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슈가슈가룬 기반 AU. 원작 파괴, 날조 있습니다. 드림캐 이외의 원작 캐릭터도 등장합니다
이름, 야마자키 소스케
소속, 사메즈카 3학년
좋아하는 음식, 돈가스
특이사항,
“야마자키 선배! 방 구경하게 해주세요!”
소스케가 모모타로와 함께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막 부활동이 끝난 후였다. ‘이 녀석은 좀 귀찮은데.’ 소스케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모모가 이렇게 말했다.
“구경 시켜주세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단 말이에요! 야마자키 선배 룸메이트는…… 얼레, 누구더라. 분명 알았던 것 같은데. 린 선배는 아이 선배랑 같은 방이고.”
정말 기억 못하는군.
소스케는 대놓고 성가신 표정을 지었지만 모모는 언제나처럼 개의치 않았다. 결국 방까지 모모타로를 데려오고만 소스케가 혀를 차며 방문을 열었다.
“짧게 해라.”
뒤에서 모모가 눈을 빛냈다.
쾅, 문이 닫혔다. 소스케가 드물게 당황해서 굳어있었다. 모모는 그의 태평양과 같은 넓은 어깨에 가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엑? 뭐예요, 선배. 빨리 들어가요.”
정말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방문 앞에 분홍색 커튼 같은 긴 머리카락이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분홍색 머리의 여자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거꾸로 앉아있었다. 와이어나 밧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서는 흰색 깃털펜이 제멋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어…… 미코시바.”
잠시 후 돌아본 소스케의 얼굴에 기묘한 미소가 떠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리를 안 해놔서 말이야. 돌아가라. 나중에 보여줄게.”
모모가 입을 내밀었다.
“에게! 그런 게 어딨어요? 더러워도 괜찮으니까, 얼른,”
“그러니까, 나중에 보여준다고. 부활동 때문에 피곤했을 텐데 얼른 가서 쉬어라.”
모모마저 이상함을 느낄 정도로 소스케의 연기는 형편없었다. 하지만 소스케가 작정하고 블로킹하는데 모모가 뚫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말썽꾸러기 후배가 돌아갔는지 세 번이나 확인한 후에 소스케가 문을 열었다.
분홍머리 남학생이 긴장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만화책은 ‘자기 방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는 남학생’을 연출하기 위한 도구 같았는데, 거꾸로 들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럴 법 했을 것이다.
“……갔어?”
남학생이 은밀하게 물었다.
소스케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꾹 누르며 대답했다.
“제발, 멀쩡하게 있으라고. 왜 중력을 거스르려고 하는데.”
“미안. 그게 은근히 집중이 잘 돼…….”
반성하는 얼굴로 웃어 보이면 소스케는 화내지 못했다.
“……갔으니까 변신이나 풀어.”
남학생이 손가락을 튕기자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며 방을 뒤덮었다. 폭발이라도 일어나면 이런 느낌일까. 처음에는 깜짝 놀랐던 소스케는 이제 심드렁하게 이 과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시야가 뿌옇게 변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연기가 저절로 사라지며,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많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여성의 그것이었다. 선이 얇고, 키도, 체격도 확 줄었다. 무엇보다 분홍색 곱슬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왔다. 방금은 괴기한 구도로 봐서 눈치 채기 어려웠지만 언제 봐도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머리카락이었다. 마치 벚꽃 같았다.
“매번 모습을 바꾸지 말고, 환각 마법 같은 건 없어? 들어오는 사람한테는 남자로 보이게.”
소스케가 말했다.
“그런 걸 하려면 며칠 동안 방에서 주문만 외고 있어야 될 걸. 일단 소스케 말고 다른 사람이 문고리를 잡으면 정전기가 일어나도록 마법을 걸어놨는데…….”
“‘정전기’말이지…….”
소스케가 착잡하게 마른세수를 했다.
이름, 야마자키 소스케
소속, 사메즈카 3학년
좋아하는 음식, 돈가스
특이사항,
룸메이트가 마녀이다!!
소스케라고 마녀의 숨겨진 조력자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소스케가 룸메이트의 비밀을 알아차린 건 전학 온지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평범하게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웠고, 시끄러워서 잠에서 깨었다. 소음의 근원지는 창문이었다. 그대로 무시하고 잤으면 좋았을걸. 비둘기라도 있나보다 싶어서 쫓아내려고 했고, 그곳에 있던 것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룸메이트와 똑같은 얼굴의, 여자. 당연히 가족이 찾아왔나보다 생각했다. 밤늦게 기숙사까지 올 정도라니,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창문을 열어주려다가 퍼뜩 무언가를 깨달았다. 여기는 3층이었다. 소스케는 얼른 허리 밑을 확인했고, 그녀는 빗자루를 타고 있었다. 빗자루. 갈색 막대기에 지푸라기가 엮인,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진짜 빗자루. 날고 있다! 소스케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얼른 침대를 돌아보았다. 얌전히 자고 있어야 할 자신의 룸메이트가 없었다.
‘좆 됐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지금 확실히 망했다고, 소스케는 오랜만에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마녀야.”
창문이 잠겨 있어서 못 들어온 주제에 그녀가 심각하게 설명했다.
“마계의 왕 후보를 결정하기 위해서 마지막 시험을 치루고 있거든. 나 말고도 한 명의 후보자가 더 내려와 있어. 물론 상시적으로 인간 세상에 머무르는 마녀도 있지만. 두 명의 후보자 중에서, 하트를 더 많이 모은 사람이 왕이 돼. 아, 하트라는 건 감정이 표현되는 보석인데……”
소스케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 설정 어디서 들어봤는데. 어릴 때 린이 봤어. 그거 슈가슈가……”
“맞아! 어느 마녀가 하계에 애니메이션을 낸 적이 있다고 들었어. 너무 자세히 알려지면 곤란하니까 실제 마계랑은 조금 다르다고 했지만. 야마자키 군도 봤구나?”
“……그건 알겠고,”
잘 해결됐다는 듯이 밝은 얼굴로 대꾸하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서, 소스케는 말을 돌렸다.
“왜 사메즈카로 온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마녀가 굳이 남고로 전학 와서 본래 모습을 감추며 하트를 모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게이를 꼬셔야할지 스트레이트를 꼬셔야할지도 헷갈리는 상황이었다. 왜 공학으로 가지 않고? 무엇보다 이 마녀 때문에 소스케가 파렴치한 인간이 될 위험에 놓여버렸다. 학교 기숙사에 이성을 데려오다니! 아니라고 해명해도 마법으로 성별을 바꾼다는 이야기를 누가 믿어주기나 할까.
“나라고 남고에 오고 싶었던 건 아니야.”
그녀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근처에 기숙사 있는 학교가 여기밖에 없었어.”
“기숙사?”
소스케가 혀를 찼다.
“머물 곳 정도는 알아서 하라 이건가. 마계도 험난하네.”
“……그냥 혼동마법을 걸어서 같이 살면 되는데 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키스미처럼 친화력이 좋지도 않고……”
그녀가 웅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소스케는 청력이 좋아서 불행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스미? 시기노 키스미?”
그녀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는 사이야?”
소스케의 표정을 보고 대답을 읽은 듯 난감하게 입을 가린다.
“아……, 어떡해.”
소스케가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한 번에 너무 많은 사실을 깨달아서 혼란스러웠다. 마녀에, 마계에, 하트니 뭐니. 그 유치한 애니메이션이 허구가 아니었다고? 상식이 젠가 기둥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기왕 마법세상이 실존한다면 이마에 번개 모양 흉터가 있는 세상이 더 나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트보다는 지팡이가 차라리 받아들이기 쉬우니까. 게다가 키스미까지…….
소스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룸메이트를 노려보았다. 그녀가 당황한 듯 하더니 민망하게 웃어보였다. 습관인 모양이었다. 소스케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너는 사실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마녀고, 초등학생 때 같은 반이었던 키스미도 사실 인간이 아니고, 내 룸메이트 사사키는 왕이 되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다 그거지…….”
“그건 아니야.”
한 마디 할 때마다 주억거리던 그녀가 마지막 말에 딱 잘라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왕 같은 건 되지 않을 거야.”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가 띠어있었지만, 그 목소리에서는 신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에게 강요하지도, 자랑하지도 않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모든 걸 감내하며 포기하지 않는 믿음. 절대 부서지지 않는 무언가. 그 목소리에는 그녀가 살아온 방식이 녹아있는 것 같았다. 소스케는 어쩐지 목이 타는 게 느껴졌다.
“……왜?”
“난 노래 듣는 걸 좋아하거든. 직접 쓰는 것도 좋아하고. 왕이 되면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거야. 왕좌를 포기하는 이유로는 시시하지?” 그녀가 장난스럽게 키득거렸다. “그래도, 모든 사람이 나를 숭배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어.”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에게선 언제나 빛이 났다. 소스케는 그게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근조근 자신의 심정을 털어놓는 그녀의 미소는 어딘지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지쳐보였을 뿐이다. 소스케는 그녀의 영혼 깊은 곳을 들여다볼 단서를 찾은 반면에,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는 평생 이 미소를 잊지 못하리라.
그녀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그리고 하나 더. 네 룸메이트는 허구가 아니야. 난 여전히 사사키 마데유키니까.”
마데유키가 손을 내밀었다.
“음, 앞으로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을 것 같은데, 미리 고마워. 기왕 이렇게 된 거 잘 부탁해. ……소스케.”
소스케는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희고 가는 손이었다. 별달리 특이할 것도 없었다. 약지에 끼고 있는 에메랄드 반지만 제외한다면. 본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건 지팡이다. 저걸로 마법을 부리고, 인간의 감정을 빼앗겠지. 마녀와 얽힌다면 귀찮은 일도 많아질 것이다. 오늘만 해도, 보라, 내일 아침부터 연습이 있는데 한숨도 못 자지 않았는가. 마녀의 숨겨진 조력자가 되기 위해서 사메즈카로 전학 온 것이 아니었다. 당장 경찰이든 정신과든 어딘가에 신고하고 마지막 학창시절을 평화롭게 마무리 지어야 했다.
“……난,”
고개를 들자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습관적인 웃음. 그 안에 숨겨진 긴장을 발견하자, 소스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그래, 잘 부탁해, 마데.”
소스케가 손을 맞잡았다.
“하트 모으는 걸 도와달라고?” 소스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왕이 되기 싫다면서?”
“응, 왕은 안 될 거야. 그래도 종류별로 하나씩은 가져가야 돼.”
“왜?”
“음……, 졸업 요건? 이라고 해야 되나?”
마데유키가 적절한 비유를 찾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학교만 졸업했다고 진짜 마녀가 되는 건 아니거든. 하계로 내려가서 적어도 종류별로 하나씩은 모으는 게 암묵적인 졸업시험이라고 해야 되나……. 거창하게 말하긴 했는데, 빈손으로 돌아가면 다들 놀릴 것 같아서 그래.”
그녀는 마계의 친구들을 떠올렸는지 킥킥대었다. 소스케는 ‘그쪽도 참 귀찮은 세상이군.’ 하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냥 “그렇구나.”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도와줄게. 안 그래도 정체 들켰다고 놀림 받을 텐데.”
“그, 그건 어쩔 수가 없었……, 웃지 마!”
그렇게 두 사람의 하트 모으기가 시작되었다. 이쯤에서 하트의 종류를 알아보자. 붉은색-진실한 사랑. 주황색-우정. 노란색(혹은 피스, 오줌하트라고도 부른다)-놀라움. 초록색-망설임. 파란색-슬픔. 보라색-죄없는 욕망. 그리고 마지막 무지개-행복.
“하트를 빼앗기면 관련된 기억을 전부 잃어버려.”
설명을 듣던 소스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데유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조근조근 말했다.
“마녀는 언젠가 마계로 떠나버릴 존재니까, 남은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 그렇게 정했대. 그래서 무지개 하트만은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행복해진다고 해. 언젠가 소스케의 하트도 빼앗아줄게.”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웃었기 때문에, 소스케는 무슨 색의 하트를 말하는 거냐고 묻지 못했다.
첫 번째 목표는 노란색-놀라움과 보라색-죄없는 욕망의 하트였다. 쉬운 것부터 끝내자는 전략이었다. 실제로 놀라움은 간단하게 해결했다. 소스케가 니토리를 기숙사로 유인하고, 마데유키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작전이었다. (“야, 야마자키 선배가 기숙사에 이성을……!” “맞아! 소스케가 날 데려왔어!” “아니야!”) 그런데 욕망은 어렵지 않나? 소스케의 질문에 그녀가 무슨 소리하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소스케? 여기 남고야. 밤에 한 바퀴만 돌면 보라색 하트 정도는 원하는 대로 챙길 수 있어. 꼭 나를 향한 게 아니라도 괜찮거든.”
소스케는 한동안 죄 없는 건장한 남자 청소년들을 서먹하게 대해야 했다.
세 번째는 우정의 하트였다. 같은 반인데다가 소스케를 통해 친해질 수 있는 린이 목표였는데, 린은 예의바르고 사려 깊은 친구였지만, 우정의 벽이 매우 높았다. 이번에는 남을 향한 하트를 몰래 빼앗을 수도 없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하트를 빼앗으면 기억이 사라져버리니까. 어떡하지 고민하는데 나타난 게 모모타로였다.
“어! 혹시 야마자키 선배랑 같은 기숙사인 선배?”
“응. 사사키 반리라고 해. 넌……?”
“미코시바 모모타로에요! 이거, 야마자키 선배한테 전해주세요!”
“그래.”
마데유키는 모모타로가 내미는 유인물을 받았다. 수영부의 연습메뉴인 모양이었다.
“고마워, 소스케한테 잘 전해줄게.”
그대로 돌아가나 싶던 모모타로가 갑자기 멈춰 섰다. 왜 그러지? 모모타로가 빠르게 돌아오더니 마데유키를 빤히 보았다. “어…… 왜?”
“선배.”
“어, 응.”
“사슴벌레 좋아하죠?”
“어?”
“착한 사람치고 사슴벌레 싫어하는 사람 없어요!”
“어……?”
그리고 한 시간 내내 사슴벌레에 대한 일장연설을 들어야했다. 그것도 소스케가 러닝에서 돌아와서 어쩔 수 없이 끝난 것으로, 마데유키는 ‘너도 그쪽이었냐’하는 질린 눈빛을 받아야만 했다. 사슴벌레 모임(모모가 이름 붙였음)이 아쉽게 파하고 모모타로는 자신의 기숙사로 돌아갔다. 그때, 그 감각이 느껴졌다. 마데유키가 얼른 엿보기 거울을 만들어 모모를 훔쳐보았다.
‘있다……!’
그렇게 찾아 헤맨 주황색 하트였다. 린은 콜라를 사줘도 안 보였는데 (그때 린은 과도한 친절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모는 몇 분 얘기 들어줬다고 생긴 것이다!
“……뭐하는 거야?”
소스케가 정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마데유키는 뒤늦게 자신의 포즈가 인간의 입장에서 어떻게 보일지 눈치 챘다. V자를 만들어 오른쪽 눈에 대고 있는 자세. 그녀가 황급히 손을 치웠다.
“이, 이건 하트를 볼 수 있는 엿보기 안경이야! 귀여운 척하는 게 아니라,”
“어, 그래…….”
소스케가 구질구질한 변명하지 말라는 듯이 대꾸했다.
“아니, 진짜 아니라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마데유키가 모모의 눈치를 보며 소스케에게 속삭였다. 남자 모습인데도 키가 많이 차이나서 발꿈치를 들어야했다.
“우정의 하트가 나타났어!”
소스케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그걸로……?”
“친화력이 좋은 친군가봐.”
“친화력이…… 좋다면 좋지만…….”
이러쿵저러쿵해도 하트는 아름다웠다. 디자인이 예쁘다든가 색이 잘 나왔다든가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낸 보석. 그 자체로 행복해지는 하나의 마법이었다. 노란색 하트는 보기만 해도 니토리의 놀란 얼굴이 떠올라서 웃음이 나왔는데, 주황색 하트는 겨울날에 훈훈한 난로가 앞에 앉은 것처럼 마음이 따뜻해졌다. 둘은 하트를 감상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가 문득 분위기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로 눈이 마주쳐서 푸스스 웃는다.
“그럼 이제 4개 남은 거지?”
소스케가 골목대장처럼 물었다.
“응.”
“빨리 끝내자고.”
하지만 그는 더 이상 하트 회수를 도와주지 못했다.
마지막 수영 대회가 다가왔다. 소스케는 우직하고 단단한 사람이었지만 고작 고등학생이었고, 많이 지쳐있었다. 고맙다면 고맙게도 마데유키는 한 번도 소스케와 ‘동료’였던 적이 없는 마녀였다. 어차피 사라질 존재. 이 땅에 소속되지 않은 인물. 그녀만큼 가깝고 그녀만큼 먼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마데유키가 어깨가 아프냐고 물었고, 소스케는 전부 털어놓았다.
마데유키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도와줄 수 있었다고 해도 소스케가 바라지 않을 터였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자신의 일은 자신의 책임으로 자신이 끝내는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였고 서로를 응원했지만 어딘지 거리감이 생겼다. 그들의 기숙사 방에서만 ‘수영’이라는 개념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지각을 하고 않고 수업을 열심히 들으면 모든 게 만족스러운 사람처럼 서로를 대했다. 마데유키는 그저 매일 밤 소스케의 왼쪽 가슴에 차갑게 얼어버리는 파란색 하트를 회수할 뿐이었다. 소스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네 번째 하트였다.
다섯 번째는 린에게 받았다. 대회 직전 소스케의 부상을 안 린이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과 동료와 헤엄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방황했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마데유키가 조용히 그의 등을 밀었다. 철저히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야비한 행동이었다. 가만히 두어도 똑같은 결과가 나왔을 테니까. 대회장으로 돌아가며 소스케가 슬쩍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레이스가 끝나고 사메즈카 팀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보고 있는 사람까지 벅차오르는 광경이었다. 엿보기 안경을 쓰지 않아도 그들의 가슴에서 빛나는 하트의 색을 알 수 있었다. 마데유키는 네 사람의 축복을 빌었다.
단 한 사람, 인간계에도 발소리만으로 누구인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마데유키가 바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문 앞에 나타났다. 소스케였다. 오늘 밤은 수영부 부원들과 함께 보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다가올 때마다 희미하게 수영장의 락스 냄새가 풍겼다. 이 냄새를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우오즈미가 내 방만 오면 정전기가 일어난다고 불길하다는데. 그 마법이 통할 줄은 몰랐어.”
마데유키가 픽 웃었다.
“그동안 날 의심했단 말야?”
“미안, 미안.”
소스케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마데유키는 남자로 변신도 하지 않고 무방비하게 있었지만, 소스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가 좋았다. 학생들은 아직 밖에 있을 시간이라서 기숙사 건물이 텅 비어있었다. 마녀의 마지막 시험은 끝났다. 마데유키는 돌아간다. 항상 소란스러웠던 공간에 지금은 한산한 분위기가 깃들어 있었다. 소스케가 새삼 주변을 훑어보았다. 함께 쓴 이층 침대. 마법약을 제조하다가 그을린 자국과, 그 자국을 감추기 위해 붙였던 좋아하지도 않는 아이돌 포스터 자국. 아, 책장이 저렇게 어두웠나. 항상 수정구슬이 반짝이고 있어서 몰랐지. 짐을 전부 치웠지만 기숙사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고마워.”
소스케가 말했다. 마데유키가 울컥한 표정을 감췄다.
“뭐가?”
“글쎄, 그냥 전부 다.”
그녀가 반박하려고 할 때 날아다니는 깃털펜이 그녀의 뺨을 찔렀다. 소스케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거 많이 당했어.” 그녀가 대답 없이 거친 손길로 깃털펜을 가방에 욱여넣었다. 뺨이 살짝 붉어진 것을 보니 민망한 모양이었다. 깃털펜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짐이라곤 어깨에 메는 검은색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수정구슬만 해도 가방의 반은 차지할 것 같은데, 그 많은 잡동사니가 저 안에 전부 들어갈리 없었다. 그녀가 인간이었다면 말이다.
“아직 하나 남았잖아.”
마데유키는 소스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바로 눈치 챘다.
“그러게, 어떡하지. 마법학교 창립일 이래 제일 덜 떨어지는 마녀라고 놀림 받을지도 몰라.”
그녀가 킥킥대었다.
“뭐, 그거야 조금 창피하면 되는 일……,”
“내 거 줄게.”
“뭐?”
“하트.”
소스케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붉은색 하트, 없잖아.”
마데유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소스케는 당황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와 똑같이 올곧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데유키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그를 살펴보다가 눈을 깔았다.
“역시 후회하는구나.”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였다.
“나랑 엮인 거…….”
갑자기 이성과, 게다가 평범한 인간도 아닌 마녀와 룸메이트가 돼서 얼마나 불편했을까. 마데유키 자신은 그다지 불편함을 못 느꼈던 만큼 소스케가 배려해주고 있었던 것이겠지.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그게 야마자키 소스케다. 그렇다고 마법으로 소스케를 도와주기라도 한 적이 있던가. 오히려 하트 모으는 걸 도와달라고 시간을 빼앗기만 했지. 후회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슴 속 하트가 점점 붉은색을 띠었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연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마법세상이 재밌었겠지.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마법약을 나누어 마셨고, 보름달이 비추는 호수 위를 거닐었고, 행복을 비추는 거울 앞에서 춤을 추었다. 매일 밤마다 두 사람의 비밀 모험이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좋아하게 될 것이다. 그때 야마자키 소스케의 옆에 있던 사람이 우연히도 사사키 마데유키였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때가 되었다. 귀찮고 짐만 되는 기억은 묻어두고 졸업하자.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소스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대꾸는 없었다. 예상했다. 정곡을 찔렀을 테니까……. 잠시 후 소스케가 말했다.
“그런 생각 하고 있었어?”
아주 어이없다는 목소리였다. 마데유키가 당황해서 얼굴을 들었다. 소스케는 수정구슬로 영화를 보자고 했을 때처럼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 그런 거잖아.”
“아닌데.”
“……모모 때 봤잖아.”
마데유키는 여전히 모모라고 불렀다. 하지만 모모타로는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복도를 지나가는 모모타로와, 말없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데유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트를 빼앗기면 기억을 잃게 되는 이유도, 마녀들의 죄책감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하트를 주겠다고 말했다.
“글쎄, 난 말주변이 없어서……,”
소스케는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다가, 문득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움칠거렸다. 긴장하고 있었나.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주 느리게. 그녀는 불안한 기색이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벚꽃 같은 머리카락에서, 삐져나온 한 가닥을 귀 뒤로 넘겨준다. 그저 그것뿐인 동작을 취하고, 소스케는 손을 거두었다.
“분명 다시 너와 사랑에 빠질 거야.”
정리되었다는 듯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약속할게. 그러니까, 네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만 잊게 해줘. 아니면 6년이나 기다리게 할 셈이야?”
때마침 창가에서 강한 햇빛이 들었다. 마데유키의 그림자가 소스케의 오른쪽 어깨를 덮었다. 하지만 어둠의 마수는 그의 얼굴까지 뻗치지는 못했다. “응?” 소스케가 소년처럼 웃었다. 찬란했다.
마데유키가 따라 웃었다. 마데유키가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난 마녀야.”
“상관없어.”
“내 세상과 네 세상은 많이 달라. 우리는 결국 아무것도 공유하지 못할 지도 몰라.”
“흠…….”
소스케가 짐직 고민하는 척 턱을 만졌다.
“마계에서도 기대 안 한 음식이 맛있거나, 더운 날에 시원한 바람이 불거나, 카페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주거나 하면 행복해?”
마데유키가 숨을 들이켰다.
“그럼 됐잖아.”
더 이상 변명거리가 없었다. 마데유키는 정말로 노력했다. 세간에서 말하는 ‘현명한 판단’이라는 것을 내리기 위해서. 함께 한 시간이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이 모양이었다. 지금 끊어내지 못하면 아마 평생 서로에게 끌려 다닐 터였다. 마데유키가 사랑하는 것은 모두 마계에 존재했고, 소스케에게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할 때마다 설명이 선행되어야하고, 서로가 서로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관계. 그런 관계는 끊어버려야했다.
마데유키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후회해도 무르기 없어.”
소스케가 픽 웃었다.
“누가 할 말인데.”
“도망쳐도 안 놓아줄 거야.”
“부디.”
“……금방 돌아올게.”
그녀의 반지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소스케가 겸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빛이 세상을 집어삼켰다. 이렇게 눈부신 경치는 본 적 없었다. 다음 순간 마녀의 차림새를 한 마데유키가 보였다. 보라색 고깔모자와 펄럭이는 망토가 조금 웃겼다. 그녀가 주문을 뱉었다. 하트를 회수할 때는 저런 표정을 짓는 구나. 아니, 어쩌면 저런 표정은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자 소스케는 꽤 기분이 좋아졌다. 심장에서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붉은색 하트. 아름다웠다.
“울지 마.”
소스케가 중얼거렸다.
소스케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모델이라도 되는 양 허공의 무언가를 끌어안은 자세로 서 있었다. 뭐야, 왜 이러고 있어. 소스케가 머쓱해하며 팔을 내렸다. 혹시나 누가 봤을까 방문도 확인했다. 잠깐. 방금까지 수영부 팀원들과 함께 있었는데, 언제 기숙사로 돌아온 거지. 손은 왜 이렇게 축축하고.
화장실에서 손을 닦으며, 물소리와 함께 자신의 기억도 수도관으로 흘러내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슬픈 꿈을 꾸고 난 것처럼 감정이 밀려오는데 정작 그게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없어도 되니까 없어졌겠지. 그렇게 되뇌어 보아도 상상통은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의 빈자리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소스케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요즘은 옥상에 있을 때가 많았다. 수영하거나, 자거나, 먹거나, 아니면 하늘이다. 몇 시간이고 멍청하게 서 있으니 주변에서 걱정하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무얼 해야겠다는 의욕자체가 들지 않았다. 재활에 성공했고, 수영도 잘하고 있다. 딱히 나쁜 것도 아닌데, 뭐.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수업시간이 돼서 옥상에서 내려왔다. 수영 실습만 있으면 좋을 걸, 대학도 귀찮은 일투성이다. 소스케는 걸음을 재촉하다가 어느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언덕 위에 호리호리한 인영 하나. 혹시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데 착각한 건가 싶었지만, 3관 뒤 나무그늘 아래에는 소스케밖에 없었다. 누구야. 검은 모자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자식. 하지만 그 아래로 구불구불하게 물결치는 분홍색 머리카락은 보였다. 마치 벚꽃 같았다. 소스케는 자신이 왜 그러는 지도 모르면서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조바심이 났다. 왜? 놓치면 안 돼. 내가 왜 이러지. 놓치면 안 돼! 소스케는 어느새 전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마데!”
소스케가 팔목을 낚아챘다. 그녀가 휘청거리며 검은 모자가 툭 떨어졌다. 초록색 눈이었다. 저 눈이 눈부시게 반짝였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순간 세상의 이치가 명쾌해졌다. 이제껏 버텨온 것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거짓이었다. 이걸 기다려왔던 것이다. 다시는 놓치지 않아.
“늦었어.”
소스케가 사냥하는 들개처럼 뜨거운 숨을 뱉으며 말했다.
“2년이나 지났어.”
마데유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급기야 환상이라도 보는 건지 의심하는 모양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마데.” 소스케가 협박하듯이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모른 척 하지 마.”
“어, 어떻게,”
“뭐가.”
“한 번 사라진 기억은 절대 다시……,”
“지금 그게 중요해?”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모양인지 마데가 아프다는 듯이 찡그렸다. 소스케가 놀라며 얼른 손을 떼었다. “미안.” 하지만 어딘지 불안한 기색으로 계속 그녀의 팔 옆에서 커다란 손을 움칠댄다. 금방이라도 도망쳐버릴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마데유키가 쓰게 웃으며 손을 잡았다.
“늦어서 미안해. 불안하게 했나봐.”
소스케가 곧장 양손에 깍지를 꼈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마데유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스케는 실수를 기억하는지 힘을 주지는 않았지만 단단한 손에서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왜 이렇게 늦었어? 무슨 일 있었어?”
소스케는 무슨 변명으로도 2년의 시간은 만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왕이 된 키스미의 첫 번째 명령이 왕정 폐지였거든. 자기는 왕 같은 거 되기 싫다고. 수습하느라 일도 아니었어.”
소스케는 딱 하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했다. 아니, 하지만 키스미는 누구보다도 대학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는데. 가만 안 둔다, 진짜. 소스케가 이를 갈았다.
“그리고…… 좀 두렵기도 했고.”
“뭐가?”
“네가…….”
소스케가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떴다. 마데유키가 미안하다는 듯이 시선을 피한다. 무슨 소릴 하나했더니, 설마 그런 걸. 소스케는 몇 번이고 입을 벙긋거리다가, 결국에는 기가 찬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인상 찌푸린 얼굴이 열 받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보였다.
“사람이 말하면 믿어, 좀.”
허탈하게 그렇게 말한다.
“미안.”
반성하는 얼굴로 웃어 보이면 소스케는 화내지 못했다. 항상 그랬다.
“대신에 선물을 가져왔어.”
마데유키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다가, 아직도 깍지를 끼고 풀어주지 않는 소스케를 바라본다.
“이제 그만……,”
“싫은데.”
소스케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그녀가 당황한 기색으로 손을 흔들자, 한숨을 내쉬며 풀어준다. 그런 건 필요 없다는 얼굴이었다.
마데유키가 내민 건 유리병이었다. 투명한 유리병에 물이 찰랑거렸다.
“어?”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소스케가 물었다.
“‘눈’이라는 거야. 천 년에 한 번씩 하늘에서 내리는 건데, 너무 예뻐서 소스케도 보여주고 싶었어. 그런데 이게 왜 이렇게 됐지?”
마데유키가 연신 어쩔 줄을 모르며 유리병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물이 저절로 얼어서 다시 눈이 되지는 않았다. 말없이 지켜보자 초조해진 모양인지, 급기야 마법까지 쓰려고 한다. 소스케가 웃음을 터뜨렸다.
“됐어.”
“아니, 정말 예쁜,”
“나도 눈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
그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 년에 한 번씩 온다고? 여기선 일 년에 한 번씩 와.”
“정말? 못 봤는데.”
“그러고 보니까 넌 여름에만 있었지.”
“여름 말고 다른 것도 있어?”
“여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와.”
소스케가 아까 떨어뜨린 모자를 주웠다. 천천히 허리를 숙여 검은 모자를 줍는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너무나 멋있었다. 그가 먼지를 털어낸 다음 직접 씌워주고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눈이라면 내가 다음에 보여줄게. 이건 고마워.”
소스케가 유리병을 가져갔다. 그녀가 창피한 표정을 지었다.
“줘, 버릴 거야. 보잘 것 없는 물이야.”
“그렇게 말하지 마. 이제 내거니까.”
소스케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왜인지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그렇게 좋은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유리병과 물인데. 마데유키는 더욱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에 만났을 때 소스케는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는데, 왠지 몇 년 사이에 더 어려진 것 같다.
“소스케는 변했어.”
“그래?”
태양에 유리병을 비추어 보던 소스케가 신이 난 얼굴 그대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물에 반사된 빛이 얼굴에 일렁였고, 초록색 눈동자가 그 너머를 헤엄치고 있었다. 에메랄드나 바다와 닮았다고들 하지만 그와 비교도 안 되게 아름다운 눈동자였다. 항상 그랬다. 그 시선을 마주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 같았다.
“소스케는 하나도 안 변했어.”
“그렇지?”
여전히 완벽한 세상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