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파가 다시 신이 되어 올라가는 순간에 나는 손을 뻗었다. 간신히 팔에 닿았다. 항상 불보다도 뜨거웠던 팔은 이제 인간의 체온을 잃어버렸다. 하늘을 향했던 시선은 내게로 돌아왔다. 그녀가 관장했던 밤을 닮은 눈동자가 맑게 빛이 났다.
"가지 마."
그녀는 웃었다.
"다시 돌아올 거야."
나는 언제나처럼 사실을 말했다.
"너와 내 시간이 달라질 거야. 나는 인간이고, 너는."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아이, 잊지 말아줘. 다시 돌아올 거야."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포옹이었다. 나는 점점 밤이 되어가는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팔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비파가 돌아간 이후에 나는 내게 남겨진 추억을 되새겼다. 이전까지 손에 들고 있던 성경은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나는 다섯시에 일어나 새벽 기도를 올리고 예배당 앞을 쓸었다. 예배 시간이 되면 비파에게 받은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비파와의 추억이 담긴 장소를 돌아보느라 점심 시간, 저녁 시간 기도는 평소 시간보다 조금 늦어졌다. 밤이 되면 창문을 열어 한 시간 정도 하늘을 보았다. 열한 시에는 그 날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다시 한 번 기도를 올린 후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새벽 다섯시가 되면 눈을 떴다.
비파가 돌아가고 한 달이 지났을 때부턴 뒷뜰 청소도 맡았다. 성당 뒷뜰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데 그 아래에 서면 그녀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빗자루를 든 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으니 성당 내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미카제 사제가 사랑에 빠진 거라는 얘기가 주를 이루는 것들이었다. 그 소문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무시했다.
세 달 후가 되었을 때는 뒷뜰에 눈이 쌓였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자기 판단이 가능해졌을 무렵, 처음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눈은 무척 새하얘서 오히려 비파가 떠올랐다. 손에 쥐면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도 닮았다. 나는 눈이 내릴 때마다 눈을 쓸어서 담장 쪽에 모아두고 그것을 계속 내려다보았다.
반년이 지났을 때 나무에 꽃이 피었다. 꽃이 피는 날이 기대된다면서 웃던 그녀가 떠올라서 나는 울었다. 꽃을 볼 때마다 눈물이 쏟아졌다. 감정이 증폭되는 일은 없었다. 다만 속으로 비파를 되뇌며 목걸이를 손에 쥐었다.
다섯시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올리고 오전 일과를 모두 마친 후 뒷뜰로 향했다. 뒷뜰에는 여전히 하얀 꽃이 눈처럼 가득 피어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땅에 떨어진 꽃잎을 쓸었다. 흙을 쓸어내는 감각과 함께 꽃잎이 옆으로 휘날렸다.
"이번엔 꽃을 쓰는 거야?"
"일부러 자청했어."
"왜?"
"비파를 잊지 않기 위해서."
"다행이다. 약속, 지켜주고 있었네."
"당연하지. 비파와의 약속......"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무심코 대답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무 위 하얀 꽃 사이에서 검은 눈동자가 빛났다. 울먹이는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번엔 우는 거야?”
“그야, 아이가 눈물 나게 하잖아.”
“신도 울 수 있구나.”
“난 특별한 거거든.”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자 비파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이에게서 사랑을 배웠으니까.”
“사랑?”
“응, 사랑. 그건 인간의 감정이잖아?”
“비파가 날?”
“뭘 새삼 그러고 있어?”
“비파는 인간이 아니니까, 나 혼자만의 감정이라고 생각했어.”
“아이는 무척 아는 게 많은데 이런 데엔 서투네.”
“어쩔 수 없잖아. 한평생 신만을 봐왔는데.”
투덜거리며 말하자 그녀가 웃었다. 내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꽃잎이 그녀의 볼을 간질였다. 비파가 웃으며 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무는 마치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신비한 광경에 말을 잃었다. 처음 비파를 만난 날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를 불렀다. 그녀가 내려다보었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통했네.”
“응, 통했어.”
이번에는 서로를 마주 보며 같이 웃었다. 가슴께가 간지럽더니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아이가 우네.”
“비파 때문이잖아.”
“이런 것도 다 내 탓이야? 그럼 내가 책임져야겠네.”
“알겠으면 얼른 내려와서 얼굴을 제대로 보여줘. 가까이서 보고 싶어.”
비파가 한 번 다리를 앞뒤로 흔들더니 상체를 앞으로 더 숙였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아서 위험해보였다. 제대로 앉아있지 않으면 떨어질 거라고 얘기하려는 순간 빙그레 웃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그럼 받아줄래?”
“뛰어내리는 건 위험해.”
“아이, 잊었어? 난 신이야.”
“신이든 아니든 내게 비파는 비파일 뿐이야.”
비파가 잠시 아무 말 없이 나를 보았다.
“네가 그런 사람이어서 내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거야.”
신계로 돌아가기 전날 내게 모든 걸 얘기해주면서 했던 말이 다시 귀로 들어왔다.
“나도 마찬가지야. 비파가 비파이기에 내가 사랑에 빠질 수 있었던 거야.”
다시 한 번 그 날 했던 그대로 진심을 전했다.
빗자루를 놓고 양팔을 위로 뻗었다. 비파가 뛰어내렸다. 바람이 그녀를 지켜주듯 우리를 둘러쌌고 내 품에 안긴 그녀는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