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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의 어느 선선한 가을날, 뻣뻣하게 긴장해 있는 건장한 청년과 마주 보고 서서 곧 기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때, 제인은 고작 열일곱 살이었다. 차라리 한여름이었다면 이렇게 머리가 핑핑 도는 이유를 내리쬐는 뙤약볕의 탓으로 돌렸을 수도 있겠건만. 제인은 긴장하고 있었다. 그 나이의 여느 십대 여자아이들과는 조금 다르게 혼자 책이나 읽는 걸 좋아하는 은둔형 계집애에게, 운동도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으며 무엇보다 잘생긴 사내애의 데이트 신청은 익숙하지 않은 것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난생 처음이었다. 질겁해서 책을 내던지고 도망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주 잘 버텼다고 누군가 칭찬해줘도 모자랄 만큼.

 

지나다니다 몇 번 본 사람이기는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구색이나마 여자아이들 무리에 섞여 놀고는 했던 제인은 그 사내애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기도 했다. 지난주에 옆 동네 학교와 벌어졌던 축구 경기에서 그 아이가 골을 얼마나 넣었다든가, 누구와 함께 있는 걸 보니 사귀는 모양이라든가, 몇 번 얻어 들은 소문을 생각하면서, 제인은 눈앞에 서있는 소문의 주인공을, 커다란 눈매 안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푸른 눈동자나, 사내애의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나, 벌어졌다 닫히며 말을 만들어내는 조각 같은 입술과 언뜻언뜻 비치는 하얀 치아를 어지러이 눈으로 쫓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제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책장의 소리라든지 거리를 따라 조용히 불어 내려가는 바람의 소리, 아니면 멀리서 지나가는 자전거의 바퀴 소리 따위를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예의 바람 탓에 자꾸만 얼굴로 넘어오는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내애가 아까부터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던 그의 커다란 손을 충동적으로 들었다가, 문득 망설이며 눈앞의 동양인 여자애에게 눈짓으로 허락을 구한 다음, 흘러내리는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 몇 가닥을 귀 뒤 쪽으로 쓸어 넘겨줄 때까지. 제인은 그 즈음 해서야 사내애의 이름을 기억해냈을 것이다. 제임스 뷰캐넌 반즈.

 

“……그러니까, 제임스.”

“버키라고 불러.”

“그래, 버키.”

 

제인은 자신이 그를 제이미라고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제임스라는 이름은 그의 남자다운 면과 퍽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입안에서 버키와 제이미를 번갈아서 발음해 보았다. 집 앞의 카페에 가서 읽으려고 들고 나온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따위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그녀는 심지어 두 애칭을 비교해보는 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다음날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는 버키의 제안에 별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에 귀에서 귀까지 웃는 남자애의 얼굴을 보자, 더 이상 애칭은 중요치 않게 되었다. 내일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여행을 떠나자고 했어도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그럼 내일 보자.”

“……어, 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책갈피삼아 끼워둔 종잇조각은 결국 전날과 마찬가지로 36페이지에 꽂힌 채로 또 하루를 넘겼다. 이야기를 마치고 뒤를 돌아 걸어가는 버키의 뒷모습을 한참 응시하던 제인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 그나마 가장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조금 전까지의 일을 늘어놓고 꺅꺅 소리를 질러대느라고 책에 대한 것은 여전히 떠올리지 못한 탓이었다. 이 전화 한 통으로 제인 키네울프는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가끔씩 버키 반즈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곁두리 반찬쯤으로 따라 올라오는 이야깃거리가 되지만, 당시의 제인은 그런 걸 생각할 수 있을 만큼 여자 아이들의 네트워크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저 한참 시끄럽게 전화를 하다가 들떠서 저녁을 먹고, 조금은 진정된 채로 방에 돌아가 자리에 누워서 제가 지금 얼마나 사춘기 계집애처럼 굴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이 평상시 그런 또래 여자애들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했는지를 되짚어 볼 뿐이었다.

 

문득 제인은 다른 주제로 생각을 옮겼다. 버키는 언제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자신을 알게 된 것일까? 그녀는 그런대로 좋다고 자부하는 머리를 돌돌 굴려보았지만 딱히 어디선가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무 것도 짚이는 바가 없으니 아마도 이것 역시 자신은 잘 모르는 무슨 세계가 있는 것이라고 타협점을 찾는 것도 빨랐다. 그녀는 어쨌든, 생긴 것부터가 그들과 달랐으므로. 굳이 여자아이들의 파자마 파티와 쇼핑과 케이크 시식이 전부인 세계에 끼어들지 않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아직 아무도 동양인이라고 자신을 괴롭힌 전적이 없음에도 제인은 그 사실이 불편했다. 큰 눈과 오뚝한 코와 하얀 피부를 가진 저 사람들과 자신은 다른 인종이라는 그 사실 자체가. 그녀는 심리적으로 묵직한 무언가를 달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제 아무리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그런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단다, 하고 단언해 주어도 그녀의 중심에 있는 생각은 영영 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 역시 자신의 외모와 또래 아이들의 시선에 하루에도 기분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십대 소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궁금한 것을 빙빙 돌려 묻는, 소위 말하는 여자아이답게 구는 것이 잘 맞지 않는 성미이기도 했다. 하고 싶은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기보다는 교양 있는 말씨로 돌려 묻는 것이 좋다고 배웠지만 그걸 실천하는 것은 보통 어른들 앞에서 뿐이었고, 친구들과 있을 때의 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잘 참지 못했다. 이 급한 성미가 언젠가는 독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물어 볼 기회가 언제 올 줄 알고 꾹꾹 아껴가며 유도신문 따위를 하고 있는 단 말인가. 그래서 그녀는 다음날 오후 다섯 시, 학교가 끝나고 자신을 데리러 온 버키 반즈와 영양가 없는 날씨며 학교 이야기를 한참 한 다음,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에 물었다.

 

“근데 날 어떻게 알아?”

 

어떻게 보면 늦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사실상 어제 마주쳤을 때 했어야 하는 물음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제인은 버키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생각했다. 겉으로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뒤쪽 벽에 붙어있는 빨갛고 파란 영화 포스터들을 대강 눈으로 훑으며, 고민을 하거나 말을 찾을 때의 습관인지 입술을 가볍게 물고 눈썹을 가운데로 모으는 그의 얼굴을 한 차례 곁눈질로 훔쳐보기도 하면서. 이 열여덟 살짜리 다 큰 소년은 자신이 아랫입술을 윗니로 물고 있는 것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에 대한 자각은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생각도 남몰래 했다. 그리고 그가 입은 남색 셔츠와 검은 바지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도. 거기까지 생각하자, 제인은 자신이 너무 앞서 나갔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서 잡생각들을 떨쳐내려 괜한 손부채질을 두어번 했다. 버키는 머리카락을 한 번 앞뒤로 쓸더니 털어놓았다.

 

“네 문학 숙제.”

“문학 숙제?”

“좀 봤거든.”

 

그러니 요는 문학 숙제를 베끼려다가 이건 도저히 자신이 썼다고 우길 수 없는 종류의 감상문이어서 포기했으나 동시에 원래 주인에게 호기심이 생겼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잘 썼다거나 놀라울 만큼 뛰어난 감상문은 아니었다. 다만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겠거니 생각이 들었다. 버키 반즈는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지만 자리에 앉아 책을 읽기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거리를 쏘다니는 쪽을 조금 더 좋아하는 축에 속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이름의 이 여학생은 누구이며, 어떻게 자신은 생각지도 못한 감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충 휘갈긴 글씨로 공책 한 페이지 가득 적어 낼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해졌다. 제인 키네울프와 버키 반즈는 사흘 전까지만 해도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였다. 그리고 지금 오늘을 경계로 친구 이상 연인 미만이 되었다.

 

 

***

 

 

자신과 버키를 이어준 계기가 된 책은 《제인 에어》였다. 제인은 자신이 그 책을 굉장히 좋아하기를 잘했다고 느꼈다. 단순히 이름이 같아서 그랬을 뿐이지만, 좋아하기를 잘했다니 좀 이상한가? 어쨌든 그랬다. 벌써 6년이나 지난 일이다.

 

1941년 5월 23일. 늦은 봄의 이른 아침이었다. 그녀는 집 근처의 조용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쇠로 된 의자와 테이블에는 아이보리색의 천이 깔려 있고 테이블 가운데에는 가늘고 긴 유리병에 이름 모를 하얀색 꽃이 꽂혀 있는 카페였다. 제인이 이 카페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머핀이나 파이, 푸딩 같은 것들이 맛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씩 이 카페에 앉아 소설 속 귀족 가문의 외동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며 금테를 두른 하얀 찻잔 안에 든 커피를 홀짝이거나 빨간 열매―아마도 산딸기일 것 같은―가 통째로 든 파이 따위를 포크로 조각내어 집어 먹곤 했다. 그런 날이면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반 정도는 거뜬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의 (아무도 굳이 끼려 하지 않기에) 조용하고 때로는 공상 가득했던 티타임에는 최근 새로운 패턴이 하나 늘었다. 그러니 이제 두 개의 패턴이 된 셈이다. 하나는 방금 말했듯이 브루클린 공작의 딸이 된 것 같은 상상에 빠져 우아하게 퍼덕거리는 패턴이고, 다른 하나는 연한 노란색 셔츠와 갈색 바지를 차려 입은 청년이 그녀의 앞자리에 앉아 독서를 방해하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늘어놓는 패턴이었다. 그럴 때면 주문하는 커피도 두 잔이었고 곁들이는 빵도 두 접시였다. 하지만 그런 날에는 책을 거의 한 페이지도 읽지 못하고 그대로 들고 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시간을 낭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 이 얼마나 유치하고 바보 같은 만남인가. 제인은 다 알면서 웃었다.

 

그 날은 드물게도 두 패턴이 같이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날이었다. 저녁 무렵에 그 카페로 갈게. 버키는 그렇게 말했다. 그는 최근 들어서 그의 친구인 스티브를 훈련시키는 중이었다. 종목은 복싱이었다. 말이 좋아 훈련이지. 제인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했다. 버키가 YMCA 웰터 급 챔피언을 세 번이나 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였으나, 문제는 스티브 쪽이다.

 

스티브 로저스. 제인은 그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스티브는 버키의 절친한 오랜 친구였는데, 단정하게 빗어 넘긴 밝은 금발과 뾰족한 코, 녹색이 살짝 섞인 파란 눈동자가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가 하면 스티브는 체구가 작은 편이었다. 제인 자신과 키가 비슷해 보였으며, 심지어 그녀보다 훨씬 무게가 덜 나갔던 것이다. (‘훨씬’이라고 말할 만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어쨌든 스티브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예의가 발랐고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힘이 있었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않는 사람이었다. 버키는 마치 그를 타박하듯 스티브가 불량배들에게 얻어맞으면서도 오기로 버텼던 이야기며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던 이야기 따위를 했으나 진심으로 흉보는 것이 아님을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은 모두 굳이 말할 것도 없이 알고 있었다. 사실 제인은 거짓말을 조금 보태 감동까지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따가는 스티브가 함께 올지도 모르겠다고, 제인은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다. 그러면 오늘은 커피 잔 세 개가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되겠다는 생각도 했다. 몇 년이나 한 잔만 남기고 떠나던 테이블 위에 언제부턴가 두 잔을 남기게 되고, 오늘은 세 잔인가.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자신의 사교성도 아주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41년. 23살. 그녀는 이제 예전처럼 자신이 동양인이라는 사실에 지레 겁먹고 바깥 외출을 꺼리는 사춘기 계집애는 아니었다.

 

“제인, 내 사랑.”

“안녕, 제인.”

“안녕, 자기. 안녕, 스티브.”

 

그래서 제인은 정말 자신의 예상대로 버키와 스티브가 함께 나타났을 때 ‘정말 둘이 같이 왔네?’ 라고 생각했을지언정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버키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고, 스티브는 버키의 옆에 앉았다. 버키가 자신과 스티브 몫의 커피를 주문하러 간 사이 테이블에는 불편하지 않은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다홍색 노을빛이 테이블보 위에 셀로판지처럼 덮였다.

 

“버키한테 너무 화내지 마.”

“응?”

“지금부터 할 얘기 말이야.”

“무슨 얘기?”

 

스티브가 먼저 말을 꺼냈지만 소피아는 말의 맥락을 읽을 수 없었다. 지금부터 할 얘기에 대해 버키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자리로 돌아오던 버키는 제인의 의아한 얼굴을 단번에 눈치 채고 가볍게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 앉았다. 둘이 무슨 얘기 했어? 버키가 물었고, 스티브는 별 거 아니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대꾸했다. 제인은 자신이 이쯤에서 ‘별 일 아니긴. 왜 화를 내지 말라는 거야, 스티브?’ 하고 물어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웬만하면 화나고 싶지 않았다.

 

“음, 제인.”

 

그래서 그녀는 버키가 자신의 이름을 사랑스런 목소리로 불렀을 때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떠서 그의 어깨 뒤편을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오늘 아침자의 신문이 놓여 있었다. 그녀는 며칠 전 집에 배달되어 온 신문을 떠올렸다. 1면의 신문을 장식했던 2차 세계 대전의 소식. 전쟁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브루클린 구석에 놓인 저택과 카페 정도만을 오가며 사는 자신에게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 기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한 번 읽은 채 그대로 잊어버렸다. 영화관에서 영화 전에 틀어주는 광고도 그냥 그러려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 그 신문 기사가 떠오를까.

 

왜?

 

당장이라도 내뱉을 만한 대화 주제가 대여섯 개 정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치 비극의 끝자락이 이 상황에서 눈을 돌리는 것을 막는 것 같았다. 아. 어째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일까.

 

“복싱 연습.”

“……제인?”

“단순한 체력 단련이 아니었구나.”

 

스티브는 지금 이 상태로는 분명 입대 부적격 판정을 받을 테니까, 준비를 도와주려는 거였구나. 제인은 전혀 몰랐던 이야기를, 그러나 이렇게 돌아보니 당연한 사실을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버키와 스티브는 서로를 한 번 바라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제인은 밀려드는 허탈함 속에서 이상하리만치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자신을 마치 제3자가 된 것 마냥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 뉴욕에 있는 모병 담당 기관에 갈 거야.”

“……좀 더 빨리 얘기해주지.”

 

그녀는 원망스러운 어조로 이야기했으나, 미리 얘기했다고 한들 충격이 반감이 되지도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자신이 그를 막았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제인은 한 번도 그의 결정에 반기를 든 적이 없었다. 제가 하겠다는데 뭐. 주위 사람들이 혹시라도 물으면 그렇게 대답했다.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기도 했지만, 자신이 내린 결정을 따라가는 그의 모습이 멋있었기 때문에, 그런 구구절절한 이유를 댄 적은 없었다. 그 이유를 자신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으므로.

 

“내 말 좀 들어봐, 제인.”

“듣고 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돌아올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런 건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야. 제인은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참아야했다. 말을 참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어른스럽지 못하게도 울고 싶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었던 것은 스스로의 멍청함에 대한 자각이었다. 어째서 자신의 연인이 장성한 청년이라는 사실과 이 나라가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연결 짓지 못했던 것일까. 이미 주변의 친구들 중 몇몇이 제 오라비나 남동생을 군대로 보냈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인은 한 번 심호흡을 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대답을 읊었다. 인위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전부 공허하고 답답한 말 뿐이었으며 책 읽는 것이나 좋아하는 어린 여자애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현실이 목 언저리에 꽉 막혀 있는 기분이었다. 이러다 질식해 죽어버릴지도 몰라. 전쟁은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사람을 죽인다.

 

“……믿어.”

“…….”

“날 잊으면 안 돼, 제임스.”

 

제임스. 그렇지. 그의 이름의 첫 단어는 제임스였다. 제임스. 제이미. 버키. 제임스 뷰캐넌 반즈. 이전에 이 애칭을 생각했을 때는 꽤 진지했던 것 같다. 손 위로 덮이는 노을이 일렁거렸다. 테이블 위로 쑥 뻗어온 손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제인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던 고개를 들었고, 자신을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웃는 얼굴을 마주 보았다.

 

“아직 입대 허가가 난 것도 아니면서.”

“조용히 해, 스티브.”

 

스티브의 목소리가 갑작스럽게 끼어들었다. 제인은 그를 향해 눈을 흘기며 짧게 핀잔을 주었고, 버키는 둘을 바라보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다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테이블 위로 몸을 기울였다.

 

“이 옆에 교회가 있었지?”

“응. 그건 왜?”

“제인, 나랑 결혼할래?”

 

자원입대를 하겠다는 말에도 감정을 꾹 참았던 제인이었으나 이 말에는 분명 놀랐으리라. 장난스러운 어조로, 그러나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남자친구가 어디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닌지 열이라도 재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 오랜 친구가 갑작스럽게 하는 말이 늘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난데없는 건 또 처음이라 스티브도 제인만큼 놀랐다.

 

“뭐?”

 

제인과 스티브가 동시에 물었다. 버키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즐겁게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 사람을 채근해 반 억지로 옆의 교회까지 끌고 갔다. 어떤 이는 젊은이들의 유치한 역할 놀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랑과 신부를 제외하고는 단 한 명의 주례 겸 하객과 함께, 두 사람은 아무도 없는 예배당 안에서 조용하고 신속하게 결혼했다. 신랑은 체크무늬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고, 신부는 남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으며, 주례를 보는 키 작은 남성은 주례 경험이 없었으므로 대강 ‘신랑 제임스 뷰캐넌 반즈는…….’ ‘신부 제인 신 키네울프는……’ ‘두 사람이 부부가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하고 흉내만 낼 뿐인 결혼식이었음에도.

 

1941년 5월 23일이었다. 그 날의 하늘은 슬플 정도로 붉었고, 젊은 두 사람은 달콤한 영원을 서로에게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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