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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 우범지대를 배경으로 총격과 살인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아이들은 더 빠르게 자란다.

아이린과 라이엇은 자신들이 마을에서 세월의 척도로 여겨지는 것을 불편해 하면서도, 그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너희가 벌써 이만큼 크다니, 무법지대도 살기 좋아졌어.’ ‘아버지랑 어머니는 잘 지내지?’ ‘너희 부모님은 정말 굉장했지.’ 마을 어디를 가도 이마에 주름살이 있는 어른들은 추억에 젖은 이야기로 옛날이야기를 꺼낸다. 어릴 땐 그게 지독히도 싫었지만, 나이가 좀 들자 저런 말에도 익숙해져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게 되었지. 너무 신경 써봐야 자신들만 손해였으니까. 둘의 그런 시니컬한 점은, 정말이지 데스페라도랑 쏙 닮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네 딸도 벌써 16살이던가? 많이 컸어. 클수록 널 닮아가는 것 같아.”

“그런가? 하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땐 데스페라도랑 판박이라는 소리를 주로 들었었지.”

“그에 비해서 라이엇은 널 닮은 것 같았는데 점점 제 아버지를 닮아 가는 거 같아. 애들이란 신기해. 그렇지?”

 

하하하. 거실에서 들리는 수다와 웃음소리에 라이엇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놓았다. 오늘 손님이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갑자기 방문객이 온 모양이었다.

목소리만으론 누군지 추측할 수 없지만 제 어머니와 편하게 말할 정도의 사이라면 인사정도는 하는 게 예의겠지. 게다가 자신과 누나를 잘 안다는 듯 말하는 걸 보면, 기억에 없을 뿐 제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엇은 굳이 집에 들어가 인사를 하기 보단, 조금 더 시간을 죽였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의 나이 13살. 아무리 착하게 자랐어도 슬슬 사소한 반항이라는 것에 눈을 뜰 시기였다.

 

“어라? 라이엇, 집에 간다며?”

“집에 손님 있어. 조금 있다 들어갈래.”

“푸핫! 또 추억팔이 하는 소리 듣기 싫어 온 거지?”

 

‘시끄러워.’ 그다지 독기 없는 말투로 답한 라이엇은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는 낡은 수레에 걸터앉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나무판자와 곡괭이. 엉성하게 수리된 작은 오두막집.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이 탄광은, 광부들에게 버려진 뒤로는 꼬마들의 아지트로 쓰이고 있었다. 이 곳을 처음 찾아낸 아이린은 정작 ‘흙먼지가 많아서 별로야!’ 라고 말하며 잘 오지 않았지만, 호기심 가득한 소년들에겐 넓은 탄광은 좋은 은신처이자 놀이터였지.

라이엇은 집에 있을 때 외에는 대부분 친구들과 여기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불순한 의도로 이곳에 와 총으로 자신들을 위협하는 어른들도 있긴 했지만, 애초에 그렇게 치면 이 무법지대에서 안전한 곳이 어디 있던가. 그리고 라이엇과 그 친구들 무리는 이 세상에 뜯어 먹히지 않기 위해 제 부모들에게 사격과 호신술 정도는 진작 배워놓은 상태였다. 그러니 이런 안락한 장소를 포기할 이유는 없었지. 위험한 세계일수록, 은신처는 소중했으니까.

 

“너도 와서 카드 칠래?”

“아까 전에도 했잖아. 좀 쉬었다가 연습이나 할래.”

“어휴, 성실하셔. 그러시던가.”

 

원카드를 하던 친구들은 여전히 라이엇의 자리는 비워둔 채 게임을 계속했다. ‘성실하다, 라.’ 친구들의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집 옆으로 갔다.

비록 카르텔의 세력은 대폭 축소되었고 치안도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결국 여기는 무법지대였다. 법이 없는 곳에선 양심과 힘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했고, 제 양심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했다. 가장 거칠었던 시대에 살아남은 부모를 둔 탓일까, 아니면 그 부모가 평생 카르텔을 숙청하며 무법지대의 질서를 바로잡았기 때문일까. 라이엇과 아이린은 비교적 살기 좋은 시대에 태어났지만 언제나 총을 놓지 않았다.

다만 아무도 그런 두 사람을 ‘너무 열심히 한다.’ 라고 할 뿐 ‘너무한 거 아닌가?’ 라고 하지 않는 건, 역시 무법지대는 결국 무법지대이기 때문이었지. 상대가 노약자든 비무장상태든 약탈자들은 제 뱃속만 채우고 떠났고, 빼앗긴 자는 목숨도 잃기 일쑤였다. 살기 위해선 누구든 총을 잡아야 하는 곳인 이상,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상대를 너무하다곤 할 수 없는 법이었지. 당장 저기 라이엇의 성실함을 불평한 친구들도, 어지간한 어른들 만큼은 총을 다뤘으니까.

 

‘슬슬 이 연습도 너무 많이 해서 패턴을 바꿀 때가 된 것 같은데.’

 

오두막집의 뒤편에는, 버려진 포대와 천 조각으로 만든 허수아비들이 늘어서 있다. 여기저기 총을 맞아 너덜너덜한 허수아비들의 머리와 가슴에는 몇 번이고 수선한 흔적이 있었지만, 튼튼하게 고친 건 아니라 그리 오래 버틸 것 같진 않았다.

라이엇은 조금 거리를 두고 서선,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차분하게 수를 센 그는 보지도 않고 허수아비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고, 팔만을 움직여 나란히 늘어선 표적들을 맞추었다.

 

“…바꿀 때 됐네.”

 

눈을 뜬 라이엇은 정확히 머리만 터져있는 허수아비들을 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멈춰 있는 표적만 맞추는 건 그다지 도움이 안 돼.’ 언젠가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곱씹은 그는 제 위로 지나가는 그림자로 시선을 돌렸다. 올려다 본 하늘엔, 커다란 맹금류가 낮게 날아가고 있었다.

 

“여어, 솜씨 좋은데 꼬마야.”

 

저 멀리 날아가는 새를 보던 라이엇은 낯선 목소리가 제게 말을 거는 바람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마을 바깥쪽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행인은, 모자와 머플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누구인지 신원을 파악 할 수 없었다. 다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는 건, 이 마을 사람은 아니라는 거였지. 행색도 목소리도 너무 낯설어, 외지인의 냄새가 풀풀 풍겼으니까.

 

“미안한데 길 좀 물을 수 있을까? 이 마을은 처음이라.”

“…길이요?”

“그래. 뭐, 안내해 주면 더 좋겠지만?”

 

능청맞게 말을 걸며 다가온 남자는 눌러 쓴 모자를 슬쩍 들어올렸다. 드러난 얼굴에서 나타난 눈동자는 흉흉하게 빛나고 있어, 라이엇은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리볼버를 고쳐 쥐었다.

 

“혹시 옛날에 카르텔 사냥꾼이었던 사람들이 사는 집이 어디인지….”

 

길을 묻던 남자는 라이엇과 눈이 마주치더니 갑자기 입을 닫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적이 있는 눈매와 얼굴형. 어린 맹수를 떠올리게 하는 맑은 눈동자는, 각각 보라색과 청록색으로 빛나고 있다.

‘설마.’ 작게 중얼거린 남자는 미간을 팍 찌푸렸다.

 

“너, 그 새끼들 아들이냐?”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길이 없지.

라이엇은 이 낯선 남자가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찾는 건지 확신하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아까 전 허수아비를 맞추었을 때와 똑같은 총성이 탄광에 울렸고, 수상한 행인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젠장.”

 

바닥에 드러누운 남자의 옷에서 튀어나온 건 총알 6발이 모두 든 리볼버였다. 분명 제가 3초만 늦었어도, 허수아비랑 똑같은 꼴이 되는 건 이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었을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진 라이엇은 입술을 깨물고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잭! 헨리! 나 집에 갈 테니까 누가 우리 집 찾으면 알려주지 마!”

“뭐? 갑자기 무슨 소릴…, 그것보다 너 연습한 건 치우고 가냐?”

“돌아와서 치울 테니까 내버려 둬, 시체 있으니까 가지 말고.”

“시체? 야, 잠깐! 어디가 라이엇?!”

 

친구들은 급히 라이엇을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제 집으로 돌아갔다. 이런 무뢰한이 한 명 뿐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약 더 있다면 벌써 집으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제 부모와 누나가 쉽게 당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라이엇은 재빨리 현관문을 열었고, 집에 있을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응?”

 

하지만 집안에 있는 건 어머니가 아니라, 과자를 집어먹으며 신문을 뒤적거리는 제 누이였다.

 

“아, 라이구나. 어서 와! 엄마가 과자 사놨어. 먹을래?”

“누나, 어머니는?”

“어어, 아까 손님 왔었는데 돌아가는 길을 배웅 해 준다고 같이 나가셨어.”

“알았어, 고마워.”

 

하필 이럴 때. 라이엇은 그렇게 투덜거리고 싶은 걸 꾹 참고 제가 달려온 방향의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찾는 건 무모하지만, 지금은 한가롭게 방향을 추론할 여유가 없었다. 집으로 오면서 마주치지는 않았으니,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게 더 현명하다. 배웅하러 가는 거라면 굳이 골목길로 갔을 리는 없으니 큰길에 있을 가능성이 높고, 이쪽 방향에서 큰 길은 하나뿐이다.

 

“아.”

 

주변을 살피며 뛰던 그는 큰 길에서 골목길로 갈라지는 모퉁이에서 익숙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근처에 손님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안 보이지만, 확실히 제 어머니가 맞았다.

무사히 배웅해 주고 돌아오는 길이었을까. 안도의 미소를 지은 라이엇은 습관적으로 소리를 죽이고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머ㄴ….”

 

단 두 걸음만 더 내딛으면 닿을 거리에서 목소리를 낸 라이엇은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평소처럼 자신을 향해 방긋 웃으며 여긴 어쩐 일이냐고 말할 것이라 생각한 어머니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제 미간에 리볼버를 들이밀었기 때문이었다.

빠르고 정확한 동작, 살기등등한 눈빛, 지독한 화약 냄새.

늘 보던 두 남매의 어머니가 아닌, ‘무법지대의 악몽’의 모습으로 라이엇을 반긴 루엔은 상대가 적이 아닌 걸 확인하고 천천히 팔을 내렸다.

 

“…라이엇?”

“어머니.”

“아, 이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 아들을 쏴 버릴 뻔 했다. 스스로의 행동에 깜짝 놀란 루엔은 리볼버를 집어넣고 라이엇을 끌어안았다.

 

“미안하구나, 놀라서 그만…. 다치진 않았니?”

“전 괜찮아요. 그것보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아까 누가 아버지랑 어머니를 찾았는데, 수상해 보여서 처리했어요.”

“이런.”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라이엇의 이야기를 들은 루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제 안 좋은 예상이 맞은 것인가. 그렇다면 아까 전 같은 반응을 보인 것도 이해가 간다. 라이엇은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를 떠올렸고, 루엔은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나도 배웅을 나간 후 돌아가려는데 뒤를 밟는 인기척이 있어서, 주변을 좀 빙빙 돌다가 찾아내서 처리했거든. 집으로 바로 가면 좋을 게 없으니까. 혼자서 왔을 리는 없겠다 싶어서 기다리고 있던 건데, 다른 녀석은 네 쪽으로 갔었나 보구나.”

“누구였을까요? 그 사람들.”

“카르텔 잔당이겠지. 소지품을 뒤져봤는데 카르텔 휘장이 있었어. 나 참, 과거의 망령도 정도가 있지.”

 

살짝 짜증을 낸 루엔은 마른세수를 하고 제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까 전 살벌했던 눈동자와는 달리, 지금 그녀의 눈에는 애틋함과 다정함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그 놈은 어디서 처리했니?”

“탄광에서 만났어요.”

“그렇구나. 흠. 내가 치우고 올 테니 집에 가있어. 아이린이 있을 테니 둘이서 집 잘 지키고.”

 

아마 더 이상의 적은 없을 것이다. 있었다면 자신이나 라이엇을 공격했을 테니까. 사냥하고 사냥당하는 생활을 길게 한 루엔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가 있으니, 최대한 자식들은 안전한 집에 같이 두는 게 좋겠지. 그렇기에 그녀는 아들을 먼저 집에 보내고, 자신 혼자 탄광으로 향했다.

 

“어라.”

 

하지만 탄광에 간 그녀가 만난 것은 수상한 시체가 아닌, 제 아들만큼이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였다.

 

“데스페라도?”

“아. 너 왔냐.”

 

아무래도 아들의 뒤처리는 이미 아버지가 한 모양이었다. 루엔은 너덜너덜한 카르텔 휘장을 들고 있는 데스페라도에게 다가가 똑같은 휘장을 내밀었다.

 

“역시 카르텔 잔당이었네. 하여간, 대단한 잡초근성이라니까. 라이엇이 잘 대처해서 다행이었어.”

“라이엇이 처리 한 거였나?”

“응. 뭐, 자세한 건 집에 가서 직접 물어봐. 난 뒤처리 해 주러 온 거였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네.”

“흠.”

 

루엔에게 휘장을 받아든 데스페라도는 라이터를 꺼내 두 휘장을 같이 태워버렸다. 이미 낡을 대로 낡아서 그런 걸까. 피가 묻은 천 조각들은 순식간에 불덩이가 되어 바람 속에 섞여 들어갔다.

 

“집에 가니 아이린이 그러더군. 라이엇이 왔었는데 바로 뛰쳐나갔다고. 뭔가 이상해서 녀석이 자주 오는 여기로 왔는데 아무도 없고 시체만 있었어. 그래도 라이엇의 솜씨라곤 생각 안했는데.”

“왜?”

“여기. 미간 거의 정중앙에 맞췄잖아? 네가 자주 이렇게 하니까. 너라고 생각했지.”

“하하하, 모전자전이네!”

 

가볍게 웃은 루엔은 화약 냄새와 열기가 남아있는 제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과연 핏줄이란 무섭다. 그런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돌아가자. 애들이 기다려.”

“응,”

 

두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손을 마주잡았다.

바람에 뒤섞여 불타던 과거의 잔재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마을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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