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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야. 아가야. 네가 바라는 소원은 내가 이루어줄게. 조곤조곤히 되풀이되는 허상의 목소리가 두 귀를 막아버렸다.

아가야. 아가야. 오로지 나만이 네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단다. 자애를 빙자한 일그러진 복음이 두 눈을 가려버렸다.

키레이의 전신을 검게, 아주 검게 적셔가고 있는 액체는 낡아빠진 신의 잔으로부터 넘치는 성수였다. 금빛으로 빛나던 가슴께의 십자가 또한 이제는 그 과거의 빛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진득하게 물들었다. 그럼에도 소리 없는 기도는 이어진다. 오로지 코토미네 키레이만이 착실하게 이어가고 있는 숨소리와 쉼 없이 쇄도하는 성수의 소리조차 매섭게 들릴만한 정적이 이 신전을 가득 채운 전부였다.

 

“……Amen.”

 

간결하지만 무게가 실려 있는 단어가 일도양단으로 정적을 부수기 무섭게 성수의 흐름이 거짓말처럼 멎어들었다. 뚝. 뚝. 키레이의 머리끝에서는 검은 물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나마 존재감을 드러내는 잿빛의 석상만이 그 광경을 더없이 온화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도 그러고 있었을 줄이야. 인내심 한 번 좋은 녀석.”

“그러는 너야말로, 아직도 있었나? 길가메쉬.”

“네놈이 모아놓은 잡동사니들을 감상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취향을 가졌더군. 이 내가 칭찬하는 거다. 마음껏 기뻐해도 좋을 텐데?”

 

어깨에 스치고 지나갔던 길가메쉬의 손을, 키레이는 새삼 신경 쓰지도 않았다. 공허하게 느껴질 만큼 빛이 반사되지 않는 두 눈이 바라보는 건 오로지 여신의 석상이었다. 재미없는 녀석. 요염한 목소리가 뱉은 말은 노골적인 비하보다는 오히려 여전함에 대한 칭찬에 가까웠다. 검은 분수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는 키레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던 길가메쉬의 보석과도 견주어볼 수 있을 법한 눈동자는 창밖에 가득 낀 먹구름을 향해 시야를 넓혔다.

 

“네놈의 그런 반응이야 익숙하긴 하다만. 뭐어, 됐다. 그런 것보다도, 오늘 밤은 구름이 흉악하군. 흘러가는 꼴을 보아하니 바람도 거칠다. 키레이여, 충고하건대 이 주기에는 조심해라. ‘좋지 못한 것’을 만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그런 건 쓸데없는 참견이다. 네 신전으로 돌아가도록.”

“하!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이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이 불쾌한 장소에는 일분일초도 더 있고 싶지 않으니. 아아, 그래. 다음번엔 네놈이 짐의 신전으로 찾아와라. 내킨다면 대접정도는 후하게 해주지.”

“그 건에 대해서는 선처하마.”

 

길가메쉬는 대답을 듣고 아주 잠깐 동안 놀란 표정으로 멈춰있었다. 그 원인은, 글쎄. 결국에는 뭐가 그리 우스웠는지 소리까지 내어 웃음을 터뜨리는가 싶더니 서서히 모습을 감췄으니 키레이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신들과 일맥이 통한 자만이 부여받을 수 있는 권능의 일부. 무릇 종류와 능력에 상관없이 신을 떠받드는 사제라면 누구나 부러워해 마지않았을 광경을 직접 목격한 셈이었으나 키레이는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을 뿐이다. 아, 이제는 덩그러니 남아버린 적막만이 다시금 주변 일대를 뒤덮었다.

어느 순간, 분명히 모든 창문이 닫혀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작은 바람이 몰아쳤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키레이는 잘 알고 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미소짓고 있는 여신의 석상에게서 등을 돌리자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강직한 어깨 위에 새로운 감촉이 느껴졌다.

 

“후후후. 귀가 간지러워서 내려와봤더니, 누가 누구더러 좋지 못한 것이란 건지 잘 모르겠네~? 아무리 큰 권력과 규모를 가진 대사제라지만 조~금은 건방진걸. 그렇지 않니?”

 

새까만 베일과 너머로 엿보이는 앳된 얼굴은 하늘거리는 드레스와는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분명 한참을 이렇게 끌어안고 제 몸 구석구석을 더듬은 끝에야 떨어질 게 분명했다. ‘그녀’는 매번 그래왔다. 이번에도 하등 다를 바 없으리라. 일부러 목걸이를 당겨대는 장난스러운 손을 떼어낼 수 없었던 건 그런 그녀가 석상으로 세워진 여인의 모습과 일치하는 탓이었다.

 

“신이시여. 이번에도 멋대로 강림하셨습니까?”

“어쩜! 그리 딱딱하게 굴지 말렴, 아가야! 꼭 우리 관계가 서먹한 것 같잖니. 예전처럼 편하게 불러도 좋단다. 나를 맹목적으로 따라주는 유일한 종자인데 그 정도의 특권은 당연하지 않겠니.”

“……….”

“자, 어서. 뭐하니? 키레이 아가는 언제부터 신의 권유에도 따르지 않는 나쁜 어린양이 되었을까~?”

 

비록 서른 남짓 되어가고 있는 만큼 어느 정도는 성장을 마쳤다고 볼 수 있는 사내라지만, 아무래도 신이라는 존재 앞에서는 피도 마르지 않은 신생아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신의 입장에서는 해줘도 그만 안 해줘도 그만인 어디까지나 자유를 존중하는 권유겠지만 사제의 입장에서는 말이 좋아 권유일 뿐 그것 자체만 해도 얼마나 강제적인 의미도 부여되게 되는지. 애초에 그걸 아는 신이었다면 저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테다. 키레이는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신의 이름을, 그것도 사적이며 친근한 어투로, 감히 입에 담아본다는 것은 매번 코토미네 키레이라는 인물이 걸어온 신앙의 길을 스스로 따져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성직자로서 그릇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쯤 제 등에 매달린 신은 세상모르고 기대감으로만 눈을 빛내고 있을 게 뻔한데. ……루리. 오랜만에 밖으로 끄집어낸 단어는 생각보다 묵직했다. 그런 정신적 무게감과는 반대로 목을 죄고 있던 물리적 무게감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래! 옳지옳지. 참 잘했어요, 우리 아가! 역시 언제 봐도 순하다니까~.”

“이름을 부른 게 그렇게도 기쁘십니까?”

“내 입으로 직접 듣고 싶은 걸까? 귀엽기도 해라. 그야, 기쁜 게 당연하지? 땅콩만할 때만 해도 누나, 누나 하면서 쫄래쫄래 따라왔었는데. 지금은 얌전한데다가 이름도 잘 불러주지 않잖니. 맨날 신이시여, 신이시여~. 아멘, 아멘~.”

“그건, ……아무 것도 모르던 때의 일이지 않습니까.”

“어느 때였든 너라는 건 변하지 않는단다. 후후, 조금 더 커서는 반말도 꽤 하길래 귀엽게 봐줬더니 사실은 내가 신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태도가 싹 변해선……. 그 때 이 누나가 얼마나 거리감을 느꼈는지 너는 모를 거란다.”

 

우는 척한지 몇 초도 지나지 못해서 히죽 웃어버리고 마는 그녀의, 루리라고 불린 어느 신의 창백한 손가락이 몇 번 문지른 것만으로도 검은 성수에 젖어 변색됐던 십자가가 제 빛을 되찾았다. 신의 하얀 손에 묻은 검은 성수라는 게 어찌나 모순적이었는지. 그녀는 곧장 위쪽을 향해 팔을 뻗어서 그대로 키레이의 젖은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은 그의 온기를 받고 있음에도 계속 차갑기만 했다. 얼음으로 구성된 건 아니니 작은 열에 녹아버리는 일은 없겠지만 알면서도 키레이는 지금까지도 그 손을 잡아보기를 퍽 꺼려했더랬다. 물론 신의 감이란 인간의 범주에 비하면 훨씬 더 예민해서, 그런 눈길이 제 손에 느껴질 적마다 루리 쪽에서 먼저 손을 잡고는 했다. 그러니까 바로 지금처럼. 손을 빼내려던 시도가 무색하게도 루리는 재차 쫓아와서 붙잡았다. 두 번은 없었다.

 

“내 신전의 유일한 사제, 내가 아끼는 유일한 아가야.”

“예. 여기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조금 멀리 산책하러 나가자꾸나. 갈 곳이 있단다.”

“조금 멀리, 말입니까? 어디 가셔야 할 곳이라도?”

“따지자면 그렇지? 어차피 여기까지 오는 별난 생물은 너나 다른 신전의 사제들밖에 없고, 여기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나도 함께 할 테니 며칠쯤 비워도 상관없지 않겠니. 여기서 기도 좀 안 한다고 저주를 내리진 않는단다.”

 

그녀가 열거한 이유들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녀가 쉬이 저주를 내리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이렇게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결국 또 시간만을 허비하는 방향만 택하는 방자한 태도만큼은 제 아무리 신이라 할지라도, 혹은 자신이 모든 기도와 신앙을 바쳐온 신이기 때문에 더욱, 키레이에게 있어 용납하기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으므로. 어쩌면 제 일생의 원망願望이 그만큼 더욱 멀어지게 될 것에 대한 초조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굳건히 다물려있던 입에 알게 모르게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주 작게.

 

“사실 말야, 슬슬 아가에게는 견식을 넓혀줄 필요가 있어보였거든. 마침 좋은 ‘희생양’이 여기 근방에 사는 모양이기도 했고. 언젠가 아가와 새끼손가락도 걸고 꼭꼭 약속했잖니? 아가의 빈틈들은 내가 메워주겠다고.”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어휴, 또 그렇게 딱딱해지는 것 좀 봐. 아가는 참 우직하다니까. 그것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지만. 아무튼, 내일은 가는 길에 길가메쉬에게 좋은 술과 안주도 차려주면 괜찮겠구나. 그렇지?”

“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좋아. 그럼 일정은 결정 됐으니…….”

 

말을 꺼내다 만 루리가 키레이의 손을 잡아당기며 앞장섰다. 작은 체구의 소녀에게 맥없이 끌려가는 거한이라는 풍경은 유쾌하다면 유쾌할 수도 있을 풍경이겠다. 영문을 모른 채 걸음을 옮기던 키레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우연인지 고의인지 알 수 없지만 루리가 조금 더 앞서서 앙칼진 목소리를 드높였다.

 

“일단 네 몸에 있는 성수부터 다 씻어내고, 그리고 맛있는 것도 먹고 같이 한 이불도 덮자, 키레이 아가. 매번 기도만 들어주다가 오랜만에 직접 만났으니까 말이야.”

“………흠?”

“어쩜!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인걸. 그냥, 아무 뜻도 없단다. 기왕 내려왔으니 인간처럼 즐겨보려는 거지.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그래, 성서에서도 신이 추한 꼴로 집에 방문했을 때 아주 잘 대접해주면 축복을 받았던가 어쨌던가. 대충 그런 과정이라고 생각하렴? 효험은 보장 못하지만 그래도 축복이라면 잔뜩 해줄 테니까.”

 

네가 바라는 소원은 내가 이루어줄게. 오로지 나만이 네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단다. 그건 처음 그녀와 만났을 때 들었던 속삭임이었다. 그토록 믿던 신이라면, 신이란 게 정말로 만능이라면, 자신의 결함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설마하니 신이 정말로 존재했으며 그 신이 제 결함을 빌미 삼아 이렇게 유희할 줄 알았더라면 다른 방면의 방법을 찾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이 이상 없을 궤변 투성이다. 머리로는 여전히 그녀의 말에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몸은 별 다른 저항 없이 그녀를 따라 신전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멋대로인 신의 행동에 휘둘린 횟수만 해도 세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매번 익숙해지지 못한 사이에 넘어가버리게 되는 건 어째서일까. 어차피 이런 신에게 물어본다 한들 직접 깨달아보라며 가르쳐주진 않을 게 뻔하다만.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거짓말쟁이 신의 뒷모습을 내려다보던 키레이의 눈빛에서 스쳐지나간 그 두 가지 감정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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