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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람들은 나와 형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갓 태어나 솜털도 채 마르지 않은 아기였을 때부터 그랬다. 북부의 붉은 여우답게 똑똑하고 예리했던 우리들은 눈치껏 그 이유를 알아챌 수 있었다. 우리가 볼튼의 피를 이어받은 북부인이기 때문이었다. 램지 볼튼의 아들. 먼 훗날 드레드포트와 폭스버로우를 물려받을 붉은 왕의 후손들. 나와 형은 공식적으로 엄마처럼 브레드의 성을 따랐지만 북부는 우리가 볼튼의 이름을 그림자 뒤에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볼튼이라는 이름에 겁을 먹는다. 오래 전 자취를 감췄던 잔인한 폭군이 무덤을 파헤치고 다시 살아나기라도 할 것처럼. 엄마 품에 안겨 코를 훌쩍이는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에는 지울 수 없는 깊은 공포와 불안감이 가득했다. 바보 같은 작자들. 나는 겁쟁이들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속으로 그들을 비웃곤 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북부를 수호하던 늑대들이 다시 숨을 쉬고 있는데 무엇이 그렇게 두렵단 말인가? 우리가 저들을 해치기라도 할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그럴 리가. 볼튼이라는 낙인과 깊은 분노와 감당하기 힘든 비정함을 유산으로 물려준 사람을 우리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오히려 내게 야만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폭력과 피냄새를 사랑하는 난폭한 짐승 같은 작자, 우리 엄마의 가슴에 칼날을 박아 넣었던 혹독한 겨울의 군주.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많이 닮은 형은 볼튼의 무자비한 전통과 가언을 사랑했고 조금이나마 아버지를 존경하긴 했지만 형도 아버지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아버지를 사랑했다.

 

몸이 얼음조각처럼 부서져가고 이방인 신이 침대 밑에 숨어 종말을 기다리는 순간에도 엄마는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스타크에 대한 반역으로 목이 잘릴 수도 있었으면서 아버지를 숨겨 브레드의 본성으로 향했던 걸 생각하면 엄마의 사랑에는 한 치의 거짓조차 없었음이 분명했다. 몰락한 얼음의 왕을 사랑하는 건 아마 엄마밖에 없을 것이다.

 

엄마는 왜 아버지를 사랑할까?

 

 

 

 

 

1.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다. 웨스테로스의 모든 지역을 둘러봐도, 바다 건너 에소스 대륙으로 건너가 봐도 엄마만큼 예쁘고 상냥한 사람은 없을 거다. 엄마의 깊은 밤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저물어가는 해를 닮은 붉은 눈을 한 번 본다면 저절로 내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언젠가 엄마에게 모두가 엄마를 좋아하지 않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엄마는 웃음을 터뜨리며 브레드는 자신을 대가 없이 사랑해주지만 다른 사람들은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엄마는 예전에 남자아이들에게 춤 신청을 받기는커녕 친구조차도 잘 사귀지 못했단다. 북부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 나를 낯설어했기 때문일 거야.’ 엄마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던 할아버지는 북부 사람이었지만 할머니는 에소스에서 건너온 이방인이라는 얘기는 들었었다. 그러니까 엄마는 혼혈아인 셈이다. 확실히 친척인 카니발이나 아스터 같은 사람들과 조금 다른 분위기를 지닌 건 맞지만, 그래도 엄마가 이렇게 상냥하고 예쁜데 감히 엄마에게 그런 상처를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몹시 속이 상하고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그 말을 들었던 날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늘 제멋대로에 나를 괴롭히기만 하는 형은 나를 울보라고 놀리며 깔깔 웃기 바빴으나 형도 내심 속으로 화가 났던 모양인지 콧방귀를 뀌며 애꿎은 돌멩이만 발로 툭툭 찼다. 엄마는 우리의 반응에 조금 당황하셨던 것도 같다. 엄마는 황급히 나를 안아 올리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어떻게 엄마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내가 가서 그 사람들 다 때려주고 올래요. 빗물처럼 떨어지는 눈물을 닦으며 내가 성을 냈지만 엄마는 내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지는 않았다. 어쩜 너희 아빠랑 똑같니, 하고 중얼거리며 내 이마에 입을 맞춰주시기만 했으니까.

 

나는 이 세상에서 엄마를 싫어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봄처럼 아름답고 여름처럼 다정한 엄마는 오랜 전설 속에 나오는 우아한 여왕을 닮았다. 얼음과 불의 피를 지닌 군주처럼 노래를 불렀던 엄마. 겨울과 여름의 자손으로서 사랑으로 만물을 끌어안았던 엄마. 그런 엄마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 건 사람들이 엄마를 시기하고 질투하기 때문인 것이 분명하다. 같잖은 감정에 사로잡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둔한 군중은 매 역사마다 존재해왔다.

 

“때린다는 말은 함부로 쓰면 안 돼.”

“그럼 말없이 때리는 건?”

“형,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그것도 안 돼. 사람들한테 나쁜 짓을 하면 못 써.”

“알았어요, 죄송해요.”

 

엄마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타일렀고 우리는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 흉내를 내며 엄마에게 달라붙었다. 엄마, 다신 안 그럴게. 용서해줄 거지? 형이 어리광을 부리며 히히 웃어버리자 엄마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형의 말에 웃지 않은 건 나뿐이었다. 형이 하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형은 엄마를 미워하거나 얕잡아 보는 사람을 모조리 다 죽여 버리고 싶어 했다. 때린다는 표현은 오히려 정중한 예의로 포장한 말에 가까웠다. 사실 나도 형과 크게 다르진 않았다. 우리에게는 명확한 공통점이 있었다.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부터 불을 삼키고 있었다는 것. 우리는 해가 갈수록 증오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자라났다. 북부를 태울지도 모르는 거대한 불꽃은 재앙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우리가 나이에 비해서 지나치게 영특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어린아이 같기는 커녕 섬뜩한 광기를 품은 어린 맹수처럼 보인다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마에스터 던컨은 우리에게 기나긴 겨울의 시대는 몇 년 전 종말을 고했고 왕국은 다시 새로운 여름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모두들 고작 열 살 남짓한 아이가 분노를 속삭이고 살인을 입에 담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쎄. 정말로 우리가 너무 잔인한 걸까?

 

태초부터 세상은 순진하게 노래를 부르던 아이들에게조차 무자비한 곳이었다. 그 옛날 스타니스 바라테온은 하나뿐인 제 딸을 불태워 죽였다고 했다. 서세이 라니스터의 어린 딸과 아들은 정치놀음에 이용만 당하다가 독살당해 죽고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했다. 위대한 사슴들의 왕과 사자들의 여왕조차도 자식을 벼랑 밑으로 떨어뜨려버린 것이다.

 

아무도 우리를 영원히 지켜주지는 못한다. 나와 형을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해주는 엄마도 마찬가지다. 엄마를 믿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겨울바람이 끊이질 않는 땅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엄마뿐이다. 그러나 만약 오천 명의 병사가 창과 칼을 들고 우리의 성문을 부수려고 한다면? 명예로운 스타크가 붉은 여우들의 목을 모조리 다 베어버리겠다고 선언한다면? 그때도 엄마가 우리를 지킬 수 있을까? 반대로, 우리가 엄마를 지킬 수 있을까? 황금을 가진 것도, 세 마리의 용을 다룰 수 있는 것도, 넓은 북부를 통제할 수 있는 것도, 빛나는 왕관을 머리에 쓴 것도 아닌 브레드에게 그럴만한 힘은 없었다. 우리가 유일하게 가진 것은 찬란한 지식이었다. 낮과 밤을 기억해야만 현명하게 머리를 굴려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는 걸 나와 형은 알고 있었다. 숨을 죽이고 가시밭길을 걸어 다니는 동안 언제 화살이 우리의 심장에 박힐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영악함이야말로 언제 어디서나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할 창과 방패나 다름없었다. 들판에서 풀이 자라고 꽃이 피는 시대를 맞이했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방심할 때마다 겨울이 살금살금 다가와 사람들을 얼어 죽게 하지 않았던가. 북부의 왕조차 가슴팍에 화살을 맞고 죽어갔던 날이 있었다. 나와 형이 왜 숨을 죽이고 수풀 속에서 몸을 낮춰 걸었던 건지를 생각하면 우리는-

 

“도련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자유롭게 유영하던 나는 유모가 부르는 소리에 상념을 떨쳐내고 고개를 돌렸다. 배 안 고픈데. 내가 쭈뼛대며 말했지만 유모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나의 등을 떠밀었다.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배가 고프지 않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식사를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는 거짓이 없었다. 나는 식탁에서 마주봐야만 하는 사람이 두려웠다. 늘 새파란 눈을 빛내며 나와 형이 죽기를 바라는 무서운 사람 말이다. 그의 이름은 램지 볼튼이었고, 그는 나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우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2.

포크와 나이프가 그릇에 부딪혀 달그락 거리는 소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살가운 미소와 다정한 대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서늘한 적막이 어색하게 느껴질 법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게 편했다. 괜히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버지는 나와 형이 엄마와 말을 섞는 것조차 싫어했다. 우리가 엄마의 애정과 관심을 독차지할까봐 불안한 것 같았다. 애초에 아버지는 엄마가 자신 외의 사람에게 감정을 쏟는 것을 지독하게도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유모가 말하기를, 오래 전 볼튼이 북부를 집어 삼키고 늑대들을 도살했을 때 아버지는 엄마를 드레드포트 깊은 곳에 가둬놓고 엄마가 아끼는 사람들을 모조리 다 죽였다고 했다. 아버지가 갓난아기였던 형과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걸 생각하면 그리 놀랍지도 않은 이야기였다. 아마 아버지는 할 수만 있었다면 우리를 진작 강물에 내다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했던 건 아버지에게는 더 이상 과거의 영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잘게 썬 고기 조각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아버지를 몰래 힐끔 훔쳐보았다. 아버지의 얼굴 곳곳에는 자잘한 흉터가 가득했다. 패자의 흔적이었다.

비참하게 몰락해 먼지만 남은 가문의 이름 앞에서 아버지는 등에 화살이 박힌 들개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엄마의 그늘 뒤에서 숨어 살고 누구도 아버지가 살아있다는 걸 모른다. 친척들은 아버지를 증오 했지만 엄마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걸 알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밀을 지켜주었다. 아버지는 엄마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우리를 죽일 수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치지 않는 광기를 토하며 발톱을 세우는 지독한 눈빛은 언제나 나를 공포에 질리도록 만들었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기를 대충 씹어 삼킨 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식기를 가지런히 접시 위에 두고 의자를 끌자 엄마가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데이비드, 왜 더 먹지 않고?”

“배가 불러서요. 엄마, 저 오늘은 조금 피곤한데 먼저 들어가 볼게요.”

“어디 아픈 건 아니지?”

“네, 전 괜찮아요. 안녕히 주무세요, 엄마.”

“잘 자렴, 아가.”

 

엄마가 자리를 떠나려는 내게 살며시 다가와 내 이마에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포도주를 들이키면서 우리를 쳐다보는 아버지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온몸에 털이 곤두설 정도로 오싹해진 나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바쁘게 걸음을 옮겨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조심스럽게 닫은 뒤에도 내 가슴은 쿵쿵 뛰며 공포감을 호소하고 있었다. 예리한 칼날로 살을 긁어내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눈이 너무 무서운 탓이야. 나는 숨을 고르며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얼음장 같이 서늘한 아버지의 새파란 눈은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내가 엄마를 꼭 닮아서 붉은 눈을 가진 게 다행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조금도 닮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곱슬거리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서늘한 인상을 주는 얼굴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사랑스러운 눈을 제외하면 엄마를 닮은 구석이 없다는 사실이 내게 종종 깊은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야, 바보야, 너 뭐하냐?”

“깜짝 놀랐잖아! 노크 좀 하고 들어올 순 없어?”

“여기가 너만 쓰는 방이냐? 여긴 내 방이기도 하거든? 멍청아.”

 

난데없이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놀라게 한 형은 콧방귀를 뀌며 험한 말을 중얼거렸다. 형을 보니 갑자기 심통이 났다. 형의 파란 눈은 누가 봐도 아버지의 것이었지만 그 외에는-부드럽고 차분한 머리카락이나 아름답고 포근한 인상 같은 것들 말이다-전부 엄마랑 훨씬 더 비슷했다. 쌍둥이면서 우리는 왜 이렇게 다르게 태어난 걸까?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형에게 종종 질투심을 느끼곤 했다. 유치한 감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형의 어깨를 보란 듯이 세게 밀친 뒤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나 책 읽을 거니까 방해하지 마.”

“웃기시네. 야, 근데 너 왜 도망쳤냐?”

“내가 언제 도망쳤다고 그래?”

“맞잖아. 아버지가 무서워서 도망친 거지? 그렇지?”

“…….”

 

나는 거짓말에 몹시 서투른 아이였다. 아니라고 변명해봤자 어차피 형 앞에서는 먹히지 않을 게 뻔했다.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문 채 침묵을 선택했고, 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혀를 찼다.

 

“겁만 많아가지고.”

“형은 안 무서워?”

“무서울 게 뭐가 있어.”

 

형은 뭐 그리 이상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겁이 많고 울보인 나에 비해 형은 늘 용감하고 대범했다. 형은 전설 속에 나오는 늑대만큼이나 커다란 나무를 타며 깔깔 웃었지만 나는 무서우니 빨리 내려오라고 형을 닦달하며 엉엉 울곤 했다. 형은 가파른 절벽처럼 날카로운 검을 손에 쥐고 아무렇게나 휘둘렀지만 나는 화살촉조차 만지지도 못하고 식은땀을 흘리곤 했다. 형은 아무리 크게 다쳐도 절대로 울지 않았지만 나는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상처가 생겨도 서럽게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에게 안기곤 했다. 형은 겁쟁이 새끼라고 욕하며 나를 비웃었다. 우는 꼴이 보기 싫다고 일부러 발을 걸어 넘어뜨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형에게 화를 낼지언정 형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터전에 침범하려는 견고한 어둠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것도 형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볼튼의 피가 흐른다는 걸 두려워했던 이들 중에는 우리의 죽음을 원했던 교묘한 자들도 있었다. 나는 우리가 환영받지 못하는 핏줄이라는 사실에 밤마다 잠자리를 뒤척이며 몸을 떨었다. 우리를 독살하면 어쩌지? 우리가 자는 동안 머리를 베어가면 어쩌지? 결국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눈물로 베개를 적셨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형은 우리를 위협하는 자들은 모조리 다 죽여주겠다고 내게 약조했다. 어차피 지울 수 없는 낙인이라면 자신이 볼튼의 명성을 이어받아 다시 북부에 피바람을 몰고 오겠노라고. 그 누구도 우리를 모욕할 수 없도록 볼튼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뿔피리를 불겠노라고.

 

‘잘 들어. 나는 커서 볼튼의 영주가 될 거야. 넌 브레드의 영주가 되는 거고. 우리가 같이 손을 잡으면 그 누구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거야. 아무도 엄마를 다치게 할 수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우리 외에는 다 적이니까. 알아들었어?’

 

엉엉 서럽게도 울음을 터뜨리는 나의 뺨을 닦아주며 형은 중얼거렸다.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착한 아이 흉내를 내면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거야. 우리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방심하도록 만들어야지. 그런 다음, 우리가 충분한 힘과 권력을 손에 쥐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정말로……. 형은 엄마 흉내를 내며 조금은 어설픈 손길로 나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무도 우리한테 까불지 못할 걸. 서늘하게 웃는 형의 얼굴은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때 나는 형에게 조금 겁을 먹었던 것도 같다.

 

형은 필요하다면 야만적인 세상이 다시 도래해야 한다고 믿는다. 먼 옛날 영웅들의 시대에 우리의 선조들이 무자비한 폭력을 선택했던 것처럼 말이다. 형은 공포만큼 효과적인 무기는 많지 않다고 했다. 형은 볼튼의 가언을 읊는 것을 좋아했고 볼튼의 역사를 좋아했으며 그들이 취했던 가혹한 전통을 좋아했다. 그래서 형은 아버지도 좋아했다. 형이 냉혹한 군주가 되기를 원하는 건 누구도 우리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힘을 원해서일까, 아니면 아버지의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아서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형도 언젠가는 과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을 고문하고 그들의 가죽을 벗기고 숲 속에서 그들을 사냥하는 행위를 즐기게 될까?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나는 형을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형은 아버지를 닮았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나를 사랑한다. 그게 형을 신뢰하는 이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절실한 믿음은 유일한 안식이었다.

 

“아버지는 우리를 죽이지 않아. 겁먹을 필요가 없다고. 어차피 칼자루를 쥔 쪽은 우리야.”

“그건 나도 알지만…….”

 

우리를 죽인다면 엄마는 평생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손에 너무 많은 피를 묻혔다. 우리의 존재가 끊어진 길 사이의 유일한 다리였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미움 받는 걸 두려워한다. 모두 아버지가 엄마를 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그토록 갈망했던 게 우리 엄마였고,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남은 건 엄마뿐이라고. 나는 눈을 깜빡이다가 이해할 수 없는 난제를 하나 떠올린다. 그럼 엄마는? 불현듯 어깨가 떨렸다.

 

“형, 엄마는 왜 아버지를 사랑할까?”

 

 

 

 

 

3.

“엄마. 엄마는 왜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어?”

 

형의 물음에 엄마는 숨을 참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간 얼굴로 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거론하는 아들을 보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형은 때때로 지나칠 만큼 솔직하고 직설적인 편이라서 나까지 곤혹스럽게 만들곤 했었다. 형을 말려야 하는 건 내 몫의 일이었지만 사실 나도 저 이유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궁금하던 참이었다. 엄마에게는 미안했지만 오늘은 침묵을 택하기로 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엄마, 우리도 아버지가 무슨 짓을 저질렀었는지 알아.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번에 슬픔으로 젖어가는 엄마의 눈이 내 가슴을 아프게 쿡쿡 찔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엄마의 얼굴에 형도 무안함을 느낀 모양인지 형은 엄마를 재촉하지 않았다. 아, 불쌍한 우리 엄마! 엄마는 정말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또한 그러길 바랐던 모양이다. 세상이 어떤 눈초리를 하면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지, 뱀처럼 날름거리는 혀가 얼마나 입방아를 찧어대는지는 엄마보다 우리가 더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엄마는 너무나 순진해서 아직까지도 꿈을 꾸고 있는 아이 같았다. 바싹 말라버린 꽃을 끌어안고 얼어붙은 들판에서 하염없이 봄을 기다리는 아이. 그게 나를 서럽게 만들었다.

 

“……엄마, 울어?”

“아냐, 엄마 안 울어.”

“엄마, 우리가 엄마를 속상하게 했어?”

“엄마는 괜찮아. 에드워드, 이리와. 데이비드 너도.”

 

우리는 아프게 흔들리는 시선을 숨기고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는 우리를 차례대로 끌어안아주며 다정한 입술로 우리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따뜻한 체온과 포근한 품이 우리를 향한 엄마의 사랑을 서슴없이 속삭이고 있었다.

 

“너희 아빠를 미워한 적도 있었어. 원망하고 두려워하고……너무 아파서 많이도 울었었지.”

 

지나간 과거를 담담하게 고백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조금 젖어있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금기의 영역처럼 어두워지는 엄마의 이런 표정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나는 살짝 겁이 나기도 했다. 엄마는 벼랑 위에 서서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언제 몸을 던질지 모르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그런 사람. 나는 울음을 참았다.

 

“분명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무너진 너희 아빠를 보고 있자니 무척이나 슬펐어. 날 바라보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목소리와 눈빛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서…….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걸 깨달았단다. 지나간 세월을 곱씹으며 후회하게 된다면 영원히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했지.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함께 있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어.”

“엄마, 엄마는 행복해요?”

 

우리를 낳은 걸 후회하지는 않아요? 문득 그런 문장이 뒤를 이어 목구멍에서 튀어나려고 했지만 엄마가 슬퍼할 것을 알았기에 충동을 억눌렀다. 떨리던 목울대가 잠잠해진 뒤에야 나는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겨우 엄마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던 아까와는 달리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해진 엄마의 눈빛은 몹시 애틋해보였다. 안정적인 세상을 쓰다듬는 빛처럼.

 

“허니.”

 

엄마가 내 질문에 대답하려는 찰나,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날아든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귓등을 아프게 때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형의 옷깃을 꽉 붙들며 어깨를 움츠렸다. 아버지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엄마를 품에 안고 엄마의 뺨에 입술을 찍었다. 우리 사이에는 아버지의 시간을 방해해선 안 된다는 규칙이 존재했기에 형과 나는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형이 먼저 저만치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문을 닫기 위해 문고리를 손에 쥔 나는 문 너머로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문장 하나에 멈칫하고 말았다.

 

“-다들 이번에는 딸일 거래요.”

 

엄마의 목소리는 햇살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내게 동생이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도 여동생이! 나는 신이 나서 숨을 죽인 채 문틈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대화를 엿듣는 게 무례한 행동임은 알았지만 호기심을 참기가 갈증을 견디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딸?”

“네. 첫 아이들 때랑은 달리 아주 얌전해서 저를 많이 닮았을 거라고 했어요.”

“…그거 꼭 낳아야 해?”

“무슨 말이에요?”

 

엄마는 아버지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버지는 혀로 입술을 축이며 뜸을 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도 충분하잖아. 이미 둘이나 있으니까. 아버지의 목소리는 냉랭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무너져있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살피며 아버지의 말을 곱씹던 엄마는 화를 내기는커녕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다 알아요.”

“…….”

“괜찮아요, 나 안 죽어요.”

“웃기지 마. 찬바람 조금 맞았다고 골골 앓는 주제에 무슨 애를 또 낳겠다는 거야? 저것들을 낳았을 때도 죽을 뻔했잖아!”

 

날카로운 어조에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다. 엄마가 죽을 뻔했다고? 엄마가 몸이 많이 약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 침을 삼켰다.

 

“하지만 포기하기는 싫어요. 우리 아이니까요.”

“난 널 잃을까봐 무서워.”

 

아버지는 엄마의 손을 간절하게 붙들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듯 중얼거렸다. 어째서일까? 아버지는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지만 꼭 울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다가올 겨울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서 숨을 억지로 짜내는 작은 짐승 같은 떨림이 몹시도 낯설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감정이 퍽 익숙한 모양이었다. 엄마는 아버지의 얼굴에 난 흉터를 살살 쓰다듬으며 살며시 웃었다. 환하게 웃는 엄마에게서는 봄 향기가 났다.

 

“겁먹지 말아요. 난 생각보다 강한 사람이에요. 잔인한 겨울도 홀로 버텨냈고 삶의 끈도 놓지 않았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받아들였어요. 부서진 과거는 여전히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통증을 이겨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요. 모두 제가 일찍 죽을 거라고도 말했지만, 이것 봐요. 전 아직 멀쩡하잖아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 네가 잘못되면 어떡해? 네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면? 더 이상 내 이름을 불러줄 수 없다면?”

 

아버지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아버지는 구원을 바라는 신자처럼 엄마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엄마는 변함없이 차분했다.

 

“나한텐 이제 너밖에 없어.”

 

아버지는 숨을 헐떡였다.

 

“처음부터 그랬어. 내가 온전히 가진 건 너밖에 없었다고.”

“램지.”

“너는 내 전부야. 네가 주는 사랑이 내 세상의 전부야.”

“램지.”

“네가 날 길들였어.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네가 아니면 안 돼.”

“나 어디 안 가요. 나 좀 봐요, 응?”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

“알아요.”

“그러니까 죽으면 안 돼. 날 혼자 남겨두면 안 돼.”

“그럴게요. 사랑해요.”

 

두서없이 말을 흘리는 아버지에게 입을 맞춘 뒤 엄마가 별처럼 속삭였다. 나는 엄마의 깊은 두 눈이 다정한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엄마의 진심은 변함없는 사랑이었다.

 

엄마의 사랑은 저주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엄마가 정말로 아버지를 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엄마를 동정한 적도 있었다. 단지 혹독했던 겨울날에 아버지에게 길들여져서 두려움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거라고. 슬픔이 엄마의 모든 것들을 잡아먹어서 세상이 일그러진 것뿐이라고.

하지만 이제는 안다. 오히려 다정한 손길에 길들여졌던 건 아버지였고, 엄마는 엄마의 의지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을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더는 왜냐고 물으며 삶을 의심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나를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기분을 느끼고 편하게 호흡을 이어나갔다.

나는 문에서 서서히 떨어져 걸음을 옮긴 뒤 기나긴 복도를 지나쳤다. 문득 엄마는 행복하냐는 나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으나 굳이 엄마의 입을 빌려 답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분명 엄마는 행복하다고 말했을 테니까.

두 번 다시 여우굴에 겨울바람이 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엄마가 계속해서 달콤한 꿈만을 꿀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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