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자는 스스로를 마술사라 소개했다.
처음 만난 날, 지난 계절의 매미 우는 소리가 여전히 선명하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열기로 피는 아지랑이 속에서 방금 막 편의점에서 사온 듯한 트럼프 카드를 쥔 여자. 우연히 나란한 길에서 마주친 보석을 닮은 붉은 눈을 빛내고 포장도 뜯지 않은 카드를 들이밀며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저기, 지나가던 마술사인데요. 할 줄 아는 마술 있으면 알려주지 않을래요?’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 연속된 비현실로 쌓은 다리 위에 자리한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튀어나온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이질적이었다. 마술사를 자칭하는 주제에 초면인 이에게 마술을 알려달라는 건 어떻게 된 사고방식인지. 길거리의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시덥잖은 장난이나 치려는 셈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만,
여자를 스치는 순간 여름의 열기를 식힐 것만 같은 바람과 같은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는, 여자의 근처에서 바람이 서늘한 열을 악기 삼아 노래하는 것만 같아서. 희미하게 스친 울림을 지나치지 못한 건 일개 드러머 나부랭이의 본능이었을까. 초여름 그 자체의 열을 닮은 체온을 붙잡고 원한다면 마술 서적이라도 구해주겠다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말로 인연의 실을 어설프게나마 엮어버린 건 나였다.
‘좋은 사람이네! 사실 나 어떤 마술이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마술사라고 자칭한 첫마디를 잊은 듯 당당한 말투에는 투명한 즐거움이 배어있었다. 비 내린 후의 꽃이 그러하듯 물기를 머금은 것마냥 고유한 색이 짙게 묻어 나오는 목소리는, 바람의 노래와 썩 잘 어울리면서도 다른 채도를 띤 채 하늘을 빈틈없이 칠했다. 여자의 눈을 마주한 이래로, 세상이 투명하게 물드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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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이름은 히마와리라고 했다. 마세 히마와리. 해바라기와 발음은 같지만 쓰는 법이 다르다고 열심히 어필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좋을 쓰는 법 따위를 눈에 익게 했다. 아니, 이름뿐만은 아닌가. 어쩌면 히마와리의 모든 것이 그러했을지도 몰랐다.
처음 스친 날 귀에 새긴 바람의 노래며 꽃을 닮은 이름, 그 어떤 비현실을 담아도 어색하지 않을 목소리. 히마와리의 곁을 꿰차는 매 순간마다 속삭이듯 연주하는 노래는 비단 여름만을 다루지 않았다. 지나간 봄의 꽃잎을 흩뜨리는 노래부터 시작해 한겨울의 새하얀 조각을 얼리는 노래, 가을의 낙엽을 으스러트리는 노래까지.
일 년의 모든 계절을 훑은 바람 소리는 날이 갈수록 그 음색을 더해갔다. 그리고 그 바람을 두른 꽃은, 어떤 계절의 차례가 돌아와도 변치 않는, 그럼에도 모든 시간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존재조차 확실치 않은 멜로디와 한 치 어색함 없이 어우러지는 목소리만큼 이질적인 건 없었으므로. 처음 만나 인연을 엮은 그 순간부터 그녀가 가진 모든 걸 온몸에 새겨가는 중이었던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테는 마법이라는 걸 믿어?”
그렇기에 네가 간헐적으로 묻는 질문에 매번 믿지 않는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라는 비현실을 인정하고 나면, 그대로 존재를 받아들이고 나면, 형체를 실감하고 나면.
너를 품은 내게 어떤 미래가 들이닥칠지 알 수 없었으므로. 비현실이라는 세 음절이 퍽 잘 어울리는 너를 끌어안은 앞날은 너머가 비치지 않는 어둑한 절망과 같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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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종종 이곳에 오기 전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폐쇄적인 마을이었다며 가볍게 흘리는 이야기에는 항상 등장하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금발에 벽안을 가진, 유쾌한 성격의 이라고 했던가. 네 이야기는 그 남자와의 이런저런 일을 추억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맴돌았다. 진척도 없고, 그 전의 이야기도 그 후의 이야기도 없으며, 마냥 작별 인사를 나눴다는 그 순간에 책갈피를 꽂아 몇 번이고 다시 펴보듯 멈춰있었다.
이름은 레이라고 했던가. 네가 마을을 나와 이곳에 오는 걸 끝까지 걱정했다고 했었지. 결국 넌 이렇게 나와 함께 있지만 말이다. 묘한 기분이 전신을 휩쓸다 바닥을 타고 사그라든다.
레이라는 남자는 네게 꼭 지켜야 할 한 가지를 신신당부한 끝에야 작별 인사를 입에 담았다고 했다. 그 한 가지가 무엇인지 너는 정확하게 알리지 않았다. 다만 흉내를 낼 것, 이라며 뭉뚱그렸을 뿐.
네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진작에 알았다. 수상하기 짝이 없던 첫 만남부터, 어설프게 말을 돌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리도 티가 나는데 모를 리가 없지. 다만, 한 가지.
네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기다리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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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고른 카드를 맞추는 마술, 손수건을 불에 태우며 장미로 바꾸는 마술, 텅 빈 상자에서 새하얀 토끼를 등장시키는 마술. 네게 선물한 책의 흔한 트릭마저도 넌 쉽사리 따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서툰 마술사가 제 특기라며 자랑스레 선보이는 건 분명 책의 어디에도 나오지 않은 마술이었다.
드럼을 잔뜩 연주한 후 땀으로 젖은 몸을 식히는 바람을 부리는 마술. 마술인지 우연인지 알 턱이 없다. 허나 네가 덥지 않느냐고 물으며 잠시 기다리라는 목소리를 내뱉고 나면 언제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초여름의 열기를 식히는 것과 닮아 기분 좋은 세기의 바람이. 낡은 선풍기를 끌고 온 너는 매번,
“이게 내 특기인 마술.”
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오래 사용한 감이 있는 선풍기는 털털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돌아간다. 허나 절대 멈추는 법이 없었다.
그 선풍기는 고장 난 지 오래된 것으로, 무슨 짓을 해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창고에 박아둔 고물이었다. 그런 기계의 불투명한 날개를 움직이는 건, 어디서 불어오는지 확실치 않은 바람. 어찌어찌 고쳤노라는 네 거짓말을 귀에 담으며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또 다른 가정을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허튼 가정을 새로이 떠올린다.
네 특기라는 마술의 트릭은, 어쩌면 트릭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뒤적거리며 성냥으로 손수건을 태우는 네 서툰 손짓의 끝에, 작은 가능성이 매달린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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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마술이라는 건 어떻게 만드는 거야?”
언젠가 네가 물은 적이 있다. 마술에 관심을 가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네게 관심을 가진 날과 같았으니 알 턱이 없다. 네게 선물한 책에 나와있지 않느냐 물으면 초보자용이라 그런 건 나와있지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억울하다는 듯 볼을 부풀린 모습이 퍽 사랑스러워, 아무렴 어떻느냐는 대답을 흘렸더랬다. 흐른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네 온몸을 감싸도록. 네가 휘감은 노래에 밀려 그대로 바닥을 내려치는 낮은 목소리를 아는지 모르는지, 네 불만 어린 툴툴거림이 나직한 공기를 울렸다. 그러다 문득 투명한 눈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마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느냐는 물음이 돌아오는 것이다.
마법사는 정체를 들킨 해의 할로윈날, 세상에 없던 마법으로써 산화되어 사라진다고. 마법사 그 자체가 새로운 마법을 탄생시키고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다.
투명한 적안이 잔잔하게 내리 깔리길 잠시, 뒤늦게 책에서 읽었노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함께 들렀던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책을 닥치는 대로 쌓아올렸던가. 마술과 관련된 서적만을 읽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판타지 소설이라도 읽었나 보다 하며 가볍게 넘기기엔 석연치 않게 내려앉는 부분이 있었다.
그건 네가 살던 마을의 이야기를 하는 때와 같은 눈을 한다는 것. 애수를 담은 듯 일렁이는 시선이 후련하다는 빛을 띠는 광경은 분명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여전히 네가 무엇을 숨기는지 알지 못한 채로, 어쩌면 이미 드러난 답을 외면하는 중일 지도 모를 현실에서 눈을 돌렸다. 시선이 작은 직사각형의 종이에 닿는다. 작은 칸으로 분할되어 숫자가 차례로 나열된 하얀 달력. 오늘의 날짜로부터 두 줄 가량을 내려가면, 우스꽝스러운 호박으로 장식된 날이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앞으로 이 주 후면 할로윈. 너는 단 것을 좋아했지. 함께한 하나의 계절 동안 알게 된 아무래도 좋을 정보를 되새기고 있노라니 네 목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어왔다.
벌써 가을이네. 여전히 덥지만. 나랑 같이 보낸 여름은 어땠어? 가볍게 손부채질을 하며 지난 계절의 이름을 담는 네가, 낙엽이 지기도 전에 사라질 것만 같다는 생각이 방금 막 떠오른 참이었다. 눈치채지 못한 새에 사그라든 네 바람의 노래와 함께 져버릴 것만 같다고, 열네 밤을 지새면 그걸로 끝날 것만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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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를 받아들인 후의 앞날은 감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했기 따름이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어설프게 감추고 어설프게 언질을 던진 진실에서 눈을 돌렸던가.
네가 마을을 떠나 오기 전, 당부 받았다는 한 가지. 흉내를 낼 것. 그리고 잊을만하면 마술 대신 입에 담았던 마법이라는 비현실적인 단어. 네가 마술사라 자칭하며 거리를 거닐었던 건, 말 그대로 흉내를 내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라고 할까,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나무의 울긋불긋한 색감처럼 선명한 확신을 닮았을지도 몰랐다. 가슴 한 켠에 자리 잡은 확신을 감추듯 건네받은 망토를 뒤집어썼다. 뒤이어 작은 손에게서 제 키만 한 낫을 받아들고 나서야 붉은 눈동자 너머로 즐거움이 번진다.
“역시 잘 어울리네, 사신 분장!”
시야를 아슬하게 가릴 듯 말 듯 흔들리는 천 너머의 너는 퍽 들떠 보였다. 어찌 되었든 일 년에 한 번 있는 기념일이니 들뜰 만도 하지만. 홀로 분장한 것이 마음에 차지 않아 네게 물으면, 네 대답은 한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오곤 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가벼운 울림이었다.
내가 며칠 전에 했던 말 기억해?
며칠 전의 목소리가 스치듯 떠오른다. 할로윈에는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온다는 말은 또 어디서 듣고 왔는지 보고 싶은 이가 있느냐고 물은 날이었다. 죽은 이들은 이미 과거에 엮여 더 나아갈 수 없는 이들이다. 그런 옛 망령을 그리워해봤자 발걸음만 더뎌질 뿐이라고 답했던가. 아마 그랬을 것이다. 어쩐지 노이즈가 낀 듯 희미하게 깨진 기억이다. 멀지 않은 기억일진대 어째서.
“분장한 사람들 틈에 진짜가 숨어있을지도 모르잖아. 죽은 사람들이든, 마녀든, 좀비든, 사신이든, 뭐든.”
그러니까 의상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말을 마치고 빙글 돈 너는 그대로 인파 속을 파고들었다. 아, 그런가. 네가 그 이야기를 꺼낸 건 망령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따위의 이유가 아니었다. 많은 이들 속에 숨어드는 비현실의 존재 때문이었다는 걸 깨달은 후에는 이미, 작은 그림자마저 놓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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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 핑크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어진다. 크고 작은 잭 오 랜턴이 널브러진 공터 한가운데에 네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네 입이 먼저 목소리를 토해낸다.
마법이 만들어지는 법, 예전에 말했었지.
정체를 들킨 마법사가 새로운 마법을 빚어내고 죽는다는 이야기. 옆머리가 뻗친 정수리에 시선을 내리다 고개를 까딱였다. 정수리에 머물던 시선은 숱 많은 머리칼을 타고 흘러내려 투명한 눈가에 맺힌다. 적안의 주인은 잠시 다물었던 입을 다시금 열었다. 마법사가 죽기 직전에 바란 걸 그대로 마법으로 반영한다고 해서. 그래서 단테를 여기로 불렀어. 여긴 사람이 없으니까. 네 눈에 박힌 붉은 보석이 처연하게 빛난다.
“단테가 바라는 걸 말해봐.”
내 바람은 단테랑 같으니까. 짜낸 듯한 목소리가 우리를 둘러싼 호박 위에 내려앉는다. 마법사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마법에 필요한 바람. 그걸 내게 묻는다는 건 여지껏 외면해온 것이 모두 정답이라는 말이 된다. 네가 마법사라는 것도, 몸에 밴 마법을 감추기 위해 마술사를 연기해왔다는 것도, 할로윈이 마지막이라는 것조차도. 너와 나 사이의 적막을 바람이 가를 만도 하건만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마법의 탄생일을 의식한 탓일까, 가라앉은 바람의 노래는 울리지 않았다.
바람. 내가 바라는 것. 그리고 너 역시 바라는 것. 함께 지낸 계절이 새긴 바람은 하나뿐이었으므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찾아올 모든 계절 속에는 히마와리, 네가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고.”
너와 같은 바람인지 한 번 확인해볼까, 서툰 마술사. 어쩐지 웃고 싶은 기분이 되어 입꼬리를 올렸다. 허나 왜인지 억지로 얼굴 근육을 끌어올린 듯한 감각만이 확연했다. 마술사 아니라는 거 알고 있잖아, 라며 너 역시 웃었다. 마찬가지로 부러 호선을 그린 입술의 잔 떨림이 눈에 들어왔다. 네 마술사 흉내는 처음부터 글러먹었지. 큭큭거리는 소리를 내자 엑 하는 단말마와 함께 흔들리는 눈동자가 썩 볼만했다. 그래도 뭐, 당신이 눈치챘든 눈치채지 못했든 밝힐 생각이었어. 단테한테는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아서. 할로윈만 기다렸어. 나릿한 울림이다.
모양 좋은 손이 느긋하게 근처의 호박을 집어 들었다. 두 손에 빠듯하게 들어오는 크기의 작은 호박은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표정이다. 자, 이 호박 안쪽 잘 보고 있어. 네가 속삭이듯 노래했다. 그 노래는 분명 네가 두르고 있던 그것과 닮았다.
시선을 옮기자, 그제서야 네 의도를 이해한 것처럼 둔하고도 날카로운 울림이 뇌리에 박혔다. 심벌을 닮은 울림 너머로, 가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매미 우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여름의 풍경이었다. 눈이 아릴 만큼 새파란 하늘이며 간간이 불어오는 열기를 품은 바람, 노랗게 핀 해바라기 밭이 호박을 채웠다. 작은 세상의 시간은 시곗바늘을 억지로 감듯 빠르게 흘러 밤의 풍경을 불러들였다. 타코야키며 사과 사탕, 금붕어 잡기 노점이 그득 들어선 거리와 별이 수놓인 하늘을 메우는 불꽃놀이. 전형적인 여름날의 축제 일부를 떼어내 작은 공간에 쑤셔 넣은 듯한 광경이 이어진다.
축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커다란 불꽃이 사그라든 풍경 너머로 연분홍빛 꽃잎이 연달아 쌓였다. 여름 너머로 찾아온 봄이었다. 달큰한 꽃향기를 실은 바람에 새하얗게 물드는 거리. 은은한 색의 꽃잎이 내려앉은 자리 위에 돗자리를 펴고 챙겨온 음식을 서로의 입에 집어넣는 남녀의 그림자가 다정하다. 그 실루엣은 꼭, 우리를 닮았으므로.
자그마한 호박 속에서 우리의 계절이 역행한다. 너와 내가 함께할 터였을 계절이었다. 하나뿐인 바람, 함께 무한한 계절을 맞이하는 것. 이리도 선명한 환상이라니, 네가 같은 꿈을 얼마나 반복했는지 마저 가늠할 수 없었다.
가을의 할로윈 호박 속에 흘러간 여름과 봄, 그다음은 당연하게도 겨울이었다.
연분홍빛 꽃잎은 알아채지 못한 새에 새하얀 눈발이 되어 휘날린다. 어설프게 굴린 눈덩이, 이들을 쌓아올린 우스꽝스러운 눈사람. 하얀 풍경을 창문 사이에 두고 따끈한 방에 누워 귤을 까먹던 두 사람의 그림자는 이내 두터운 옷을 껴입고 바깥으로 나가 눈 덮인 나뭇가지를 흔들며 즐거운 웃음소리를 토해내었다.
“어때? 단테가 바라던 거야.”
단테와 내가 바라는걸, 담아봤어. 같은 꿈, 같음 바람, 그럼에도 실감하지 못한 오지 않을 미래의 광경. 호박에 꽂아둔 시선을 뽑아 네게 향했다. 투명한 눈이 일렁인다. 모든 계절을 담다 못해 흘러내릴 것처럼. 우리의 만남이 현실과 비현실의 교차점 위에 자리하지 않았더라면 이만치 벅차지는 않았을 터. 가라앉은 채 실타래마냥 복잡하게 얽혀가는 감정 탓에 아무 말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절망에 가라앉는다면 꼭 이런 느낌이 아닐까. 자연스레 느껴야 할 감정, 반사적으로라도 튀어나가야 할 목소리, 돌아올 너의 대답마저 검게 물들어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감각이 낯설다.
“―히마와리,”
“단테, 그거 한 번 뒤집어 볼래?”
스노우볼처럼, 응. 그렇게. 제 이름에 이어질 문장을 끊어낸 네가 소소한 부탁을 건넨다. 건네받은 호박을 반바퀴 뒤집으면, 정말로 스노우볼이라도 되는 마냥 내부의 겨울이 중력을 거스른 채 거꾸로 눈을 흩날렸다. 오렌지빛의 호박에 갇힌 비현실을 지켜보던 찰나, 네 목소리가 스치듯 바람에 녹아들었다.
단테, 나는, 당신이 가장 먼저 알아차릴 계절이 되고 싶어.
계절을 싣고 당신에게 가장 먼저 닿는 바람이 되고 싶어. 당신과 함께 수없이 많은 계절을 함께 맞는 거야. 그걸 내가 단테에게 알리러 올 테니까, 그러니까―
펑. 갑작스러운 폭발음이 옅은 목소리를 가렸다. 오렌지색의 파편과 함께 하얀 가루가 흩어진다. 뒤집은 호박이 터진 소리임이 확실한 자욱이. 폭발음에 몰려는 인파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쏟아냈다. 나 역시, 네가 남긴 마지막 비현실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때이른 굵은 눈이 쏟아진다. 손에 쥐어도 전혀 시리지 않은, 하얀 눈꽃이. 날카롭게 웃는 호박 위로 소복이 쌓이는 겨울의 증거란 참으로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네 존재가 그러했듯이, 네가 휘감았던 바람이 그러했듯이. 급작스레 비어버린 자리에도 옅은 눈이 이끼 끼듯 쌓여간다.
일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간다. 분명 차지 않은 눈송이였을 터인데, 스친 바람은 겨울의 날카로운 냉기를 품은 채였다. 꼭, 계절을 미리 알리기라도 하듯이. 네 바람의 종착지인,
……―네 바람의 종착지, 라니. 누구를 떠올리며 시작한 문장인지를 잊었다. 바람이 스치는 대로 날아간 기억의 자리가 옅게 시린 소리를 낸다. 때이른 겨울을 맞이하게 된 낯선 할로윈이라고는 하나, 눈송이에 가려질 정도라면 그리 중요한 이는 아니었겠지. 대수롭지 않게 털어내는 상념 속에 낯설고도 애절한 울림의 이름을 발견한다. 여름날 꽃의 이름을 닮은 그것을 떨쳐낼지 망설이는 손이 주먹을 쥐었다. 왜인지 차오르는 애달픔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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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남달랐던 할로윈을 지나쳐 겨울, 봄, 그리고 여름을 맞이한다. 이상하게도 그 할로윈 이후로 계절의 경계에 걸친 날이 오면 특별한 바람이 소소한 노래를 울리며 사라지곤 한다. 각 계절과 어우러지는 네 가지의 음색, 그리고 그 속에는 변치 않는 목소리가 은은하게 숨어있는 듯한 노래. 그래, 투명하게 너머의 감정을 전하는 듯한 목소리를 품은 바람이었다. 바람에 감정이 있을 리 없었음에도.
한심하게도 계절의 잔향에 매료된 팔은 매 경계가 지날 때마다 새로운 악보를 써내렸다. 벚꽃이 부는 노래, 매미가 우는 노래, 낙엽이 부서지는 노래, 눈이 쌓여가는 노래. 모두 다른 분위기를 띠었음에도 악보의 이름은 하나뿐이었다.
히마와리. 낯익은 열애가 피우는 꽃의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