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데기는 언젠가 나비가 됨을 알아 도망가지 않도록 날개를 뽑는다.
이것이 몇 번째 죽음이던가. 음울한 표정의 데스페라도가 축 늘어진 몸을 안아 올렸다. 와인 빛깔의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검붉고, 달빛을 받아 창백한 빛을 뽐내는 목은 가늘기 그지없다. 자신도 모르게 슬쩍, 그 목을 한손으로 쥐어본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의 목을 감싸고 있는 제 손이, 문득 너무나도 검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제까지 저지른 살인이 제 몸에 눌어붙어, 씻을 수도 없게 착색된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겠지. 입가에 걸리는 미소가 썼다.
지겹도록 보아도 도망치는 그녀의 모습은 질리지 않는다. 낡은 저택의 복도에 휘날리는 드레스, 밤보다 검은 머리카락, 쫒는 보람이 있는 아름다운 사냥감.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막다른 구석으로 몰아넣고 총을 꺼낸다. 움직이지 않으면 더 이상 떠나지 못하니까. 영원히 제 곁에 두기 위해서.
어째서? 그녀는 언제나 그렇게 묻는다. 왜 자신을 죽이는 거냐고, 왜 이렇게 된 거냐고 자세히 묻지 않고 그저 저 한 마디만을 내뱉는다. 무서워서 말이 짧아진 거라 가정하기엔 목소리가 지나치게 침착하다. 애초에 그녀는 겁을 먹는 법이 없이 늘 여유로웠으니, 공포에 질렸을 리가 없지. 오히려 데스페라도는 그렇게 질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자신을 죽이려는 연인에게 이유를 물을 여유가 있다니. 과연 제가 사랑하는 여인이다. 그는 루엔의 그런 점이 좋았다.
“사랑하니까”
그 외에 달리 이유는 없다. 방아쇠를 당기면, 짧고 안타까운 비명과 함께 그녀가 쓰러진다. 처음에는 조금 망설인 것 같기도 한데, 이제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도 없다. 아직 따뜻한 그녀의 시체를 안고 있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은 모두 사라져버리곤 하니까. 루엔. 루엔. 자장가라도 부르듯 달콤하게 속삭이는 그는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악몽을 끝내러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계속해서 죽여야 하는 이 악몽, 죽이지 않으면, 새벽이 오면 그녀는 떠나가고 만다. 그러니까 그는 몇 번이고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비록 끝은 이렇게 될지 몰라도, 이 종착점이 오기 전까지 그녀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미안해”
형식적인 사과. 피가 흘러나오는 몸을 안아 들고 밖으로 뛰어나가는 그의 뒤로 핏자국들이 따라붙는다. 복도에서 계단, 계단에서 출입구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던 핏자국은 정원에 도착할 때쯤엔 붉은 선이 되어 있었다. 어차피 죽은 몸이라지만, 많이도 흘러나온다. 데스페라도는 미리 준비해 둔 그녀의 관으로 다가갔다.
어슴푸레한 달빛으로 장식된 정원의 구석. 얕은 구덩이 안에 놓인 관은 그녀의 머리색과 똑같은 색으로 만들어져있다. 오늘 아침 막 꺾어 싱싱한 꽃들은 아직 주인도 들어가지 않은 관 안에서 향기를 내뿜고 있고, 관을 묻어줄 녹슨 삽은 저 혼자 달빛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구릿빛으로 침묵하고, 자신은, 그녀는,
‘얼른 서둘러야 해’
누군가가 자신을 부추기고 있다. 형체도 보이지 않는, 어린 소년의 목소리를 가진 누군가가 자꾸만 제게 마무리를 지어라 독촉한다. ‘얼른 서두르지 않으면, 새벽이 오고 말아’ 그녀가 없는 새벽은 상상하고 싶지 않다. 능숙하게 루엔을 관 속에 눕힌 그는 이 악몽이 시작하기 전 그녀와 있었던 일들을 회상해보았다.
‘괜찮아, 나는 너밖에 없어’
희미한 기억은 수면에 비치는 달처럼 아른거린다. 거짓말인 걸 알고 있지만 기분 좋은 약속. ‘네가 원한다면 뭐든 해 줄게’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두 사람. 자신에게 맹세하는 그녀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리지만, 그건 자신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벌써 그렇게 옛날 일이 되었나. 관 뚜껑을 닫으려던 그는 꽃들을 붉게 물들이는 몸뚱이를 바라보다 손을 뻗었다, 매번 근사한 장례도 치러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겠지. 제 연인이니까. 그녀는 아니지만 제겐 그녀밖에 없으니까.
데스페라도는 관 안에 깔려있는 꽃 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을 골라 그 품에 안겨주었다. ‘고마워’ 귓가의 환청이 너무나 선명해 기분 나쁘다. 관 뚜껑을 닫고 삽을 든 그는 누가 보고 있을 리도 없는데 서둘러서 흙을 덮었다.
서툰 것도 몇 번이고 반복하면 익숙해지는 법. 처음엔 삽질이 서툴러 쩔쩔했던 그였지만 이젠 순식간에 관을 파묻어버리고 나서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게 되었다. 남은 것은 돌아가서 잠들면 그만이다. 악몽은 자신을 다시 오늘 오후로 데려가 줄 테고, 눈을 뜨면 제가 또 죽을 운명인지도 모르는 그녀가 웃으며 물을 것이다. ‘늦잠꾸러기네, 잘 잤어?’ 라고. ‘내 꿈은 꿨어?’ 라고.
“후후후후”
관이 묻혀있는 방향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의, 루엔의 웃음소리다. 등골이 서늘해지지만, 딱히 발걸음을 재촉하거나 하진 않는다. 환청인 걸 아는데 왜 도망치는가. 이게 몇 번째 악몽인데, 자신을 놀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한발의 총알이 부족한 리볼버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이 식은땀으로 끈적거렸다. 차라리, 죽어버리면. 자신도 죽어버리면 이 악몽은 멈추는 것인가. 더 이상 그녀를 죽이는 것으로 함께하는 날을 하루씩 늘이지 않아도 될까. 그리도 사랑하는 연인의 심장에 총알을 때려 박은 자신이다. 제 머리에 총을 못 겨눌 리가 있는가.
방으로 돌아온 그는 계속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피해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옷은 갈아입지 않아도 된다. 지금 제게 필요한 것은 죽음이거나 잠이다. 영원히 사라질 리 없는 죄의 흔적. 제 검은 손으로 귀를 막고, 숨을 고르고, 눈을 감은 그는 아직 루엔의 체취가 남아있는 옷가지를 끌어안았다.
‘잃어버린 건 없나요?’
그녀의 환청이 사라지고,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묻는다. 이 환청 또한 익숙하다. 자신을 재촉하는 목소리와는 또 다른 낮선 환청. 어린 소녀의 목소리.
글쎄, 자신은 뭘 잃어버린 걸까. 그녀? 아니면 이 악몽이라는 우리 안에서 나가는 열쇄? 그것도 아니라면, 제가 그녀를 처음 죽인 날이 언제냐는 거라던가? 그것조차 아니라면,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