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을 높게 올려다보며 별을 셈했다. 강가, 넓은 풀밭에 누워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으니 어째 자신이 무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푸른 이파리들이 볼을 간지럽힌다. 생각보다 푹신하고 시원한 흙은 정말 하늘에라도 누워있는 기분이 들게끔 했다. 밤하늘을 수놓기엔 별이 많이 부족했지만, 도심에서 이 정도면 제법 찾았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시간을 때우려 아무거나 하고 있었을 뿐이지, 얼마나 세었다고 기분이 좌우될 것까진 없었다. 저번엔 빌딩 옥상에 앉아 혼자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눈은 하늘을 보았지만 손은 화단에 있던 자갈을 몇 개 꺼내 공기를 하기도 했다. 그때도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히나.”
마치 지금처럼. 한순간 공기를 가르기라도 했는지 바람이 이상하게 불었다. 하늘에서 사람이 뛰어내린다. 정확히는 지금 나를 부른 사람이. 의외로 차분한 듯 밝은 그 목소리는 상처 하나 없이 땅을 밟았다. 오히려 너무 사뿐히 내려와서 감각이 이상해질 것 같기도 했다. 완전히 착지한 그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 페리도트를 닮아 반짝이는 눈동자가 금세 사르르 접혔다. 애정이 한껏 담긴 눈이 오로지 나만을 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여상스러운 미소가 차가운 몸을 단번에 녹여주는 듯했다. 살포시 눈을 접고 마주 웃어주었다. 어서 와.
“찾기 힘들었어.”
“그래? 으응…. 그래도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움직이면 더 찾기 어려워지니까.”
가만히 있어 주는 편이 낫다며 자연스레 옆자리를 꿰고 앉는다. 그를 향해 손을 뻗으니 당연하다는 것처럼 마주 잡아주는 것이, 그것은 행여 부서질까, 사라져 버릴까 걱정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어루만져주는 그에 기분이 좋아 고양이 마냥 기대어 고롱거렸다. 1년에 단 한 번, 이 시간이 너무나 달콤하고 사랑스러웠다.
“이번에도 나한테 시간 내줘서 고마워.”
“아니이~ 내가 오늘만 기다리는 거 모르지! 히나는?”
설마, 키득키득 웃고 고개를 도리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이, 립 서비스 같은 말은 실로 믿을 것이 못 되었다. 우리는 연인이 아니었고, 애초부터 그와 만난 것도 그의 소중한 사람이 어디론가 떠나버려서, 그 사람을 찾던 중에 마주쳤을 뿐이었다. 마치 그곳에 평지가 있기라도 하듯 하늘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기에 어쩌다 보니 말을 걸고, 어쩌다 보니 얘기를 나누게 된 그는, 1년에 딱 한 번, 나를 위해 시간을 내주었다. 오늘 단 하루, 내가 밖을 볼 수 있는 날. 소중한 사람이라면 한시라도 빨리 찾고 싶을 텐데, 잘 알지도 못하는 내 억지에 어울려주는 그.
그에겐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속삭여주는 달콤한 말엔 더더욱 넘어가선 안 됐다. 아마 그는 원래가 이렇게 애정이, 그리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아니었다면 이렇게 곁에 있어 줄 리 없으니까. 하늘에 서 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손짓 한 번이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그였다. 내가 기억이 없다는 말을, 내가 외롭다는 말을 했으니까 그런 것은 고이 집어넣고 손을 잡아주는 거겠지.
“내년엔 안 찾아와도 돼, 찾는 거 힘들고.”
괜히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본다. 매년 오늘을 기다리고 있으면서도.
그야, 언제까지고 민폐를 끼칠 순 없는 일이다. 더 정이 들기 전에 너와 멀어져야 하는데.
“히나, 방금 내 얘기 제대로 들었어?”
“들었지만…레오는 찾는 사람이 있잖아.”
“아, 그렇지…….”
“뭐야, 그 반응은? 설마 포기했다고 하는 건 아니지?”
레오는 대단한 사람이니까, 분명 머지않아 찾을 수 있을 거야. 나름의 격려를 하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슴 언저리가 따끔거리는 것을 알았다. 이제 와 이런 감정이라니, 그저 우스워서. 차가운 손을 모아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내 시선은 제법 따뜻한 온도를 안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날 가만히 보더니, 그가 씩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내 제 머리를 쓰다듬던 내 손을 그대로 붙잡아 당겨, 일으킨다. 영문도 모른 채 그가 행동하는 대로 휘청거리며 일어나자 어깨를 잡아 품에 담았다. 이게 뭐람, 당황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자니 그가 따뜻한 손으로 내 볼을 쓸었다.
“오늘도, 놀러 가자.”
“……응.”
이를 드러내고 지은 미소는 밤하늘 아래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끄덕이면, 익숙한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아, 나는구나. 솔직히 마법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면 영화에서나 보는, 그거. 하지만 저를 안고 있는 그는 너무나 평범한 차림을 하고 있어서 괜히 웃음이 났다. 작게 웃음을 흘리는 나를 흘끗 내려다본 그는 곧 품에서 나를 놓고 손을 고쳐 잡았다. 이것도 이젠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라, 그가 몇 번 손을 움직이고 고개를 들어 시선을 앞으로 하면 눈앞에 별가루가 가득했다. 아까 찾고 있던, 하늘을 수놓을 별은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은하수라도 보는 기분이 되어 그것에 손을 뻗었다.
“어라, 안 잡혀.”
“와하하, 왤까?”
“이 정도는 알려줘도 될 텐데.”
볼에 바람을 가득 넣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것이 좋기라도 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웃는 얼굴이 무너지는 일은 없어서, 조금 얄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
소중한 사람이 사라졌다.
사라졌다는 표현이 맞는 걸까. 소중한 사람이 떠났다, 내 곁에서. 그녀를 잃었다. 사라져서, 보이지 않아서, 그렇게, 눈앞에서 보란 듯이 자취를 감췄다.
그저 그뿐이라면 차라리, 나을 텐데.
눈을 감았다. 당분간 정신을 차릴 일은 없을 듯싶었다. 그렇잖아, 이제 세상에 남아있는 게 없으니까. 수식 하나도 떠오르지 않아 텅 빈 머릿속은 그녀로 채우려 바쁘겠지. 몰골이 말이 아니라며 핀잔을 들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눌렀다. 어차피 봐줄 사람도 없잖아. 내치고 나니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던 것 같다. 무책임한 말을 했다는 자각은 있었다. 미안해, 중얼거리고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괜찮아?”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여린 목소리가 간신히 귓가에 닿았다.
“……너는.”
잠시 망설이고 내뱉은 두 글자는 다 갈라져 듣기 싫은 것이 되어있었다. 대답하지 않는 편이 나았으려나. 하지만 자신만큼이나 그녀를 아끼던 소녀의 얼굴이 퍼뜩 떠오르니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한숨을 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괜찮을 리가, 괜찮을 리가 없다. 분명 어제까지 여기 있었는데. 내 손을 잡고 있었는데. 내게 기대고, 손을 뻗고, 머리를 쓰다듬어줬는데.
세상이 회색으로 물들었다.
“괜찮다면, 거짓말이겠지? ….”
그녀가 말을 삼켰음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눈꺼풀을 닫고 들어볼 요량으로 귀를 기울였다. 다른 사람은 아니어도 그녀라면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게 너하고, 나는.
“자는 건 말리지 않을게, 그냥…위험한 생각만 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아마 심호흡을 했다는 것에 가까울는지도 모르겠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들려오는 그것은 나를 향한 걱정이 묻어나와 입안이 썼다. 나는 누굴 신경 쓰거나 배려해줄 경황이 없는데. 감사함과 놀라움, 착잡함, 미안함…여러 감정이 뒤섞여 참지 못하고 상체를 바로 일으켰다. 천천히 눈을 뜨면 지금까지 했던 실험도구와 수식이 빼곡히 적힌 종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모두가 대단하다고 곧잘 추켜세웠지만, 단숨에 이렇게 떨어지는 것도 마냥 없을 일은 아니구나. 그보다는 솔직히 이 수식을 그릴 때 기뻐하리라고 미소를 상상했던 것이 가장 먼저 떠올라 머리가 아팠다.
“……잘 자, 임금님.”
일어나면 봐. 그런 인사가 멀리서 들렸다. 유리는 안 잘 셈인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저와는 달리 아직 그가 곁에 있음을 깨닫고 도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 것은 시간이 꽤 지난 후였다.
그러니까, 300년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반겨준 것은 아니나 다를까, 리츠와 유리였다. 잠꾸러기인 두 사람이 마력을 느꼈다며 하품을 하고 인사를 건넸다. 찌뿌둥한 몸을 몇 번 비틀고 두 사람을 따라 하품까지 하니 조금 개운해진 기분이 들었다. 날짜를 물어보니 제법, 아니 몹시 시간이 지나있었다. 둘의 차림새도 어쩐지 잠들기 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라, 시간이 지나긴 했구나, 새삼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옷이 별로라며 호들갑을 떤 유리와 이즈미에겐 몇 번이나 혀를 찼다. 어느새 갖다둔 컴퓨터로 쉴새 없이 물건을 주문하고, 미간에 주름을 만들고 노려보고 있자면 본 척도 안 하고 옷을 몇 벌이나 눈앞에 보여주었다. 이건, 300년 전이랑 하나도 안 변했네.
“이건 언제 사놨어?”
“그걸 이제 물어? 뭘, 집주인 자고 있는데 문명은 발전하잖아. 사야지 어쩌겠어.”
“그보다 이거 신분증이랑 스마트폰. 적당히 만들어놨으니까 나머지는 알아서 해, 대마법사.”
“말은….”
이즈미가 던진 물건을 받고서 한숨을 쉬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는 양을 보고 있으니 방해라며 쫓아내기까지 했다. 이게 무슨, 야.
“여기서 뒹굴지 말고 바깥 공기 좀 쐬고 와.”
“야, 세나. 너.”
“오늘은 핼러윈이니까, 지구 한 바퀴라도 돌아보시던지.”
쾅, 폭탄을 던진 그는 그대로 문을 확 닫아버렸다. 핼러윈, 10월 31일. 스쳐 지나가는 조각들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니며 답을 좇았다. 돌처럼 굳어 있던 몸이 반응했다.
*
“여기도 없어.”
땅을 내려다보며 실망을 담은 목소리를 뱉었다. 구름 아래에 서서 도시를 한 번, 두 번, 다섯 번, 그보다 더 많이. 황혼이 물들고, 내가 선 하늘도 색을 바꾸어가고 있을 무렵이 되었다. 그만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벌써 해가 다 저물어간다.
1년, 딱 1년. 내년을 기약해볼까, 어차피 시간은 많은데.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그래, 돌아가자. 그렇게 결심하고 손을 움직이려 했던 순간이었다. 정말 딱, 그 순간이었다. 익숙한 기운, 그리운 향기. 눈이 번쩍 뜨였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내리면, 그곳에, 아주 당연하다는 것처럼 있었다.
“……마법, 이야?”
그녀가.
“히나.”
“어떻게 내 이름, 와악?!”
얼음처럼 차가운 몸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당황으로 물든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울렸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오랜만에 웃었어. 아마 활짝 웃었을 거다. 아니 분명, 언젠가 네가 말해줬던 그 웃음이, 너를 볼 때만 지을 수 있던 그 미소를.
“저기, 나를 어떻게 보는…저기!”
“나는 마법사야, 소중한 사람을 찾는 중이었어.”
“하, 하아…? 그런데 왜, 갑자기….”
“혼자서야 외롭잖아, 그렇지.”
아직도 제대로 상황파악을 끝내지 못한 그녀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정도는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아차렸다. 충격을 내보일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니까, 오늘은 그저 네게는 첫 만남이나 다름없는, 이 기적 같은 재회를 한껏 맛보자. 감사하고, 환성을 질러야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세상이 밝게 빛났다. 무채색 같던 세상이, 오랜만에 아름다웠다. 그것이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뻔했다.
다시 시작하자. 다시, 네 안에 기억을 쌓자. 나는 아주, 아주 오래 살 거고, 너를 찾을 수 있으니까.
10월 31일, 핼러윈.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날이다.