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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죽음의 딸들인 버금 여신들은 수없이 많다. 아마 이 나라의 모든 신들을 합쳐도 어머니 죽음의 딸들인 버금 여신들만큼 많은 자식을 둔 신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인간에게는 수없이 많은 죽음의 형태가 존재했으니까. 병들어 채 생을 끝까지 살지 못한 아이의 죽음, 시어미에게 맞고 남편에게 외면당해 죽은 새 신부의 죽음, 모든 삶을 살고 잠들 듯 세상을 떠난 노인의 죽음... 그는 핏물이 울긋불긋 든 붕대를 감고 사제 서품을 받을 때 그를 바라보았던 어머니 죽음의 대사제를 떠올리며 벽 위로 그을음을 남기는 램프의 불을 손바닥으로 쥐어 꺼뜨렸다. 맑은 보석처럼 여전한 총기와 생기로 반짝이는 녹주석의 눈동자와 시간이 그에게 새겨놓은 눈가의 주름들을 찌푸리며 대사제는 말했다. 어머니 죽음의 막내 따님이 자네를 선택했네, 라고.

 

버금 여신들의 사제는 잘 선택되지 않는다. 애초 버금 여신들이 신전에 들어앉아 사제들을 굽어살필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지도 않거니와, 보통은 어머니 죽음을 섬기는 사제들이 돌아가며 그녀들의 신전에 향을 올리고 먼지를 털어내기 때문이었다. 생을 상징하는 아버지 태양을 섬기는 만큼 그와 함께 세계의 반쪽으로 만들어진 어머니 죽음을 섬기는 이들도 많았다. 그 수많은 이들이 수많은 버금 여신들의 신전도 함께 돌보니 버금 여신들은 굳이 그네들을 위한 사제를 고를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마지막의 버금 여신, 어머니 죽음의 막내딸이 그녀만을 위한 사제를 고른 것이다. 그것도 전쟁터에서 그나마 붙었던 숨이 껄떡껄떡 넘어갈 때가 되어서야 후발대에게 발견되었던 유일한 생존자를. 혹자는 그것을 보고 그 버금 여신의 악취미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버금 여신이 관장하는 죽음은 전쟁터에서 원한을 품은 죽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닥쳐, 닥치란 말이야,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거 요란법석 떠는 건 여전하구만."

 

어머니 죽음의 딸들 중 가장 늦게 태어난 이의 신전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암울해 보이고 좁은 신전의 돌 벽을 손가락으로 쓸며 그는 괜히 툴툴대는 식으로 웅얼거렸다. 그러나 저 멀리서 다시 한 번 머리를 벽에 들이 박는 소리에는 도저히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할 수가 없었다. 급하게 굽이를 돌자 한 번 더 시끄러워!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신전은 아주 작았다. 포도나무 덩굴은 우거지고 신전의 입구에는 폭포수처럼 가지를 드리워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어 잘 찾기도 어려웠다. 그 때까지도 목발을 짚고 절뚝거리며 걷던 그를 바라보며 그를 안내해 주었던 또 다른 사제는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혹시 왜 이 여신님의 신전이 이토록 외진 곳에 있는지 아십니까? 그는 멀뚱하게 눈을 굴렸다. 그의 교육은 빈민가 아이들을 위한 기초적인 것들에서 끝이 났었으니까.

 

신전은 좁고 작은 대신 깊었다. 수 없이 구불구불 꺾어져 들어가면 자줏빛 베일을 몇 겹으로 두르고 침상 위로 쿠션을 쌓아 올린 공간이 흐릿하게 시선 안 쪽으로 들어왔다. 안쪽으로 깊이깊이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바깥에서는 그림자보다도 못하게 보일 것이다. 그는 실루엣이라고 하기도 뭣 할 정도로 희미하게 비춰지는 것이 몸부림을 치듯 구르는 것을 보고 베일이 찢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걷어가며 그 안으로 들어섰다. 닥쳐, 입 다물라고, 시끄러워, 아무 것도 아닌 것 주제에 시끄럽게 굴지 마, 머리 울린단 말이야! 하는 소리가 울부짖음에 가깝게 울려 퍼졌다. 베일 바깥 쪽에 걸어놓은 촛불이 베일 안 쪽으로 불투명하게 새어 들어 흔들렸다. 작은 그림자가 몸부림을 쳤다. 시끄러워! 시끄럽다고, 제발 닥쳐! 그는 발치에 걸리는 쿠션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려 애쓰며 바깥 쪽으로 걷어내고 마지막 베일을 손 안으로 말아 쥐었다. 윤. 그는 짤막하게 목소리를 냈다. 꿈틀거리며 벽에 머리를 박아대던 행동이 잠깐 동안의 텀을 두고 멈췄다. 그는 다시 한 번 쾅, 하고 벽을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 누구도 감히 입에 올리려 하지 않는 여신의 이름을 감히 소리 내어 내뱉었다. 윤. 촛불의 불빛이 흰 손 위로 주홍빛 그림자를 그렸다. 그녀가 외마디 비명처럼 외쳤다. 그만하라고!

 

"윤!"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시끄러워, 시끄러워...!"

 

그는 결국 마지막까지 쥐고 있으려던 여유를 모두 버리고 허겁지겁 좁다란 침상 위로 기어 올라가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어머니 죽음의 막내딸이라 한들 그보다도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소녀신의 몸뚱이는 그 시간 아래서 폭삭 부서져 버릴 만큼 마르고 작았다. 품으로 끌어안으면 한 팔로도 온통 다 휘감길 정도였다. 품 안에서 발버둥치는 체온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온통 차갑게 서늘했다. 이 버금 여신께서는 전쟁터에서 원한을 가지고 죽은 이들의 죽음을 관장하시죠. 젊은 사제가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 죽음의 가장 막내딸이시지만 동시에 가장 어려운 일을 맡아 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신과 인간이 가까운 나라, 사제와 신은 더더욱 가까운 나라. 아직 풋내 나는 몸으로 춤추는 것이 더 어울릴 소녀 신은 제 그림자의 몸집을 불려 피와 살점을 억울하게 바친 이들의 원한을 집어 삼켰다. 울부짖는 소리와 피 울음, 더 살고 싶었다는 발악과 고통, 비명소리와 잿가루의 맛과, 어떻게든 복수하겠다는 탄 내음 풍기는 분노.... 그리고 또 다른 모든 것들을. 전쟁터를 휘돌며 부러진 칼날과 녹슨 포탄과 떨어져나간 살점들을 밟고 밟아가며 죽어간 이들의 울음소리를 집어 삼킨다. 그림자의 안 쪽으로, 더 안 쪽, 아주 아주 깊은 곳으로... 영혼은 삼켜진다. 삼켜져서 어머니 죽음의 땅으로 떨어진다. 버금 여신들이 죽은 자의 영혼을 거두어가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끔 멀쩡한 상태로 신전에 나타나는 그의 여신은 장난을 섞어 '맛'이 느껴진다고 했다. 보통은 잿가루나 탄 맛... 그리고 녹슨 쇠의 맛이 난다고.

 

품 안의 손이 거칠게 어깨를 밀어냈다. 시끄러워, 시끄러워, 귀가 아파, 하고 우는 소리는 신이라기보단 상처받은 짐승에 가까운 빛깔이었다. 젊은 사제는 말했다. 그 분은 전쟁터에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삼키시지만... 벽을 타고 둥실 피어 오르는 거대한 그림자, 완벽하게 차단되어 녹아 떨어지는 밀랍의 불빛. 그들의 원한은 삼키시지 못하죠. 그래서 그림자 안 쪽으로, 안 쪽으로, 계속해서 쌓여 울부짖는 겁니다. 괴롭다, 슬프다, 살고 싶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라고. 이 세계의 신들은 아버지 태양과 어머니 죽음 이외에는 모두 불완전했다. 작게는 숙취에서부터 크게는 죽음-이후에 부활을 반복하지만-까지 모두 몇 군데 씩 빈 곳이 있었다. 그는 사방의 벽을 타고 거미줄처럼 퍼져나가는 그림자 속에서 물안개 퍼지듯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작은 소녀신의 몸을 더 품 안으로 끌어 안았다. 아프다, 보고 싶다, 두고 온 사람이 있어, 엄마, 내 아이, 엄마... 아마 이 좁고 작은 방이 그림자로 꽉 차게 되면 천둥처럼 치는 고함도 들릴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은 그림자 안에 원한을 쌓아두고 있다가, 아주 괴로울 때... 괴로울 때 이 곳에 오셔야 하기 때문에. 아주 작고 좁은, 그가 오기 전까지는 가끔 올리는 향과 먼지를 떨어내기 위한 사람들만 왕래했다는 신전은 그렇기에 외지고 작고 좁은 것이라고, 젊은 사제는 그렇게 말했다. 신이 괴로워하는 곳이기 때문에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귀가 아파, 계속해서, 계속, 소리,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쉬이, 쉬, 괜찮아, 괜찮습니다, 누구도 여기 없어, 당신과 나 외에는 아무도..."

 

신이 괴로워하는 곳.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그의 여신과 처음으로 만났던 전쟁터를 떠올렸다. 덜 식은 포탄이 회색 빛 겨울 하늘 위로 희뿌옇게 연기를 내뿜고 널려있는 총칼들은 모조리 부러져있던 전투 뒤의 전쟁터, 움푹하게 고인 곳으로 질척한 흙탕물과 핏방울이 뒤섞였는데 그 곳을 찌푸림 하나 없이 맨발로 밟아가던 검은 로브 차림의 어린 소녀신. 맥이 탁 풀려가는 눈가 사이로 애써 힘을 주며 흰 발등 위에 무엇도 묻어나지 않던 그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던 그를 향해 시선을 내렸던 소녀 신은 로브의 후드를 젖히며 아주 약간, 기쁜 듯이 웃었다. 하나는 줄었네, 라고 말하면서. 여기 있는 모든 걸 다 먹어 치우면, 아주 오래도록 기분이 나쁠 것 같았거든, 속이 더부룩하고... 중얼거리는 표정은 아주 희미하고 덧없어서, 그는 저도 모르게 경련을 시작한 입 꼬리로 거 다행이구만, 하고 툭 내뱉었다. 먼지 같은 목소리를 들은 그의 소녀 신은 약간 눈을 크게 떴다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그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나긋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있지, 혹시 입 무거워요? 라고.

 

발치로 모여든 그림자가 꿀렁거렸다. 점성 있는 액체 같은 움직임으로 벽을 타고 오르던 그림자들이 썰물처럼 다시 바닥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시큰시큰하도록 팔을 부여잡은 작은 손을 흘끗 바라보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콧등을 부드럽게 눌렀다. 괜찮아, 괜찮아, 아무도 여기에는 오지 않아, 당신과 나 이외에는, 하고 속삭일 때마다 목덜미로 차게 물기 어린 숨이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공기를 먹어 치우던 속삭임들이 짓눌려 터지듯 희미한 껙, 소리를 남기며 사라졌다. 견딜 수 있는 한계치는 한 순간 범람하고 또 한 순간 잠잠해졌다. 잠잠해지면 또 한계치는 뒤로 한없이 밀려나 다음 범람까지 잠잠해진다. 그럼 그의 여신은 또 떠나는 것이다. 그 전날 밤 식은땀으로 푹 젖어 잠들었던, 고작해야 인간일 뿐인 그녀의 사제의 품에서 깨어나, 아무렇지도 않게 그림자의 색을 띈 로브를 추스르고 어떠한 말 붙임도 없이, 바람처럼. 그는 그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제법 지켜보았기 때문에 그의 소녀 신이 신전으로 오는 것을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았다. 마르고 둥근 어깨를 끌어안고 그의 여신을 달래는 것에서 오는 감정과 소녀 신이 울부짖는 모습을 지켜보는 감정은 양날의 칼날처럼 돌아갔다. 고통스러워하는 여신, 구원받은 사제, 외진 신전. 세상의 어떤 일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대릴."

 

고요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소녀 신은 언제나 장난스러운 가면을 두른 묵직한 그림자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사실 그에게는 조금 낯선 울림이었다. 연약한 물방울을 닮은 떨림. 그는 한 순간 물방울처럼 부풀었다가 나무 침상의 아래로 빨려 들어간 그림자에게서 눈을 떼고 감히 품 안에 가득 안은 소녀 신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끔 그의 여신이 낮에 찾아올 때-그러니까 그가 그녀에게 서툴게 향을 바치고 대충 먼지를 떨어낸 제단 근처에서 멀거니 생각에 빠져 있을 때도,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당신, 이라는 애매한 호칭으로 부르는 그녀의 화법은 청자가 그 혼자였기에 망정이지 한 명만 더 끼어 들었다가는 누구를 부르는 것일지 확정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방금 전에,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 만난 그 전쟁터를 벗어나서는 한 번도 부르지 않았던 이름을. 그는 입을 벌려 대답을 하려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촛불의 주홍빛이 어룽진 흰 뺨에는 눈물길이 여전했다. 풀어 해쳐진 로브 안 쪽으로는 얇은 슬립에 가까운 검은 드레스 자락들 뿐이었다. 어깨에 젖은 뺨이 뭉개졌다. 온기 대신 미지근한 냉기 뿐이었고, 무게는 손에 쥐면 부서질 것처럼 가벼웠다.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고통을 느끼는 어머니 죽음의 막내따님, 그의 여신.

 

그는 입술을 짧게 물었다 뗐다. 조심스럽게 제게로 기울여진 둥근 머리에 뺨을 누이고, 마치 악몽을 꾼 연인을 달래는 사내처럼 조심스레 마른 어깨를 쓸어 내린다. 그에게 사제 서품을 내려주었던 대사제도, 그를 이 외진 신전까지 데려다 주었던 젊은 사제도 그에게 말했었다. 당신은 어머니 죽음의 막내따님이 인간처럼 고통 받고 괴로워하고 울부짖는 모습을 유일하게 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시험해보려는 듯 가늘게 흐려졌던 눈초리와 걱정스러움이 묻던 눈가를 한 채. 아주 오랜 세월 이 버금 여신의 사제를 맡았던 몇몇의 사제가 있었고 그들은 전부 여신의 고통에 동화되어 미쳐버리거나 여신의 고통을 발설하려다 그 분의 그림자에 묻혀 사라졌습니다. 위협이라면 위협일 어투를 온 어깨와 얼굴로 받아내며 그는 마른 침만 연신 삼켜댔었다. 포탄의 흰 연기에 묻어나던 물음. 있지, 혹시 입 무거워요? 라고. 가면 속 금방 들킬 장난기를 둘렀던.

 

"괜찮습니다."

 

그는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괜찮습니다, 라고. 그 때도 그렇게 대답했었지. 시간이 녹은 눈동자와 걱정이 어려 파르르 떨리는 뺨으로 그를 쳐다보던 이들에게 그는 괜찮다, 고 말했다. 괜찮다고, 이미 그 때 그의 여신 앞에서, 꼭 어린 계집애에게 확답을 해주던 어른처럼, 그렇다, 고 이야기 했으므로. 그 때와 약간 비슷하면서도 다른 맥락으로 그는 중얼거렸다. 괜찮아. 반말과 존대가 어지럽게 뒤섞인 언어에도 그의 소녀 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쓸어 내리는 흰 어깨에 미약하게 인간의 체온이 옮겨 간 것 같았다. 침상 아래로 스며든 그림자가 검은 물결처럼 부드럽게 흰 맨발 끝에서 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계속, 여기 있을 테니까.

당신이 그림자 안의 목소리에 잠기지 않도록.

 

어깨에 기대어 있던 그의 여신이 아무 말 없이 품 안으로 더 깊이 다가왔다. 고요하게, 아주 고요하게, 그는 그 흰 이마에 콧등을 내리 누르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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