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유혈주의

*사망주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시선은 한 여성에게로 향해있었다.

몸 전체에 붉은색을 두른 한 여성에게로. 여성이라기엔 어리지만, 소녀라기엔 성숙한 그런 여성은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 거리를 거녔다. 붉은색의 의상, 립스틱, 구두, 들고 있는 장미까지. 그녀가 미인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 붉은색이 눈에 띄지 않았을까.

그런 그녀에겐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붉은색을 좋아하는 붉은색에 맞춰 웃으면서 맞이하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내일이면 그와의 데이트. 너무나 신나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리듬이 느껴지던 걸음은 행복해 보이는 남녀의 모습에서 모든 것이 멈춰버리게 되었다.

 

 

 

“같아졌네, 우리. 아아. 나는 행복해. 오이카와씨.”

 

 

붉음. 그 자체인 그녀, 마츠자카 나츠미는 웃었다. 꽃을 닮은 분홍, 구름을 닮은 하양,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하늘이 섞인 머리카락마저 점점 붉은색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만의 상상에 불과했다.

 

그녀는 많은 남자의 사랑을 받았다. 사랑스러운 외모에 인생을 연기하는 얌전함은 처음 보는 남자에게마저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 사랑들은 결코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닌 그저 저만의 작은 자존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일 뿐. 내가 이런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있다는 그 작고, 하찮은 자존심.

자신에게 와달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제 숨통을 조여오는 말을 들으면서도 남자라는 건 믿지 않겠다고 해놓고 그날의 달이 그를 미치게 한 걸까 아니면 별이 나를 미치게 한 걸까.

 

처음 보았던, 어느 파티장에서 홀로 쉬고 있던 나에게 다가온 당신은 다른 남자들과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 한숨 쉬듯 내뱉은 한마디에 웃으면서 말해줬지.

 

“아름다운 밤하늘이네요.”

“네가 더 아름다운걸.”

 

그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연인들이었을 것이다.

우연을 가장한 나츠미의 노력으로 함께 별을 보는 일이 많아지면서 되풀이되는 상황은 그에게는 아주 사소한 것이었지만 그것을 영원, 또는 불확실한 자신만의 운명이라고 믿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거나 울거나, 때로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랑을 하거나 작은 오해에 삐치기도 하고, 그런 감정에 제멋대로 생각을 더 하기도 했다. 제 생각만이 섞인 감정은 상대를 향해 내뱉은 순간 몇 번의 거절과 함께 이어지는 고백에 응하는 순간 모든 것이 빛나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보이는 색은 나츠미와 맞춘 것처럼 붉은색. 나츠미가 가장 좋아하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색이었다. 이것으로 우린 하나가 되었어.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어때, 오이카와씨. 오늘의 나도 빛나고 있어?”

 

 

이 사람과는 영원을 함께해도 좋아.

작은 실수라도 감싸줄 거고 함께 고쳐나갈 거야.

이런 작은 일상이 찰나의 환상일지도 몰라.

그래도 당신과 함께라면 뭐든지 행복으로, 사랑으로 빛이 날 거야.

그런 집착적인 사랑은, 사랑받기만을 원하던 큰마음은 사소한 것에, 우연이라는 것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게 된다.

 

나츠미는 떠올렸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과 그 옆에선 함께 웃으며 걸어가는 한 남녀를.

우연이라고.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나츠미의 마음속에선 붉은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이것은 사랑. 그는 나만을 사랑해야 했고 그것은 내 고백을 받아줬던 그가 해야 했던 나와의 약속이었다.

약속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서 자신과 같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하는 오이카와를 보며 나츠미는 다가갔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는지 중얼거렸지만, 붉은색을 토해내는 그의 목소리는 나츠미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어째서냐고?”

 

 

나츠미는 어느 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약속을 어긴 건 오이카와씨가 먼저였어.”

 

 

나츠미의 말이 이어지면서 오이카와는 붉은색을 뱉어냈다. 하얀셔츠는 점점 붉은색으로 물들어갔다.

 

 

“나랑 같은 붉은색이네. 오이카와씨.”

 

 

오이카와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인지 하얀 셔츠가 붉어질 때마다 만족해하며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손이 닿은 곳은 점점 붉은색으로. 오이카와 손이 그녀의 손을 잡아왔다.

순간적으로 광기가 어린 눈이 그를 향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두 손이 점점 붉어져 가지만 그것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녀의 손에, 반짝이는 별을 얹어주었다.

 

제 손에서 빛나는, 자신이 동경하던 별을……. 나츠미는 눈을 떴다.

 

 

“이것 때문에 누나랑… 마츠자카한테 딱 맞아서… 다행이다.”

 

 

안돼.

제 뺨을 어루만지기 위해 다가온 손에 힘이 빠지자 나츠미는 제 손으로 오이카와의 손을 잡아 제 뺨을 어루만지게 했다.

 

 

“…미안.”

 

 

마지막을 알린 미소는 오이카와의 숨이 멎음과 동시에 그가 입고 있던 셔츠는 붉은색을 지나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안돼. 나츠미는 오이카와를 품에 안았다. 말도 안 돼. 내가……. 나츠미가 오이카와를 꽉 끌어안을수록 셔츠에 묻어난 피가 나츠미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붉게 적셔갈 뿐이었다.

 

자신만 사랑하는 줄 알았고 자신만을 사랑해주던 사랑을, 질투에 사로잡혀 저 스스로 떠나보낸 슬픔에 나츠미는 어느샌가 제 옆 서 있는 남자가 자신에게 내민 약속을 받았다.

영원히 함께하자. 너를 사랑해.

이 하늘 아래에서

너와 함께.

나는 네가 정말 좋아.

많은 추억을 떠올리는 단어가 머릿속을 괴롭혔다. 괴롭다. 괴롭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나츠미는 홀로 방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눈앞에 있는 검게 되어버린, 자신을 사랑해주던 그가 있었다.

눈물이 한 두 방울, 바닥을 적셨다. 손바닥과 만난 눈물은 붉은색이 섞여 바닥을 붉게 적셨다.

다른 손에서 들리는 작은 달그락 소리. 이번엔 네가 어겼어. 라며 자신을 비웃는듯한

약속이란 이름의 총은――

나츠미의 손에 의해 그녀의 품속으로 향했다.

 

눈앞에서 들리는 총성.

마지막으로라도……. 오이카와에게로 향하던 붉어진 손은 그에게 닿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이 상황을 남자는 붉은 꽃잎을 그리며 흩어진 것을 보며 힘없이 바닥에 떨어진 총을 챙기고 난 뒤 그야말로 붉은색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붉어진 입술을 립스틱 바른 것 마냥 남겨둔 체 남자는 나츠미의 손과 오이카와의 손을 겹쳐 잡아주고는 사라졌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