흘릴까봐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제 어머니는 상냥해서 거스름돈을 잃어버린 정도로 화를 내진 않겠지만, 누나가 과자를 못 먹는 것은 싫다. 그러니 돈을 흘리지 않게, 최대한 조심하려고 했는데….

 

“야. 거기!”

“응?”

 

나란히 걸어가는 남매를 불러 세운 건 10대 초반 정도의 소년들이었다. 하나, 둘, 셋. 소리 없이 상대의 수를 센 아이린은 자신보다 제법 연상인 상대방에게 당돌하게 외쳤다.

 

“왜 불러요? 난 ‘야’가 아닌데?”

“허, 말은 잘하네. 이리 와봐!”

“싫은데요? 그쪽이 오던가!”

 

‘저건 무슨 배짱으로 저러는 거야?’ 소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친구들과 함께 다가왔다. 이건 좀 위험한 거 아닌가. 라이엇은 아이린에게 어쩔 거냐는 듯 눈치를 줬지만, 제 누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희 돈 있냐?”

 

소년들의 시선이 라이엇에게 향한다. 꼭 쥔 주먹 안에서 들리는 동전끼리 부딪히는 소리, 잘 포장된 물건. 누가 봐도 심부름 다녀오는 모습이니 돈이나 뺏어볼까 하고 눈독을 들인 거겠지. 아이린은 제 뒤로 라이엇을 감추며 버럭 외쳤다.

 

“와, 지금 삥 뜯으러 온 거지?!”

“그러면 어쩔 건데? 쥐방울만한 게 이제 반말까지 하네?”

“내 동생 건들면 가만 안 둬!”

“가만 안 둬~? 아이고 무서워라~, 뭘 어쩔 건데~?”

 

아직 10살도 안 된 여자애가, 머릿수도 많은 자신들에게 소리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겁을 먹는 바보는 없다. 소년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적어도 눈앞의 남매가 몇 년 전까지 무법지대를 휩쓴 그 흉악한 커플의 자식인 줄 알았다면,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탕!’

 

귀를 찢는 총성의 근원지는 분명 눈앞이었다. ‘설마?’ 믿을 수 없지만 그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파악했다.

라이엇은 너무 놀라 입까지 벌린 채 아이린을 응시했다. 제 손을 잡고 있는 누나의 반대편 손에는, 작은 리볼버가 화약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어?”

 

소년들의 반응은 한 발 늦게 튀어나왔다. 리더로 보이는, 앞장서서 아이린에게 말을 걸던 소년은 총알이 스쳐지나간 자신의 뺨을 손으로 훔치고 굳어버렸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에서 읽을 수 있는 건 당혹스러움과 공포, 그리고 혼란. 아무리 무법지대라지만, 이런 어린애가 총을 가지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일부러 빗나가게 쏜 거야. 지금 꺼지면 살려는 줄게.”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은 가끔 제 아버지가 보여주는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도저히 7살 짜리 여자애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건 농담이 아니다. 그걸 느낀 소년들은 더 이상 말을 섞기도 싫은지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누나, 그 총은…?”

“응? 아아. 아빠가 혹시 시비 거는 놈들 있으면 다 쏘라고 줬어! 시체는 아빠가 다~ 알아서 할 테니 절대 지고 살지 말래!”

“…….”

 

‘아버지가 그럴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하고 싶은 라이엇이지만, 아마도 저건 사실일 거다. 제가 4번째 생일을 맞이하고 나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쯤. 자신도 분명 아버지에게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 라이엇. 넌 아직 어리지만 혹시 몰라서 말해두는데, 누가 네게 개소리를 하면 아빠든 엄마든 불러. 뒤처리는 다 우리가 할 테니 지고 살지 마라.’

 

그땐 그냥 알았다고 했는데, 이런 의미였나. 어린 라이엇은 새삼스럽게 제가 태어나 살고 있는 곳이 얼마나 살벌한 곳인지 실감했다. 사실 돈을 뜯으려는 양아치가 환한 낮에 버젓이 돌아다니는 것도 정상은 아니지만, 그걸 총질로 물러서게 하는 것도 다른 곳에선 비정상이겠지.

 

“자, 과자 사서 집 가자. 엄마 빨래 못하면 우리 오늘도 이불 못 덮고 자!”

 

제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벌였는지도 모른 채, 아이린은 상냥하게 동생을 이끌어준다. 제 손안에 갇혀있느라 땀에 젖어버린 동전을 본 라이엇은 더 이상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 건지 고개를 끄덕이고 누나를 따라갔다.

 

 

 

“그래서, 총을 쏴버렸다고?!”

“흐음.”

 

그날 저녁, 식탁에서 아이린이 꺼낸 무용담에 루엔과 데스페라도는 상반된 표정을 지었다. 루엔 쪽은 꽤나 놀랐지만, 데스페라도는 무표정으로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쪽도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으니 상관없겠지. 라이엇은 살짝 짜게 조려진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양친의 눈치를 살폈다.

 

“응! 나 잘했죠?!”

“잘 했어. 그냥 머리를 쏴도 됐을 텐데.”

“아니, 그 정도로 죽이면 안 되잖아?! 빗맞힌 정도가 좋지!”

“네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니 낯선데. 뭐, 너였다면 봐주겠지만 난 아냐.”

 

‘어디서 삥을 뜯으려고….’ 작게 중얼거린 데스페라도는 아이린을 대견하다는 듯 보았다. 과연 내 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도 보였다.

 

“지금이 옛날이랑 같아? 그리고 난 카르텔 말고는 일단 살려줄 생각부터 했거든?”

“그랬던가. 만났던 인간이 대부분 카르텔이라 몰랐군.”

“…….”

 

그의 놀리는 말에 멀쩡히 밥을 먹던 루엔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풉. 얄미워 죽으려 하는 아내의 얼굴에 웃음이 터지고 만 데스페라도는 한발 늦게 제 말을 수습했다.

 

“…농담이니까 표정 풀어. 어쨌든, 라이엇 너도 어디 가서 누가 시비 걸면 네 누나처럼 해라. 알았어?”

“…네.”

 

이대로라면 자신도 조만간 누나처럼 총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제 미래를 아주 정확하게 예상한 라이엇은 식구들 몰래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Written by Esoru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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