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팔에 새겨진 문신은 빛나는 일이 없었다. 아이는 문신을 내려다보았다. 문신은 곧 힘의 증거였다. 이 마을에 태어난 이에게 빛나지 않는 뇌신의 후예의 표식은 곧 위계질서에서의 도태와 이어진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든 이 표식은 존재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 마을에서 무술로는 누구도 이길 자가 없음에도 예외는 되지 않았다. 뇌신의 힘을 가진 강한 전사를 원하는 마을에선 그를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아이에게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나 소중한 이의 옆자리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은 고통스러웠다. 오른팔에 있는 뇌신의 문신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창가로 내리는 달빛에 오른팔을 비췄다. 뇌신의 문신은 그제야 조금 빛을 내는 것 같았다. 달빛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닮았다. 잔잔하면서도 절대로 빛을 잃는 법이 없다. 아이는 미나를 떠올리고 살짝 웃었다.
미나는 이제 그와 같은 열여섯살이다. 촌장의 딸이라는 입장에 매일같이 시달린다. 그와 함께 대련을 하면서도 그녀의 입에선 불평불만이 끊이질 않았다. '아버지가 또 마을의 청년들 중에 신랑감이 될 만한 자를 고르라며 연회를 여셨다'느니 '변변찮은 남자들이 되도 않는 신의 힘만 믿고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다.'느니 하면서 입이 일자는 튀어나오곤 했다. 언젠가 한 번 촌장이 마을 청년들을 모두 모아놓고 그녀에게 선택권을 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박차고 달아났다. 아이와 무술 실력으로 호각을 이루면서 뇌신의 힘마저 가진 그녀를 잡을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고 결국 그 날도 아이가 있는 대련장에 와서 하소연을 잔뜩 늘어놓았다. 볼이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채 투덜거리던 모습이 떠올라서 아이는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때, 집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제법 늦은 시각이어서 마을 사람들 모두 자고 있을 터인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을 열어보니 미나가 웃으며 서있었다.
"무슨 일이야?"
"늦은 시간에 미안해, 아이."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보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안색이 좋지 않아.“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데?”
“미나는 거짓말을 하면 얼굴에 다 드러나.”
“정말?!”
“응. 시선이 밑으로 향하고 입술을 조금 앞으로 내밀어.”
“전혀 몰랐는데.”
오른손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자세히 보면 눈밑으로는 검은 음영이 져있을 정도였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가 대련 상대가 되어주겠느냐고 물었다.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몸 상태가 안 좋은 거라면 쉬는 기 좋다고 생각해."
"아니야, 그냥 기분이 안 좋은 것뿐이야.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무슨 꿈을 꿨는데?"
"사신을 따르는 자들이 이 마을에 쳐들어오는 꿈."
"사도들이?"
"응. 아무튼 대련, 같이 해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집에서 검을 들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대련장을 사용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어서 뇌신의 신전이 있는 숲 속에서 하기로 했다.
검을 밑에서 위로 올려치면 검이 막아섰다. 미나의 검은 그렇게 묵직한 것은 아니었지만 날쌔었다. 대련은 다섯 번 정도 이어졌다. 단련되어 있는 몸이라고는 하지만 정신이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선 평소보다도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미나의 검 사이에서 틈을 보다가 얼른 파고 들어서 목에 검을 겨누었다. 미나의 검도 어느새 그의 배에 근접해 있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아아, 난 여기 누워있을란다~"
"그러다가 또 촌장님께 혼나게 될 거야."
"옷이 더러워지든 말든 난 지금 쉬는 게 더 중요하다고!"
검을 들지 않은 왼팔을 허공에 휘두르며 그녀가 볼을 부풀렸다. 검을 검집에 다시 넣고 그 옆에 앉았다. 미나가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꿈 속에서 다들 죽었어."
"사도들에게?"
"응. 뇌신의 힘을 가져갔다고 자랑하던 멍청이들이 사도들 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더라. 너무 순식간이어서 처음엔 눈을 의심했어. 그래도 그 멍청이들, 한가락 하긴 하잖아. 물론 아이나 내 발 끝에도 못미치지만."
"응."
"다 죽고 결국엔 아이까지 죽으니까 너무 무서웠어."
"미나."
"응?"
"쓸데 없는 걱정이야."
"그치만!"
"내가 사도들에게 죽을 사람으로 보여?"
미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이는 웃었다.
"잘 알고 있잖아."
"그래도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걸. 그 놈들은 사신의 힘을 받고 생명을 죽이고 세상을 멸망시키는 데에 특화되어 있잖아."
"뇌신의 힘이 있을 경우 그런 힘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는 건 나도 알아.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뇌신의 힘에 집착하는 거고."
"그럼 더더욱 아이에게 불리한 상황인 거잖아."
"원래라면 승률이 이렇게 낮은 전투에 참가하는 일은 없겠지만, 미나가 있다면 얘기는 달라지지."
미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만 가득한 눈이 그를 보고 있었다.
"난 충분히 나 자신을 지킬 수 있어. 그럴 만한 힘도 있고."
"알아. 그러니까 너와 같이 네가 사랑하는 이 마을을 지키고 싶어. 너에게 소중한 건 내게도 소중하니까."
미나가 대답 대신 그를 끌어안았다. 아이도 마주 안았다. 미나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난 아이를 선택할 거야."
"응."
"아이와 함께 싸울 거야."
눈물이 그의 어깨를 적셨다. 그의 손이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천천히 다독이는 상냥한 손은 뇌신의 힘보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