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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튜 로렌스 <정신병원을 탈출한 여신 프레야>를 일부 오마주했음을 밝힙니다

* 드림주 이름 (간접적) 언급 주의

 

 

  Gott ist todt. Gott bleibt todt.

  Und wir haben ihn getodtet.

  Wie trosten wir uns, die Morder aller Morder?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안식을 얻을 것인가?

 

  -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0.

 

그는 최후의 신이었다.

나는 그를 모시는 최후의 사제였다.

 

 

1.

 

우리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했을 때,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을 다잡을 때, 혹은 단순히 삶의 조언이 필요할 때, 우리는 우리 머리 위의 존재들에게 기도를 올린다- 과학자들은 환형幻形 동물이라, 연단의 목사들은 '신'이라 부르는 자들에게. 그들은 우리의 부름에 응하며, 우리의 간절한 믿음을 흡수해 오직 초월적 존재들만이 이뤄낼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킨다.

 

나의 신은 전쟁과 무예를 관장했다.

 

그는 어떤 무기로도 꿰뚫을 수 없는 성스러운 금빛 갑옷과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 왕관을 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신이 전장에 나타나 푸른빛을 발하는 두 개의 장검을 치켜들고 전투의 기도를 내지르면, 전사들은 목놓아 그의 이름을 외치며 적진을 향해 진격했다. 그의 신전에 찾아와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끄십사 기도를 바치던 군주들은, 투신鬪神의 발치 아래 무릎을 꿇고 그가 내리는 축복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들의 왕국에 신의 가호가 함께하고 있음을 되새겼다. 그는 존경받는 절대자임과 동시에 위대한 전사, 정의로운 집행자였고, 또한 그가 속한 신화를 이루는 더욱 위대한 판테온pantheon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내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태어나기도 전, 까마득히도 먼 옛날 일이었다.

 

 

2.

 

자신을 몇천 년 전에 한껏 위용을 떨치던 고대 신이라 칭하는 자를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를 헛소리나 해대는 미친놈 취급하곤 한다. 내가 없었다면, 내가 그 날 그곳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머리가 돌아도 한참 돈 듯한 이 남자를 구원할 사람은 영영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내 신의 존재를 믿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처음엔 숭배와 경외 속에서, 그다음엔 멸시와 무관심 속에서 몇십 세기를 내리 살아온, 잊힌 신의.

 

신은 믿음을 먹고 산다. 그의 존재를 향한, 그리고 그가 행하는 기적을 향한 인간들의 진실한 그것을. 믿음이 두터워질수록 그는 강해진다. 허나 신자들이 어떤 이유든지 그의 존재를 부정하기 시작하면 그의 힘 역시 쇠퇴한다. 당연한 이치였다- 거짓된 믿음은 오히려 신에게 해악이 될 뿐이니.

 

 

3.

 

나는 사실 사제보다는 다른 게 되고 싶었다.

 

몇 대에 걸쳐 신을 섬기는 사제 가문에서 태어나지도, 정식으로 서품을 받지도 않았다. 종교와는 일절 관련 없는 이들이었던 나의 부모님은, 한때 고대 왕국의 수도였던 곳에서 발견된 수수께끼의 유물을 해독하는 데 젊음을 바쳤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내가 수송선에 몸을 싣고 처음 향했던 여행지 역시 그곳이었다.

 

열 세기가 넘게 지속 되어왔던 독특한 유일신 사상과 그 중심에 있었던 호전적인 남신의 이야기가 새겨진, 신전 입구의 석판.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그의 이름과 마주했다. 세 어절로 이루어진, 어쩐지 유아한 느낌을 풍기는 이름이었다. 본디 볼품없는 반신半神에 불과했던 그는 왕국이 위세를 떨치자 덩달아 신앙과 권력을 얻었고, 끝내는 제 동료 신들의 존재마저 말소시키며 유일한 절대자로 군림했다. 한창 시절 그의 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그림으로나마 짐작할 뿐이었다. 신전의 벽화 속에 고스란히 담긴, 몇십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달리는 용맹한 신의 모습. 흉악한 악귀들과 결투를 벌이는 신의 모습, 전설 속 왕들과 함께 괴물 사냥에 나서는 신의 모습.

 

허나 무한할 것만 같았던 영광의 시간에도 기어이 끝은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그의 보호 아래 영원한 번영을 누릴 것만 같았던 왕국은 점차 안에서부터 무너져갔고, 끝내는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침략자들의 칼에 종말을 맞이했다. 국가의 실질적인 권력을 휘어잡고 있던 사제 계층의 탐욕과 지나친 사치 -호화로운 신전 건축으로 대표되는- 가 불러온 재앙이었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입을 모아 지목한 국가 패망의 원인은, 아니나 다를까 그였다)

 

석판을 앞에 두고 한창 생각에 빠진 사이, 문득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자 소년과 어른 사이의 애매한 공간에 걸쳐진 듯한 인상의 남성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진흙 벽돌로 쌓아 올린 신전 벽에 기대어 침울한 얼굴로 태양 빛을 받고 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아직까지 내 기억 한 켠에 비수처럼 파고들어 박혀 있는, 강렬하기 그지없는 심상. 그는 내 목에 걸린 신분증 - 알레시아 키아라, 리포터, 디 아비터 트리뷰널 - 과 디지털 카메라를 흘긋 쳐다보더니 이윽고 얼굴에 애잔한 미소를 띄웠다.

내 이름을 읽었군.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꺼낸 말이자, 내가 처음으로 전달받은 그의 신탁이었다.

 

나는 그 날 그의 사제가 되었다. 내 영혼에 그의 이름을 각인하였고 내 신에게 영원한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한 절반쯤은 내 의지로, 절반쯤은 그의 무조건적인 강요로. (내 신은 끔찍이도 고집이 센 자였다)

 

 

4.

 

현신한 나의 신이 선택한 이름은 '칼'이었다. 한때는 수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제 '원래' 이름의 제일 앞 음절에서 따 온 명칭이라며, 그는 씁쓸하게 웃었다.

 

최후의 신을 모시는 최후의 사제에게 주어진 의무는 다행스럽게도 별 것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를 향해 계속해서 믿음을 바치면 될 따름이었다. 그가 만들어내는 기적을 체험하든, 아니면 단지 그의 말상대가 되어주든, 어떤 형태로든지. 내 임대 아파트가 곧 그의 신전이요 내 업무용 책상이 곧 그의 제단이었다.

 

신을 기쁘게 하는 방법 중 가장 효과적인 건, 아니나 다를까 조공이었다. 먼 옛날, 왕국의 사제들은 용맹을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사나운 맹수를 제물로 바쳤던 모양이다 (참 그들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무인을 가장 높이 여기는 왕국의 사회 통념에 따라, 그들이 사제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전사임을 신께 자랑스럽게 알리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이 의무는 모든 사제에게 부여된 것이었으니 나 역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허나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나에게 요구되는 의식은 이 현대 사회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비현실적인 것일 뿐더러, 나는 사제이기 이전에 동물 애호가였으니! 결국 근처 슈퍼마켓에서 사온 동물 모양 젤리를 내 신에게 공양하는 것으로 이 파렴치한 의식을 대신했다. 하루에 한 봉지씩, 그가 가장 좋아하는 포도 향으로. (그는 소파에 앉아 쉴 새 없이 입을 오물거리며,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움이라도 벌이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젤리를 깨물어 먹곤 했다)

 

초월적 존재와 동거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비현실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가끔 그는 집의 가구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덜대더니, 힘든 기색조차 내비치지 않은 채 큼지막한 옷장이며 텔레비전 등을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들어 옮기곤 했다. 종종 집에 무단침입하곤 하는 하루살이를 향해 가공할 만한 힘과 정확도로 휘두르곤 하는 그의 손바닥은, 이미 벌레들뿐만 아니라 내 집 천장과 벽 몇 부분까지 으깨어버린 터였다. 아무리 몰락한 신일지언정, 한 때 세상의 위대한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그에게 아직 그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다나 뭐라나. 내 진정한 힘을 되찾으면, 제일 먼저 네게 젤라틴으로 만들어진 신전을 하사하마.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면, 그는 얼토당토않은 농담을 던지며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5.

 

어쩌면 나는 그에게 단순한 신뢰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역시 나를 단순한 영매 이상으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에서 버려진 채, 점차 힘을 잃어가는 자신을 저주하며 몇천 년을 견뎌왔다. 내가-그를 믿는 유일한 존재인 내가 삶을 멈춘다면 그의 존재는 영영 사라질 것이다. 내가 그가 실재함을 믿길 멈춘다면 그의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가 소멸하면, 내가 살아갈 이유 또한 없어지겠지. 사제는 신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 신은 그의 눈과 코와 입이며, 몸이자 마음이며 영혼이다. 그는 신이며 신이 곧 그이다. 매일 기도를 바치고 숭배의 뜻을 전할 신이 없다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의 존재 의의는 사라진다.

 

허나 나는, 적어도 이 사실에 대해서는 당분간 함구할 생각이다.

 

 

6.

 

신들은 죽었다. 이성과 과학의 시대에 도달한 인류는 여태껏 섬겨온 절대자들을 가차 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그들의 우상을 부수고 경전을 불태웠으며 성스러운 신전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더는 우리 머리 위의 초월적 존재들에게 기도를 바치지 않는다. 그저 우리 자신을- 하나의 문명이자 공동체로서의 우리 자신을 믿을 뿐이다.

 

허나 나는 그의 이름을 부른다. 오늘도, 내일도. 경애인지 연모인지 모를 감정으로 불타오르며, 그의 말 한 마디마디를 내 기억 속에 새겨넣는다. 내 육신이 허락하는 한, 나는 그에게 믿음을 바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조그만 신전을 지키는, 그리고 그곳에 깃든, 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신을 섬기는 미치광이이다.

 

 

그는 최후의 신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모시는 최후의 사제이다.

 

 

사랑하는 자는 경멸하기 때문에 창조하려고 한다!

자신이 사랑한 것을 경멸할 줄 모르는 자가 사랑을 알겠는가!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창조자들의 길에 대하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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