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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무_갸몬스와.png

소녀는 하늘에서 내려왔다. 프릴이 장식된 원피스를 입고, 똑같이 프릴이 장식된 양산을 쓰고 내려오는 모습은 여동생 미하루와 함께 본 적 있는 영화 속 메리 포핀스와 같았다. 갸몬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당신이로군요?"

조금 놀란 표정을 하더니, 소녀는 저 하늘에 뜬 초승달처럼 눈을 휘며 미소지었다.

"사카노우에 갸몬… 그게 당신의 본명. 하지만 제게 당신은 치도 세츠 님이니까요."

"뭐?"

갸몬은 귀를 의심했다. 치도 세츠는 잡지에 퍼즐을 출제할 때 쓰는 이름이었다. 그 치도 세츠의 정체가 자신임을 아는 이는, 여동생 미하루 외에는 없었다. 게다가 이 소녀와의 만남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후후, 만나뵈어 반가웠어요. 제 이름은 쿠도 스와코. 다음에 또 찾아뵐게요. 편히 주무시길."

"이, 이봐!"

무심코 손을 뻗었으나, 상대는 바로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갸몬은 멍하니 소녀, 스와코가 있던 허공을 응시했다. 꿈이라기에는 너무도 생생했다. 볼을 꼬집자 아픔이 느껴졌다.

"어떻게 된 거야…"

의문만을 품고, 갸몬은 잠을 청했다. 당연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치도 세츠, 본명 사카노우에 갸몬은 거대한 크로스워드 퍼즐과 직면했다.

"이, 이게 뭐야?"

하얀 사각형들이 운동장을 메우고 있었다. 꼭 크로스워드 퍼즐의 형태와도 같았다. 옆에는 빈칸을 채울 단어의 힌트들이 늘어서 있었다. 다만 몇 개의 힌트가 약간 이상했다.

'봄 특별호♣ 7번 단어'

'11월호♠ 4번 단어'

"이게 대체…"

다른 학생들 역시 크게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시선들은 곧 어느 한 곳에 집중되었다.

"어머, 갸몬 님. 안녕히 주무셨나요?"

"너…"

소녀는 전날 밤처럼 프릴 달린 블라우스에 스커트를 갖춰 입고, 우아한 디자인의 양산을 쓴 채였다.

"후후. 동경하던 분의 성함을 부르고 싶지만, 듣는 귀가 많으니까요. 그러니 갸몬 님, 이제 제 마음을 담은 퍼즐을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레이스 장갑을 낀 손이 운동장을 향해 내밀어졌다. 아름다운 소녀가 생긋 웃었다.

"갸몬 님만을 위해 만든 퍼즐이랍니다. 이곳, 루트 학원에서 제 퍼즐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저희 두 사람뿐. 저는 이런 퍼즐이 있어도 1분 안에 풀어내겠지만, 갸몬 님께는 시간을 더 드려야겠죠? 오늘 안에 전부 풀어내실 거라고 믿을게요."

스와코는 퍼즐 쪽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크로스워드 퍼즐만큼 룰이 간단한 건 없죠. 힌트에 맞는 단어를 빈 칸에 채워주시면 된답니다. 그것만 있으면 잡지와 똑같으니까, 마력을 쓰는 김에 특수한 룰을 만들어 봤어요. 빈 칸에 채우실 단어의 글자는 전부 옆의 설명에서 가져오셔야 해요. 보기를 드린 거니까 더 쉬우실 수도 있겠지만, 횟수가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답니다. 직접 글자를 옮기시게 하기엔 제가 마음이 아프니, 단어를 채우실 땐 저를 불러주세요. 루트 학원에서 쓰는 마력은 전부 갸몬 님을 위한 것이니까요."

병 주고 약 주고, 채찍 주고 당근 준다는 말은 이런 때를 위해 있는 게 틀림없다고 갸몬은 생각했다. 이름도 크로스워드와 비슷한 소녀가 대체 무엇 때문에 그에게 퍼즐을 풀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잠깐, 마력이라고?"

갸몬이 알기로, 그건 세간에 신비로 알려진 마법사라는 존재가 다루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소녀는 마력을 써서 퍼즐을 만들었다고 했다. 갸몬이 던진 의문에, 스와코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네. 쿠도 가는 대대로 마력이 넘쳐나니까요. 늘 남는 마력을 갸몬 님을 위해 쓸 수 있어 아주 기뻤답니다. 아,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나름대로 계산해서 사용하고 있으니."

"역시 마법사였냐?"

"하늘을 날 수 있는 인간이 마법사가 아닐 리가요. 어머, 마법사는 처음 보셨나요?"

"본 적이 있겠냐! 양산 쓰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사라진 녀석이 있어서 마법사가 아닐까 한 게 다야."

"그건 제 이야기인가요? 후후, 저는 갸몬 님께 첫 마법사로군요."

대화를 할 때마다 정신력이 깎이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쭉 귀찮아질 것만 같은 예감을 뒤로 하고, 갸몬은 퍼즐의 힌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빈 칸에 들어갈 단어는 전부 갸몬의 상식 범위 내였다. 갸몬은 쉽게 빈 칸을 채워갔다. 글자를 옮겨달라고 하면, 스와코가 옷만큼이나 하늘하늘한 손짓으로 힌트 부분에서 글자를 띄워 갸몬이 원하는 칸으로 옮겼다. 정체불명의 힌트도 금방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치도 세츠는 종류에 관계없이 퍼즐을 출제했다. 그리고 스와코는 치도 세츠의 존재를 분명하게 알았다. 답은 뻔했다.

"치도 세츠의 퍼즐 마니아구만, 말하자면."

스와코를 쳐다보자, 갸몬의 말을 들은 게 분명함에도 소녀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다른 문제들도 내가 냈던 크로스워드 퍼즐에 있던 거겠지. 그러니까 내가 맞추기 쉬웠을 테고… 그나저나 너, 몇월호 몇 번 하면 다 아냐?"

"그럼요. 아주 많이 풀었으니까요. 우연히 들어온 퍼즐 잡지에서 치도 세츠님의 퍼즐에 빠져, 달마다 별장으로 배송되도록 정기 구독까지 신청했답니다. 평범한 책은 마법서보다도 빠르게 너덜너덜해져서, 치도 세츠 님의 퍼즐이 실린 호는 몇 권이고 더 구입했지요."

마법사라는 건 다 이런지, 아니면 스와코가 특이한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갸몬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해 한숨을 쉬고는, 도로 퍼즐 풀이에 집중했다. 겹쳐지는 부분의 글자를 또다른 힌트 삼아 단어를 머릿속으로 맞춰보자, 딱 떨어지는 조합이 있었다. 문제는 마지막 번호의 답이었다.

"여기만 끝에 한 칸이 남는단 말이야…"

들어갈 단어는 한 개 외에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모르는 단어일 리는 없었다. 고민하는 사이에, 갸몬은 숨겨진 배열을 눈치챘다.

"그런 거였냐."

각 답은 다른 부분은 어딘가와 겹쳤으나, 끝 글자만은 그렇지 않았다. 갸몬은 곧바로 답이 되는 단어들의 끝 글자를 머릿속에서 번호 순서대로 늘어놓았다.

"당신…의스… 흥, 그렇군. ‘당신의 스와코를 잘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단어의 힌트에만 설명에 특수문자가 붙어 있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뭔가 있을 거라고 의심했다. 있는 글자를 채워넣는 것만 생각했기에, 없는 문자를 채워넣는 건 마지막에 와서야 떠올릴 수 있었다. 갸몬은 마지막 번호의 답을 스와코에게 말했다.

"그러면 한 칸이 남는데요?"

"시치미떼지 마. 거기 넣을 특수문자, 여기에 없지? 채워넣을 법은 네가 알려줘야 하잖아."

자신만만하게 답하자, 스와코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역시 갸몬 님. 과연 제가 반한 분이네요."

"반… 뭐, 뭐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갸몬이 당황하는 사이, 스와코는 마지막 칸을 제외한 다른 칸에 글자를 채워넣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칸으로 직접 다가가더니, 품에서 분홍색 액체가 채워진 병을 꺼냈다.

"잠, 잠깐!"

말릴 새도 없이, 스와코는 병 마개를 열고 액체를 빈 칸에 쏟았다. 그러자 액체가 칸 전체를 물들이더니, 중앙에서 스멀스멀 움직여 흰 문자를 만들어냈다.

"하트. 그게 갸몬 님의 답인가요?"

최종적으로 액체가 묻지 않은 흰색은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어디에 태클을 걸어야 할지 생각하면서도, 갸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예요. 후후, 제 퍼즐을 멋지게 풀어주셨네요."

스와코의 말이 끝난 직후, 다른 글자는 순식간에 전부 사라지고 각 해답의 마지막 글자만이 남았다.

"갸몬 님, 당신의 스와코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스와코는 한 손으로 스커트 자락을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혔다. 실로 우아한 인사였다.

"그, 당신의라는 건…"

"말 그대로랍니다, 갸몬 님."

소녀가 다시금 싱긋 웃었다. 불길한 예감은 더 이상 예감으로 남지 않았다. 마법사에 대해 소문만 들었을 뿐, 실제로 만난 적이 없던 퍼즐 매니아 소년은 처음 만난 마법사에게 가지각색으로 시달릴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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