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것은 아주 오래 된 이야기랍니다.
잉크를 가득 쏟은 커피와 같은 색의 머리카락, 곱게 빚어 맑은 물만 가득 채워 놓은 듯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눈동자를 이드(Id, 충동)는 바라보았다. 이름 없이 떠도는 공허한 영혼에게는 낯설고 과분한 시선이 무거웠다. 누군가가 깨끗하게 비워 어떤 이의 고통과 피 울음에도 무감각하게 깎여나간 움푹 패인 뺨 안 쪽으로 먼지 바람이 쌓였다. 앳된 소녀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검은 색의 모직 상복의 끝이 흔들렸다. 어미도 아비도 없이 홀로 음습하게 이끼 낀 우물 안 쪽에서 튀어나와 타인의 고통과 피 울음과 원망과 애증을 계단 삼아 밟아 올랐던 이드의 심장 대신 피어 있는 들장미 꽃 한 송이가 얌전하게 가시를 내리고 고개를 수그렸다. 아주, 아주 오래 된 이야기에요. 속삭이는 목소리에서 성당의 촛불이 녹아 떨어지는 밀랍 내음과 묵직한 청동 종의 소리가 묻었다.
날 적부터 시작되었던 비루먹은 몰골과 너절한 영혼으로 이드는 고개를 숙였다. 숨결이 그대로 섞일 거리까지 그의 목덜미가 수그러들었다. 모질고 잔악한 아비의 슬하에서 자라 단 한 번의 불복종으로 형틀에 묶여 책형을 받아 숨을 거두었다는 성녀는 제 코 끝이 닿을 만치 내려 온 공허와 허무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는 마른 입술을 열어 존재도 낯선 공기를 들이마셨다. 뻑뻑하게 마른 목구멍 안 쪽에서 모래처럼 매운 목소리가 왈칵 뱉어졌다.
"...말해봐."
너의 이야기. 잔악하고 무도한 아비의 아래에서 자라 빈민들에게 빵을 나누어 주려 망토를 뒤집어 쓰고 쥐새끼처럼 더러운 골목골목을 누볐다던 너의 이야기. 무신경한 아비의 이야기를 들은 그 날로부터 과부들이나 입을 법한 무거운 모직 상복을 입었다는 너의 이야기. 귀 먹고 눈 먼 산 송장처럼 그림자 속에서나 아비의 명령을 피하려 애쓰다 어느 날인가 햇빛 아래 거대한 불복종을 저질러 책형을 당했다는 너의 이야기를. 옳은 일을 하고 신념을 관철하고 맹세를 지켰을 뿐인데 온 세계 다시 없을 죄인처럼 목에 올가미가 걸려 맨발로 돌밭을 걷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 매달려 책형으로 피를 쏟으며 죽어야 했던 너의 이야기. 그 삶 마디마디에 새겨진 분노와 고통과 울음과 슬픔과 원통함을, 미움과 배신감과 애증과 원망을 말해 봐. 긴긴 세월 살아오며 죽은 영혼과 살아있는 인간 간의 복수극을 조율했던 그림자와 충동의 자식에게 성녀는 다정하게 웃었다.
"아주 긴, 길고 긴 이야기에요."
그리고 그것은, 아주 오래 된 이야기.
2.
어린 소녀가 있었다.
성 안에 오래도록 홀로 자라던 소녀였다.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는 어머니 외에는 벙어리 유모와 둘이서만 살던 외로운 소녀였다. 한 달에 한 번씩, 애틋한 눈을 하고 소녀를 끌어안으러 오는 어머니는 소녀에게 수많은 장난감과 인형과 비단 옷들을 안겨 주었지만 소녀의 외로움은 달랠 길이 없었다. 벙어리 유모는 무릎에 기대어 오래도록 외로움에 우는 소녀를 달래지 못해 으으,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끙끙댔다. 소녀는 생각했다. 내 외로움을 나눌 사람이 있다면, 나를 이 어두운 외로움 속에서 끄집어내 줄 사람이 있다면, 나는 분명 그 사람을 영혼을 다해 사랑하게 될 텐데.
그리고 한 소년이 있었다.
잔악한 영주가 다스리는 영지에서 도망쳐 나온 소년이었다. 악마 같은 성정의 아비에게서 반쪼가리 핏물을 이어받은 영주의 둘째 아들이었다. 저를 낳고 이틀 만에 아버지에게 걷어차여 한 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쓰는 어머니를 데리고, 도저히 제 자식들에게도 횃불과 인두를 들이대며 낄낄대고 웃는 아비를 보다 못해 칼을 치켜든 형의 반란을 틈타서 도망 나온 소년은 숲으로, 숲으로 기어들었다. 다리를 저는 어머니와 함께 불안한 안온함이 깃는 화로에 앉아 있으며 소년은 생각했다. 적어도 한 사람, 나를 정말로 사랑해 줄 사람이 있다면, 이토록 끔찍하고 지저분한 인생의 그를 사랑해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분명 그 사람에게 내 영원을 줄 텐데.
소원을 들어주고자 했는지, 아니면 소원을 들어주는 척을 했는지. 사실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는 이야기지만, 외로운 소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외로운 소녀를 찾아냈다. 달빛이 하얗게 비추던 밤이었다. 늘 동경 어린 눈으로 바라만 보던 네모지고 길쭉한 창문 너머를 밟고 나타난 소년을 보며, 소녀는 뜯던 꽃잎을 내려놓고 그 앞으로 다가섰다. 외로운 소녀가 물었다. 당신은 천사님인가요? 홀로 앉아 장미 꽃잎을 희고 작은 손가락 사이로 흩뿌리던 소녀를 지켜보았던 외로운 소년이 되물었다. 그러는 너는? 외로운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나는 그냥 외로운 아이에요. 외로운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냥 외로운 아이야.
외로운 소년과 외로운 소녀는 친구가 되었다. 아니, 어쩌면 친구라는 말은 그들에게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단어였을지도 몰랐다. 둘은 꼭 영혼을 반절 나눈 사람들처럼 서로의 구원이 되어주었다. 창 밖의 세계를 보고 싶어하는 소녀를 위해 소년은 소녀를 업고 숲 속을 거닐었고, 제 운명과 영혼의 얼룩에 소년이 울면 소녀는 밤새도록 소년을 끌어 안아주었다. 아주 어리고, 길고, 영원히 계속될 풋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영원하지 않아, 잔혹한 아비가 결국 형을 죽이고 지리멸렬한 내전을 끝냈다는 것을 알아챈 소년은 어머니를 데리고 도망쳐야만 했다. 구슬픈 눈물을 뚝뚝 흘리는 소녀에게 소년은 약속했다. 내가 널 꼭 데리러 올게. 반드시 내가 너를, 사랑하는 너를 신부로 맞으러 올게. 외로운 소녀는 눈물 젖은 얼굴로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장미 정원의 들장미를 소년에게 꺾어주었다. 꼭 돌아와줘요, 나를 데리러 와 줘요. 그렇게 말하는 소녀에게 소년은 입을 맞추어 주었다. 그래, 약속이야, 라고 말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외로운 소녀에게 흰 말 열 필과 검은 말 다섯 필이 끄는 마차가 도착했다. 그 마차에서 내린 선제후는 소녀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소개했다. 너를 데리러 왔다. 너는 이제 성 안에서 살고 가장 고귀한 남자의 고귀한 아내가 되어 살 것이다. 소녀는 소년을 기다리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나를 데리러 올 사람이 있어요, 나를 찾으러 올 사람이 있어요. 소녀의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찼다. 그 소년은 이미 죽었다. 그 소년의 잔인한 아버지가 도망친 아내와 막내 아들을 쫓아 깊고 깊은 산골까지 뛰어 들어갔고 그 애의 심장에 칼을 꽂아 우물 너머로 던져버렸다. 눈물 젖은 얼굴로 까무러쳐 아버지의 성에서 눈을 뜬, 다시 외로워진 소녀는 상복을 찾았다. 내 삶에 빛을 보여준 사람이 죽었으니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겠어요, 누구의 아내도 되지 않겠어요. 거만하고 제멋대로의 성격을 가진 아버지는 외로운 소녀에게서 상복을 벗겨내려 애를 썼으나 외로운 소녀는 무거운 모직 상복과 장례의 베일을 벗지 않았다. 과부처럼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궁핍한 이들에게 식량을 나눠주고 병든 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았다. 그 모든 모습을 바라보며 길길이 화를 내던 외로운 소녀의 아버지는 어느 날 또 다시 궁핍한 이들을 위해 성문을 나서는 외로운 소녀를 낚아채어 성의 바닥에 꿇어 앉혔다. 라인 궁중백이 청혼을 해왔다, 결혼 아니면 죽음을 택해라! 그렇게 외치는 아버지를 보며 외로운 소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그 사람 말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어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외로운 소녀의 말에 분노한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에게 책형을 선고했다. 뜨겁게 달궈진 돌밭을 맨발로 걸어 십자가에 매달린 외로운 소녀의 죽음은 그녀가 돕던 궁핍하고 병든 자들을 분노케 했고 저 멀리, 잔인한 형제의 손길을 피해 한량을 자처하던 소녀의 숙부 또한 분노케 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조카딸의 죽음으로 분노한 소녀의 숙부는 깃발을 높이 들고 궁핍하고 병든 이들과 함께 소녀의 아버지가 버티고 선 성문의 철문을 뚫었다. 외로운 소녀를 매달았던 소녀의 아버지는 저를 쫓는 이들을 겁내어 뛰쳐나가 머나먼 들판에서 비참이 생을 마감했다. 새로이 선제후가 된 소녀의 숙부는 외로운 소녀가 매달렸던 십자가 아래에 눈물과 함께 소녀가 아꼈던 들장미를 심었다.
그 때부터였다. 십자가를 온통 휘감은 들장미는 겨울이 되어도 가을이 되어도 꽃이 지지 않았다. 혹자는 그것을 사랑했던 소년을 향한 사랑으로 보았고 혹자는 궁핍하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신실함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책형에 처해진 십자가와 그것을 휘감은 들장미를 문장으로 한 채, 외로운 소녀는 성녀로 이름 붙여지게 된 것이었다...
3.
"...그건 너의 이야기인가보지?"
이드의 물음에 성녀는 미소를 지었다. 생전, 그녀가 이렇게 미소를 지으면 그녀의 치맛자락과 손에 뺨을 부비던 이들은 저도 모르게 안식을 찾았을 것이다. 체온과 가장 가까울 정도의 다정한 미소였을 테니까. 사후의 영광 이외에는 자유도 사랑도 그 무엇도 가지지 못했던 어린 처녀의 흰 볼 위로 퍼지는 말간 복숭앗빛 홍조를 보며 그는 제 심장 대신 피어난 들장미의 줄기를 손가락 끝으로 휘감았다. 길고 허무한 운명을 들어 기가 죽은 것인지 가시가 온통 아래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무감각하게 물었다. 그건 너의 이야기인가? 성녀가 다시 웃었다. 대답은 짤막하고 간결했다. 네, 나의 이야기에요. 이드는 눈을 깜박였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어쩌면요."
"내게 이야기를 하는 영혼은 단 한 개의 길을 골라."
발 밑으로 진득하게, 어미와 아비도 없이 그를 세상으로 뱉어놓은 진흙이 울컥거렸다. 이드는 충동이면서 빈 그릇이었다. 진흙으로 서툴게 만들어진 토우마냥 비천하고 비루먹은 몰골로 돌아다니는 그는 그 안 쪽으로는 온통 텅 비어 있어, 아직도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원한과 피 울음을 새긴 원혼들은 이드의 망토 자락과 신발 끝으로 우우 몰려들어 제 이야기들을 해댔다. 불륜으로 아내를 죽인 남편에 대한 이야기, 먹고 살기가 힘들어 아이를 오븐에 밀어 넣은 어미의 이야기, 저를 사랑해주지 않는 남편의 목을 조른 아내에 대한 이야기, 사랑을 위해 어미에게 칼을 꽂은 아들의 이야기, 그런 모든 이야기들을. 이드는 그 이야기들을 묵묵하게 듣고-사실은 반 쯤은 듣지 않고, 온 세상의 모든 색들을 쳐 넣어 뭉개버린 듯한 목소리를 하는 원혼들에게 차례로 손을 내밀어 주었다. 복수극의 조율자라고 혹자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제 텅 빈 몸과 영혼 안으로 원혼들을 우겨 넣어 비극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악령이라고. 원혼에게 내맡긴 몸뚱이가 복수극을 피의 색으로 물들여 또 다른 절망과 절규를 불러낸다고. 제 몸 안쪽을 빌려 노을 지는 복수극을 만들고 그림자 안 쪽으로 녹아 드는 것으로 그 값을 치르는 원혼들을 보며 그는 끝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찾아야 해, 찾아야 하지만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나는 찾아야 해. 저들처럼 제 몸뚱이도 존재도 모조리 잃고, 발 아래 재단한 천들처럼 길다랗게 늘어선 그림자 안으로 익사하기 전에.
스스로 안 쪽으로, 안 쪽으로 녹아 드는 것을 알면서도 제 발 밑에 움켜쥔 탄식들을 뱉어내던 영혼들의 말로, 끝없이 계속되는 단 하나의 길. 이드는 무뚝뚝한 얼굴로 창백한 손을 내밀었다. 뼈마디 구석구석 어둠이 녹고 뭉개져 그림자가 드리운 손을 바라보며 성녀가 고개를 부드럽게 기울였다. 마른 어깨 위를 무겁게 감싼 검은 모직 상복과 유일하게 걷어낸 애도의 베일 아래에서도 하얗게 반짝거렸을 얼굴이었다. 빈자들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골목 사이에서 달과 별로 빚어낸 천사처럼 빛을 흩뿌렸을 어린 얼굴. 그는 눈을 깜박, 한 번 감았다 떴다. 눈꺼풀 사이 사이로 그림자가 풀처럼 달라 붙었다가 순식간에 말라붙었다.
"나는 그 소년이, 네가 그렇게 죽는 걸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
"이미 끝난 일에 내가 말을 붙일 필요는 없지."
그러니까. 그는 다시 한 번 더, 손을 부드럽게 작은 몸 앞으로 내밀었다. 이드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원혼들이 선택하는 단 하나의 길이란 그것 뿐이었으니까. 원한 없이 소중한 것들의 곁에 머물거나 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허공을 떠돌던 영혼들마저 질겁을 하고 도망치는 그림자의 그릇의 앞까지 몰려들어 앞다투어 피 섞인 이야기를 뱉어내는 원혼들은 그 손을 잡아 그의 몸을 빌렸고 누구도 득이 되지 않는 복수극을 만들고는 그의 그림자 안으로 녹아 들었다. 은실로 테를 두른 보드라운 선의 옆얼굴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저 사랑스러운, 어린 시절의 사랑에 목숨을 바친 어리석으면서도 연약한 얼굴이 원혼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쩌면 인간들이 말하는 안타까움을 닮은 감정을 불러 일으키지 않을까? 저 작은 몸뚱이가 스스로가 무엇인지도 잊어버린 채로 그림자 안으로 삭아 뭉그러지는 것은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슬픔을 닮은 색을 띄지 않을까. 한참을 그의 손에 시선을 담아내던 성녀가 못 자국이 난 작은 손을 들어올렸다.
움푹 패인 뺨 위로 가는 손 끝이 닿았다. 까맣게 죽은 눈 밑으로 그는 눈을 끔벅였다. 아무도 닿으려 하지 않은 곳이었다. 뼈를 삼키고 시체를 삼키는 우물의 진흙에서 뱉어져 나온 그는 존재만으로도 병마와 죽음을 몰고 오는 자의 취급을 받았으니까. 그러나 자그마한 양손은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그저 다정하게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그의 비참함이 어린 뺨을 감쌌다. 쫓겨난 선제후도 형을 쫓아내고 자리에 오른 선제후도 모두 죽고 영화를 누렸던 과거를 뒤로한 채 몰락해가는 영지의 빈 성당 바닥을 옅은 밤바람이 휩쓸었다. 눈 밑이 붉게 부풀어 오른 얼굴로 울듯 웃은 성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짤막한 단어 위로 달큼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아니요, 아니에요.
"내가 원했던 건, 내가 원하던 건..."
모직 치맛자락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내밀었던 손을 저도 모르게 떨어뜨리며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눈물길을 내는 성녀를 바라보았다. 뻥 뚫린 가슴 위로 자물쇠처럼 틀어 막혀 시들어가던 들장미 위로 붉은 빛이 번졌다. 진주 빛 어린 얼굴을 한 성녀가-소녀가 속삭였다. 안녕.
"안녕, 천사님. 정말 나를 찾으러 돌아와줬네요."
4.
"꼭 돌아와줄 거죠?"
옷자락을 잡는 손은 제 손으로 잡으면 녹아서 떨어질 정도로 작고 하얗게 반짝였다. 얇은 모슬린으로 된 잠옷을 잔뜩 흐트러뜨리고 잉크를 한껏 엎지른 커피 색의 머리카락을 바람에 흐트러뜨린 복숭아 빛 볼의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제 옷자락을 쥐어 잡은 그 작은 몸 앞으로 한 쪽 무릎을 꿇어 앉았다. 꼬맹아, 하고 부르자 벌써 새빨갛게 달아오른 코 끝이 작게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목 안쪽을 불로 지진 것처럼 시큰거렸다. 달빛 아래서 처음으로 만난, 작고 달고, 그대로 녹아 내릴 것처럼 사랑스러운 그의 어린 소녀. 그는 애써 장난스러운 얼굴을 만들어내려 애쓰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한껏 당겨 올린 입 꼬리가 묻어나는 울음으로 떨렸다.
"그래, 꼬맹아. 내가 약속했잖아?"
"잊어버리면 안돼요? 꼭, 꼭 돌아와줘요, 알겠죠?"
그래, 하고 그는 나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전 그의 자그마한 계집애가 꺾어 준 들장미가 여전히 허름한 윗주머니에 꽂혀 생생하게 타올랐다. 계집애가 순한 눈매 끝에서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약속했잖아. 대답하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눈 밑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데도 그는 애써 웃었다. 지금 그가 여기서 울면, 울어버리면, 정말로 다시는 못 볼 사람처럼 되어버릴 테니까. 상냥하고 다정한 그의 어린 계집애도 더 울어버리고 말 테니까. 그래서 그는 그저 웃었다. 질근질근 문 혀 끝에서 알싸하게 핏방울이 터졌다. 목 안 쪽으로, 스스로 만들어놓고도 먹먹하게 목구멍을 막는 약속들이 뭉개졌다. 너에게 돌아올게, 너를 신부로 맞으러 올게.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몰랐다. 그의 아버지는 이제는 청년 티가 나는 그가 형의 전철을 밟아 그를 치려 할 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한 끝에 그를 죽이려 결정했을지도 몰랐다. 그의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돌아오고 싶었다. 돌아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 어린 소녀, 그의 인생으로 다가온 달과 별의 아이, 그와 똑같이 외로움 안으로 온통 잠겨 들어 눈물을 떨어뜨리던 그의 어린 꼬마에게로. 그가 숨쉬어야 할 곳은 그 날, 그 달빛이 길고 네모진 창틀 위로 쏟아지던 그 날부터 온통 소녀에게로 향했을 뿐이니까. 그는 조그마한 머리 위로 코 끝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약속할게, 내 꼬마야. 나는 반드시 네게로, 네게로... 작은 몸이 품 안으로 미끄러지듯 안겼다. 끌어안은 체온은 꼭 눈물의 온도만큼 따뜻했다. 맹세할게. 그는 그 말이 스스로의 목과 영혼을 모조리 졸라 맬 것을 알면서도 감히 입술 위에 담았다. 내가 맹세할게.
"꼭 네게로 돌아올게."
"...응, 약속이에요."
약속이에요, 대릴, 하고 품 안에서 소근거리던 꽃물 들인 목소리. 고작해야 두 음절 뿐이었지만 꼭꼭 눌러 부르는 목소리 끝에서 생을 얻었던 이름.
아, 그것은 너무나 오래 된 이야기.
5.
"...윤."
이름은 짧은 숨소리를 닮았다. 단음절의 이름에 긴긴 세월 다시는 겪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물기를 담아 터뜨리며 그는 제 뺨을 감싼 소녀를 바라보았다. 망각 속으로 한껏 잠겼다 이제야 눈 앞으로 다가온 흰 얼굴은 그 옛날과 다를 바 없이 사랑스러웠고 다정했다. 모든 것을 잊고 충동의 이름을 뒤집어 쓰고 원혼을 위한 빈 껍데기가 되었던 세월 동안 머릿속을 뒤흔들었던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찾아야 해, 기억나지 않는 무언가라고 할 지라도, 나는 찾아야 해, 그림자 안으로 녹아 들어 익사하기 전에, 스스로가 무엇인지도 잊고 그대로 녹아 내리기 전에, 찾아야 해... 그는 다시 내뱉어질 리 없는 숨을 터뜨리듯 짧은 이름을 내뱉었다. 윤, 하는 부름에 눈 앞의 소녀가 눈물 젖은 얼굴로 웃었다. 대릴,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떨렸다. 낯설고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오래도록 잊었던 스스로의 이름. 대릴, 하고 떨려오는 그 부름에 그는 단두대에 목을 올려놓는 어린 소년처럼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죽은 자들, 죽어버린 두 영혼이 닿는 부분에서 꼭 온기가 닿는 것 같았다. 가슴을 가로질러 뻥 뚫린 심장 대신 피었던 들장미가 물을 빨아들이듯 잊었던 기억들을 먹어 치워 띄우는 붉은 빛이 시선 아래를 스쳤다.
"혹자는 나를 어리석었다고 해요. 또 다른 사람은 내게 요령이 없다고 했죠."
부드러운 턱 끝으로 방울방울 흐린 달빛이 맺혔다. 천천히, 만들어진 성녀이자 오랜 시간 그를 기다렸던 그의 어린 소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단어 하나와 하나를 꼭꼭 눌러 혀 끝으로 꽃물을 들였다. 그는 입 안으로 온통 맴도는 이름을 헛된 숨결과 함께 삼키며 진주 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입술로 소녀가 속삭였다. 하지만요, 하지만... 먹먹하게 잠기는 목소리의 끝에서 물 내음이 물씬했다. 하지만, 대릴. 낯선 이름이 다시 한 번 허공으로 뒤섞였다.
"나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나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물 찬 꽃송이가 피어나듯 피어나는 어린 얼굴 위로 장례의 베일을 드리울 때도, 단 한 순간의 안식도 허락하지 않는 거친 모직 상복을 걸치고 잔인한 아버지의 눈을 피해 그림자로 숨어들 때도. 내게 주어진 화려한 성의 생활을 뒤로하고 먼지 구덩이의 골목으로 숨어들어 당신을 떠올리게 하는 어린 빈자들의 손을 잡고 문드러진 병자들의 이마에 입을 맞추는 그 모든 순간 순간에도. 아비의 앞에 가장 비천한 자리의 사람처럼 끌려 가 원하지 않은 혼인을 강요 받고 그것을 거부한 죄로 차꼬를 찬 맨발과 족쇄를 두른 손으로 뜨겁게 달궈진 자갈밭을 걸어가던 그 때도. 그리하여 결국 십자가에 매달려 숨을 거두는 그 순간마저도. 나는 당신을 사랑함에 그 어떠한 후회도 없었고 나의 인생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어요. 속삭이는 목소리에 입 안이 뻑뻑하게 말라붙었다. 다정한 눈은 단호했고, 사랑스러운 얼굴은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누더기 천처럼 정처 없이 무언가를 찾아 헤맸던 그가 애타게 원하던 것, 원한다는 것을 모를 때도 원하던 안식과 애정이 그 안에 있었다. 그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유일하게 허락되었던 안식처.
작은 발이 한 걸음, 두 걸음, 그에게서 물러났다. 그는 그녀가 물러난 만큼 한 걸음, 두 걸음,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다가섰다. 단 하나의 발자국을 남겨두고 윤은 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검은 상복의 소매가 흘러내려 희게 반짝이는 팔이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드러났다. 그녀가 속삭였다. 봐요. 그는 저도 모르게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곱 선제후의 딸도, 문벌 귀족의 아가씨도 아니에요."
빈자들을 위해 희생한 성녀도, 폭정을 휘두르던 제멋대로의 아버지의 손에 죽은 딸도 아닌. 그녀는, 그저.
"나는 그냥... 윤이에요."
"너는..."
"그저, 당신을 사랑한..."
...당신을 사랑한, 윤. 목소리 끝에 눈물 방울이 똑, 똑, 하고 고였다. 그는 목말라 죽어가는 사람처럼 발을 내디뎌 품 안으로 안고 안아도 한없이 공간을 남기는 작은 몸을 끌어안았다. 아주 오랜 세월을 지나 닿은 그의 어린 소녀에게서는 여전히 봄의 단 내음이 풍기고 딱 떨어지는 눈물만큼의 체온이 돌았다. 작은 손이 그의 등을 가득 끌어안았다. 목덜미 안 쪽으로 온통 뭉그러지는 가는 머리카락과 온기 어린 숨소리가 물결처럼 고였다. 비루먹고 너덜거리는 영혼이 되어서도 돌아가고 싶었던 곳, 어리석다면 어리석을 사내애의 약속을 온전하게 믿어 온 생을 그 곳에 걸었던 사랑. 복사꽃을 닮은 온기를 가득 품은 어린 소녀를 품에 안고, 충동의 이름을 가진 채 세상을 떠돌던 소년은 고요하게 눈을 감았다.
6.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이다.
마지막 문장을 곱씹으며 윤은 조심스럽게 책을 덮었다. 아주 오래된 책이었다. 페이지마다 누렇게 들뜨고 슬금슬금 좀 먹은 부분이 보여 조금이라도 잘못 손을 댔다간 책 날개에 붙은 풀까지 모조리 말라붙어 한 장 한 장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유난하게 두꺼운 표지와 그 위에 울퉁불퉁하게 튀어나온 금속 요철들이 손가락 끝에 툭툭 걸렸다. 기묘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었다. 풋사랑으로 시작되었던 운명에 대한 이야기. 달빛이 쏟아지던 창가에서 만난 소년을 죽음 너머까지 사랑하여 언젠가 저를 찾아올 것을 믿고 기다리던 소녀와, 돌아오겠노라 너를 찾겠노라 약속한 것을 제 자신을 잊어버린 그 시간 속에서도 기억하여 어둠 속에서 사물의 윤곽을 그리듯 소녀에게 돌아 온 소년의 이야기. 해가 잘 들도록 남향으로 창이 난 도서관 안으로 길게 햇살이 들어왔다. 누가 쓴 책일까? 아무리 책 표지 안 쪽을 들여다 보아도 책을 쓴 작가의 이름은커녕 출판사의 이름도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해볼 만한 가설은 자비 출판에 구전 문학으로 내려오던 것을 책으로 엮었다는 이야기인데, 제법 낯선 이야기라 어디의 민담을 엮어낸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책이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앉은 자리 바로 옆에 책을 내려놓고 표지를 톡톡 손가락 끝으로 두드렸다.
"...책은 다 읽었냐?"
"앗, 아저씨!"
문으로 쑥 들어온 상체에 그녀는 앉았던 곳에서 퍼드득 몸을 일으켰다. 날개모양의 큼직한 자수가 수놓아진 검은 가죽 자켓이 햇살 아래에서 기름칠한 빛깔로 번들거렸다. 트레이드 마크처럼 가지고 다니는 석궁은 방 안에 두고 왔는지 빈 등인 채였다.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불만스러운 듯 보이는 얼굴을 한 나이 든 연인을 보며 목 안으로 큭큭 웃고는 넓게 팔을 벌려 그의 빈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코 끝이 뭉개지는 살갗에서는 허리가 꺾인 풀의 냄새와 희미한 모래의 냄새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철창의 주변이라도 보고 온 모양이었다. 사람이 늘어나다 보니 철조망 안으로 달라붙는 워커들의 수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였으니까.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대릴은 그녀의 이마에 양껏 콧등을 누르고 그녀의 콧등으로 미끄러지듯 입술을 내렸다. 숨소리에서는 옅은 바람의 향기가 풍겼다.
"그래서, 뭘 보고 있었길래 아까도 대답을 안 한 건데, 어?"
"으아, 말 걸었었어요?"
"대답이나 해, 꼬맹아. 뭘 보고 있었는데?"
딱딱하게 인이 박힌 손 끝이 턱을 부드럽게 눌렀다. 윤은 살그머니 벌어지는 입술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들며 흘끗 등 뒤를 바라보았다. 먼지 낀 양장 표지와 그 위로 요철을 그리는 금속 장식들이 햇빛 아래서 온통 백금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물끄러미 그 표지를 바라보던 윤은 나직하게 웃었다. 툭, 하고 기댄 품에서 두근두근 심장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냥, 그냥....
"그냥, 아주 오래 된 이야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