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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삼사일은 걸렸을까? 아직도 바다 위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네 방향으로 온통 수평선 가득 물 뿐인 장소와 거기 달랑 하나 떠 있는 큰 배. 탄 사람은 그녀 뿐이었으나, 배의 치장은 화려했다. 항해하는 배가 아니어서였다. 온갖 반짝거리는 장신구와 비싼 천으로 그녀와 배를 둘러 주고 바다나 항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그녀만 달랑 태운 건 그게 처음부터 가라앉길 바라고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배는 아직까지 기적처럼 안전했다. 바다의 뙤약볕이 좀 사그라들자 바다도 점점 시원해졌고 해도 바다 속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침 잠깐 이후 계속 선실에 박혀 있던 그녀도 슬슬 갑판으로 나왔다. 하나 둘 별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저녁이 되기 시작하는 이 때부터가 뜨거운 바다에서 그나마 좀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어둡고 칙칙한 선실에서 나와 빛이나마 볼 수 있다는 데에서 작은 위안을 가졌다.
이렇게 뱃머리에서 물이며 물 따라 흐르는 별이며 달이나 은하수며 등을 보는 건 이런 상황에서도 나름 즐거운 일이었다. 그냥 작은 행복이나마 찾으려는 본능인지는 몰라도, 여튼 얼마 남지 않은 날을 즐기는 것이 좋았다. 이 크기만 하는 나무 배는 언제 바위에 부딪혀 가라앉을지 몰랐고 언제 물이 차 가라앉을지 몰랐다.
별안간 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며칠 동안 사람 한 번 못 본 그녀는 경계보다는 반가움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사람이 아니어도 좋았다. 우연히 탄 개 한 마리에도 일단은 괜찮았다. 해적? 제물을 실은 불길한 배이니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둘째치고 어쩌면 친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주변엔 배가 아무 것도 없었는데도 배 뒤에서 나는 소리의 정체는 사람같은 무언가였다. 분명 사람은 없는 걸 확인했는데도 그 사람은 왜인지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내가 드디어 헛것을 보나.'

 

"저기……?"
"아."

 

계속 바다 쪽만 보던 그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섰다.

 

"여긴 저 혼자가 아니었나요? 어떻게 여기 계세요?"
"꽤 오랫동안 같이 있었는데 이제야 알아채나? 섭하군."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언제부터?"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셨을까."
"하나도 모르겠네. 그럼 출발할 땐 없었단 이야기에요?"
"뭐, 그렇겠지."
"잠깐만……, 아냐, 그래도 하나도 모르겠어."
"이런 데선 또 현실적이군. 멋대로 생각해. 그래서, 이번에 인간들의 사정은?"
"네? 몇 달째 날씨가 가물어서……."
"비인가. 들어줄 수는 있지만 그럼 매번 귀찮겠지."

 

바람이 적당히 불기 시작하면서 정처없이 떠돌던 배도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마법사이신가요?"
"아니."
"그러면 도대체……."

 

그가 다시 바다 쪽으로 몸을 돌리자 그녀도 조심스럽게 그 쪽으로 다가가 옆에 섰다.

 

"왜 굳이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아니, 안 풀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며칠만에 처음 보는 사람이고……."
"좋다. 인간들이 내 이름까지 알고 있을 필요는 없었겠지."
"도대체 누구이시길래 그러세요?"

 

그가 작은 불꽃같은 것을 손끝에서 만들어내 몇 번 굴리다 바다 쪽으로 흘려넣었다.

 

"재앙을 부르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존재다."
"설마……. 어머니가 이름을 말하면 찾아온댔어요."
"지금 이렇게 찾아와 있으니, 그래서 내 이름은?"
"……."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

 

그가 익숙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완전히 잊어버리게 만들 심산인가 보군."
"상관이 있나요?"
"잊혀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재앙신이니 빈도가 약해질 거라고 생각했겠지. 어리석게도."
"……그렇겠네요."
"아델이다."
"아델 님……."
"존칭은 필요 없다. 잊어버릴 텐가?"
"전혀요."

 

그녀는 한 순간의 고민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뒤따라오는 잠깐동안의 고민이 있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억울하게 육지에서 얼마나 떨어졌는지도 모르는 이 망망대해로 밀어넣은 그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악의도 있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난 것이었다. 그냥, 왠지 모르게 그렇다고 말해줘야 할 것만 같은 기분. 그는 그녀 자신만큼 화려하게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누군가와 가까워질 수는 없었던 걸까'.

 

"인간들에게 잊혀지고 있다면 이 배는 나에게 바쳐진 것은 아니겠군."
"네. 아마……."
"동생 녀석이겠지. 그 녀석은 이런 덴 전혀 관심같은 걸 두지 않는데 말야."
"그럼 이렇게 같이 있어도 괜찮은 건가요?"
"그 녀석은 네가 바다를 떠돌다 죽는 것도 모를 거다."

 

'전혀 쓸모없는 일이었구나' 하고, 그녀는 밤인데도 반짝거리는 옷자락을 잠깐 살폈다. 움직일 때마다 짤랑거리며 쇳소리를 내는 옷자락에서 그가 그녀의 손목을 찾아 잡고 뱃머리 쪽으로 이끌었다.

 

"……많이도 달았군."
"이렇게 죽은 사람도 옛날부터 꽤 많았겠죠."
"지금 이건 오래 전 나에게 바쳐지고 버려진 섬으로 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아무도 없다. ……만, 네가 맡아라."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죽는 것보단 잘 할 수 있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에 바닷새가 날아들었다. 땅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소리였다.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했지만 동물들은 저들대로 잘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라면 괜찮았다. 어느 정도는 살아나갈 수 있다는 소리니까.

 

"섬의 중앙에 과거의 신전 건물이 있다. 나머지는 그리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군."
"어차피 아무도 없는 거라면 안 남아 있는 쪽이 더 나아요."
"다행이군."

 

점점 육지가 보이고 배의 바닥이 모래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오자 둘은 배에서 내려 적당히 나무에 묶어 두고 섬을 걸었다. 완전히 깜깜해진 하늘에 섬은 너무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익숙히게 그녀를 내려 주고 길을 이끌었다.

 

"익숙하시네요."
"아무리 버려져 있더라도 나의 땅이니까."
"전 아침에 좀 더 자세히 둘러봐야겠어요."
"하긴, 어차피 지금은 아무 것도 안 보이겠군."
 
그가 한쪽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그녀의 한 쪽 손을 잡은, 뒤에서 안은 모습으로 섬을 천천히 한 발 한 발 같이 걸었다.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건가요?"
"아가씨의 치렁치렁한 팔목보단 이 쪽이 훨씬 낫거든."
"시라베시에요. 사야코."
"배를 타면서 얻은 이름은?"
"어……."
"제물들에게는 새 이름을 붙여 준다던데."
"카르나요."
"카르나."

 

그가 몇 번 카르나, 카르나, 카르나, 하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앞으로의 이름은 그렇게 하지. 카르나라고 부르겠다."
"굳이……."
"시라베시 사아쿄라는 인간은 이미 죽었지 않나? 그럼 잘 부탁하지."
"……저도, 아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사제로써."

 

그가 도착한 듯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리던 손을 뗐다. 그녀가 눈을 뜨자 그가 버려진 신전의 화로에 불을 붙였다. 그녀는 잡고 있던 그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그제서야 영 딱딱해 보이던 그의 표정이 좀 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느낀 그녀도 겨우 어느 정도 풀린 긴장으로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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