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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식 시공이 아닙니다. 현대……라는 설정이며, 모 대기업 회장 길가메쉬와 사원 드림주가 연애(?)하다가 결혼(!)했습니다. 아마. 아마도. 아마도…….

* 아이 아빠(!)의 직접적인 등장은 없습니다…….

 

 

쉬이이잇. 비쭉 내밀어진 앙증맞은 두 입술과 그 위에서 정숙을 뜻해보이는 짧고 몽땅한 검지 손가락. 그건 햇살이 몸소 이 땅에 제 빛을 전하기 위해 도래한 것처럼 화사한 금빛 머리칼을 흩뿌리고, 노을보다도 붉은 색감을 눈동자에 담아 둔 아이가 인기척이 들려오자마자 몸을 틀어보이며 엘키두에게 보여준 최초의 행동이었다. 그의 앳되다 못해 푸르기까지 한 새하얀 뺨엔 답지 않게도 비장함이 깃들어 있었다. 엘키두는 어쩌면 경고일런지도 모를 모든 것을 아울러 바라보다가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의례적인 것이라기보다도 사실은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지만. 다만 발소리를 죽이고, 또 목소리를 낮추어서.

“엄마는 아직 자고 있니?”

아이는 말없이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렸다가는 고개를 끄덕인다. 작은 아이가 흘금 보았던 곳으로 그가 함께 시선을 던지면 그곳에는 소년과 똑 닮았으나 한량없이 어려보이는, 말 그대로 아기나 다름없는 연약한 인영을 끌어안고서 곤한 숨을 속살대는 여자가 한 명 있었다.

두 아이가 낮의 도래나 다름없는 색을 품고 있다면 그녀는 역으로 새까만 밤을 닮은 빛깔을 갖고 있었기에 공간을 잘라낸 듯한 기묘한 비례감이 가장 첫눈에 띄었다. 그래도 그건 마치 어느 저명한 풍경화의 일부처럼 안온한 것이라서, 그는 문득 창가를 비집고 커텐 사이로 빠져나와 이 너른 거실을 물들이는 연노랑의 노을마저도 이 순간을 위해 계산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낮과 깊은 밤을 이어주기 위해서 석양이 몸소 이곳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라고.

엘키두는 아이에게 두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아이는 이미 몇 번이나 읽은 듯한 동화책을 스르륵 놓아버리고선 냉큼 그 품에 안겨왔다. 소년에겐 제 부모 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온 어른을 향한 경계심이나 적대감 따위는 일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엘키두는 제 아버지의 유일한 친우이자 제 어미의 오누이와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그 당사자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들었던 탓이다. 얇은 동화책에서 접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도 비현실적인 그들의 이야기를 곱씹다보면 오히려 불신의 지푸라기가 끊어지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할 지경이다.

그는 제 가슴팍에 기대오는 아이를 단단히 들어 안고서는 꿈나라에 초대 받은 두 사람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걸어나왔다. 직전 들어섰던 현관문을 열어 애정 어린 손길로 정돈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어설퍼서 문득 웃음이 나오는 정원으로.

그곳엔 누구의 취향인지 차마 모를 수가 없을 정도로 맑고 화사한 꽃들이 어지럽게 피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띄는 것은 무엇보다도 군데군데 빈 틈을 메우는 갓 피어난 새싹 같기도 하며, 또한 이미 한 번 깊이 무르익었던 수엽처럼 보이기도 하는 녹음의 무리다. 이 정원의 주인이 누구를 생각하며 꽃잎과 과실보다도 이토록 무성한 숲을 길러내었는지……. 그는 그 해답을 미리 손에 쥐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직접 마주하는 것이 자못 쑥스러운, 무량한 애정.

그러니 그로서도 그 애정에 응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엄연히 오늘 하루, 초대 받은 입장임에도 안주인이 잠들어 버린 것에 문책 대신 고운 꿈을 꾸라는 배려로 대신 아이를 데리고 나온 것도 그 연장선상의 일인 것이다.

“얼마나 혼자 기다렸니?”

“다섯 시부터요.”

아이는 제법 씩씩하게 대답했다. 들꽃처럼 작고 가녀린 손가락 다섯 개를 한꺼번에 펴 보이는 것이, 제가 얼마 전 숫자의 개념을 배웠음을 자랑하는 것이 자명했다. 영재성을 논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제 팔은 이미 안으로, 더 안으로 굽어버린 모양인지 엘키두는 가슴 한 켠이 뿌듯하고도 따스한 온도로 물드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만일 아이 아버지가 듣는다면 네가 그런 성정이었느냐며 혼자서 홍소하다가 그만 복통이라도 일으킬 것이었다.

그는 제 손목시계에 잠시 시선을 꺾어두었다. 시침이 여섯 시 직전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니 아이는 한 시간이나 홀로 지새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도 없는 공백을 함께 흘려보낼 만한 마땅한 것도 없이 오롯하게, 혼자서.

“꽤 오래 혼자 놀고 있었구나.”

“응……, 엄마는 샤미가 우는 걸 달래다가 같이 잠들어 버렸어요.”

조막만한 아이가 우는 것은 언제 보아도 당혹스럽다. 이미 한 번 지독하게 겪어보았던 일이라고 해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해버리기에 과거의 경험은 도움이 되는 것도, 그렇다고 되지 않는 것도 아닌 계륵이 되고 마니까. 엘키두는 그녀가 어떤 당혹스러운 얼굴로 아이를 얼르고 달랬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어설픈 손동작과 서투르게 익살맞음을 흉내내는 목소리. 내도록 그것을 바라보던 소년이 간신히 잠든 아이와 여자를 깨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터였다.

“아직 아가니까 그렇다고는 하는데, 샤미는 잠이 많은 게 엄마랑 똑같은 거 같아요.”

가느다란 웃음 소리가 입술 새로 안개처럼 퍼져나온다. 손에 잡히지 않고 흩어지는 것마저 같다. 그리고 그의 것. 그는 아이의 등을 쓸어내리다가 돌연 너도 그녀 만큼이나 잠이 많은 아이였고 또한 지금도 그렇다며 말해주고 싶었다. 모든 것에 의문을 품고 모든 것을 탐구하려드는 나이대의 소년에게 언질을 주었다가는 꽤 긴 대담이 될 것이 분명해 그저 또 한 번의 미소로 무마할 따름이지만.

“그렇네. 샤미도 그녀도 한 번 잠에 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자곤 하니까.”

아이는 강하게 수긍하는 것을 피력하기 위해 고개를 꾸닥꾸닥 주억였다. 유달리 잠이 많은 여자는 저를 가졌을 땐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에 투자했단 말과 함께 누군가 혀를 내두른 적도 있고, 소년의 동생을 품었을 무렵에는 애석하게도 소년의 육아를 비롯해 유달리 번무들이 쏟아져내려 평소와 견주어 턱없이 부족한 잠을 청했던지라 샤미가 태어난 이후에는 걸핏하면 그의 곁에서 쓰러져 자고는 했다. 마치 이제까지의 할당량을 채우려는 것처럼. 덕분에 소년은 누구에게나 검지 손가락을 세워 침묵하게끔 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쳐 활용하곤 했다. 심지어는 소년의 아버지가 되는 존재에게마저.

“혼자서 심심했을 텐데, 잘 참았구나.”

“그치만 자기 전까지는 엄마가 잔뜩 놀아주셨거든요. 지금은 엘키두도 왔구.”

아이는 금세 지루함을 잊었는지 한결 즐거워진 입꼬리로 조잘대다간 곧 그의 팔뚝에 앉아서도 가동질을 쳤다. 그것을 위험하다고 타박하기보다도 그는 제 다른 팔에 힘을 주어 아이를 견고하게 끌어안을 따름이었다. 여린 피부 아래로 아이의 순진하며 흠결없는 신뢰의 무게감이 퍽 다정다감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도 우리랑 저녁 먹고 갈 거죠, 그렇죠? 꼭 새벽이 저물고 아침이 찾아들 때 창문가에서 지저귀는 종달새 마냥 조잘대는 목소리가 맑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수려한 옆얼굴은 아주 먼 옛날, 사내가 이 세상의 삼라만상에 사랑을 받았던 소년이었을 적과 착란될 정도로 흡사해서 간혹 엘키두로 하여금 상념에 빠져들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 무렵에는 가장 귀한 애정과 가장 귀한 마음들이 어렸던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실로 모든 것이 그의 소유이며 그의 긴 여로를 밝혀줄 등불이었던 시간. 그러나 그 기대와 바람의 가짓수를 헤아려낸 그곳에 온전한 어린 아이는 있을 수 없었다. 너무 많은 것을 받아, 무수한 것을 내다보았던 치천의 주인. 엘키두는 그 시절의 어떤 고립을 아직까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그 고독을 피해 에움길로 가지도 않았고, 그런 고독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온전히 받아들여 제 긍지로 삼았을 뿐.

그것이 또 한 번 반복될까. 섣부른 염려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한 번쯤 그런 상념이 불쑥 치미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고독을 고른 본인보다도 그 곁을 맴돌고, 그 곁을 지켰던 이들이 더욱 절감하는 매순간의 냉랭함이 그곳에 있었으니까. 그는 직전까지 양달이었던 곳이 해가 짐에 따라 응달이 되는 것을 보며 구태여 다른 따사로운 곳을 찾아 걸어나왔다. 지금 아이에게는 그런 따스함이 어울렸다. 확신처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다행이야. 너희가 엄마를 닮아서.”

뜬구름을 잡는 듯한 이야기였으나 아이는 그의 품 안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다들 제가 아빠를 쏙 빼닮았다구 그랬는데요, 하고서 물끄러미 올려다 보는 시선으로 반문하는 말에 엘키두는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만약 이 작은 소년이 어리고 푸른 낯 뿐만 아니라 성격까지도 제 친구의 것을 물려받았더라면 이 짧은 안도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런 사유를 그녀가 알게 된다면 분명 그녀는 자신을 얼마나 바보 취급 할 셈이냐고 또 뾰루퉁한 얼굴을 하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 만큼 그것은 칭찬이었다. 사내의 아이가 아이 다울 수 있게, 그리고 아이 답게 자라날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장 평범했던 그녀의 덕일 테니까.

너무도 짧았던 유년기와, 제 삶의 지표를 찾아서 고민했던 소년기. 그리고 확답을 가진 채 줄곧 고독하게 걸어오던 길 위엔 이제 더이상 사내의 것만이 새겨져 있지 않았다. 엘키두가 그 곁에 놓인 조그마한 족적들을 보고 있는 이상,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감이 되어 언제까지고 사내의 곁에 머물러 있을 것이었다.

지리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이가 저만큼 자란 뒤로 미뤄두어도 될 것이었다. 엘키두는 대신 품 안의 소년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저길 보렴, 리비. 아버지가 벌써 퇴근하신 모양이야. 아이는 퍼뜩 고개를 들어올려 으스대길 좋아하는 무수한 저택들 사이에서도 가장 만연한 존재감을 뽐내는 이 길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응시했다. 도저히 착각할래야 착갈할 수 없는 익숙한 실루엣이 채 태양이 저물기도 전에 돌아와서는 벌써 현관에 접어드는 것을 보며, 저를 빼고 모두 잠들어 버린 가족들 사이에서 홀로 얌전하게 곁을 지키던 아이가 마침내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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