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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오래 살진 못하리라는 것 정도는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까마득하게 어렸을 적부터 질리도록 보아온 제 선조들에 대한 기록 속, 저와 같은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 향년 스무 살을 넘긴 사람은 몇백 년도 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발견할 수 있다는 것 따위도 진즉부터 깨닫고 있었다. 오래간 마녀의 피를 이어받은 로아이다가에 걸린 단명의 저주. 그걸 풀기 위해 노력에 노력을 가했던 제 조상들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요절했다. 죽는 게 두려워 어떻게든 재앙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것도 잠시, 시간이 잘게 부서져 쏟아져 내릴수록 유리는 점점 포기라는 걸 배워갔고, 끝내는 수명의 끝이라는 걸 기다리게 되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유리는 읽던 서적을 덮었다.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이런 약한 모습 보여주기 싫은데, 장수할 수 없으니까, 언제 이 땅의 근원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으니까, 그만큼 자신은 더 의연해지고 강해져야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아무리 다짐에 각오를 쌓아올린들 가끔 물밀 듯 치고 올라오는 두려움은 자신을 참도 무력하게 만들었다. 허탈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서 단명의 마녀는 서책을 책장에 도로 꽂아넣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머릿속에 집어넣는 일이 퍽 무의미했다.

탈력감에 온몸의 힘이 발을 타고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떠오른 31일의 밤, 월광에 옅게 진 그림자를 따라 자신을 덮쳐오는 무언가의 기척을 신경 쓸 기운도 자신에겐 더는 남아있지 않았다. 너무 노골적이었기 때문인지 입술을 비집고 조소가 튀어나온다. …그래, 어디 멋대로 해보라지. 어쩐지 죽음이라는 단어가 꽤 우스워진 유리가 귀갓길에 오르려 대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저를 해치려는 존재의 유무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그 길을 선택한 이유는, 자꾸만 차오르는 삶의 미련을 일찍이 손에서 놓기 위함이었을까, 혹은 저도 모르게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한 발 뒤에서야 자신의 변덕을 눈치채고 만 유리는 급히 주문을 읊기 위해 숨을 들이켰다.

 

“어…?”

 

들이켠 숨이 도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당혹감에 젖은 몸뚱어리가 뻣뻣하게 굳은 탓에, 살기를 숨길 의지가 전혀 없는 상대방을 마주하고서도 유리는 멍청히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채 주문을 외울 틈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 마물과, 급하게 저를 감싸 안은 채 마물의 공격을 받아낸 디펜서.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일어난 일에 소녀는 가만히 눈만을 끔뻑였다. 허공으로 핏물이 흩날렸고, 중심을 잃은 몸이 제게로 고꾸라진다. 그제야 뇌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유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안돼, 무슨…! 리츠!”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 마물이 한 발짝 유리에게서 물러난다. 간신히 리츠를 지탱한 소녀의 눈가에 물기가 서렸다. 유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소년을 감싸 안았다. 상처께에서 배어 나온 핏물이 유리의 손끝을 적시고 있었다.

제 운명을 향해 내던지는 한순간의 일탈일 뿐이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어긋나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그저 그 운명을 조금 앞당길 뿐이었을 터다. 전적으로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 그런데 왜, 어째서, 너는 이토록이나 처절하게 나를 지키려고 하는 건지.

 

“…미안.”

 

유리가 아랫입술을 꾹 깨문다. 눈물 젖은 시야 바깥으로 다시 한 번 저희에게 달려드는 검은 형체가 비쳤다.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이 감정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어째 오늘은 하나도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이다. 소중한 사람을 상처 입혀가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추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제 품에 쓰러진 채 그다지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태연한 듯 말을 뱉는 제 디펜서가 정말 야속하기 짝이 없다. 소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 심정을 어떻게 토해내야 할지 모르겠다. 리츠를 안은 손에 힘을 주고서 유리는 무언가의 언어를 입 밖에 내었다.

 

“excursátĭo”

 

일순 눈동자에 붉은빛을 띄운 마녀의 낯에 바스러질 듯 건조한 미소만이 내려앉는다. 위아래의 입술이 다물림과 동시에 콰드득, 하고, 수명이 다한 봉제인형이 뜯어져 나가기라도 한 양, 기분 나쁜 소리가 귓가에 감돌았다. 한낱 미물 따위라도 혈액은 인간과 비슷한 모양인지 허공에서부터 터져 내리는 새빨간 비가 유리의 뺨을 타고 톡, 톡, 떨어져 내린다. 제 시야가 검붉게 물드는 걸 보면서, 마녀는 결국엔 자신도 이 만큼이나 화려하게 흩어지는 최후를 맞이하게 될는지, …뭐, 그런 퍽 실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유~쨩, 방금 또 이상한 생각 했지.”

“글쎄에.”

 

…역시 우문이었다고, 제 나름의 판단을 내리려는 찰나에도 이 눈치 빠른 녀석은 제 생각을 꿰뚫어 본다. 어느새 제 품에서 벗어난 리츠의 얼굴은 자신이 무어라 떠들든 간에 실답지 못한 대답 따윈 수긍해주지 않으리란 표정이었다.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이 멋쩍어 유리는 그대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과 없이 시선에 잡히는 붉은 옷가지들이 그렇게 추잡해 보일 수가 없었다. 자신의 생각없는 행동이 그를 상처 입게 만들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지키려는 그를 두고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제야 울컥 차오르는 죄책감에 그녀는 피가 흥건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어냈다.

 

“…리츠는 이상해.”

“…뜬금없네.”

“뭐랄까, 그렇잖아. 고작 나 하나를 지키려고 리츠의 몸을 던진 이유를 모르겠는걸.”

 

유리의 탄식과도 같은 소리에 리츠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 말고 피딱지가 굳어 얼룩진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미미하게 몸이 떨리는 걸 보아 아무래도 또다시 턱 끝까지 타오른 울음을 참아내고 있는 모양이다. …바보, 유~쨩. 안타까운 심정을 뒤로하고서 그는 조심스레 유리를 잡아 일으켰다. 지금의 그녀에게 필요한 건, 당장의 휴식이리라.

 

“이만 돌아가자, 유~쨩.”

“…응.”

 

 

*

 

 

날은 더 깊은 밤 속으로, 나름 길다면 길었을 하루를 마치고 좀처럼 잠에 들지 못하는 유리가 편안히 눈을 감을 때까지, 손을 잡고 곁을 지키던 리츠가 조심스레 집 밖을 나섰다. 당장에 능력을 쓸 수 없어 일단 그대로 공격을 받고 본 게 되려 그녀에게 또 하나의 근심거리로 다가갔구나 싶어 좀처럼 맘을 편히 먹을 수가 없다. 서늘한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나부끼고, 복잡한 심경을 내포한 표정 뒤로 푸드덕, 박쥐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누군가의 기척을 눈치챈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리츠, 상처는 이제 괜찮은고.”

“…멀쩡해.”

 

귀에 익은 목소리에 리츠가 미간을 좁혔다. 소식 한번 빠르네. 쓸데없는 오지랖은 그다지 반갑지 않아서, 대답하는 목소리에 절로 날이 섰다.

 

“어지간히도 본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모양인게지, 계속 그곳에 있을 생각인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할 의무 없거든.”

“크크, 여전히 싸늘하구먼.”

“당신은 여전히 짜증 나네.”

 

지금 사람 놀려? 어처구니가 없어진 통에 리츠가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으로 상대해주기 싫을 것 같은데, 얼른 사라져주지 않으려나. 제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일들의 반복이 오늘따라 유난히도 피곤하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훈수를 놓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말일세. …리츠, 이제 그만 결단을 내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

“…시끄러워, 알고 있어.”

 

구겨진 표정은 펴질 줄을 모르고 험악한 인상을 선물한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서 리츠는 속으로 제 형님의 말을 되뇌었다.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지금의 자신이 계속해서 유리의 곁에 남아있기 위해선, 서로 간에 비밀은 만들지 않는 게 좋다는 걸. 그 상대가 전적으로 자신을 믿어주는 자라면 더욱이 말할 것도 없었다.

리츠는 그 달밤에 흩날렸던 자신의 핏자국을 떠올린다. 흔적도 없이 말끔히 사라진 그때의 상처는, 자신이 예사의 인간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표적이 되었다. 제가 평범한 녀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유리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을 터다. 그런데도, 굳이 무언가를 묻거나 하지 않는 건 자신이 먼저 말을 해주길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 건지, 뭔지. 착잡한 심정이 한숨에 실려 허공에서 부서진다. 그는, 마음 가운데 불측지연을 껴안고 있는 그녀에게 다른 사념까지 품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뒷전으로 두면서도, 그가 상처 입는 건 끔찍이도 슬퍼하는, 그런 바보 같은 여자에게 이 이상 상흔을 남길 이유도 없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들쑤시는 제 일족을 물려 보내고서, 리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제 발치를 은은히 밝히는 달빛이 어쩐지 참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다. 그 빛을 도화지 삼아 리츠는 그 위에 지금쯤 곤히 잠들었을 유리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에 대해선 조금 더 고민을 하기로 했다. 당장에 무언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유리의 목숨을 노려왔던 그간의 추저분한 마물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신에게는 생각보다도 더 무거운 용기가 필요했다. 이야기를 꺼내는 건 다음에도 늦지 않아. 그렇게 판단을 내린 리츠가 곧이어 하나씩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힘을 갈망하는 무리가 하나둘 음습하게 모여든다.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불쾌한 소리가 바람에 실려 리츠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달빛만이 내려앉은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일순 건조하게 빛난다. 10월의 삭망, 오늘의 리츠는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조용히 해, 유~쨩이 자고 있잖아.”

 

싸늘하게 뱉는 그 말이 마지막이다. 아닌 밤중에 이루어진 때늦은 청소 시간은, 아침 해가 떠오르기 전에 마무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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