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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발의 소녀, 미에리나 카즈는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의 머리카락과 눈을 보고 마녀라며 손가락질하고 돌을 던지던 마을 아이들에게 그런 것이 어디에 있냐며 조소를 던졌고 실제로도 그것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 앞에 있는 사람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부수어버리다 못해 가루로 만들 정도로 완벽하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마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쥐어짜내어 말했다. 


" 당신이...이 숲에 사는 마녀에요? "


그 사람은 그녀의 말에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웃어보였다. 그 미소는 지독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자네의 눈에는 내가 여성으로 보이는가? ...그럴 수도 있으니까요. 의외인 그녀의 대답에 소리내어 웃은 사람은 어느샌가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이야기했다. 


" 나는 마녀가 아니라 마법사라네. 그리고 자네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겠는가? "

" ...미에리나 카즈에요. "

" 좋네. 카즈양, 나와 동반자살 해주게나 "


어딘가 부담스러운 눈빛과 확 바뀐 분위기에 순간 긴장을 했었지만 그 뒤의 말은 너무나도 허무맹랑했다. 이 사람, 사실은 마법사가 아니라 제대로 이상한 사람 아닐까. 잠깐이라도 비현실적인 존재를 믿을 뻔한 자신이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다. 


" 음... 죄송한데 사실은 제가 집에 가봐야 해서요~ "


대충 핑계를 가져다 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손목을 잡는 감촉에 카즈는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때려버렸다. 
정말 말 그대로 몸이 자동적으로 반응한 것이기에 때린 사람도 맞은 사람도 당황하여 정적이 흘렀고 길지 않은 정적을 깨뜨린건 맞은 이였다. 너무하다네! 어떻게 이 잘생긴 얼굴을 보고 때릴 생각을 하는가! 아니, 저기 그러니까 자칭 마법사씨...? 다자이 오사무라네! 게다가 자칭 마법사가 아닌 진짜 마법사이고 말이네! 그럼 다자이씨? 방금건 정말 실수인데요... 카즈는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이건 지금 어떻게 되어가는거지. 분명 이 숲에는 마녀가 있다고 해서,


" 일부러 숲까지 들어왔는데... "

"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어찌되었던간에 자네가 이 풀을 찾아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함없을걸세! "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그가 두꺼운 책을 펴들고 어떤 풀의 그림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책은 또 어디에서 나온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넘겨버리고 그림을 자세히 보니 분명 어디선가 본 적 있는 풀이었다. 아마도 약초바구니에 한 뿌리쯤은 있을터였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카즈에 다자이는 의문을 표했다. 자네는 참 특이한 인간이군. 별로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태연하다니... 아니 뭐... 죽으려고 들어온 숲인데 고작 그걸로 두려울리가 없으니까요. 그녀는 부러 뒷말을 삼켰다. 아침에 약초를 캐러간다며 핑계를 대고 금지된 숲의 깊은 곳으로 온 그녀는 정말 순전히 죽음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약초바구니에 들어있는 약초들도 아깝지 않게 쏟아부어 바닥에 늘어놓고 뒤적일 수 있었고 다자이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리가 없었다. 자, 여기요. 그녀가 태연히 내민 풀을 멍하니 보던 그는 해사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숲에 온 이유는 죽고 싶어서, 인가. 카즈는 정곡을 찌른 말에 두 눈을 끔뻑였다.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이대로 그렇다고 답하기도 껄끄러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 그렇다면 나를 도와주게! "


응? 아까의 말보다 더 뜬금없고 연결조차 되지 안는 말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다자이는 그녀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말을 이어나갔다. 


" 사실은 얼마 전부터 조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말일세. 1년 동안 내 일을 도와준다면 내가 자네를 죽음으로 이끌어주겠네! "

1년. 딱히 지금 당장의 죽음을 고집스레 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녀는 짧게 생각한 뒤 승낙의 말을 내뱉었다. 잘 생각했다네! 그는 카즈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 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었던 풀은 어느새엔가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어느 정도를 걸었을까. 분명 저 뒤에서 보았을 때에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을터인데 꽤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띤 집이 눈앞에 있었다. 만나고나서 처음으로 보는 그녀의 큰 표정변화에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카즈는 가볍게 질문하며 마치 제 집인것마냥 자연스레 문 안으로 들어섰다. 다자이는 그녀의 질문을 웃음으로 얼버무리고는 뒤를 따라 집의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마법사, 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커다란 모양의 냄비가 자리하고 있었다. 커다란 책장에는 그녀가 아까 보았던 것과 비슷한 두께의 책들이 잔뜩 있었고 그것조차 모자랐는지 탁자위에도 몇 권의 책이 쌓여있었다. 책장 옆에 있는 찬장에는 본 적 없는 가지각색의 신비한 것들이 쌓여있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풀을 냄비에 던져넣고 찬장의 앞으로 다가가 여러 통에 담긴 것들을 꺼내 역시 냄비에 부어버렸다. 가벼운 손동작으로 그가 불을 붙이는 것까지 본 그녀는 흥미로이 냄비를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냄비는 보랏빛 액체로 가득해 서서히 끓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연기도 배어나오는 듯 싶었다. 


" 이건 무엇을 만드는건가요...? "


그녀의 말에 그는 장난스레 대답했다. 적어도 그대가 아까 때린 것으로 인해 치료약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안심하게. 아까 자네가 찾은 풀은 사실 내가 세 달동안 찾고 있던 것이라 말일세. 그래서 자네의 죄책감의 도움을 조금 받았지. 이것은 내 아프지 않은 자살에 도움이 되는 약이라네. 카즈는 그의 말을 듣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사들은 영생을 사는 것 아니었어요? 아니, 그보다 당신이 죽어버리면 제 죽음은 누가... 다자이는 그녀의 말에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그야 그것은 그 때 가서 두고 볼 일이 아닌가! 그녀는 속으로 그가 지금 당장이라도 죽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죽음을 바라는 두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다섯 달이 지났다. 카즈는 그동안 그에 대한 것을 제법 많이 알아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는 가끔씩 찾아오는 주황머리의 마법사와는 사이가 무척 나빴으며 집에 찾아오는 사람과 그녀 자신을 제외하면 만나는 사람도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리고 그는 실력이 아주 좋은 마법사이며 마법사의 영생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죽음을 갈구했다고 들었다. 허나 그녀는 처음 만났던 날을 제외하고는 그의 입에서 자살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을 듣지 못했다. 다자이의 눈동자는 그녀를 향할 때마다 슬픔을 담고 있었다. 카즈는 그 슬픔에 대해 그의 집에 오는 모든 마법사들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물었으나 그들에게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그녀의 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돌아가기 일수였다. 그녀는 그 슬픔을 마주하게 될 때에는 마음이 불편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의 눈동자에서 배어나오는 짙은 슬픔과 그 슬픔에 묻힌 그리움을 보게 될 때에는 어째서인지 그녀조차 그것에 동화된 듯 심장이 아픈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로서는 빠르게 그 원인을 해결하려 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전전긍긍하며 그것을 해결하려 하는 동안 다자이는 그 나름대로의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녀와 만난 날에 분명 그 풀은 그에게 필요한 것이 맞았었으나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그에게는 그 풀 뿐만 아니라 그동안 모아왔던 그 약을 위한 모든 재료가 단번에 의미가 없어졌다. 그는 바로 그 약을 포기하고 다른 것을 만들기에 전념했다. 그 약과는 다르게 이번에 시도하는 약은 그리 어렵지도 않고 재료도 희귀한 편이 아니었지만 그는 재료를 구하고 익숙치 않은 일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에 쉬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와 과거. 그 둘 중에 하나를 붙잡아야 했지만 지금의 시간도 앞으로 일곱 달 뒤면 끝나버리는 것이었다. 허송세월로 지난 다섯 달을 날려버린 그는 과거를 붙잡기로 했다. 그리고 이 주변에서는 자주 나지 않는 재료를 얻기 위해 그가 아끼는 제자에게 연락을 취했다. 

백발의 초보 마법사인 아츠시는 지금 인생 최대의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다. 존경하는 마법사인 다자이가 웬일로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취해 갑작스레 달뿌리를 들고 오라는 말을 해 그것을 듣고 그의 집에 갔다. 여기까지만 해도 가끔 있는 일이라 딱히 당황스럽거나 특별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현재 볼 수 있을 리가 없는 이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달뿌리를 전해주고 다자이의 집에서 나오려던 그는 자신이 분명 그 차게 식은 몸을 들어옮겼던 것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에게 순식간에 붙잡혀 작은 방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녀가 몸을 돌려 그와 눈을 마주했을 때 그는 더욱 패닉상태가 되었다. 어째서... 당신이... 아츠시는 중얼거리며 머릿속으로 생길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생각해냈다. 간신히 아츠시가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은 다자이가 드디어 그 약을 완성해냈다는 것이었다.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끝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까지 해낼줄은. 아츠시가 자신의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그의 앞에 있는 사람, 카즈도 그녀 자신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리버리해보이는 표정과 자신을 보았을 때 보인 반응, 그가 중얼거린 것을 통틀어 보건대 이 자는 제가 원하는 해답을 가져다 줄 수 있을 듯 했다.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녀의 한 마디에 그가 한눈에 보일 정도로 깜짝 놀랐고 카즈는 그동안의 다른 이들과 그가 다를 것이라는 직감을 느꼈다. 물론 호락호락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 저기, 그쪽은 이름이 뭐에요? "


다시 한 번 그가 흠칫 떠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아츠시의 기억대로라면 그녀의 이름은 필히 카즈일 것이다. 그녀는 거의 모든 이에게 자신의 성을 말하지 않았었기에 그가 아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하지만 제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봐서 그가 예상하는 상황은 아닌 듯 했다. 아츠시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그녀에게 답했다. 


" 나카지마 아츠시요... "


왠지 호구조사를 당하는 듯한 기분에 아츠시는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법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채 다시 말했다. 그럼 아츠시군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녀의 평온한 말에 아츠시는 간단하게 긍정의 대답을 했다. 어떻게하면 저렇게 부르는 호칭까지도 똑같을 수 있을까. 아츠시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앞에 내어진 찻잔을 집어들었다. 그녀를 본 순간부터 그의 머릿속에는 백 년 전의 일이 생생하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지금도 변함없이 그는 햇병아리 같은 마법사이지만 그때에는 더더욱 그랬고 그 기억은 항상 정신을 갉아먹는 듯하여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피곤해지기 마련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 옛날에는 마녀와 마법사. 즉 이질적인 것들이 더욱 탄압받고 있었다. 그 때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 많았는데 그녀도 그 중에 한 명이었다. 다만 다른 이들과는 꽤나 다른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도그럴게 그녀는 자신의 연인을 대신하여 죽음을 맞이하였다. 저항조차 한 번 하지 않은 그녀를 보며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에 의해 그 자리에서 창에 찔려 죽었고 그 사체를 수습한건 아츠시였다. 그는 그녀의 차가워진 몸과 그 표정을 아직까지도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자이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처음으로 겪은 주변인의 죽음은 뇌리에 강하게 새겨져 잊을래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눈 앞에 버젓이 살아있는 이를 보았다. 그래서, 아츠시군은 이제 제게 다자이씨의 과거를 말해줄 준비가 되었나요? 그녀의 말에 그는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상황에서 자신이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이제 없었다.


***


이제 마지막 재료가 도착했으니 기억을 되찾게 하는 약은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 다자이는 마무리 작업으로 냄비에 담긴 약을 천천히 휘젓고 있었다. 반대방향으로 두 번 정도를 휘젓고 약이 완성된 순간 방 안으로 들이닥친 이가 있었다. 무슨 일인가 카즈양? 그는 꽤나 기분좋게 돌아보았고 그녀의 표정에 굳어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가. 글쎄요. 그녀의 짧은 답에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완전자살독본을 들켰나? 아니면 방을 제대로 치우지 않았었나?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보통 큰 일이 아닌 듯 했다. 


" 왜 그런 거짓말로 저를 데려온 거에요? "


다자이는 그녀의 말에 한순간 상황을 파악했다. 그녀의 공허한 듯 보이는 눈은 그 만을 온전하게 담고 있었다. 그는 그 눈에 빠져버렸기에 질문에 온전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곳에는 그와 그녀밖에 없는 둘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 자네가 나의 세상이었기 때문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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