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에 스치는 바람이 차갑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죽을 만큼 춥다. 차가운 바람이 볼에 스치는 것이 마치 칼로 스치는듯했다.
그렇지만 내 앞에 놓인 광경은 그 추움마저도 삼킬법한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한 발짝만 내딛으면, 이 난간을 잡고 있는 손을 놓으면 내 몸은 저 시멘트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날것이 뻔했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아니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후련한 감정이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역시 죽을 순간이 되니 생전 안하던 생각까지 하고 있다.
'그래, 난 태어날 때부터 단추가 잘못 맞춰졌어.
엄마는 일본인, 아빠는 아일랜드인.
그 빌어먹을 '아빠' 라는 양반은 나에게 이 이름만을 남긴 체 어느 날 홀연히 자기나라로 떠나버렸다.
당시 갓 난 아이였던 '나'와 엄마만을 내버려두고.
그리고 지어주려면 좀 정상적인 이름을 지어줄 것이지, 굳이 고른 그 이름은 자기나라에서 유명한 전설 속 무려 대 영웅의 이름이란다.
안 그래도 이 머리색과 눈 색 때문에 많이 불편했는데 이름까지 한술 더 뜨고 앉아있다.
그리고...... 또....... 아 맞아. 우리 엄마.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난다, 웃는 얼굴은 더더욱.
그야 그럴게 그 사람 내 앞에서는 거의 울거나 화내거나 무표정. 자주 맞기도 했구나.
내 눈과 머리색이 나를 버리고 간 아빠를 쏙 빼닮았다나.
뭐, 나라도 그러겠지만.... 이해합니다, 이해해요.
그리고 결국 그 엄마도 내 앞에서 목을 메 고 떠나가 버렸다.
그 뒤로 할머니 댁에 맡겨졌지만..... 나 때문에 딸이 죽었는데 좋을 리가.'
슬슬 손이 시리다 못해 아파오기 시작했고 볼도 감각이 안 느껴지기 시작했지만 생각을 멈출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것은 음악 이였다.
처음은 할망구가 아는 사람에게서 얻어온 (사실은 버려진 거 주워온) 낡은 오르간.
음정도 삐뚤삐뚤 심지어 안 나오는 것들도 있었지만 당시 나에겐 그것만이 오로지 전부였다.
그 뒤로는 뭐 알다시피 개 같았네.
중학교 때는 서양인 아빠를 닮아서 또래들보다 몸집이 월등히 커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내 머리색이나 눈 색으로 지나치게 받는 관심이 배로 늘었다.
물론 그걸 가지고 시비 털어오는 새끼들은 다 족쳐버렸지만.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조그마한 사기를 칠수 있었다.
해봤자 나이를 속이고 아르바이트 했던 거였지만.
그렇게 산 나의 첫 기타.
성인이 된 지금까지 쭉 저것만 쓰고 있다.
이렇게 보니 정말 어릴 때부터 음악에만 매달려왔구나.
그래, 난 그냥 그저 음악을 계속 하고 싶었을 뿐 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바친 음악이었건만 결국 그 뮤즈라는 양반은 한번 도 나를 이끌어주기는커녕 머리털조차 본적이 없다.
평생을 바친 대가가 이거라니.
결국 처음부터 끝까지 너덜너덜 엉망진창인 인생이잖아.
'이건 뭐... 희극소재로도 못쓰겠네.....'
여기까지 생각이 들자 입가에서는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천천히 손에 힘을 빼려던 그 순간.
"안녕, 잘생긴 오빠. 죽는 것도 좋지만 우선 내이야기부터 들어 보는 건 어때?"
처음 들어보는 여자 목소리.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더니 ,그곳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인영이 하나 서있다.
목소리에서 여자라는 건 확실했지만 그림자 속에 있어 자세한 모습이 안 보인다.
"너 뭐야."
경계심에 목소리가 굳어졌다.
"나에 대한 걸 듣기 전에 위험하니까 우선 이쪽으로 오는 건 어때?"
그 그림자의 목소리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그러면서도 거부 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천천히 발을 난간 안으로 옮기고 있었다.
내 발 모두 안전하게 땅에 닿는걸 보자 안도했다는 듯 한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걱정이라도 해줬다는 걸까.
슬슬 죽겠다는 생각보다는 저 사람이 어떤 말을 하려는지가 조금씩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인영은 천천히 그림자에서부터 천천히 움직이기 시ㅈㅏㄱ..... 우왓, 검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 엉덩이까지 내려와 있는 머리카락조차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까지 쓰고 가지가지 하네. 진짜'
그 인영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아무리 봐도 사기꾼, 아니면 사이비 같은 모습.
'괜히 왔나'.....
라고 고민하던 찰라 하얀 손이 검은색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겼다..
그 안에서 나온 선명한 붉은색의 눈동자.
나도 붉지만 저쪽은 마치 루비를 눈에 박아 넣은 듯 했다.
그 눈동자가 나와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눈동자에 매료된 것 마냥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는 순간 그 '여자'가 입을 열었다.
"우선 인사부터 할게. 난 '프로듀서'고 너의 음악을 꾸준히 들어왔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너의 음악이 마음에 들어. 혹시 나에게 프로듀스 받아 볼 생각 있어?'
이 사람이 지금 뭘 말하는가, 누군가 뒤통수를 세게 때린 것 마냥 머릿속이 멍멍하다.
'프로듀서? 그럼 데뷔? 아니 잠깐만....믿어도 되는 거야?'
순식간에 밀려오는 여러 가지 의문들과 의심으로 머리 속이 복잡해 아무 말도 못하자 '프로듀서'가 다시 한번 더 입을 열었다.
"그래....확실히 나는 지금 어느 프로덕션에 소속 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나를 증명할 방법은 없어.
그래도 하나만은 약속할게.
너의 음악을 확실히 이 세상에 알리게 해줄 수 있어."
그런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평소라면 믿지도 않았을 그 이야기가 희한하게 귓가에 맴돈다. 그 붉은 눈동자에 담긴 확신이 나를 이끌었다.
한번.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희망을 가져보고 싶어졌다.
"...할게"
"응?"
"한다고"
슬쩍 쳐다본 프로듀서의 얼굴에 천천히 얇은 호선이 그려진다.
"그럼 통성명부터 할까? 나야 너의 이름을 알지만 그래도 알려줄래? 계약기념으로."
".......쿠 훌린. 쿠 훌린이야..."
"그래, '쿠 훌린' 앞으로 잘 부탁해."
"당신 이름은?"
"나? 나는 그냥 프로듀서로 만족...."
"아니, 나만 알려주는 건 치사하잖아. 알려줘, 이름"
그 질문에 프로듀서는 당황 한듯 잠시 동안 아무런 대답이 안하더니 얼마 뒤 조용히 말했다.
"............호레이샤. 호레이샤라고해."
호레이샤.... 얇은 입술에서 나온 기묘한 그 울림은 마치 나를 묶어버리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 번 더 운명이라는 바다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그 뒤로 일단 그 프로듀서는 사기꾼은 아닌지 빠른 속도로 준비가 이루어져갔다.
새로운 밴드멤버, 처음 배정받는 매니저.
멤버들은은 시끄러웠고 매니저는 귀찮았다.
하지만 모든 것 이 새로웠다. 처음으로 내 음악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생겼다.
즐거웠다. 매일매일 집에 돌아오면 지쳐서 쓰러져 자는 게 일상이 되 버렸지만 음악을 처음 시작할 때처럼 매일매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쏙독새의 별'
프로듀서에게서 받은 내 데뷔곡의 이름이었다.
마치 내가 쏙독새 같다며 프로듀서가 붙여준 이름이지만 정말 네이밍 센스가 구려서 조금 웃고 말았다.
'살아있으면 불타올라라.'
몇 개월 전 까지 만해도 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조금씩 이게 어떤 느낌일지 알 것 만 같았다.
내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마다 어두운 관중석에 물든 푸른 사일론의 빛. 조명은 뜨거울 정도로 눈부셔 관객석이 더 어둡게만 보였다. 그 덕에 그것이 흔들릴 때마다 마치 은하수를 보는거 같았다.
정말로 아름다운 그 광경에 노래를 하면서도 당신의 얼굴이 생각났다. 당신도 이 광경을 보면 좋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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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가 끝나고 오랜만에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프로듀서는 저 앞에 나는 열 발자국 뒤 에.
기분이 좋은 건지 콧노래로 내 노래를 흥얼 거리고있다.
그녀와 만난 지 곧 있음 1년이 다되어간다.
그간 얼마나 많은 변화가 나에게 찾아왔던가.
그때 그 제안을 거절했다면 난.......
시작은 그 눈동자 였다. 붉은색의 눈동자.
마치 빛나는 듯 한 선명한 그 색은 처음 본 순간 내 심장에 박혀버렸다.
그 눈동자가 나를 볼 때 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조용히 깊은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거리는 고요하기 그지없어 프로듀서의 구두 소리와 내 발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도 이렇게 추웠는데.
주머니 속에 넣은 손을 꼼지락 거렸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릴까 겁난다.
긴장에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 난 뒤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서 한마디를 내뱉었다.
".......프로듀서..."
고개가 돌아가고 그 붉은 눈이 나를 본다. 분명 얼굴은 시뻘개져서 보기 흉할 게 뻔했다. 처음으로 어둠에게 감사를 보냈다.
그리고
"좋아합니다, 사귀어주세요."
내뱉듯이 뱉은 말, 그녀의 눈이 커진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친다,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