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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AU

 

현관문 앞에서 무언가 툭 발치에 걸렸다. 대릴은 문고리를 잡으려 뻗던 손을 다시 그대로 거두어들였다. 가정집 현관 앞에 놓여있을 만한 건 정리하지 못한 애들 흙놀이 장난감이나 택배 정도가 전부다. 고개를 깊숙하게 숙여 바라보자 과연 희미하게 지기 시작하는 저녁 하늘이 모서리에 반짝이는 상자가 있었다. 택배였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갑자기 웬 놈의 택배?

 

그와 아내는(애들은 자기들끼리 택배를 주문하기에는 너무 어렸으므로) 택배를 애용하는 편이 아니었다. 배송비 문제도 있었고, 그와 윤이 집을 비우고 있는 사이 아이들이 베이비시터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불안한 점도 있었다. 그들이 사는 카운티가 작기는 해도 택배비를 내느니 근처의 마트나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하면 될 만큼 있을 건 다 있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도 택배가 왔다면 근처에서 구하기 어지간히 힘든 물건이거나 좀 특이한 경우라는 건데, 우리가 그런 걸 살 일이 있었던가? 기억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생각나는 것이 없어 그는 입꼬리를 아무렇게나 비틀었다.

 

어찌되었던 간에 현관문 앞에 놓아두었다간 문이 열리고 닫히고 하는 통에 오만팔방 걸리적거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는 입꼬리를 비튼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든 물건이 상자에 빈틈없아 맞는 크기였는지 험하게 주름이 잡힌 박스를 손에 쥐면 안에 든 것의 부피가 손바닥 안으로 그대로 담겼다. 정사각형에 반듯하고 두툼한 물건인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뭔가 싶어 찌푸린 눈매 끝으로 한 때 낯설었으나 지금은 어설프게나마 알아 볼 수 있는 송장 위의 글자들이 담겼다. 신혼 전부터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글자들이었다. EMS 국제배송. 짧은 단어들을 느리게 끌어읽으면 그 아래 오른쪽, 오래도록 사용해 온 언어로 쓰인 익숙한 이름이 읽혔다. 윤 딕슨Yun Dixon.

 

“......국제 택배?”

 

 

 

“다녀왔습니다으아악!”

“엄마! 엄마 애기 때 머리 엄청 길다아!”

“엄마, 엄마아! 여기 쪼그만 아가 누구야? 율이 이모야?!”

 

엄마 허리 나가겠다, 이 똥강아지들아! 하고 다급하게 어깨를 잡아오는 커다란 손에 반 쯤은 기댄 상태로, 윤은 얼떨떨하게 골반 께며 허리 위로 팔을 뻗어오는 아이들의 어깨를 자동반사적으로 그러안았다. 고개를 숙이면 금방이라도 코 끝이 스칠 곳까지 들어올려져 팔락거리는 것들은 어딘지 익숙한 앞 면과 하얀 바탕 위 연갈색 글자들이 깨알처럼 사선으로 가로지른 뒷면이 정신없이 뒤바뀌고 있었다. 뭐지 저게? 굉장히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인데. 그렇지만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것 같은.... 생각이 흘러갈수록 미간이 저절로 좁혀져 윤은 코 끝을 마저 찡그렸다. 아니, 저렇게 펄럭이기보다는 어딘가에 정리되어 있는 게 더 익숙한 것 같은 느낌이....

 

“사진....?”

 

정답을 말했다고 칭찬이라도 하듯 뻗어올린 팔들이 쉴새없이 파득거렸다. 엄마 사진이래! 하고 골반 쯤에 코를 박을 기세로 달라붙은 아이들이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밀어올리며 꺄르르 웃었다. 평소 같았으면 마냥 귀여워 끌어안느라 정신이 없었겠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사진? 사진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그녀는 필름 카메라가 널리 보급되던 시기의 끝물 쯤에 태어났고,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는 것이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그녀의 사진들은 사진으로 남아있기 보다는 SD 카드나 핸드폰의 클라우드에 남아있었다. 저렇게 사진으로 남아있을 정도라면 아주 어릴적의, 그러니까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의 때나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사진들은 아마 앨범에 고이 담겨서 한국의 친정에 있을텐데.

 

...설마. 윤은 몇 주 전에 한국에서부터 걸려왔던 스카이프를 떠올렸다. 잘 지내고 있니, 요즘도 공연 준비한다고 맨날 밤에 늦게 들어가니, 몸 잘 챙겨야 한다... 하고 으레 시작하던 안부부터 아이들과 남편 이야기를 거쳐 어머니가 꺼낸 것이 앨범이야기였던 것이다. 한 아파트에서 10년 가까이를 살다보니 짐이 지나치게 많아져서 베란다에 쌓아둔 잡동사니가 든 박스들을 정리하다보니 어린 시절의 앨범이 나왔다고. 딱 지금 네가 네 애들 정도의 나이였을 때 사진 말이야, 하고 어머니가 웃었던 것도 기억이 났다. 그 때야 엄청 오래 전이네요, 하고 넘겼는데 설마 그게... 애매한 예감을 담고 뒤를 돌아보자 어깨를 잡고 있던 남편이 능청을 부릴 때의 늘 짓던 그 비죽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뜯어봐도 된다고 한 건 너였다.”

“아니, 뜯어봤다고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고... 그럼 진짜 앨범이에요?”

“너 어렸을 때 양갈래 진짜 많이 했더만.”

 

아, 슬픈 예감은 늘 틀린 적이 없지. 윤은 장탄식을 터뜨릴지 그게 아니면 웃음을 터뜨려야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어깨만 으쓱 추켜올렸다. 굳은살이 마디마다 박힌 커다란 손바닥이 올라온 어깨를 다정하게 쥐었다가 무게를 담아 매달려오는 애들과 함께 넘어지지 않도록 가볍게 앞으로 몸을 밀었다. 엄마 다친다니까, 욘석들아. 하는 목소리는 핀잔하는 투인 말과는 다르게 애정이 가득했다. 윤은 그런 남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어떤 껍질로 둘러싸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다정한 울림의 소리.

 

“그리고 엄마 좀 그만 밀어라,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자꾸 밀고 그래.”

“그치만 엄마가 애쉬만큼 작은걸!”

“엄마아, 응? 응? 여기 애기 때 엄마가 안고 있는 아가가 율이 이모야? 응?”

 

몸이 제대로 세워지면서 밀려난 아이들이 히잉,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도 이번에는 손목이며 팔에 차닥차닥 손바닥을 붙여왔다. 제 엄마의 어린 시절이 신기한 건지, 그게 아니면 액자에 담겨 있지 않은 사진이 신기한 건지 도통 가늠을 할 수가 없어서 윤은 아이고, 하고 입으로 죽는 소리를 내며 휘청였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결국 졌다는 듯이 아직도 응? 으응? 하면서 사진을 흔들고 있는 작은 아이를 옆구리에 끼어 안았다. 테스코에서 산 어린아이용 슬리퍼가 작은 발 끝에 대롱대롱 매달렸다가 떨어졌다.

 

“그래, 그래, 알았어, 우리 아기들. 엄마랑 들어가서 보자, 들어가서. 응?”

“응! 저기 책에 엄마 사진 어엄청 많아!”

“근데 엄마가 다아, 어, 누나랑 똑같아!”

 

처음에 봤을 땐 누나인 줄 알았어어. 잔뜩 들떠 몸을 들썩거리는 작은 아이의 말에 허리에 팔을 둘러 찰싹 달라붙은 딸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나두! 나두 처음에 깜짝 놀랐어! 하고 붙이는 말들이 전부 웃음이 한가득이라 금방이라도 둥실 떠오를 것처럼 가벼웠다. 윤은 찰싹 달라붙어 자꾸 발목 안쪽으로 엉기는 애쉬의 발을 밟지 않으려고 애쓰며 최대한 크게 한 발자국씩 걸어 거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평소처럼 보폭을 좁게 해서 걸었다가는 까딱하면 딸아이까지 함께 넘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보폭에 맞추어 크게 몸이 기울어질 때마다 갸우뚱하게 고개가 넘어가는 것이 마냥 재미 있는지 애쉬가 꺄륵꺄륵 눈을 접어가며 웃었다.

 

“와, 진짜다.... 다 엄청 어렸을 때 사진이구나.”

 

아이들이 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걸려서 다치기라도 할까봐 작은 테이블을 빼고 큰 러그를 깐 거실 바닥 위에 널부러져 있는 사진들은 이제는 희미해진 익숙한 얼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아장거리며 막 걸음을 떼는 여동생에게 미니 마우스가 프린팅 된 풍선을 들려주는 젊은 아버지, 뺨 위로 페이스 페인팅을 한 채 초등학교 체육복을 입고있는 어린 시절의 그녀 자신과, 오래 전 돌아가셔서 이제는 기억을 더듬어도 희미하게만 남아있을 뿐인 외할아버지와... 아주 먼 시절의 이야기들이 조금 색이 바래긴 해도 그 모든 사진들의 안에 담겨져 있어서, 윤은 앨범의 투명한 비닐 안 쪽의 사진들을 보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신기하다는 듯 앨범의 귀퉁이를 연신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옆으로 남편이 작은 아이를 내려주고선 다리를 접어 앉았다. 뭘 다른 사람 사진처럼 말을 해? 하고 묻는 콧등이 설풋 찡그려졌다가 희미한 자국을 남기고 펴졌다.

 

“여기 있는 사진 다 네 거 아니야?”

“그치만 못해도 20년은 전이라구요. 거의 다 초등학교 때까지니까.”

 

따져보면 정말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그녀가 딸아이만할 때의 사진인 셈이다. 윤은 새삼 기분이 묘해져 투명한 비닐 안쪽에 붙어있는 사진 위로 톡톡 손가락을 두드렸다. 20년이라니, 말로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어떤 기억들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달라붙어 있어서 떼어내면 그대로 자국이라도 남아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정작 머리띠로 앞머리를 몽땅 쓸어넘기고 앞니가 하나 빠진 얼굴로 웃는 그 옛적의 모습을 보면 그녀 자신보다는 차라리 옆에서 사진 속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덧그리고 있는 딸아이를 닮아있었다. 언젠가 뒤를 돌아보니 젖먹이였던 그녀가 벌써 품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던 어머니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윤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느릿하게 사진들의 귀퉁이들을 훑던 시선 안 쪽으로 불쑥 네모 반듯한 것이 끼어들어왔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준이 엄마, 엄마 이거! 하면서 엎어지듯 몸을 기울였다. 형광등 불빛에 반들거리는 사진의 표면 위에 부옇게 손자국이 묻어있었다. 아까 전에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이것 좀 보라며 그녀에게로 들어올리던 사진인 듯 했다. 여기이, 여기 아가 율이 이모 맞지이?! 하는 어린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윤은 아직도 양 뺨에 동그란 꽃물이 오른 아들의 뺨을 손등으로 슥슥 문질러주고선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멜빵 바지를 입은 어린시절의 그녀가 강보에 싸인 작은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열 살? 아홉 살 때 쯤인가? 그 때 쯤이면.... 몇 번이고 기억을 더듬고 있노라면 태열이 올라 발갛고 쭈글쭈글한 아기의 얼굴이 이제는 코트가 잘 어울리는 누군가의 웃는 얼굴과 겹쳐졌다. 한국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공항에서 마주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늘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해도 언제고 기다리고 있는 다정한 아이.

 

“그러네! 엄마가.... 그러니까 외할머니가 율이 이모랑 같이 집에 돌아오고 얼마 안 됐을 때 찍은 사진이야. 신기하다, 어릴 때 사진에서도 지금 얼굴이 보이네.”

“우와아, 맞췄다! 이모 쪼글쪼글해!”

“갓 태어난 애기들은 다 그래. 리틀 제이도 그랬는걸?”

 

아닌데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진에서 제가 아는 사람을 알아맞췄다는 게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하던 얼굴이 금새 울상으로 바뀌었다. 제이는 이렇게 쪼글쪼글 안 했는데에, 하고 말 끝과 함께 쭉 내민 입술을 가볍게 꼬집은 대릴이 장난기가 잔뜩 어린 얼굴로 아니긴 뭐가 아니야, 맞거든, 리틀 제이, 하고 놀려댔다. 정작 갓 태어난 준을 보고서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눈을 했으면서도 그랬다. 하기야 가끔 릭도 주디스를 그렇게 놀려대곤 했으니까. 윤은 불만스레 고개를 도리도리 저어 입술을 꼬집은 손을 떨어뜨린 작은 아이의 머리를 달래듯 토닥여주었다. 입 위로 고사리 손 두 개를 포개어 얹은 아들이 손바닥 아래로 이이잉,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옆구리에 바짝 붙었다.

 

“아빠! 아빠, 나두 엄마처럼 이렇게 할래!”

 

동생이 우는 소리를 내고 아빠가 그것이 귀여워 볼을 만지작대던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고 한참을 고개를 기울여가며 뒷장의 사진들을 보고 있던 애쉬가 고개를 파드득 들어올렸다. 이제 막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쓰는 일이 잦아져 손마디 위로 아직은 말랑한 굳은살이 박히기 시작한 손이 조금 다급하게 앨범의 보호필름을 벗겨내는 소리가 요란했다. 대뜸 딸아이에게 지목당해 얼떨떨한 얼굴의 대릴이 뭘 해달라고, 허니 번치? 하고 길게 목을 뺐다가, 작은 손이 앨범 위로 우당탕 꺼내놓은 사진을 보고서는 미간을 요란하게 구겼다.

 

“....이런 머리를 대체 어떻게 한 거야?”

“하하, 옛날에 엄마 낙이 내 머리 땋아주는 거였거든요.”

 

게다가 이 땐 율이도 없었을 때라서. 윤은 여전히 부루퉁한 울상을 하면서도 힐끔힐끔 제 누나가 꺼내놓은 사진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준의 머리 위로 가볍게 뺨을 문질렀다. 거의 10년을 외동딸로 그녀를 키운 어머니는 그녀의 머리를 꾸미고 땋고 묶어주는 것을 유난하게 즐겼다. 이른 아침 시간에 그녀가 아동용 애니메이션에 정신을 팔고 있으면 한 때는 허리까지 치렁치렁했던 머리카락들이 깔끔하게 빗기고 땋아져 화려한 끈들로 장식되어 있고는 했다. 동생이 태어나고 그녀가 중학교에 들어갈 때 쯤이 되어 머리를 단발로 바꾸면서 그 모든 것들은 기억으로 남겨졌지만, 그래도 가끔 어머니는 그녀의 머리를 빗어주고 판고데기를 이용해 머리를 펴주는 데에 손을 보탰다. 어떨 때는 다 큰 그녀를 앉혀놓고 머리를 땋아준 적도 있었다. 즐거워보였지, 엄마. 그녀는 중세의 공주처럼 땋아내린 반묶음이 화려한 꽃리본으로 장식되어 있는 머리 모양을 한 사진 속 어린 자신을 보며 생각했다.

 

물론 어쩌다보니 딸아이의 리퀘스트를 받은 거나 다름 없게 된 남편은 또 다른 생각이겠지만. 그녀는 심각하게 몸을 수그리고 사진 위를 착착 소리가 나도록 두들기는 딸과 함께 사진을 들여다보는 대릴을 보며 몰래 웃었다. 몇 년 전 우연히 알게 된, 아버지들이 유투브에 올린 아이들을 위한 헤어 튜토리얼을 따라해본 남편이-물론 그 시도 뒤에는 몇 번이나 엉망이 되어주었던 그녀의 머리가 있었지만-땋아준 머리가 학교에서 호평을 받은 이후로 애쉬는 엄마가 아니라 아빠에게 머리를 묶어달라고 찾아오고는 했다. 그런 딸아이를 볼 때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도도 안 했지. 하고 비죽한 소리를 하면서도 남편은 착실하게 유투브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어가며 몸을 둥글게 만 곰처럼 어깨를 굽히고 열심히 아이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주고는 했다.

 

어어, 엄마 거처럼 이렇게, 이렇게 해서어! 하고 착착 사진을 두드리는 딸아이의 기대에 찬 얼굴과 사진을 바라보던 대릴이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이의 정수리 위에 툭 손을 얹고 부드럽게 도닥였다. 알았다는 뜻의 제스추어였다. 그 자리에서 팔짝 뛰어 일어난 애쉬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번엔 유투브에 뭐라고 찾아야 나올지 감도 안 잡히는구만.”

“아, 저번에 글렌이 유투브 찾아보는 당신은 상상도 안 된다고 웃던데요.”

“그 새끼가 딸 안 키워봐서 그러지.”

 

방방 뛰던 와중에도 어떻게 그 소리를 들었는지 딸아이가 파드득 멈춰 서서는 아빠, 나쁜 말! 하고 품으로 파고 들었다. 손가락이 접히는 가는 마디마다 어린아이들의 맑은 혈색이 덧그려진 손가락이 거슬거슬하게 껍질이 일어난 제 아버지의 입술을 제법 사납게 두드렸다. 아까 전까지 그렁거리며 투덜거리던 남편이 무릎으로 선 딸이 뒤로 나동그러지기라도 할까봐 어린 등 위에 손을 댄 자세로 그래, 그래 아빠가 잘못했다. 항복. 하고 꼬리를 내리는 것이 못내 우스워 윤은 목을 울려 웃었다. 놀림감이라도 된 기분이 들었는지 뭐가 그렇게 재밌냐, 하고 눈썹을 와당탕 찡그리면서도 여전히 딸아이를 받치고 있는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아빠아, 아빠아아.”

“아빠 숨 넘어가냐. 뭘 그렇게 자꾸 불러.”

 

한참을 햇빛에 돌돌 말린 꽃잎마냥 몸을 기울여 앨범을 바라보고 있던 작은 아이가 덜커덩 소리가 날만큼 반짝 고개를 들어올리고 남편의 티셔츠 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몇 번을 빨아 이제는 천이 흐늘거리기 시작하는 회색 티셔츠의 위로 자그마한 둥근 자국들이 옴푹하게 패였다. 아빠아. 재차 확인이라도 하듯 보채는 소리에 남편이 아들을 향해 못 이기는 척 유순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그래, 또 왜. 하고 묻는 목소리와 함께 마주하고 있는 눈동자들은 서로 똑같이 젖빛이 한가득 섞여들어가 옅은 회색의 혜성들처럼 반짝였다. 윤은 아이들과 대릴의 눈이 닮아있는 것이 좋았다. 아이들의 사진을 처음 보고서는 너 혼자 낳은 게 아니냐며 놀려대던 한국의 친구들이 아이들의 눈을 보고는 네 남편과 똑같은 눈이라고 이야기할 때면 꼭 아주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마음이 들뜨곤 했다. 사랑하는 이의 눈동자를 사랑하는 이들이 물려받았다는 사실은 늘 그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있잖아아. 가끔 제가 원하는 것이 있을 때마다 꺼내놓는 버릇으로 준이 다시 한 번 말 끝을 늘였다. 남편은 늘 그런 작은 아이의 버릇을 고쳐야 할 것 같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간 얼굴을 보면 늘 누그러지고 마는 사람인지라 여전히 감추지 못하는 온후한 얼굴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입가에 걸리는 웃음을 아무렇게나 깨물며 제 아버지가 동생을 향해 몸을 기울인 탓에 둥글게 둥글게 몸이 구겨진 딸아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앨범의 장 수는 아직 많았고 그녀는 아직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수많은 이야기들을 불편한 자세로 듣게하는 것은 가여운 일이었다.

 

“아빠두, 어, 아빠두 있어?”

“뭐가 있는데?”

“이거! 엄마처럼, 옛날 사진들!”

 

금방이라도 딸아이를 끌어올 것처럼 뻗은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방향이 이 곳으로 튈 지는 몰랐는지 작은 아이를 향해 숙여져 있던 등도 순간적으로 움찔 튀어올랐다. 제이는 아빠 사진두 보고싶어. 그렇게 말한 작은 아이가 한 번 더 남편의 옷자락을 말아쥐고는 어깨를 달싹였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다 멈춘 그녀를 의아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딸이 동생의 말 끝을 따라 애쉬두! 애쉬도 아빠 사진 보고싶어! 하고 명랑하게 덧붙였다. 하얗고 무구한 얼굴이 턱 끝을 숙인 제 아버지를 향해 돌아가자 전등 아래에서는 금빛으로 반짝이는 더티 블론드의 머리카락이 빛무리를 흩뿌리며 통통 튀어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윤은 손가락을 가볍게 손 안으로 숨겼다가 폈다. 손 끝이 조금 차가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릴은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가끔 옛날 이야기라고 말하며 꺼내놓는 것들은 멀과 함께 조지아 주를 돌아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나 윤을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들-주로 카운티에 섞여들면서 엉망진창으로 벌어졌던 사건들-이 전부였다. 그 외의 시간에 대해서 누군가가 물어보면 우그러든 미간과 뚱한 얼굴로 그런 걸 다 기억을 하면 이러고 살겠느냐며 퉁명스레 눙치고는 했다. 단 한 번, 윤에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한 번도 순탄한 적이 없었고 한 번도 메마르지 않았던 적이 없는 시절을 입 밖으로 끌어올려 무엇을 하느냐고. 그래봐야 뒷맛만 껄끄럽고 악몽이나 부를 뿐인데.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유난하게 쓸쓸해서, 그녀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그 어깨를 가만히 감싸안았을 뿐이다.

 

그 이후로도 대릴은 늘 과거지사에 대해서 입이 무거웠고 어지간히 필요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예전에, 하고 운을 떼는 일이 없었다. 대릴에게 있어 ‘예전’이란 길게 드리워진 숲의 그림자와 구석마다 모래바람이라도 서걱일 것처럼 헛헛하게 비어있던 빈 집 뿐일 테니까. 애쉬와 준에게도 그러해 아이들은 제 아버지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을 손을 꼽아서 셀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설마 지금 이 쪽으로 방향이 튀어버릴 줄은.... 아이들을 대할 때 치고는 드물도록 길게 남편은 말을 잇지 못했다.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시듯 벌어졌다가 다시 꽉 다물리는 입술 사이로 단어가 되지 못한 무언가들이 투두둑 떨어졌다. 아빠? 딸아이가 오랜 침묵이 이상했는지 제 동생이 그러하듯 옷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아빠아. 부르는 소리에 마른 목울대가 움틀거렸다. 윤은 비어있는 남편의 무릎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아빠는 그런 거 없어.“

“왜애?”

“엄마는 있는데!”

 

글쎄다.... 튀어오르는 목소리들이 뺨 위를 아프게 긁는지 애매한 얼굴로 남편은 말 끝을 흐렸다. 때로 천진하게 시작되는 모든 것들은 의도하지 않게 속을 아프게 긁는 갈고리가 될 때가 있었다. 사람들의 사이에서 홀로 외로웠으나 객관적으로는 평온한 삶 속에서 지내오던 윤에게는 있는 것, 그리고 어디를 둘러보아도 메말라 있을 뿐이라서 꺼내고 싶지 않은 삶 속에서 지내던 대릴에게는 없는 것의 간극이 그 갈고리에 매달려 삽시간에 무거워지고 있음을 윤은 느낄 수 있었다. 낙인을 찍은 뒤에 흩날리는 잿가루처럼 쓴 뒷맛을 삼켜내듯 몇 번 목울대가 움직이고 나서야 떨어진 목소리의 뒤 끝이 졸라맨 어딘가에서 끄집어내듯 온통 쉬어있었으니까. 아빠는... 아빠가 자랄 때는. 둥글게 뜬 어린 눈동자들이 줄어드는 말의 끝을 쫓듯 도로록 굴렀다.

 

“그건 별로 소중하지 않았으니까, 아빠한테는.”

 

이렇게 남겨놓고 싶지도 않았고. 마디에 거칠게 굳은살이 올라오고 딱딱하게 인이 박힌 손 끝이 드문드문 꺼내어져 빈 공간을 남기는 보호필름의 위를 쓸었다. 몇 번이고 덧그리는 흔적을 따라 불빛이 꼬리처럼 따라붙었다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그의 빈 손가락 사이에 제 손을 끼워넣고 꼭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시간을 흔적으로 남긴다는 것은 그 시간이 흔적으로 남을 만큼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고싶지 않은 순간들을 사람들은 흔적으로, 사진으로 남겼다. 당신이 빈 공간을 덧그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했다. 당신의 그 어떤 순간도 빈 공간으로 남아있지 않았으면 좋을텐데.

 

아직 어린 나이이기에 이해하기가 어려웠는지, 그게 아니면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에서 사각이는 먼지와 잿더미의 쓸쓸함을 눈치챘는지 아이들은 드물게 말이 없었다. 그저 순한 눈매 안쪽으로 담긴 눈동자를 몇 번이고 굴리고서는 보호필름을 쓸어내리는 메마르고 단단한 손마디를 말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재재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온통 저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만이 남겨진 순간이 서먹한지 남편이 머뭇거리며 손가락 끝을 안쪽으로 아무렇게나 말아쥐었다. 그러니까, 하고 얼버무리려 새어나온 단어의 뒤로 작은 아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빠아, 있잖아.”

 

고물고물 다가와 허리께에서 톡 튀어나온 흰 뺨이 갸웃 기울어졌다. 빈 공간 위를 쓸어내리던 남편의 시선과 그 둥글게 웅크린 손등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한순간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다 자른지 꽤 되어 길어진 앞머리가 살랑이는 방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제 아버지를 온전하게 닮은 그 새벽별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저와 똑같은 눈동자를 향해 반짝였다.

 

“그럼 지금은, 어, 소듀, 소중해?”

 

엄마랑 제이랑 누나랑 같이 있잖아아. 그러면 소중해? 하고 묻는 목소리는 척척하게 젖어든 곳 하나 없이 온통 보송보송했다. 여전히 야무지게 잡은 옷자락이 으응? 하고 재차 묻는 통에 아무렇게나 흔들렸다. 그녀가 제이, 그러다 아빠 옷 다 늘어나겠어, 하고 손등을 톡톡 두드리자 작은 아이는 무엇이 그렇게 성에 차지 않는지 제 아버지가 그러듯 조막만한 미간을 꾸깃꾸깃 뭉갰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그제서야 현실에 다시 발을 붙이러 내려온 것처럼 길게 한숨을 내쉬며 리틀 제이, 하는 부름과 함께 말랑하게 구겨진 미간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문질러 폈다.

 

“당연히 소중하지, 리틀 제이. 너랑 엄마랑 누나랑 다 얼마나...”

“그러면, 그러면 있잖아, 지금 소중하니까, 지금부터는 다아 모아놓자!”

 

끝나지 않은 말 끝으로 와그르르 해맑은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겨우 땅 위에 발을 붙였더니 이제는 때 아닌 급류에 휘말린 사람처럼 대릴이 뻐끔,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꾸깃꾸깃 어울리지 않게 뭉그러뜨렸던 미간은 거짓말이기라도 했던 것처럼 환한 얼굴로 돌아온 작은 아이가 제 아버지의 허벅지 위로 물웅덩이 밟는 소리가 나도록 손바닥을 붙이고는 몸을 기울였다. 젖살이 빠지려면 한참을 더 기다려야해 기분이 좋으면 장밋빛으로 물드는 보드라운 뺨이 몽실하게 눈 아래로 밀려 올라갔다. 그 때는, 그 때는 못 모아놨잖아, 그치! 하고 동의를 구하는 목소리가 물비린내는 한 구석도 찾아볼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지금은 소중하니까! 이렇게 잔뜩잔뜩 모아놓구우, 매일매일 같이 보자!”

“와아, 좋아! 완전 좋아! 제이 천재 같아!”

 

무릎에 앉아서 제 동생과 아버지의 대화를 듣던 애쉬가 박수와 함께 동당당 발을 흔들었다. 누나가 제 편을 들어주어 기쁜지 순하게 접혀 내려간 어린 눈매가 아예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르르 녹아들어 휘어졌다. 그런 동생과 마주보고 웃으며 그럴거면 지금부터 엄청엄청 많이 찍어야겠다! 하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선언한 딸아이가 턱을 들어올려 아직도 얼떨떨한 얼굴을 한 대릴을 향해 아빠! 하고 조롱조롱 목소리를 울렸다. 조건반사처럼 남편이 턱 끝을 숙이자 애쉬가 팔을 날개짓하듯 파닥였다.

 

“아빠아, 애쉬랑 제일 먼저 사진 찍는거야? 응?”

“아! 누나 치사해! 내가 먼저 찍자구 하려고 했는데에!”

 

난데없이 순서를 빼앗긴 것이 억울했는지 작은 아이가 눈매를 새초롬하게 치켜올렸다. 누나가 제이 순서 뺏어갔어! 하는 목소리에 억울함이 뚝뚝 묻어 떨어졌다. 하기야 형제자매란 5분 전에는 세상 다시 없을만큼 예쁘고 소중하다가도 그 바로 직후에는 방금 전의 애정이 파사삭 깨져버릴만큼 역동적인 관계가 아니었던가. 윤은 황망한 가운데에 제법 심각한 대치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 치밀어오르는 웃음을 어떻게든 눌러 삼키려 애썼다. 사진을 찍는 순서로 한순간 상황이 뒤바뀐 아이들이 귀여운 것도 귀여운 것이었지만, 어어 하는 사이에 아이들 사이에 끼여서 허망한 얼굴로 눈을 굴리고 있는 남편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치만 애쉬도 아빠랑 사진 찍고 싶어!”

“제이도 찍고 싶은데!”

 

아빠아, 애쉬랑 찍을거지, 응? 아니지이, 제이랑 찍을거지?! 기어코 무릎으로 일어선 딸아이와 허벅지에 손바닥을 대고 몸을 기울인 아들이 동시에 고개를 돌려서 물어오는 서슬이 자못 시퍼렇게 엄중했다.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끝이 길게 끌리는 말투가 이렇게까지 서늘해질 수 있었던가. 엉겁결에 딸과 아들 사이에 끼어 인기의 대상이 된 남편이 왜인지 하얗게 질려가는 눈 끝으로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보며 결국 윤은 깨물지 못한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가 옆에서 어깨를 웅크려가며 웃는 것보다는 누가 아빠와 사진을 먼저 찍는 게 중요한지 제 아버지의 허벅다리를 사이에 두고 와그작 와그작 얼굴을 찌푸리던 아이들이 결국 대릴에게서 떨어져 바닥으로 도르륵 내려와 버티고 서는 모습을 보며 윤은 폭소로 달아오른 뺨을 황당한 얼굴을 한 남편의 어깨에 댔다. 인기만점인데요, 아빠? 하고 농담을 던지자 구겨진 미간이 대답보다 먼저 뛰쳐나왔다.

 

“...저러다 싸울 거 같아서 엄청 걱정밖에 안 되는데.”

“그치만 기분은 나쁘지 않잖아요? 아빠랑 먼저 찍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뺨을 빈 어깨에 문지르면 이제는 가족들 모두에게서 풍기는 달큰한 섬유 유연제 향기가 났다. 처음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는 이 향기를 어색해하던 사람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향기를 풍기고 있는 것이 좋았다. 언젠가 다가가기만 해도 서로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떨어지던 시절도 있었는데. 윤은 다시 한 번 목을 울려 웃었다. 함께 있어서 만들어진 변화였다. 소중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모든 변화가 하나하나 다 소중하고 반짝거려서, 오래도록 흔적으로 남겨놓고 싶을 정도였다. 아마 대릴도 그럴 것이라고, 윤은 그렇게 생각하며 남편의 비어있는 손의 사이사이로 제 손을 채워넣었다. 뼈마디 사이가 움푹한 부분에 맞추듯 손가락을 끼워넣으면 자연스럽게 깍지가 껴졌다.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어린 아이들은 때론 가장 옳은 말을 하는 철학자가 된다고. 윤은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기울어진 뺨에 닿는 온기를 느끼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준의 말이 옳았다. 모아놓을 소중한 순간들이 부족했다면 지금과 미래의 소중한 순간들을 하나하나 남기고 모아서 채워넣으면 된다. 어쩌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또 어떤 다른 순간들이 뒤를 돌아보면 잔뜩 흩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방금 전처럼 낯설었던 향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두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나 서먹했던 시간을 건너 아무렇지도 않게 뺨을 기대고 손을 잡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들 같은 순간들이 있지 않았던가. 비워진 페이지는 영원히 비워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설령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 빈 페이지를 채우기에는 남겨놓은 순간들이 너무 적었다고 하더라도, 윤은 걱정없이 장담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채워져 편수를 나눠야 할지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그녀가,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들이 대릴에게 소중하게 남겨놓고 싶은 시간들을 잔뜩 만들어주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으니까. 그 모든 사랑스러운 순간들을 남겨 차곡차곡 모아놓을 수 있도록. 그래서 비워져 있었던 시간만큼 더 빠르게, 더 많이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그녀는 서로를 향해 칭얼거리듯 제가 먼저 아빠와 사진을 찍어야 하는 이유를 대고 있는 아이들이 귀엽지만 서로 싸우다 울어버릴까 걱정이 되는 듯 애매하게 찡그린 눈으로 바라보는 남편을 향해 다시 한 번 목을 울려 웃었다.

 

“그만큼 사랑받고 있는 거라구요.”

“....그래.”

 

그럴지도 모르지. 순순하게 떨어진 대답에는 옅게 웃음이 섞여있었다. 그녀가 정말로 좋아하는, 마음 한 켠에서부터 피어올라 얼굴 위로 번지는 웃음이었다. 윤은 그것이 못내 기꺼워 깍지를 낀 손가락의 끝으로 마른 손등을 도닥도닥 두드렸다. 손등의 뼈와 핏줄이 어지럽게 얽힌 피부 위를 두드리는 박자에 따라 어린아이들의 높다란 소리의 투닥거림이 꽃덩쿨처럼 얽혀들었다. 그치만 전에도 누나가 아빠랑 먼저 자전거 타러 나갔잖아! 그건 제이가 아직 두발 자전거를 못 타서 그런 거잖아! 전에 스케이트 타러 갔을 때는 제이가 먼저 아빠랑 손 잡고 탔으면서! 점점 커져가는 목소리에 기어코 울먹이는 기운이 섞이는 것을 기민하게 잡아챈 남편이 장탄식처럼 한숨을 내쉬며 깍지를 풀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됐다, 됐어! 이제 그만 싸워, 이 똥강아지들아! 그리고 우리집 카메라 망가졌어서 새로 살 때까지는 아빠랑 사진 못 찍어!”

“그치만 핸드폰 있잖아! 엄마가 우리 사진 그걸로 많이 찍는데!”

“맞아, 핸드폰으로 찍으면 되는데!”

 

집에 그나마 있는 사진은 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나 카메라가 망가지기 전에 찍어놓은 것들 뿐이다. 그나마도 아이들이 기억을 되짚을 수 없을만큼 오래 전에 망가진 이래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인화를 맡기지 않고도 늘 가지고 다닐 수 있었으니까. 그런 상황인데다 필름 카메라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시대니만큼 이제 갓 두 자리도 차지 않은 나이의 아이들이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핸드폰으로 찍은 것과는 어떻게 다른지 구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까지는 차마 생각하지 못했는지 남편이 허망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런 남편의 팔뚝이며 손에 언제 서로 마주보고 소리를 높여 싸웠다는 듯 나란히 아이들이 매달렸다. 근데 아빠아, 핸드폰이랑 그거랑 뭐가 달라? 피-일름이 뭐야? 하는 질문들이 계속해서 밀려와 쌓였다. 그러고보면 대릴은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에 늘 약했다. 몇 번 대답해주다보면 꺼내어낼 것들이 바닥이 나 버려 쩔쩔매다 식은땀이 흘러서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곤 했다.

 

하여 윤은 아이들을 말려야 하는 과업에 이제 뭐가 다른지까지 알려줘야하는, 세상에서 제일 못하는 일에 휘말린 남편이 더 이상 구겨질 수 없을 때까지 미간을 구기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집에 필름 카메라 하나 쯤은 있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뮬론 둘 중 누구도 사진에 대해 아는 바가 없고 암실도 없으니 인화는 못 하겠지만, 가족사진을 찍은 사진관에 부탁하면 어느정도는 인화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요즘에는 다들 전문가용으로 나오는 추세이기도 하니 정 안되면 폴라로이드로 찾아보아도 될테고. 이번 주말에는 다 함께 카메라를 보러 가자는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 먹으며 윤은 앨범을 내려다보았다. 사진이 꺼내어져 비어있는 자리 위에 반짝, 불빛이 고였다.

 

앨범의 첫 페이지는 가족사진이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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